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동시다발적
유해의 마을은 항상 안개에 잠겨 있었다.
회백색의 반투명한 유해의 폭포가 끝없이 떨어지고, 사방으로 안개를 뭉클뭉클 피워 올리는 그 풍경 앞에서 우리는 차원강습 시스템에 관해 논의했다.
평행 세계의 나는 타키넷에서 아몬과 대화를 나누고, 또다른 세계의 나는 유해의 마을에서 장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참 알차게 보내는 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바쁜 나와 달리 유해의 마을 장인들은 좀 느긋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그들도 차원강습 시스템에 지대한 관심을 드러내긴 했지만, 그 논의 과정이 효율적이지 않았다.
“이건 정말 재밌어. 봐 봐, 저 내구성과 탄성을!”
“황소람이! 자네는 저렇게 탄성이 있는 물건 만들 수 있나?”
“쉽지!”
“쉽다고?”
“그래! 적당한 재료 구해다가 유해의 폭포에서 한 1년만 반죽하면 되겠구만!”
“흐흐. 나는 저 가슴 부분의 디자인에 참 관심이 가. 나도 저렇게 작품을 한번 만들어 볼까?”
중정 공방의 장인들은 차원강습 시스템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면, 여기 장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물성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꼭 필요한 일이긴 했다.
결국 차원강습 시스템을 자체 생산 하려면 저렇게 구성 요소 하나하나를 살피고 비슷하게 만들어 보는 작업이 필요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과정이 너무 느긋하다는 것이었다.
‘자기 전공 아닌 건 남 일 대하듯이 하네.’
기본적으로 유해의 마을에 있는 장인 대부분이 이번 연구에 참여하겠다고 발을 걸쳤지만, 신발 장인인 송일은 신발 부분만 살피고 장신구 장인인 탁마 노인은 번쩍거리는 부분만 보고 있었다. 중정 공방처럼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공통의 목표 의식을 불태우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물론 각자 한 분야에 인생을 건 장인들이라는 건 알지만, 이런 식으로는 원하는 연구 성과가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서 나도 논의에 끼어들려고 할 때, 나보다 먼저 논의에 끼어드는 사람이 있었다.
데미안이었다.
“아뇨. 그런 식으로 이 보물을 다루는 건 낭비예요.”
턱은 치켜들고, 눈에는 불을 켜고 고귀하고 오만한 박력을 철철 흘리며 나섰다. 크지도 않은 목소리였는데 모두의 귀에 또랑또랑 박혀 들었다.
“연구 계획을 짜고 다 같이 협력해서 착착 진행을 해 가야죠. 각자 자기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볼 거면 여기에 저 귀한 샘플을 맡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새파랗게 어린 도련님이 최고로 꼽히는 장인들을 야단쳤다. 그런데 그 모습이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그 자존심 강한 장인들이 꿀 먹은 벙어리들처럼 눈만 끔뻑거렸다.
그때 데미안이 상기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자기 뜻대로 계속 몰아붙여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데미안이 자신 있게 한 발 더 나아가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할 거면 지금이라도 때려치우십시오! 내드렸던 샘플은 그대로 업고 돌아가겠습니다!”
장인들이 술렁거렸다.
“어, 어이, 그건 아니지!”
“줬다 뺐는 게 어딨나?”
“이런 신기한 물건은 처음 본다는 말야……!”
그러자 데미안이 똑 부러지게 못을 박았다.
“그럼! 이렇게 하지 마십쇼! 세월아 네월아 연구 결과가 나오든 말든 각자 좋을 대로 물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것? 이젠 용납 못 합니다. 지금 그럴 상황 아닙니다!”
와- 내 속이 뻥 뚫릴 정도로 시원한 일갈이었다.
그리고 세계 최고 부자 가문의 직계로서 어릴 때부터 착실하게 경영 수업을 받아 온 데미안은 그냥 일갈을 내지르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다음부터는 구체적인 계획과 지원 내용을 쏟아 내기 시작했는데, 그게 정말 압권이었다.
“일단 오늘 내로, 이 안에 들어가는 부품들 공수해 오겠습니다.”
“부품이 있어?”
“네. 용산구 서부드래곤힐동에서는 벌써 분해 작업을 완료했습니다.”
“벌써?”
유해의 마을 장인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애초에 분해를 누가 더 빠르게 하나 경쟁을 한 적도 없지만, 말을 저렇게 하니 어쩐지 뒤쳐진 기분이 들어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네. 제가 거기서 내부 구성품들 싹 뜯어서 가져올 테니까, 한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똑같이 생산해 보십시오. 한 부품당 장인 세 명이 각기 따로 생산을 하고, 그중에서 제일 비슷한 부품을 만들어 낸 사람 것을 채택하는 방식으로 반복할 겁니다.”
“…제일 비슷한지는 누가 판단할 건데?”
“제가 직접 가지고 가서 확인할 겁니다.”
“도련님이?”
“네. 외차원 기술의 전문가들을 섭외해 놨습니다. 어떤 부품이 더 원본에 가까운지 정도는 정확하게 판단 내릴 수 있습니다.”
“으음…….”
장인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한 부품당 세 명의 장인이 경쟁을 하는 구도. 데미안이 만든 판에 장인들은 부담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고 호승심과 재미를 느끼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근데… 잠깐, 누굴 섭외했다고? 외차원 기술의 전문가? 그런 게 있나?
내가 의아한 눈으로 데미안을 보자 데미안이 보낸 텔레파시가 내 머릿속을 울렸다.
- 타키넷에 있는 제가 나타르 씨와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여기서 생산된 부품들이 차원 문명의 규격에 맞는지 검수할 수 있는 전문가를 따로 준비해 놓겠다고 합니다. 아몬 씨에게 물어도 될 테지만 아몬 씨도 연구로 바쁠 테니 나타르 씨를 통하는 게 더 나을 거 같아요.
세상에… 타키넷에 있는 데미안이 실시간으로 허락을 구하고 지구에 있는 데미안은 곧장 일을 진행한다. 데미안이 둘이니까 일도 두 배로 빠르게 착착 진행됐다.
데미안은 장인들을 윽박지르는 것만으로 끝내지도 않았다.
“노력 좀 해 주십시오. 대신 평생 써 본 적 없었을 재료도 마음껏 내드릴 테니까요.”
와르르-
데미안은 무엇으로 장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데미안이 아공간을 열고 쏟아 낸 재료에는 유해의 마을 장인들조차 평생 한 번을 보기 어려운 희귀 자원들이 가득했다.
“맙소사! 청염석이야!”
“이건… 베히모스의 가죽이 아닌가?”
장인들의 환호성은 곧 데미안이 제시한 방법에 대한 동의와도 같았다. 이제 당장 내일부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차원강습 시스템의 부품 카피가 시작될 것이다. 물론 그걸 실제로 인챈트 해서 차원강습 시스템을 만들기까지는 머나먼 여정이 남아 있을 테지만… 중요한 건 어쨌든 첫발을 제대로 내디뎠다는 것이다.
“잘하셨습니다.”
내가 칭찬하자 데미안 루드비히는 그 나이대의 아이답게 천진한 웃음을 보여 주었다. 그 옆의 까막이는 뭔가 홀린 듯한 눈으로 그런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타키넷에 있던 내가 갑자기 달려온 허묵을 만난 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구에 있던 나 역시 허묵이 하는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갈타의 정보를 발견했다고? 잘은 모르겠지만… 한반도에서 아갈타 놈들의 대대적인 작전이 있을 것 같다고?’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지?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핸드폰 벨이 울렸다. 최치국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 지금 첩보가 입수되었습니다. 철원에서 작전 중이던 사령관님의 부대에서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상대는 마족들로 추정됩니다.
“네?”
- 확실한 첩보입니다. 저도 지금 그곳으로 이동……! 이런! 기습! 크윽……! 사령관님! 속히 움직이지 않으면 부대가 전멸할 수도 있습니다!
철원이라면 창신 1대가 파견된 장소였다. 박민희와 강전구가 그곳에 있었다.
‘잠깐만…….’
분명 허묵은 ‘대대적인 작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방금 창신 1대가 공격을 당했다는 사실을 들었고 그 사실을 알려 주던 최치국 역시 기습을 당한 것 같았다.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거… 혹시 여기도……?’
바로 그 순간, 나는 [만상공감]으로 내리꽂히는 위험을 감지할 수 있었다.
“다들 모여요!”
청하와 파도가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 위로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빛이 떨어졌다.
꾸우우우웅-!
유해의 마을을 뒤덮고 있던 은빛 안개가 그 어마어마한 힘을 이겨 내지 못하고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늘 어둡던 유해의 폭포 위로 파란 하늘이 걸리고 햇살이 내린다.
충격파가 지나가고 돌들이 우르르 쏟아졌지만, 그걸 맞고 다친 사람은 없었다. 유해의 마을에 있는 장인들도 모두 초능력자들이었으니까.
“이… 이게 대체?”
하지만 그들은 평생 처음 보는… 유해의 폭포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라는 풍경을 보고는 크게 충격을 받은 듯했다.
“저 안개가 그냥 힘으로 없앨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그래.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유해라는 건, 특수한 영력의 집합체이다. 유해에서 나온 저 안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걸 이렇게 말끔하게 날려 버렸다고?
툭, 투둑…….
때마침, 폭발을 막기 위해 내가 하늘로 날려 보냈던 청하와 파도도 맥없이 땅에 떨어졌다.
사라진 안개.
힘을 잃고 떨어진 청하와 파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내 가슴 속에 뭉쳐져 있던 영력에도 큰 충격이 가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상황은 명확했다.
‘안티 소울……!’
방금 터진 폭발은 그냥 폭발이 아니었다. 이 일대의 영력을 통째로 날려 버리는 [안티소울]의 힘이 담긴 포격이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조심하십시오! 마누스가 모두 날아갔습니다!”
영력도 날려 버린 폭발 앞에서 마누스 따위가 버틸 리가 없지..
데미안의 경호 팀이 신속하게 달려와 우리를 감쌌지만, 마누스가 없는 탓에 평소보다 움직임이 현저히 느렸다.
현재 상황은 명백했다.
“미친놈들… 진짜 날을 잡았구나?”
툭 터진 하늘에는 어느새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뿔까지 우뚝 솟은 슈트를 걸친 다섯 명의 실루엣이 보였다.
마족이라 불리는 아갈타의 차원강습병이 무려 다섯이나 있었다.
‘그냥 다섯도 정면으로 붙으면 만만찮을 텐데… [안티소울]의 힘이 담긴 포격까지 갈겨 버리네.’
창신 1대에 이어 최치국 그리고 유해의 폭포까지. 그야말로 대대적인 작전이었다.
악의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당하기만 하던 놈들이 칼을 제대로 갈았구나.
팽팽한 긴장감이 등줄기를 달렸다.
‘곤란해.’
나는 탐貪에게서 거인창을 꺼냈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눈앞의 마족 다섯이 아니었다. 패배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데미안 루드비히가 있었으니까. 데미안이 위험해지면 수신호위인 리디아 위트필드가 나설 것이고, 그녀의 힘이라면 눈앞의 마족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체될 거야.’
지금 걱정되는 건 창신 1대였다. 최치국이 분명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최치국도 나도 지금 발이 묶여 버렸으니까.
‘제발. 버텨 줘, 금방 처리하고 갈 테니……!’
나는 거인창의 두꺼운 창 자루를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