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하얀 털이 난 손등
창신 1대가 파견을 나가 있는 동안 창신 2대는 용산구 제2지역에 남아 경계 임무를 수행한다. 반대로 창신 2대가 파견을 나가면 창신 1대가 남는다.
서민서는 비번이었다.
비번일 때 서민서는 주로 영력 수련을 했다. 수련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즐거웠다.
조금씩 강도를 올릴 때마다 금방이라도 죽을 듯 욱신거리는 통증과 턱 끝까지 바짝 치미는 호흡이 좋았다. 내 호흡이 깊어지는 만큼 내가 확장된다. 머리를 아찔하게 하는 열기와 현기증만큼 영력은 더 커지고 더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된다. 식물처럼 꾸준히 자라는 영혼.
한 치의 꼼수도 없이, 그 어떤 과장도 없이 온전한 ‘나’를 마주 보았을 때, 내가 좀 왜소해 보여도 좋았다. 나아질 구석이 아직도 이렇게나 많다는 것이었으니까.
이 좋은 걸 가르쳐 준 소시민이 고마울 뿐이다.
‘역시… 선배를 따라다니면 좋다니까.’
돌아보면 옛날부터 그랬다. 소시민이 갑자기 변하기 전에도.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유일하게 편안하고 즐겁게 머물 자리가 되어 준 사람.
물론,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보내다 문득 돌아보면 현실감이 없기는 했다. 이게 정말 현실이 맞나? 1년 전만 해도 별 볼 일 없는 예비역 헌터에 매일매일 알바를 하던 우리는 어디로 갔나?
‘그날 뭔가 각성이라도 했던 걸까?’
생각해 보면 사마귀 던전 때부터 그랬다. 그날은 정말 소시민이 죽는 줄 알고 부끄러운 소리도 마구 해 댔는데… 그날 D급 괴물을 단숨에 썰어 버리는 순간부터 소시민의 변화를 느꼈다.
‘얘기를 나눠 보면 분명 선배가 맞기는 한데… 갑자기 아재가 된 느낌이야.’
나이를 한 서른 살은 더 먹은 느낌? 좋게 말하면 노련한, 나쁘게 말하면 능글능글한 인간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마음에 걸리는 것들도 있었다.
‘타키넷이라는 이상한 곳도 그렇고… 어쩐지 무섭단 말야.’
소시민을 따라다니다 보니, 데미안 루드비히나 권승리, 최치국과 같이 잘난 아이들과도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기곤 했다. 그리고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세상이 멸망할 수도 있다는데.’
심지어 소시민조차 그 이야기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마치 멸망에는 관심 없는 사람처럼 행동할 뿐이었다. 하지만 서민서는 아니었다. 충격받았다. 세상이 정상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멸망까지 한다니……?
타키넷에 대해 알고, 영력에 대해 알게 될수록 이런 불안함은 더 깊어졌다.
‘어차피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그들의 탐욕 덕분인 거잖아?’
직접 타키넷도 다녀왔기에 알 수 있었다. 차원 문명의 침략자들은 당장이라도 지구를 통째로 가루로 만들 수도 있었다. 우리가 가진 핵폭탄을 애들 장난으로 만들어 버릴 초월 병기가 없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건 전쟁이 아니었다.
직접 타키넷에 다녀오고, 권승리, 최치국이 소시민과 나누는 대화를 듣고, 또 오며 가며 한번씩 대화를 섞어 가면서. 서민서의 머릿속 그림은 점점 명확해졌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피라미드 같은 거야. 침략자들은 도굴꾼이고.’
지구는 말하자면 보물로 가득 찬 피라미드다. 끊임없이 생기는 던전은 도굴꾼들이 파 놓는 구멍이다. 침략자들은 이 피라미드 속의 모든 보물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 피라미드를 구성하는 잘 깎인 돌 하나까지도 모조리 싹 분해해서 가져가려고 한다. 그게 그들이 지구를 통째로 날려 버리지 않고 번거로운 방식으로 침략을 하는 이유였다. 이 안의 보물과 주춧돌 하나까지 다치지 않게 파내기 위해서.
정면 승부로는 처음부터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도굴꾼들로부터 피라미드를 지키려면 구멍을 철저히 틀어막고 결사 항전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소시민이 하는 일은, 오히려 더 많은 구멍을 내고 밖으로 나가 더 많은 도굴꾼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일이 아닌가?
소시민 곁에 있는 건 좋았다. 항상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권승리나 최치국이 아닌 소시민의 곁이 자신의 집인 것이다.
하지만 서민서는 점점 더 자신이 없어졌다.
‘하지만 그게 옳은 일인지는…….’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옳지 않으면 어쩌라는 거야? 서민서는 잡생각을 날리기 위해서라도 더욱더 영력 수련에 매진하려 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김민수 씨?’
보물 사냥꾼 김민수였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장비들을 구해 와 싸게 파는 역할을 했다. 소시민이 쓰는 거인창도 김민수가 구해 준 물건이었고, 다른 동료들도 이런저런 장비들을 김민수에게 구했다.
영력 수련을 함께하며 친분을 쌓았다. 보물을 찾는답시고 수련을 자주 빠지곤 했지만, 어지간하게 힘든 수련에도 항상 여유롭게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의 목소리에 여유라곤 한 톨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들려준 소식도 충격적이었다.
“서민서 씨! 창신 1대! 창신 1대가 기습을 당한 것 같습니다!”
“네?”
“아니, 마침 제가 있는 곳 근처에 박민희 씨가 파견 나와 있다길래 살짝 얼굴이나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연락이 안 닿아서 어디에 있나 따로 알아봤더니… 여기저기서 전투가 발생했다는 제보가……! 휘오도 지금 박민희 씨나 강전구 씨와 통신이 안 된다고 합니다!”
연락 두절. 전투에 대한 소식. 기습이라는 그의 예측은 무척이나 신빙성이 높았다. 아무튼 확인은 해야 한다.
‘그런데… 왜 이 소식을 내게 전달한 거지? 시민 선배가 아니라?’
김민수가 곧바로 답했다.
“사령관님도 연락 두절입니다!”
등 뒤가 싸늘하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선배는 유해의 마을로 간다고 했었지?’
그럼 거기도 공격을 받은 걸까?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민서 씨에게 전화 드렸습니다.”
“네. 제가 움직일 게요. 걱정 마시구요. 창신 1대랑 같은 지역이라고 하셨죠? 일단 창신 1대를 지원하러 가시면 뒤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믿겠습니다!”
김민수의 간절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서민서는 전화를 끊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가 지휘해야 돼.’
그렇게 하기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가장 적임자였다. 간단한 이치였다. 소시민이 항상 그녀를 데리고 다녔으니 그녀는 소시민이 아는 모든 사람을 알고 있었고, 그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은 서민서가 유일했다. 김민수도 그걸 아니 서민서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서민서는 즉시 소시민의 비서 겸 부관인 김세희에게 전화를 했다.
“사령관님과 창신 1대가 각각 기습을 당했어요. 여기도 안전할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창신 2대를 반으로 갈라 대기시켜 주세요. 절반은 구조 임무로 파견을 가고 나머지 절반은 남아서 지역을 사수해야 할 것 같아요.”
김세희가 잠시 당황을 한 듯했지만 이내 수화기 너머로 여기저기 지시를 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곧이어 김세희는 차분한 목소리로 답변을 주었다.
“사령관님과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불법이지만… 사령관님께선 자신의 부재 시에는 당신의 판단을 따르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즉시 준비해 놓겠습니다.”
군인이 민간인의 명령을 따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격변을 맞이하고 있는 용산구 제2지역에서는 그런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 당장 군대인지 자경단인지 그 위상부터가 모호한 창신대부터가 그랬다.
‘아무튼 따라 준다니 다행이야. 선배가 평소에 말을 잘해 놔서 살았네.’
서민서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곤 곧장 새로운 곳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어야 할 곳은 많았다. 최치국, 권승리 그리고 하준광.
최치국과 권승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행히 하준광과는 통화가 연결되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하준광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 공격을 당했다고? 소 사령관하고 너네 부대가? 그래서, 소 사령관이 어디로 갔다고?”
* * *
싸움은, 준비한 놈이 잘하는 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유해의 마을을 습격한 놈들은 완벽하게 준비가 되어 있었고, 반면에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빌어먹을 새끼들.”
아, 부끄럽다. 적에게 빌어먹을 새끼라니… 이거 거의 패배를 시인하는 말 아냐?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나오는 한마디.
“너희, 싸움 그렇게 하는 것 아니다.”
상황이 그만큼 답답했다.
처음에, 거인창을 꼬나쥐고 네필림의 날개까지 활짝 펼치고 달려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투지에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곧이어 나를 엄습해 온 건 섬뜩한 감각뿐이었다.
‘이게 뭐야?’
내 눈에 보인 건 하늘을 온통 뒤덮는 광선이었다. 아갈타의 마족들 등에서 솟은 돌기들에서 수십 갈래씩 광선이 뻗어 나왔다.
시야를 모두 채우는 그 풍경은 눈으로 볼 때는 두려웠지만, [만상공감]으로 느낄 때는 그렇게 대단한 위력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놈들……!’
다만 문제는 그 광선들 하나하나가 우리 ‘모두’에게 쏟아졌다는 것. 그러니까 나나 까막이, 데미안과 그 경호 팀뿐 아니라 유해의 마을을 구성하는 장인들에게도 쏟아졌다는 게 문제였다.
“막어!”
“으헛! 저게 뭐야!”
“젠장! 이 방패 써!”
“여기 수호의 반지!”
물론 장인들도 그냥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초능력은 전투보다는 생산에 특화된 것이고, 방어에 특화된 장비의 수는 턱없이 부족했다.
심지어 [안티소울]의 포격을 맞고 영력이 흔들리고 마누스가 날아간 상태가 아닌가?
[만상공감]이 분명히 알려 주었다.
‘이대로라면 0.01초 내로 장인 11명이 사망한다.’
나에겐 두렵지 않은 광선이었지만, 전투가 전공이 아닌 장인들로서는 막기 어려운 공격이었다.
그 꼴을 보고 날아오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곳에 있는 장인들은 대한민국의, 아니 나아가 지구의 공업을 책임질 장인들. 지구의 기간 시설과 생산 역량을 보존하고자 하는 나에게는 최우선 보호 대상!
곧장 움직였다.
등에 멘 탐貪과 세계수의 걸음에 영력을 모아 한 발자국을 걸었다. 화아악-! 타오르는 아우라와 함께 [자유]가 또 한 번 발동한다. 이미 [자유]를 발동한 상태로 한 번 더 발동하는 탓에 미친 듯이 빨려 나가는 영력.
‘하지만 찰나의 순간이니까……! 버틸 수 있어!’
그 누구도 감지할 수 없는 찰나의 순간, 나는 정확히 장인들의 수만큼 많은 평행 세계 속으로 갈라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내가 원하는 엔딩을 모조리 선택해서 보게 해 주는 기적의 한 걸음이었다.
후욱!
온 세상을 가릴 듯 떨어지던 광선의 궤적들이 통째로 사라졌다. 나는 단 한 걸음으로 이 넓은 지역을 모두 커버했고, 내 등 뒤의 탐이 그 많은 광선을 모조리 먹어 치운 것이다.
“어? 사라졌다?”
“살았다!”
“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웅성거리는 장인들의 목소리. 기적이라도 본 듯한 흥분한 목소리들. 하지만 우리의 적들은 무섭도록 침착했다. 하늘에 우뚝 선 마족들은 그냥 때가 되면 광선을 발사하는 기계처럼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고 곧장 다음 광선을 쏟아 냈다.
그게 반복이었다. 놈들이 쏘면 내가 막고, 쏘면 또 막고.
다행히 데미안이 [안티소울]의 포격을 맞은 혼란을 빠르게 정리하고 움직여 주었다.
“장인들을 보호해요! 마누스는 못 쓰니까 철저히 초능력으로 대처해요!”
혼란 속에서 데미안의 목소리가 전장을 갈랐다.
데미안의 경호 팀은 마누스뿐만 아니라 초능력만으로도 강력한 이들이었다. 일단 혼란을 좀 정리하고 나자 [실드], [강화], [발화] 등의 초능력으로도 그럭저럭 대처가 가능했다.
덕분에 내 부담이 줄었다.
‘하지만 벌써 영력이 절반이나 날아갔어……!’
환장할 노릇이었다. 별로 강하지도 않은 광선을 몇 번 막는다고 영력을 이렇게 탕진했다고?
[안티소울] 포격을 맞아 영력이 크게 흔들린 탓에 영력 소모가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빨라진 것 같았다.
늪지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다섯이나 몰려와서 이렇게 치사하게 싸울 줄은 몰랐다. 우리가 막아도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묵묵하고 성실하게 광선을 뿌리는 놈들.
‘우리를 소모시킬 만큼 소모시킨 다음에 잡아먹겠다 이건가?’
그 꼴을 볼 수는 없지.
“까막! 데미안! 장인분들 확실하게 가드 해 줘!”
왼손에 감싸고 있던 악몽사슬을 던졌다. 길들이기가 끝난 악몽사슬은 뱀처럼 날아다니며 스스로 장인들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청하도 날리고 싶었지만 녀석은 초반에 [안티소울]의 포격을 맞은 뒤로 계속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파도는 아우라가 약해졌을지언정 정신을 차렸는데, 청하는 아우라가 꺼질 것처럼 흐릿한 상태로,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몇백만 원짜리 과도였던 청하는 처음부터 아우라의 크기도 작았다. 그 한계가 지금 드러나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나 역시 청하처럼 한계를 드러내고 말 것이다.
그러니 지금 승부를 봐야 했다.
다시 네필림의 날개를 펼치고 까드득 소리가 나도록 거인창의 창자루를 비틀어 쥐었다.
‘일단 한 놈을 잡자.’
모든 정신을 창 끝에 집중했다. 네필림의 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아래로 내려치는 순간, 피이이잉-! 하고 내 몸은 하늘을 향해 쏘아졌다.
기계처럼 묵묵하게 광선을 쏘아 내던 마족들의 움직임이 변했다. 우우우웅! 놈들이 팔에 찬 캐스터가 빛을 뿌리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캐스터에서 풀려 나온 진득한 영력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후욱-!
후욱-!
영력을 뚫고 나갈 때마다 마치 물속을 통과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필터가 씌워지듯이 매 순간 매 순간 몸이 무거워진다.
‘디버프……!’
다섯 명의 마족이 동시에 캐스팅 한 디버프의 위력은 엄청났다. 등 뒤로 투명하게 떠오른 네필림의 날개가 당장이라도 꺼질 듯 깜빡거렸다. 기껏해야 타키온 70알짜리인 네필림의 날개와 타키온 1,500알짜리 캐스터 다섯 개의 대결. 당장 꺼지고 떨어지지 않은 것도 [만상공감]으로 강화한 덕분일 뿐이다.
하지만 그조차 잠깐이었다. 창을 놈들의 목줄기에 꽂아 넣기도 전에 바닥으로 추락할 게 분명했다.
“으아아아!”
나는 허공에서 한 번 걸음을 내디뎠다. 말랑한 세계수의 걸음이, 쫀득하게 평행 차원의 경계면을 밟는다. 불가능조차 엔딩을 보게 해 주는 불합리의 걸음.
후우욱!
내 몸이 순식간에 공간의 간격을 지우고 목표로 찍은 아갈타의 마족 앞에 섰다.
……!
……?
놈들의 몸을 타고 흐르는 전율과 당황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놀랐지?’
이게 결과만 놓고 보면 공간 이동과 같지만 실제로는 공간 이동이 아니다. 무수한 평행 차원의 간섭 속에서, 내 존재가 존재할 확률이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온 거니까.
말은 어렵지만 그 효과는 단순하다.
공간 이동을 사전에 감지하고 차단하는 차원 강습 시스템으로도 대비할 수 없는 일격! [자유]라는 건 그렇게 고차원적인 주문이었다.
쿠직!
7미터짜리 거인창을 빌어먹을 아갈타 놈의 가슴에 꽂았다. 거인창은 놈의 가슴을 꿰뚫고도 여력이 남아서 그대로 뒤로 쭉 뻗어 하늘에 박혔다.
꾸지직!
거인창은 철판을 우그러뜨리는 소리를 내며 하늘에 박혀 들었다. 그랬다. 정말 하늘에 박혀 들었다.
“이건?”
나는 뒤늦게서야 [만상공감]으로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결계를 쳐 놨어?”
어쩐지, 서울 한복판에서 이 난리가 났는데 지원군이 너무 늦더라니.
마족과 하늘을 동시에 꿰뚫은 거인창을 뽑아냈다. 마족의 시체는 떨어지고 우그러진 하늘 사이로 결계 밖 풍경이 보였다.
‘이걸 부수면 지원군이 올 거야……!’
하지만 마족들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남은 네 명의 마족이 일제히 나를 노렸다.
광선이 쏟아지고, 마족들의 뿔에서 강력한 벼락이 떨어지고, 심지어 구름강기를 두른 손으로 나를 노렸다.
나는 얼른 거인창을 손에서 놓고 뒤로 물러섰다.
광선은 절규를 삼킨 밤의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버텼고, 벼락은 탐貪으로 삼켰고, 구름강기를 두른 손들은 파도로 쳐 냈다. 방어는 성공적이었지만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다.
‘미치겠네.’
영력이 벌써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뒤로 물러서며 영력 회복 주사를 꺼내 심장에 꽂았다.
푸욱!
섬뜩한 따끔함과 함께 진득한 영력이 심장으로 밀려들었다가 탄산처럼 온몸으로 퍼졌다. 대부분의 영력이 뭉치지 않고 그냥 피부 밖으로 빠져나갔다. 온몸에서 아지랑이가 일렁거렸다.
‘개당 200알짜리 최고급 영력 회복 주사를 놨는데 영력이 고작 절반 회복됐다고? 진짜 [안티소울] 지독하네.’
진흙탕 싸움이었다.
리디아 위트필드가 움직여 준다면 걱정할 게 없을 텐데… 그녀는 데미안의 생명이 위험할 때에만 움직인다. 그리고 그 판단 기준은 아주 엄격했다. 적어도 내가 패해서 떨어지기 전까지는 데미안의 생명이 위험하리라 여기지 않을 거다.
얄밉게도 그 판단은 정확했다.
‘딱 내가 죽을 둥 살 둥 싸워야 놈들을 꺾겠는데?’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창신 1대를 구할 수 없다.
‘부대를 강화한다고 내 장비 강화를 안 한 게 엄청나게 후회가 되네…….’
생각해 보면 파도 이후로 무기를 강화하지 않았다. 그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쩔 수는 없다. 지금 가진 것을 가지고 변수를 만들어야 한다.
까가가가각!
그때 철판을 찢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런……!’
마족들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백색 아우라가 활활 타오르는 거인창이 스스로 결계를 뚫고 있었다. 벌써 절반쯤 자신의 몸을 결계의 틈새로 박아 넣고 온몸을 비틀고 있었다.
100퍼센트 길든 거인창도 얼마든지 내 손을 떠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놈들은 내가 창을 놓고 물러섰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거인창은 그대로 남아 결계를 뚫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
하지만 소음 때문에 생각보다 빨리 들켰다.
‘젠장할!’
결계를 부수지는 못해도 결계 밖의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라도 바라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마족 하나가 거인창을 잡아 뽑아 버렸다.
울컥한다.
‘이젠 어쩔 수 없나?’
그냥 이성계의 활을 쏠까? 하지만 그러면 진짜 창신 1대를 구하러 못 갈 텐데?
‘시발. 그래도 이러느니?’
깐죽거리는 마족 놈들이라도 시원하게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터덕!
하얀 털이 숭숭 난 손등이 보였다.
결계 밖에서 결계 안쪽으로, 거인창이 뽑혀 나간 구멍 사이를 잡아 벌리듯 우악스럽게 쥐는 손이었다.
새까만 눈동자에 주름진 눈매가 갈라진 결계 사이로 이쪽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초승달처럼 접히며 웃음을 지었다.
“여기 있었네?”
하준광의 목소리였다.
-6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