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한 시간
각성.
초능력자들은 자신의 각성 경험을 이야기하는 걸 아주 좋아한다.
‘각성? 내 인생에 그만큼 힘든 순간도 없었지만… 그만큼 성취감이 들었던 적도 없지.’
‘그 순간, 나는 내가 태어난 이유를 알았다.’
일반인들은 열이면 열 다 똑같이 진부한 각성 경험담에 손발이 오글거린다며 진저리를 치지만, 정작 능력자들은 그 틀에 박힌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뭔가 아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보통 각성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순간 찾아온다.
풀코스 마라톤을 겨우 달리던 사람이 온몸이 찢어지는 통증을 참으며 60km, 70km 거리를 달리는 순간.
괴물들에게 습격당해 가족이 모두 죽는 순간, 마지막까지 발악하며 식칼이라도 쥐어 들었던 순간.
물에 빠져서 죽을 뻔했던 순간.
또는 풀리지 않는 시험 문제를 앞두고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머리를 굴려 보던 어떤 순간.
살면서 마주치는 크고 작은 한계들. 그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순간 문득 온몸이 뒤틀리고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은 고통이 찾아오고, 그마저도 이 악물고 이겨 내는 순간 각성이 이루어진다.
물론 처음부터 각성할 잠재력이 있었던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기적이었지만, 어쨌든 각성은 한계 너머로 도전하는 순간에 찾아왔다. 그 순간의 기억은 능력자들에게 강렬한 각인으로 남는다.
‘그럴 수밖에 없지. 각성이잖아? 내가 정말로 누군지, 내 안에 어떤 힘이 있는지 깨닫는 순간이라고. 여태까지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단단한 껍질을 내 스스로 깨고 나오는 그 짜릿함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걸 어떻게 잊어?’
그래서였다. 박민희는 이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너무나도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으아아아아!”
분명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검을 휘둘렀다. 혈관과 근육이 괴사하고, 영력이 폭발하고… 이제 신체가 붕괴되어 죽을 운명만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오히려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평생을 함께했지만 단 한 번도 인지해 본 적 없는 힘이 끓어올랐다.
뛰어난 재능을 갖춘 몇몇에게만 이루어진다는 현상.
박민희 본인에게 찾아올 리 없다고 생각했던 그 현상.
그녀는 전율했다.
‘2차 각성!’
본래 그녀의 능력은 가장 흔해 빠졌다는 [육체강화]였다. 물론 [육체강화]라고 다 똑같은 [육체강화]는 아니다. 그녀는 각고의 수련으로 누구보다도 빠르고 강하고 단단하게 강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육체강화]라는 능력 자체가 별다른 변수를 만들지 못하는 단순한 힘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소시민과의 대련에서 단 1합만에 칼을 잃었던 것이고, 장교급 던전이 아닌 부사관급 던전만 전전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솟아나고 있는 힘은 전혀 달랐다.
[육체강화]가 든든하고 안정적인 베이스라면 그 위에 입혀지는 기타 솔로 같은 화려한 힘이 피어오른다.
파직! 파지직!
그녀의 까만 머리칼이 하늘로 곤두서고, 그녀의 전신에서 벼락이 터져 나온다.
끼이이잉-!
강력한 전류가 자기장을 만들고 그 공간 내의 질서를 붕괴한다. 그냥 전류가 아닌, 초능력으로 만들고 그 위에 영력까지 덧입힌 전류.
아갈타의 차원강습 시스템조차 오류를 일으키게 만드는 신비한 벼락!
꽈르릉!
마족의 방어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다.
새하얀 벼락과 함께 날아온 회색빛 칼날이 그대로 마족의 허리를 양단했다.
검은 연기와 붉은 피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벼락에 타서 사라진다.
푸스스스-!
박민희가 울컥울컥 토하던 핏줄기마저 하얗게 타서 증발해 버렸다. 새하얀 벼락의 격류 속에서 그녀는 이를 하얗게 드러내고 웃었다. 그리고…….
쿵-!
웃는 채로 쓰러졌다. 깊은 숨소리와 함께 그녀의 가슴이 천천히 오르내렸다.
* * *
서민서는 반쯤 몸을 일으키고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가슴속 깊이 알 수 없는 감정이 마구 부풀어 올랐다.
“아…….”
너무나 벅찬 가슴에 말이 차마 나오지도 않고 그저 신음 같은 것만 흘러나왔다.
그녀 앞에 펼쳐진 건 서럽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한쪽에서는 다 죽어 가던 박민희가 갑자기 벼락을 뿜으며 마족을 일도양단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창신 1대가 수십 명씩 죽어 가면서도 자기 몸을 던져 마족의 움직임을 제약했다.
마족은 자신이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알고 퇴각을 시도했지만, 강전구와 창신 1대가 마지막까지 마족을 붙들고 늘어졌다. 마침내 도착한 창신 2대와 김민수가 남은 한 마리의 마족을 참살했다.
“아아…….”
피, 피. 온통 피였다.
함께 훈련하고 함께 싸우던 사람들이 고장 난 마네킹처럼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고, 그 사이사이를 붉은 피가 촘촘히 연결 지었다.
창신 1대의 절반 가까이가 죽은 것 같다. 그만큼 처절하고 두려운 싸움이었다.
그래서였다.
꿍!
마지막 마족이 쓰러졌을 때도 사람들은 환호하지 않았다. 그럴 힘조차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흐아아악! 하아악!
으헉! 허억……!
수십 명이 그대로 주저앉아서 가쁜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얼핏 보아도 마흔 명 이상이 죽었다.
하지만 만약… 김민수의 첩보가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박민희가 2차 각성을 하지 못했더라면.
창신 1대가 자신들의 한계 이상의 실력으로 싸워 주지 못했더라면…….
이 중 무언가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여기 누워 있는 건 창신 1대 전원의 시체였을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면 아찔했지만 또 기묘한 고양감이 가슴을 가득 채우기도 했다.
‘그 어려운 걸 해냈어……!’
이들 모두가 그녀의 예상보다 강했다.
감히 범접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차원 문명의 진보한 무기와 기술을, 창신대와 동료들이 기어코 멱살 잡아 진흙탕 속에 처박았다. 그걸 해낸 건 단순히 뛰어난 초능력의 힘이 아니었다.
‘선배, 선배가 옳았어요.’
소시민이 구매해 준 장비들과 그가 가르쳐 준 각종 기술과 전략이 이 모든 걸 가능케 했다. 해낼 수 있으리라 믿어 본 적 없는 결과가 눈 앞에 펼쳐졌다.
‘우리도 이놈들과 싸울 수 있어요.’
흔들렸던 마음이 확고히 바로 섰다.
‘최치국 씨와 권승리 씨는 이차원으로 통하는 통로를 막는다고 그랬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렸었다. 하지만 이제 돌아보니 그건 단순한 두려움으로 인한 도피였을 뿐이다.
이차원 통로를 막는다.
말은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통로를 막는 게 가능할까? 그리고 그걸 누가 어떻게 해내는데?’
사실 최치국과 권승리는 서민서에게 아무것도 얘기해 주지 않았던 셈이다. 그런데도 마음이 흔들렸던 건, 차원 문명이라는 거대한 적과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하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잘난 분들이 해 줄 테니까 믿고 그 뒤로 숨자는 안일한 마음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소시민이 보여 준 해답은 달랐다.
‘모든 게 구체적이야.’
직접 싸워서 이기면 된다.
어떻게?
오늘처럼! 이차원의 도구를 수입해 오고 성실히 숙달해서 싸워 이기면 된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벅찼다.
자욱한 피와 살점이 더없이 서럽고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서민서는 구름 강기에 뚫린 어깨에 회복 주사를 꽂고 일어섰다. 이가 딱딱 떨리고 창백한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흐를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똑바로 서서 외쳤다.
“창신 2대! 전부 기상! 부상자 응급처치 하고 후송을 준비한다! 일단 마족이 남긴 결계부터 완파해! 결계가 부서지면 화이트 게이트로 단숨에 후송한다! 서둘러! 단 한 명이라도 죽어선 안 돼!”
수십 명의 전사자. 가치 있는 희생이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난 이제 와서 죽으면 안 되지. 죽으면 안 되는 거야!’
이곳에 숨 쉬고 있는 저 영웅들 모두 끝까지 살아 명예롭게 복귀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게 후발대로 온 자신과 창신 2대의 의무였다.
그 마음을 알아차린 창신 2대가 빠르게 움직였다.
“빨리! 빨리 결계부터 깨뜨려!”
“아까 우리가 들어올 때 벌써 구멍을 하나 뚫어 놨으니 나머지는 10분이면 부술 겁니다!”
“10분 길어! 위독한 부상자들 안 보여?! 3분 내로 부숴!”
“예!”
그렇게 창신 2대가 악을 쓰며 뛰어다니기 시작한 그때.
꽈장창!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결계가 깨져 나갔다.
부우우웅-!
동시에 사방에서 열리는 하얀색 게이트. 서울의 중증 외상 센터와 곧장 연결되는 게이트들이었다. 갑자기 깨진 결계 덕에 휘오와의 연결이 회복된 것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한 병사들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외쳤다.
“어?”
“사령관님?”
“사령관님이다!”
파아란 하늘에 투명한 날개를 펼친 소시민이 7미터짜리 창을 비껴 들고 천천히 하강하고 있었다.
“선배라고?”
퍼뜩, 하늘을 올려다본 서민서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어디선가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 줗은 미소였다.
* * *
사실 나는 창신 1대가 전멸하지 않고 버티고만 있어도 감동의 눈물을 흘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눈앞에 펼쳐진 놀라운 현실 앞에 나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고 눈만 깜빡였다.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내가 움직여야만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새빨간 피가 범벅이 된 대지에는 수많은 병사의 시체와 함께 마족 셋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나 없이 이뤄 낸 일이었다.
‘고작 1년이었는데…….’
물론 1년 동안 노력 많이 하긴 했다. 하긴 했는데… 그래 봤자 고작 1년 아닌가?
내가 이만큼 강해진 것만 해도 기적이나 다름없는데, 다른 사람들의 성장까지 바라는 건 사실 욕심이었다.
그런데 내 착각이었나 보다.
‘다들 나만큼이나 간절했었던 건가?’
내가 내 사람들을 얕봤다.
이 전쟁을 살고 있는 이들은 항상 발버둥 친다. 살아남기 위해, 겁이 나도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아파도 한 번 더 잡아당긴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바른 길을 제시해 주는 사람일 뿐이었다.
내가 길을 알려 주는 순간, 그들은 스스로 그 길 위에 매달렸다. 악착같이 기어올라서, 기어코 마족 셋을 죽였다.
‘나 혼자만 발버둥 치고 있는 게 아니었어.’
심지어 저기 웃으며 기절한 박민희는 2차 각성을 한 것 같았다.
‘그 늙은이 말이 맞긴 맞았네.’
박민희는 멈춰야 할 때를 몰랐다.
그래서 2차 각성이라는 자신의 운명과 마주했다.
“하… 하하.”
웃음이 나왔다.
처음으로, 서민서와 박민희, 강전구와 김민수… 내 동료들과 창신대라는 나의 부대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거대한 날개가 나를 감싸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가 열어 둔 화이트 게이트를 통해 환자들이 후송되는 것을 보며, 나는 그런 감상에 젖어 있었다.
그렇게 [자유]의 한 시간이 모두 지나갔다.
두 개의 평행 차원에서 벌어진 일이 다시 하나로 합쳐진다. 그 과정에 나는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린다.
‘알차다.’
꽉꽉 채운 한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타키넷에 넘어가서 볼일을 보았고, 아갈타의 포대 하나를 박살 내며 정보도 얻어 왔다. 유해의 마을에서는 앞으로 진행할 연구 방식을 다잡았고, 갑자기 시작된 아갈타의 습격도 성곡적으로 막아 냈다. 조금 더 일찍 돌아와서 빨리 결계를 부숴 부상자를 후송한 덕분에 불필요하게 희생도 막았다.
[자유] 덕분에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일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뼈아픈 한 시간이 되었겠지.
‘정말 굉장한 주문이야. 이 근간에는 어떤 게 있는지 천천히 연구해 봐야겠어.’
나는 세계수의 걸음의 신발 끈을 다시 묶으며 녀석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런데 쪼그려 앉은 내 눈앞으로 투명하고 찰랑거리는 발등이 보였다.
‘어……?’
처음에는 이게 뭐지? 했다가 뒤늦게 목뒤로 소름이 쭈뼛 돋았다.
그건 물이었다. 하지만 그냥 물이 아니었다.
여자의 형상을 띤 물 덩이였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
미지의 존재가 내 [만상공감]의 권역 안으로 파고 들어오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다.
상황을 파악한 지금에서야 이 물 덩이 같은 생명체의 감각이 느껴졌다. 아주 예민한 오감과 인간이 갖지 못한 특이한 육감을 총동원해 나를 살피고 있었다. 해부라도 할 기세로 구석구석 관찰 중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게 생명체인지 아니면 무생물인지 자꾸만 헷갈렸다. 투명한 것은 아무리 복잡하고 섬세한 형태를 지니고 있어도 알아보기가 어려운 것처럼, 뻔히 내 앞에서 나를 핥듯이 관찰하는 그녀가 잘 구분되지 않았다. 그게 날 긴장하게 만들었다.
‘만상공감으로도 파악하기 어려운 존재……!’
이번이 세 번째였다.
하준광은 너무 거대해 알아보기 어려웠고, 권승리는 너무 고차원적이라 보고도 이해할 수 없었다면, 이 물 덩이는 너무나 투명해서 뻔히 앞에 있어도 잘 보이질 않았다.
잘은 모르지만, 지금의 내 [만상공감]으로는 측량하기 어려운 상대인 게 아닐까?
잔뜩 긴장해서 천천히 시선을 올리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투명한 물로 이루어진 얼굴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러더니 웃음기 싹 뺀, 놀라고 감탄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방금 뭐예요? 뭐였어요? 어떻게 한 거예요?”
쪼그려 앉아 나와 시선을 맞추고 내 손을 꼭 잡는다. 생기기는 이국적이다 못해 외계스러운 액체 인간이 제스처는 아주 지구인 같다.
심지어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한국말이었다.
“네? 제발 알려 주세요!”
아주 먼 곳에서 찾아온 엔젤 투자자, 무르물랑 씨와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