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잠재력
무르물랑은 타키넷 평의회의 이사계界 중 하나인 뮤리온 차원의 거주민이었다.
뮤리온 차원의 거주민들은 인간종처럼 머리와 사지를 지니고 직립보행을 했지만 인간종으로 분류되지는 않았다. 온몸이 푸르른 액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실루엣만 인간종과 유사할 뿐 물리적 구성과 영적 구성은 전혀 달랐다. 어떤 차원에서는 정령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족속이었다.
뮤리온의 거주민들은 스스로를 뮤론이라고 물렀다.
무르물랑은 똑똑하고 재기 넘치는 뮤론이었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그렇듯이 성장 과정에서 재능에 합당한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몇 가지 불운과 편파적인 평가로 인해 결국 무르물랑은 자신의 꿈에 도전을 해 보기도 전에, 타키넷 평의회 소속 통계청에 취직하여 인생의 다음 수를 천천히 모색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니면 그냥 그 자리에 눌러앉거나.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더 높이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무조건 잡아야지! 난 절박하다구!”
그게 무르물랑의 목소리가 고조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친구, 무레멜린은 심드렁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있는 거라도 잘 지켜. 야, 누구는 타키넷 통계청이라고 하면 근무하고 싶어서 다섯 번 일곱 번씩도 도전을 하는데, 너는 뭐가 부족하다고 그러냐?”
무르물랑은 자신의 친구 무레멜린을 노려봤다.
무레멜린은 찰랑! 하고 제 살갗의 물방울을 튀겼다. 사람으로 치면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제스처였다. ‘뭐 어쩌라고?’라는 뜻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무르물랑이 한숨을 푹 쉬었다.
“진짜 모르겠어?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갈타의 유망한 장교가 지구를 정복하려고 한다… 여기서 느껴지는 게 없어?”
“느껴지지. 지구라는 곳 큰일 났구나. 불쌍해라. 쯧쯧.”
“…그게 다냐?”
무르물랑의 눈빛이 조금 차게 식었다. 그걸 본 무레멜린이 울컥해서 외쳤다.
“아니. 알아! 안다고!”
흥분했는지 그녀의 살갗이 풍랑이 이는 것처럼 마구 흔들렸다.
“네 생각 다 안다고! 갑자기 3,000명이나 되는 차원강습병을 파견하는 걸 보니 생각보다 먹을 게 더 많나 보다, 그거 나도 나눠 먹고 인생 역전 하고 싶다! 이거잖아? 하지만 그래서? 너 혼자 거기서 뭘 할 수 있는데? 3,000명이나 침공했다고! 그 차원 쫄딱 망하면 투자한 너만 빙신되는 거잖아? 보상은 불확실한데 리스크는 너무나 확실하다고! 내 친구가 지옥의 나락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제발! 네가 그 3,000명의 정규군을 다 잡아 죽일 수 있는 게 아니면 그냥 닥치고 조용히 살자. 응? 3,000명은 무슨, 서른 명도 감당 못 할 녀석이 대체 왜 그래?”
화를 내는 무레멜린을 보며 무르물랑은 찰랑찰랑 기분 좋게 웃었다. 결국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으니까.
무레멜린의 걱정도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지구가 너무 신경 쓰였다. 미친 듯이 늘어나는 GDP 때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보면 볼수록 머릿속 한구석이 간지러웠다. 확신에 가까운 예감. 지구에 무언가가 있다.
무르물랑은 무레멜린이 화를 다 내고 지칠 때쯤 다시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그래서 직접 가 보려고.”
“가? 어디를?”
“지구.”
“…미쳤냐?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가? 차원 격류가 완전 미쳐 날뛰는 곳이라며? 아직 제대로 된 항로도 없는 그런 오지로 간다고?”
“가야지 보지, 이게 나락인지 천국인지. 생각해 봐. 만약 직접 가서 봤더니 그 차원에 아갈타의 침공을 이겨 낼 잠재력이 있다면… 어떻겠어?”
무레멜린이 무르물랑을 향해 물방울을 튀겼다.
“침공을 이겨 낼 잠재력? 하? 그딴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만약에, 있다면?”
“하! 만약 그런 게 있다고 해도!”
무레멜린은 그녀를 똑바로 직시하며 말하다가 문득 말끝을 흐렸다.
“있다고 해도… 있다면……! 음… 그럼 나도 투자해야지. 벌써 7,000퍼센트 상승이라며? 우리 같은 중산층이 최상류층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니냐?”
그 대답을 들은 무르물랑은 찰랑찰랑 기분 좋게 웃었다.
“거봐. 그러니까 알아보자고, 아갈타의 엘리트 장교인 퀴니세인은 거기서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지구인들은 거기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무르물랑의 온몸에서 뜨끈뜨끈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지구식으로 표현하면, 온몸이 후끈 달아오른 셈이었다.
“과연… 지구에 침공을 이겨 낼 만한 잠재력이 있는지.”
* * *
후끈-
하준광의 어깨에서 뜨거운 아지랑이가 펄펄 끓어올랐다. 압도적인 마누스가 하준광을 사람이 아닌 불덩이로 보이게 할 정도였다.
까지지직-!
거인창으로 찔러도 간신히 구멍이 나고 끝이었던 결계가 하준광의 손에서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아갈타의 차원강습병들이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당황스럽겠지. 나도 당황스럽다.’
강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였어?
원시적인 힘인 마누스로 차원 문명의 기술이 적용된 결계를 뚫는다는 건 그런 거였다.
마치… 석탄으로 움직이는 증기기관차가 핵융합 엔진으로 우주 전함을 속도로 앞질러 버리는 꼴을 보는 듯한 황당함이랄까?
그러는 사이 하준광은 결계를 잡아 뜯고 넘어와서 여유롭게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중력왜곡]이라는 희대의 초능력을 가진 그는 공중에서의 움직임에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사냥 직전까지 사냥감에게 관심 없는 척하는 사자처럼 느긋하게 스트레칭을 하던 하준광의 시선이 돌연 아갈타 병사들의 폐부를 꿰뚫는다.
퀴이이잉-!
순간적으로 엄습하는 압박감에 짓눌린 아갈타의 병사들은 발작적으로 반응했다. 그들의 캐스터가 굉음을 내며 회전했고, 가장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주문을 발현시켰다. 마누스를 처음 본 이계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그’ 대응법.
강력한 영력의 파동을 날려서 불안정한 마누스를 날려 버리는 것.
파앙-!
팡!
파아앙-!
파팡!
그것은 마치 불길에 유입되는 산소를 차단하는 것과 같았다. 산소가 없으면 불이 타오르지 못하듯 저항이 불가능한 종류의 공격이었다.
하준광도 예외는 아니었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 같았던 하준광의 마누스가 연이은 영력의 파동을 견디지 못하고 모조리 날아가 버린 것이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하준광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하, 이것 봐라?”
마누스가 속절없이 날아가 버린 상황에서도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이것 봐라?’ 하는 한마디가 다 끝나기도 전에 하준광은 아갈타의 차원강습병들을 향해 뛰어내렸다. 그는 중력을 자유자재로 다뤘기 때문에 하늘을 향해서도 얼마든지 떨어져 내릴 수 있었다. 중력가속도가 하준광의 등을 떠민다.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위험합니다!”
마누스로 신체를 강화하지도 않고 그냥 뛰어든다고?
‘미쳤어!’
마누스가 아무리 원시적인 힘이라고는 해도 힘은 힘이었다. 그조차 두르지 않고 달려든다는 건 맨몸으로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름이 없는 만용.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하준광의 전신에서 터져 나오는 거친 힘을 느끼며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부조리하다.’
아무리 거대한 불길도 산소가 차단되면 타오를 수 없다. 그것은 진실이다. 하지만 아갈타의 병사들과 내가 간과한 건, 불길이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산소를 모두 태운 뒤에 일어나는 반응도 격렬하다는 것이었다.
진공상태가 된 거대한 공백지는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이며 용오름 현상을 일으킨다.
하준광의 마누스도 그랬다. 겉을 감싸고 있던 마누스가 날아가자 오히려 하준광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정돈되지 않은 힘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건 오히려 마누스보다도 더 원시적인 힘이었다. 거칠고 잡다하다.
초전자포를 쏘는 과학 문명 앞에서 돌멩이를 집어 던지고 나무를 부러뜨려 휘두른다면? 아마 큰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거대한 허리케인이 돌멩이를 날리고 나무를 부러뜨려 휘두르며 다가온다면? 과학이고 나발이고, 그런 건 피하고 봐야 한다.
하준광의 힘이 바로 그랬다.
전혀 정제되지 않고, 전혀 고차원적이지 않고, 전혀 신기할 게 없는 힘인데… 단지 그 규모가 너무나 거대하기에 입을 함부로 놀릴 수 없는 힘.
자연재해처럼 부조리한 힘.
아갈타의 병사 하나가 하준광의 손에 걸리는 순간 걸레짝처럼 찢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쟤네가 저렇게 쉽게 잡힐 놈들이 아닌데…….’
하준광의 [중력왜곡]에 붙잡힌 탓이었다. 불쌍한 병사는 몸이 찢기는 순간까지 쥐덫에 걸린 것처럼 허망하게 버둥거렸다.
“왜 이렇게 물렁해? 손맛 버리게!”
입맛이 아니고 손맛을 버린다니…….
하준광은 사이코 살인 평론가 같은 소리를 하며 찢어 버린 아갈타의 병사를 옆으로 던지곤 다음 희생양을 향해 튀어 나갔다. 아갈타 병사들의 온몸을 타고 전율이 흘렀다. 그건 틀림없이, ‘공포’라는 이름의 전율이었을 것이다.
놈들은 바퀴벌레처럼 흩어져 도주했다. 마족이라는 별칭이 무색했다. 그 뒤를 쫓는 하준광이 오히려 대악마처럼 보일 지경이다.
“크하하하하!”
광소를 터뜨리는 하준광의 전신에서 색색의 빛이 터져 나왔다.
붉은 연기와도 같다가 푸른 섬광과도 같고, 다시 보면 노란 물결 같았다.
묘사는 현란하지만 사실 대단한 현상은 아니다. 정제되지 않은 힘인 마누스가 쓸데없이 주변에 아지랑이를 만들 듯이… 품질이 나쁜 자동차일수록 소음이 심하듯이 그저 하준광이 지금 뿜어내고 있는 힘의 불안정성과 비효율성을 보여 주는 증거일 뿐이었다. 마누스보다도 오히려 격이 떨어지는 힘.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눈이 부시네…….”
인간이라는 건 이렇게 무식한 방식으로도 저런 무식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거구나…….
나도 많이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1류를 넘어 초일류, 이제 에이스라고 불리는 랭커들 수준에도 충분히 도달했다고 여겼는데…….
천외천.
정상급은 차원이 달랐다.
위로 올라갈수록 한 단계 한 단계의 힘의 격차가 이렇게 아득하다.
문득 회귀자들이 이해되었다.
‘역시… 너무 잘난 탓인 거야.’
차원 문명을 안 받아들여도 저렇게 강한데 뭐 하러 그 불쾌하고 수상한 놈들이랑 교류를 하겠어?
이해가 된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열이 뻗쳤다.
‘시발놈들…….’
결국 자기들 힘에 취해서 자기들이 세상을 다 지키려다가 말아먹은 거다. 나는 미래를 알고 있다. 영웅에게 내 미래를 맡길 수는 없었다.
결국 자기는 자기가 지켜야 한다. 결국 그래야만 했다.
‘당장 지금만 봐도 그래.’
힘겹게 싸우고 있을 창신 1대를 지켜 주는 영웅은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하준광도 최치국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또 속이 부글거렸다.
‘빨리… 구하러 가자.’
이번 생에는 지구를 지키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은 행복하고 싶으니까. 하지만… 아는 사람들은 끝까지 지켜야 한다. 그래야 덜 불행해지니까.
‘휘오.’
휘오를 불렀지만 아직 반응이 없었다. 결계가 사라졌는데도 이러는 걸 보니 [안티소울]의 포격이 세계수의 가지에도 악영향을 미친 모양이었다.
‘쳇……!’
이렇게 된 이상 직접 휘오가 있는 인왕산 공백 던전까지 달려가는 수밖에는 없다. 나는 광소를 날리며 마족들을 추격하는 하준광을 뒤로한 채 인왕산을 향해 달렸다.
* * *
“참… 이게 말이 되는 건가?”
퀴니세인은 고개를 저었다.
투입된 차원강습병이 3,000이었다. 그런데 벌써 사망자와 실종자의 수가 100명을 넘었다.
‘제거’를 하려고 이곳에 왔는데 정작 마주한 현실은 ‘전투’.
“식민 지배도 아니고 자원 조사와 확보 임무였는데 피해가 백 단위. 내가 들어도 비웃었겠네.”
하지만 이 초라한 성적을 두고도 퀴니세인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노란 눈동자를 반짝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딱 한마디를 했다.
“이렇게 많다고? 진짜?”
전 지구 곳곳을 들쑤시는 대규모 작전을 막 시행한 찰나였다.
유독 방비가 굳건했던 곳, 병사들의 피해가 많았던 곳, 의심스러운 첩보가 들어온 곳, 그런 장소들에 포격을 쏟아붓고 병력을 파견했다. 피해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이 도박이 성과를 낸다면, 그딴 피해, 아무리 크든 오히려 돌아오는 것은 훈장일 테니까.
결과는 놀라웠다. 아직 작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곳곳에서 들려오는 보고.
고대신의 유해가 벌써 다섯 군데나 발견이 된 것이다.
퀴니세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마치 유전을 발견한 것과 같았다. 혹은 고대에 가라앉은 보물선을 찾아내거나.
성과만 낸다면 훈장이 문제가 아니었다. 촉망받는 엘리트 군인이었던 퀴니세인의 진로가 군인을 움직이는 권력자의 라인으로 뒤바뀌게 될 수도 있는 대사건이었다.
성과만 낸다면.
“이제…….”
퀴니세인은 짜릿한 긴장감을 느끼며 혀를 핥았다.
유전과 보물선을 발견했다면 그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타산성 평가만 통과하면 된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석유가 매장되어 있는지, 얼마나 많은 보물이 묻혀 있는지 예측을 해 보아야 한다. 그 후에 그걸 뽑아내는 비용과 비교해서 추진할지 안 할지가 결정된다.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된다면 그때부터 퀴니세인의 인생은 완전히 새로운 길로 나아가리라.
“샘플이 필요하겠네. 그 지랄맞은 차원 격류를 넘어서 고향까지 가져가려면 만만치 않겠어.”
퀴니세인은 히죽 웃었다.
만만치 않은 일. 하지만 가치 있는 일.
그런 일을 해내야 얻어 낼 수 있는 것도 더 많은 법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