6. 기쁘다 투자자 오셨네
투자의 가장 커다란 적은 두려움이다.
미래라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지 속으로 나를 던져야 하는 두려움.
대부분의 사람은 끝내 이기지 못하고 보다 ‘확실한 순간’만을 기다린다. 미래를 나의 예측이라는 작디작은 상자 안에 구겨 넣을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그건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미래는 바다와 같이 거대하다.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그저 파도에 맞서서 버텨 낼 수 있는 기초 체력과 수영 실력뿐. 거기에 하나를 더한다면 헤엄쳐 가야 하는 방향. 그러고 나면 이제 투자할 준비가 끝났다고 할 수 있다.
무르물랑은 그런 마음으로 지구를 찾아왔다.
죽을 수도 있다.
지구에 있을 거라 생각한 기회가 착각일 수도 있다.
그래도 왔다. 아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뮤론들이 가진 천부적인 학습 능력으로 지구의 언어를 빠르게 흡수하며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크게 당황했다.
‘타키넷을 오가며 교류한 흔적이 전혀 안 보이잖아?’
유망한 인물들을 조사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대단한 권능을 지닌 인물이었을 뿐이다. 차원 문명과 교류한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지구인들은 그들이 ‘던전’이라고 부르는 난파 차원에서 획득한 조악한 골동품들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예상보다도 더 끔찍한 수준의 문명을 영위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르물랑은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어떤 파도를 만나도 침착하게 헤엄치겠노라 각오하고 찾아온 지구였지만, 이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 같았다.
‘GDP가 7,000퍼센트나 성장했잖아? 타키넷과 교류하는 거대한 시장이나 공장 같은 게 있어야 되는 것 아냐?’
한 명의 인물이나 국소적인 세력이 그런 성장을 이뤄 낼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원시 차원에서 갯펄시장에서 팔릴 정도의 물건을 만들어 내려면 그 차원의 사활을 건, 대규모 프로젝트가 진행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게 무르물랑의 상식이었다.
‘혹시… 그 7,000퍼센트라는 게 뭔가 데이터 수집 오류라거나……?’
가능성이 0.000000001퍼센트에 수렴할 정도로 낮은 가정이었지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차원 문명의 흔적이 전무했다.
긴장으로 몸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끼면서도 무르물랑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최소한 7,000퍼센트 성장이 어떻게 이루어진 건지, 데이터 수집 오류라면 어째서 그런 오류가 발생한 건지 제대로 확인하고 가야 돼.’
조바심을 느끼면서도 더 꼼꼼하게 지구 전체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래서였다.
소시민을 보는 순간 무르물랑은 전율을 느꼈다.
‘이 사람이다!’
마침내 찾았던 것이다.
‘7,000퍼센트 상승은 이 사람이 일으킨 거야!’
증거는 많았다.
일단 소시민은 타키넷 사용자였다. 그녀는 높은 등급의 사용자였기 때문에 상대가 타키넷의 사용자인지 아닌지 정도는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소시민의 주변에는 캐스터를 지참한 창신대가 우글우글했다. 그녀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차원 문명의 흔적이 여기 다 모여 있는데 그걸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뿐만이라면 그냥 ‘저 조직이 GDP 7,000퍼센트를 상승시켰구나.’ 하고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무르물랑은 확신했다.
저 조직이 아니라.
‘저 남자가 GDP 7,000% 상승의 주역이다.’
처음에는 차원 전체의 힘을 모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게 상식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기대는 작은 국소 조직으로 바뀌었고, 마침내 드러난 진실은 그 모든 게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이었다.
무르물랑은 뮤론답게 현실을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성격이었다.
그런 그녀가 격정으로 온 살결에 파문을 일으킬 정도로 눈앞의 진실은 놀라웠다.
‘믿기지 않지만 믿을 수밖에…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수준 높은 주문을 사용했잖아……?’
그게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소시민이 펼친 [자유]가 끝나는 순간, 그녀는 세상의 근간이 비틀렸다가 다시 합쳐지는 듯한 기묘한 감각을 분명히 느꼈다. 만약 그녀가 법칙의 흐름에 민감한 종족인 뮤론이 아니었더라면, 그 중에도 상위 0.001퍼센트 안에 들어가는 수재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심오하고 미묘한 비틀림이었다.
‘솔직히 그런 주문은… 우리 뮤리온 차원에서도 연구소에나 가야 볼 수 있는 거라고.’
만약 아마존 정글에 사는 원주민이 간단한 장비들을 가지고 줄기세포를 뚝딱 복제해 버리는 광경을 목격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지금 무르물랑이 느끼는 기분이 딱 그랬다.
얼마나 놀랐는지 대뜸 다가가서 어떻게 한 거냐고 물어봤을 정도였다. 괜한 경계심을 사는 멍청한 행동이었지만 그녀는 그만큼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면이 있으니까 7,000퍼센트 성장이라는 수치를 기록할 수 있었던 거겠지?’
무르물랑은 소시민을 전설 속의 생물처럼 신기해하며 관찰했다.
당황한 소시민은 슬쩍 무르물랑과 거리를 벌리며 물었다.
“아니, 그쪽은 누구신데……?”
그 모습이 무르물랑에겐 또다시 인상적이었다.
보통 원시 차원의 주민이 차원 문명을 이룬 다른 세계의 존재를 만났을 때 보이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으니까.
배척하거나 숭배하거나.
‘나를 보고도 괴물이라며 적대하지 않았다. 정령이라며 숭배하지도 않았고! 그냥 낯선 지구인을 대하는 듯한 오픈 마인드… 역시! 타키넷에서의 경험이 많은 탓이겠지?’
다른 인종을 음식 취급 하는 야만적인 식인종의 마을에서, ‘인종차별’이라는 단어를 알고 ‘인권’이라는 걸 생각할 줄 아는 개화된 원주민을 만난 기분.
다행히 이야기가 잘 풀릴 것 같다는 예감을 느끼며, 그녀는 자신의 친구 무레멜린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 무레멜린은 물었었다.
[그래서, 투자금은 충분해?]
그때, 무르물랑은 쓰게 웃었다.
[열심히 저축하고 투자해서 굴려 봤지만… 빠듯하지.]
[그래서 얼만데? 통계청에 취직한 지 이제 한 7년 됐지?]
[어… 죽어라 모아서 대략 1,500만 타키온?]
[뭐? 봉급쟁이가 많이도 모았네? 역시 봉급쟁이의 끝판왕 평의회 소속이다 이건가?]
[그것도 그런데, 통계청이라 투자로도 재미 좀 봤어.]
[근데, 참 나… 1,500만이라… 많은 액수인데도… 하필이면 지구가 대상이니 턱없이 적게 느껴지네. 어쨌든 전쟁이라고. 우리 같은 일개 봉급쟁이들이 낄 만한 사이즈는 아닌 것 아니냐?]
[…대출까지 풀로 땡기면 3,000만까지는 가능해.]
[대출까지? 너 진짜 정말 진심이구나?]
[물론.]
[하아… 그래. 나는… 800만! 쥐어짜면… 1,600만까지는 가능하다!]
무레멜린의 대답에 무르물랑의 얼굴에 찰랑찰랑 미소가 번졌었다.
[최대 4,600만. 좋아, 일단 이걸로 어떻게든 베팅을 해 보자.]
[베팅. 그래. 투자 대상 찾고 나면 어떻게 접근할 건데?]
[거물이라는 인상을 줘야지. 원시 차원 하나를 살리는 일이야. 절대적인 신뢰가 필요해. 일단은… 기를 확 꺾고 시작하자.]
4,600만 타키온.
많다면 많은 금액이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비하면 초라한 액수였다.
하지만, 멸망의 기로에 놓인 원시 차원의 인물 하나를 구워삶기에는 충분한 액수일 것이다.
회상에서 빠져나온 무르물랑은 어깨를 쭉 폈다.
‘방금 그 주문이 엄청 궁금하긴 하지만… 그건 나중에. 일단은 기부터 꺾고 시작하자.’
초장부터 제발 알려 달라는 둥 헛소리를 하는 바람에 모양이 빠지게 되었지만, 그녀는 이제부터도 분위기를 역전시킬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도도하게 말했다.
“저는 무르물랑, 투자자입니다. 당신의 목표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투자자? 목표? 갑자기?”
소시민은 멍한 얼굴로 그 단어를 되뇌었다.
* * *
어느 날 찾아온 이계의 투자자가 갑자기 내게 물었다.
나의 생을 걸고 이루고 싶은 목표가 무엇이냐고.
나는 홀린 것처럼 답했다.
행복하고 싶을 뿐 다른 건 없다.
그러자 그녀가 되물었다.
“일단 안전해야겠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할 일도 적어야겠죠? 가령 소중한 사람이 죽거나 다치면 안 되죠.”
또 고개를 끄덕였다.
“쉬고 싶을 때는 마음껏 쉬고 가지고 싶은 건 가질 수 있어야 되고요?”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충분한 대화를 나눈 뒤 그녀는 내 바람을 한 마디로 요약했다.
“터무니없군요. 터무니없어요.”
이유는 간단했다.
지구는 아갈타의 침공을 받고 멸망한 운명이었기에 나는 안전할 수 없고, 후회하지 않을 수 없고, 쉴 수도 없으며, 사치할 수도 없다.
그래, 딱 지난 생의 내 모습처럼.
‘…젠장, 뭐 어쩌라고.’
그 말이 사실이긴 했지만 기분이 상당히 불편했다. 내 눈매가 가늘어질 때, 그녀, 무르물랑 씨는 투명하고 찰랑거리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꿈, 제가 이뤄 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가망이 없어요. 이제부턴 전적으로 내 말을 따라야 합니다.”
나는 생각했다.
‘지가 뭔데?’
상당한 상위 차원에서 온 존재라는 건 알겠다. 그녀가 도와준다면 아갈타와의 싸움에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따르라니? 뭘 믿고?
‘언제 봤다고 가르치려고 들어?’
미래라는 건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존재가 내게 사기를 치는 것인지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처음 만난 외차원의 존재가 잘난 척하는 말을 듣고 냉큼 받아들일 만큼 내 인생의 무게가 가볍진 않다.
한참 그런 반항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녀는 갑자기 타키넷의 시스템 창을 열더니 내 계정으로 타키온을 이체했다.
나는 지구에서도 타키넷의 시스템 창을 열었다는 사실에 한 번 놀랐고, 그녀가 내 계정으로 이체한 금액에 다시 한번 놀랐다.
“일단 이걸로 시작하죠. 당장 돈을 좀 많이 써야 할 것 같으니까요. 무기한 무이자 대출입니다. 나중에 여유가 될 때 갚으세요.”
[띠링! 무르물랑 님이 소시민에게 300만 타키온을 입금했습니다. 무기한 무이자 대출입니다. 존재 소멸 시까지 청산되지 않을 경우엔 후계자에게 채무가 상속되며, 후계자가 없을 시엔 채무가 소멸합니다.]
“어……?”
세상에? 무기한에 무이자? 말이 돼? 사실상 그냥 주는 것 아닌가?
그리고 금액이… 얼마?
“사, 삼백만 타키온?”
내가 여태 벌어들인 총액이 백만 타키온을 좀 넘을까? 그런데 갑자기 삼백만 타키온?
눈동자가 흔들린다.
무르물랑 씨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거물……! 거물이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알아요. 고작 삼백만. 많이 적죠? 그건 일단 인사라고 생각하세요. 제대로 된 투자는 계약 체결하고 배분 정해서 하죠.”
이런 일 수도 없이 해 봤다는 듯한 그 여유로운 목소리에.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잠깐, 잠깐.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고.’
무르물랑 씨는 방금 300만 타키온을 주며 인사라고 말했다.
대체 얼마나 돈이 많으면 그럴 수 있을까?
‘10만 원 있는 사람이 1만 원을 인사라면서 초면에 턱 줄 수 있을까?’
아니지.
그럴 리 없다.
1만 원을 인사라고 턱 내주려면… 내 생각에는 최소 100만 원은 있어야 할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 한… 1,000만 원?
‘그러면 뭐야? 이 사람은 최소 3억 타키온이 있다고? 어쩌면 30억 타키온?’
짜르르, 전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했다.
이건 진짜다. 나의 인생… 아니지, 어쩌면 이 세상 전체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진짜 거물!
그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제가 무얼 하면 될까요?”
모르겠다, 이게 뭔지.
어쩌면 함정일 수도, 사기꾼의 수작일 수도 있다.
하지만 300만 타키온을 그냥 줘 버리잖아?
그건 거절하기엔 너무나 큰 액수.
까짓 것.
알 수 없는 미래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볼 만한 액수였다.
* * *
사방이 새하얀 순백의 방.
중력도 없고 오감마저 차단된 그 공간에 둥실 떠서 영력을 수련하던 퀴니세인은 갑자기 느껴진 기척에 눈을 슬쩍 떴다.
- 사령관님, 수련 중에 죄송합니다. 작전이 완료되어서 보고드립니다.
퀴니세인은 입을 열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고대신의 유해 총 열세 군데 발견, 확보한 곳은 두 군데. 고대신의 유물은 스무 개 발견, 그중 다섯 개 확보. 그 밖에 유해를 이용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신의 힘이 깃든 물건 백스물일곱 개를 확보했습니다.
보고 내용에 퀴니세인의 입가에 씰룩 미소가 지어졌다.
극도의 평정을 지켜야 하는 영력 수련 중이었음에도 절로 웃음이 나올 만큼 달디단 성과였다. 확보한 비율이 낮은 건 마음에 걸리지만, 위치를 파악한 것만으로도 일단은 충분했다. 지구인들의 저항이 예상보다 강하다는 건 이미 염두에 둔 사실이니까.
- 이번 작전으로 인한 아군 피해는 사망자 73명, 누적 사망자가 187명입니다.
아갈타군 전체를 놓고 보아도 요 1년간 손에 꼽힐 만큼 큰 피해.
하지만 퀴니세인은 화내지 않았다.
‘어차피… 성과를 보면 다들 납득할 수밖에 없어. 그리고 일단 성과를 보여 주면… 압도적인 전력을 충원할 수 있게 될 거다.’
고개를 끄덕인 퀴니세인은 영력 수련을 마무리 짓고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는 단 한 가지만 생각하자고. 지구의 철저한 고립. 이 달콤한 보물 창고에 애먼 놈들이 꼬이지 않게, 그것만 신경 쓰면 돼. 전쟁은 어차피 증원이 오면 그 순간 끝나는 거니까, 이제부턴 정보 통제와 봉쇄에 집중해.”
- 네. 혹시라도 차원 문명과 접촉하는 일 없도록 감시를 대폭 늘리겠습니다.
“그래.”
퀴니세인은 기분 좋게 영력 수련실을 나가며 덧붙였다.
“아, 그런데 혹시 극동 지역 피해는 어땠어?”
- 그게… 이번에도 유독 사망률이 높았습니다. 사망자 73명 중 21명이 극동의 한반도라는 협소한 지역에서 생겼습니다.
기분 좋게 펴져 있던 퀴니세인의 미간이 팍 찌그러졌다.
“뭐야? 리트리안 대위한테 그 최치국인가 뭔가 죽이라고 오르피앙페르까지 줬잖아? 이번에 뭐가 문제야?”
- 그… 최치국을 죽이는 데 실패했습니다. 강력한 조력자들이 있었다는 보고입니다.
“실패? 오르피앙페르를 빌려줬는데?”
퀴니세인은 진정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내가 오르피앙페르를 빌려줬잖아?”
원시 차원에서 차원 강습병 187명이 죽었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손수 무기를 빌려줬는데도 실패했다는 사실을 더 믿을 수 없어 하는 퀴니세인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알아봐.”
퀴니세인의 목소리에 깊은 분노가 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