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제발 버텨라
유해의 마을로 향했던 내가 마족들의 공격을 당했을 때, 타키넷에 있던 나는 허묵의 뒤를 따라가는 중이었다.
따라가기는 하지만 도통 믿기지는 않았다.
“진짜 아갈타 놈들이 그런 곳에 포대를 세웠다고요? 그렇게 오가는 사람이 많은 장소에?”
“어차피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지구 놈은 하나도 없을 텐데 기밀 뭐 그런 걸 따지겠어?”
“…그건 그렇네요.”
허묵은 아몬이 지정한 시약 재료를 모아 오기 위해 이차원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말은 이차원이지만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지적인 우세 종이 있는 정규 차원이 아닌, 그저 특이한 암석이나 식물 군락만이 존재하는 무인도처럼 작은 세계들. 그런 곳들은 차원 격류도 강하지 않아서 타키넷을 경유하면 어디에서든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말하자면 허묵처럼 타키넷의 기반이 약한 이들이 재료를 구하기 위해 열심히 돌아다니는 초보 사냥터.
허묵은 오늘도 그 초보 사냥터로 약초를 캐러 갔다가 아갈타의 병사와 마주친 것이다.
“그 마족 놈이 날 보고 뭐랬는 줄 알아?”
“뭐랬는데요?”
“약초 많이 캐세요~! 그러더라고. 번역 마법까지 써서 친절하게.”
“하?”
“역겹지? 지구에서는 그렇게 악마 같은 놈들이 밖에서는 아주 친절 그 자체야?”
허묵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면서 성큼성큼 풀숲을 헤치고 지나갔다.
“저쪽이야. 내가 다른 약초꾼한테 물어보니 포대라고 하더군. 여기가 약소 차원들 중에서도 지구랑 가까운 곳이래.”
허묵이 가리킨 곳을 보니 과연 아갈타의 마족이 경계를 서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5층 건물 높이쯤 되는 탑들이 보였다. 기하학적인 문양이 탑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고 푸르고 노란빛들이 문양을 따라 번뜩였다.
“아까 내가 확인도 마쳤어. 저 꼭대기에서 새하얀 광채가 날아갔어. 그게 이놈들의 미사일 같은 건가 봐. 들어 보니까 여기 말고 근처 다른 약소 차원들에도 저렇게 포대가 서 있는 곳이 꽤 되는 모양이더라. 다 지구를 노리는 거야.”
“흠…….”
반신반의했는데 저 탑을 보니 확실했다.
‘이런 걸로 CKM 복합체도 쏘고 안티소울 포격도 날리고 했던 거네… 참 열받게 생겼네.’
차원 격류를 뚫고 날아가 지구까지 정밀 타격을 하는 진보한 포대. 이런 것들 중의 하나가 유해의 마을도 포격한 것이리라. 삐죽삐죽 서 있는 모습이 건방져 보였다. 뭐가 얼마나 그렇게 잘난 건지 하나하나 해부해 보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경계를 서고 있는 인원은… 다섯명이네요.”
“그게 느껴져?”
허묵이 놀란 눈으로 날 돌아봤다.
당연히 느껴지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갈타의 포대를 살피다가 허묵에게 물었다.
“은신에 특화된 초능력 있죠?”
킬러 회사의 사장에게 그런 게 없을 리 없다.
“있지.”
“근데 저까지 은신시켜 줄 수는 없죠?”
“…뭐? 당연히 된다. 고작 한 명 추가되는 정도는……! 내가 이래 봬도……!”
발끈한 듯한 목소리. 웃음이 나온다. 잘됐네. 나는 허묵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따라와요. 들키지 않게 해 줘야 돼요.”
불쑥 풀숲을 나가서 아갈타의 포대를 향해 걸었다. 허묵이 허둥지둥 내 뒤를 따라 나오더니 초능력을 발휘해 나와 자신을 덮었다. 갑자기 온 세상이 입체감 없고 명암 없는 흑백으로 보인다. 진공 속을 거니는 것처럼 피부로 와닿는 감각이 모조리 사라졌다.
‘대충… [그림자 은신]에 [감각차단] 그리고 미약한 [이면보행] 정도인가? 나쁘지 않네. 아니 훌륭해.’
중소 킬러 회사 사장 주제에, 까놓고 보니 초능력 수준이 상당했다. 아무튼 이 정도면 조금 더 대범하게 움직여도 될 것 같았다.
‘뭔가 그럴듯한 걸 찾을 수 있으려나?’
허묵의 도움으로 들키지 않고 포대를 살펴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딱히 볼 것은 없었다. 포대를 제외하면 정말 아무것도 있지 않았으니까. 포대 그리고 차원강습병 다섯 명. 그게 전부였다.
“새끼들 잠은 어디서 잔대?”
“쟤네가 입고 있는 슈트 이름이 차원강습 시스템이잖아요?”
“잠 어디서 자냐고 물었더니 동문서답을……?”
“들어 봐요. 시스템이면, 어떤 목적을 위해 필요한 다양한 기능을 제공하는 걸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저걸 입고 잘 거라고요. 물에 떠 있는 것처럼 편안할걸요?”
“그럼 그렇게 말하면 되지 왜 또 날 기죽이려고……!”
“잠깐. 조용히 해 봐요.”
허묵이 발끈하려고 할 때 내가 그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허묵은 굉장히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나는 아갈타 병사 한 놈에게 집중했다. 웬 만년필 같은 걸 손에 쥐고 서 있는 녀석이었다. [만상공감]을 통해 녀석의 감각이 전달된다.
‘교신기? 정보 저장 장치? 아니야. 둘 다구나.’
무전기 겸 명령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년필처럼 작은 막대였는데, 복잡한 영력 패턴으로 암호를 해독하면 그 안의 정보를 생각의 속도로 열람할 수 있는 멋진 장치였다.
물론 나처럼 상대의 감각을 다 읽어 버리는 사람에게 암호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이었지만.
‘오케이… 암호를 해독하는 영력 패턴 확인 완료.’
암호화된 영력 패턴을 완벽하게 외웠다.
그 와중에 교신 내용도 엿보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텔레파시 중에 내 관심을 잡아끄는 내용이 있었다.
[운송 당일 날은 하달된 운송 계획을 참조하여 움직일 것. 사령관님이 직접 챙기는 사항이니 실수가 없도록 각별히 유의할 것.]
‘사령관님’ 그리고 ‘운송 계획’. 뭔가 대박 냄새가 솔솔 나는 단어들이었다. 놈들의 계획을 미리 알면 얻어 낼 수 있는 게 많다.
‘저건 꼭 가져야지.’
나는 허묵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저기 저놈이 손에 들고 있는 것 보여요?”
“그래.”
“저걸 훔칠 거예요.”
“네가?”
“허묵 씨가요.”
“나? 들킬 텐데? 암살이라는 게 원래 암살 대상한테는 들킬 수밖에 없는 일이라… 뭐, 죽은 사람한테는 들켜도 상관없는 거지만.”
“딱 2초. 훔치고 딱 2초 동안만 안 들키고 몸을 빼 봐요.”
“그러면?”
“죽은 사람한테는 들켜도 상관없다면서요?”
허묵이 꿀꺽 침을 삼키고 되물었다.
“진짜 2초면 죽일 수 있어?”
“네.”
“오케이. 믿는다. 천하의 소시민 사령관님.”
허묵이 조심조심 마족에게 다가가는 사이에 나는 포대 위로 올라갔다. 포대 주위에 흩어져 있는 마족들이 눈에 보였다.
허묵이 조심스럽게 마족에게 다가가 놈이 쥐고 있던 교신기를 탈취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즉시 나는 이성계의 활을 꺼내고 화살을 잰다.
심호흡을 했다.
‘평소랑은 달라. 숫자는 다섯. 표적은 흩어져 있어. 나눠 쏴야 한다. 다 쏘고도 탈진하지 말아야 하고.’
그렇게 1초가 지나고.
끼리리릭-!
활시위를 당기는데 2초가 지났다.
교신기를 빼앗긴 아갈타 병사는 처음 1초는 잠시 허묵의 은신을 꿰뚫어보지 못하고 얼탔고, 다음 2초째에는 허묵을 발견해 공격하려다 말고 흠칫 놀라 포대 위에 서 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이성계의 활이 내뿜는 흉악한 영력을 느낀 것이다.
‘이미 늦었어, 인마.’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스으으으.”
가늘게 뱉으면서 손을 놓았다.
퉁-!
경쾌한 반동과 함께 화살이 사라진다.
훅!
허묵 앞에 있던 아갈타 병사가 화살에 꿰뚫려서는 분자 단위로 지워진다. 화살이 땅을 뚫고 보이지도 않는 깊이까지 파고 들어갔다가.
꽈아아앙-!
크게 폭발하며 지진처럼 땅을 흔들어 댔다.
허묵이 창백한 얼굴로 주저앉는 것을 보며 나는 다시 화살을 메겼다.
“스으으”
여전히 숨을 내쉬는 채다. 두 번째 화살을 쏘았다.
픽-!
이번엔 살짝 빗나갔다. 아갈타의 병사가 몸을 뒤트는 바람에 화살에 비껴 맞는 맥없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반신이 날아간 아갈타의 병사가 땅에 떨어지고.
꾸구궁-!
이어진 땅울림과 함께 분자 단위로 흩어진다.
이번엔 잠시 내뱉던 숨을 멈췄다.
도망치려고 몸을 돌리는 마족이 하나 보이고 내게 달려드는 마족이 둘이 보인다. 먼저 도망치는 마족에게 화살을 하나 날렸다. 볼것도 없다. 사라지고 쿵! 하는 땅울림.
꾸드드득!
무리한 연사로 인해 근육과 관절이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뜨거운 통증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괜찮다. 좋다! 한 번 더!
푸드득!
네필림의 날개를 펼쳤다. 내게 충분히 다가온 두 아갈타 병사를 날갯짓 한 번으로 떨어뜨린다. 떨어뜨리고 나니 두 명이 같은 조준점에 모였다. 마지막 활시위를 놓았다.
투우웅-!
활시위가 울고, 검은 아우라가 자욱하게 흩어지고, 눈앞에 있던 두 아갈타 병사도 흩어진다.
파아아앙-!
화살이 대기를 찢어발기고 하늘의 지형을 바꾸는 모습이 설핏 보였다.
“푸핫! 하아악! 하아! 하아악!”
나는 그제야 숨을 다 뱉어 냈다. 호흡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쿵!
뭘 어찌해 볼 사이도 없이 네필림의 날개가 꺾이고 땅에 머리부터 처박혔다. 긴장이 풀리니 균형 감각이 제일 먼저 날아간 탓이었다.
온몸이 과부하된 영력이 주는 열기로 후끈후끈했다. 어질어질한 머리로 간신히 땅에 앉았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생각보다 괜찮잖아?’
그간 유물을 꾸준히 써 온 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차츰차츰 강해진 근골과 사람 구실 하게 된 영력 지배력이 이 기적을 가능하게 해 준 걸까? 될 것 같긴 했는데 정말 됐다! 이성계의 활의 힘에 휘둘리지 않았다!
‘한 번 쏘고 나면 탈진했었는데.. 이번엔 그 힘을 조절해서 네 번에 나눠 쐈어.’
그러고도 여력이 남았다.
‘좀 쉬고 나면… 금방 다시 싸울 수 있겠는데?’
당장은 죽을 것 같지만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성계의 활을 쏘고 나면 풀코스 마라톤을 뛴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단지 고중량으로 놓고 악으로 깡으로 깔리기 직전에 벤치프레스 네 개를 한 느낌. 당장은 힘들지만 마라톤보다 훨씬 빨리 회복된다는 뜻이었다.
“후아… 하… 기분 좋네.”
머릿속에 분비되는 도파민이 맛을 가진 것처럼 달콤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여유를 가지고 현재 상황을 파악했다. 마침 저쪽 평행 차원에선 유해의 마을 습격이 하준광의 개입으로 정리된 시점이었다.
그곳에 있는 다른 평행 차원의 나는 박민희를 구하기 위해 열심히 날갯짓을 하는 중이었고, 하준광은 그런 나에게 재수 없는 소리를 해 댔다. 뭐? 박민희가 멈춰야 할 때를 모른다고? 미친놈이…….
열받으면서도 또 가슴 한편이 서늘했다.
‘회복되는 대로 바로 움직이자.’
이쪽 평행 차원에서도 박민희는 습격을 당했을 것이다. 내가 [자유]를 사용해서 두 세계로 갈라지기 전에 습격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니까.
‘하지만 어차피 한쪽에서만 구하면 된다.’
이제 15분이 더 지나면 [자유]가 끝나게 되고, 그러면 나는 두 세계에서 벌어졌던 일 중 내 마음에 드는 것만 취사선택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니 저쪽 세계의 나보다 이쪽 세계의 내가 움직이는 게 더 빠르다.
‘주사 맞고 딱 30초만 앉아 있자.’
영력 회복 주사와 내구성 강화 주사를 심장에 꽂고 훅훅 숨을 내쉬며 쉬고 있는데, 문득 허묵이 쭈뼛쭈뼛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지, 진짜 빨리 끝냈군요.”
“하아… 하… 껌이죠. 아 참, 그건 잘 챙겼어요?”
“네? 아, 네. 여기 있습니다.”
허묵에게 아까 아갈타 병사가 가지고 있던 교신기를 받았다. 만년필 같은 사이즈에 손에 착 감기는 그립감이 마음에 든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예감이 좋다. 이 안에서 상당히 쓸 만한 정보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뭔가 어색한데?
“여, 여기 물 좀 드세요…….”
“아, 감사요.”
물을 받아 들며 어색함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 아저씨가 존댓말을 하네?
공손하게 물러서는 허묵의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
‘데미안한테 보여 줬던 그 저자세 모드잖아?’
가만히 바라보니 눈도 마주치지 않고 슬쩍 시선을 피한다. 왜 저러는 걸까?
‘설마… 이성계의 화살을 가까이서 보는 바람에 기가 죽은 거야?’
맞는 것 같다. 강자 앞에서 몸을 낮추는 킬러 사장님의 본능.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그걸 내가 겪으니 조금 웃겼다. 어떻게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태도가 바뀌지?
정말…….
“…까막이가 낫나?”
“네?”
“아니, 아니에요.”
우리 까막이는 나한테는 형님 동생 먹으려고 하고 데미안한테는 친구 행세 하려고 드는 놈이었다. 웃기는 놈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그릇만큼은 사장인 허묵 씨보다 큰 게 아닐까?
그런 쓰잘데기없는 생각을 하며 30초를 쉬었다.
그리고 휴식이 끝나는 순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리가 휘청 풀릴 뻔했지만 힘을 꽉 주고 섰다.
“이만 가죠.”
“네? 어딜……?”
“싸우러요.”
“또, 또?!”
허묵이 놀라거나 말거나.
부우우웅-
내 요청을 들은 휘오는 제천으로 통하는 화이트 게이트를 열었다.
창신 1대를 구하러 가야지.
온몸이 욱신거리고 영력은 뜨거운 캐러멜처럼 늘어진 상태고… 호흡도 정상이 아니지만, 어쩌겠어? 나 말고 해 줄 사람이 없는걸.
‘버틸 수 있지? 제벌 버텨라.’
창신 1대에게도, 또 내 자신에게도 그렇게 기원하며 나는 허묵을 이끌고 화이트 게이트를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