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두 배로 즐겨요
햇살이 비쳐 드는 동굴.
하얀 게이트를 넘어서자마자 초록머리칼에 초록색 눈동자가 휘오휘오거리면서 다가왔다.
약간 날카로운 눈매와 살짝 보이는 송곳니가 귀여운 녀석이다.
휘오오오오-
[오랜마안!]
훌쩍 달려서 콱! 안겨 든다. 어라? 전에는 유령처럼 가볍더니 이제는 제법 무게감이 느껴진다. 묘하게 따뜻하기도 하고.
정령 형태인데도 이런 현실감이라니.
‘그새 또 성장한 거야?’
세계수라는 게 원래는 이렇게 쑥쑥 잘 자라는 게 아니었을 텐데?
휘오는 심은 지 1년 만에 전생 오십 평생 동안 보았던 그 어떤 세계수보다 훌쩍 자라 있었다. 애초에 세계수가 정령 형태를 취한다는 말 자체를 들은 적도 없는데, 이제는 그 정령이 무게감과 체온까지 흉내 낸다. 기가 막힌다.
‘뭐, 다 내 덕분이려나.’
[만상공감] 덕에 가능한 성장이었을 것이다. 이 알 수도 없는 차원에서 날아온 식물에게 꼭 필요한 교감과 양육이 가능하게 해 주는 건, [만상공감]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테니까.
하지만 자고로 어린애들이란 부모의 이런 노고는 몰라주는 망할 것들이었다.
[간식 줘! 간시익!]
웬일로 달려와서 안기나 했더니 입이 심심했나 보다. 품에서 발버둥 치는 휘오 놈에게 타키온 한 움큼을 꺼내 주니 세계수 이파리로 접시를 만들어서는 거기에 수북이 쌓아 놓고 사탕처럼 아드득아드득 깨물어먹었다. 내 한 팔에 안겨서 방자하게 다리 한 짝을 허공에 늘어뜨린 채였다.
놈이 하는 짓을 보니 실소가 나왔다.
“귀… 귀엽군요.”
옆을 돌아보니 데미안 루드비히가 손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휘오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는 눈치였다. 까막이는 그런 데미안 루드비히의 반응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휘오오오-!
그런데 데미안의 시선이 휘오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휘오가 눈매를 더 날카롭게 만들며 손을 휘젓자, 잎이 무성한 세계수의 가지가 나와 데미안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아…….”
이파리 너머로 데미안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게 느껴졌다. 휘오 녀석은 뭐가 좋은지 낄낄거리며 내 한 팔에 안긴 채 다리를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켠다. 작은 머리가 내 가슴팍을 부비적거리는데… 와, 이 현실감이 놀랍다. 진짜 그냥 작은 짐승을 안고 있는 기분이네.
녀석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휘오가 작은 송곳니를 반짝이며 만족스럽게 웃는다.
녀석과 놀아 주다 보니 어쩐지 복잡했던 머릿속도 간단하게 정리되는 것 같았다.
‘현재 상황은?’
대한민국은 아갈타의 침공을 그럭저럭 잘 버텨 내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여전히 피해가 크다. 허무하게 죽어 버린 기술자도 많을 것이다. 그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면한 가장 굵직한 과제는?’
차원강습 시스템을 연구해야 한다. 그런데 속도가 많이 느리다. 보다 획기적인 방법을 찾아내고 싶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위해서라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어떻게든 나의 업무 부담을 줄이는 것.
할 건 많은데 몸은 하나이니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휘오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시고 나니, 마음속을 가득 채우는 건 자신감과 희망이었다.
‘타키넷에서 방법을 찾자. 다행히 타키넷 다녀오는 시간은 커버할 수 있으니까.’
그래. 결국 모든 문제의 해답은 타키넷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을 살 수 있으니까. 내 고민의 해답도, 미래도, 꿈마저도.
한 점의 의심 없이 그렇게 믿기로 했다.
“다들 내 곁으로 모여.”
사르륵-
내가 말하는 즉시, 휘오가 데미안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가지를 치워 냈다. 데미안과 까막이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난 그 둘의 어깨를 잡았다.
“휘오, 내가 한 걸음 걸으면 게이트를 열어. 그리고 두 걸음째에 게이트를 넘을 거야.”
[알았어어.]
내 품을 벗어나 세계수의 가지 위로 올라선 휘오가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끝났다.
“후우우.”
호흡을 가다듬고 영력을 신발에 집중했다. 세계수의 걸음에서 하얀 테두리를 지닌 아우리가 활활 타오른다.
세계수의 걸음. 그 안에 인챈트된 ‘자유’의 힘이 한계를 넘어 발휘되었다.
가장 자유로운 것은 그 어떤 것과도 부딪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작은 알갱이조차 그 존재를 알지 못하고 지나친다. 그렇게 이 세상의 아무도 모르는 틈새로 파고들 때, 내 존재는 무한한 경우의 수로 흩어지며 한없이 자유로워진다.
저벅.
한 걸음 걷는 순간, 나는 자유로워졌다.
무수한 분기점. 끝없는 평행 우주가 내 눈앞으로 갈라지고, 나는 그 모든 세계 속에 존재하는 나를 느꼈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압력을 느꼈다.
“크윽……!”
영력은 빠르게 줄어들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프다. 이런 식으로는 찰나도 견딜 수 없다.
하지만 그건 안 될 소리!
‘확률이 너무 많아서 그래! 두 개로 줄인다.’
신발을 감싼 백색의 아우라가 한 번 더 일렁거리고, 끝도 없이 펼쳐져 있던 평행 우주가 단 두 개의 세계로 줄어들었다. 찰나의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었던 무한 개의 평행 우주가 꽤 긴 시간 동안 유지되는 단 두 개의 평행 우주로 축소된 것이다. 숨 막힐 듯한 압력이 약해졌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태라면 1시간은 유지가 가능하다.’
이런 사용법은 [자유]를 인챈트 한 아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염두에 둔 사용법은 그저 찰나의 순간 내 존재를 무수한 확률 속으로 흩어 피할 수 없는 공격을 피하게 하거나 마찬가지로 성공할 수 없는 공격을 성공하는 정도. 그 정도가 전부였겠지.
하지만 [만상공감]이 세계수의 걸음을 강화한 순간, [자유]는 전혀 다른 주문이 되었다.
아니, 그건 [만상공감] 덕분이라기보다는 애초에 [자유]라는 주문이 가지고 있는 개념이 지나치게 고차원적인 덕분이었을 것이다.
인챈트 한 아몬조차도 ‘자유’라는 고차원적인 개념의 그림자만 간신히 포착했겠지. 그마저도 엄청난 행운이 따라서 가능했으리라. 그리고 나는 [만상공감]을 이용해 자유라는 개념의 그림자 끄트머리에서부터 기어올라 가 간신히 그 발뒤꿈치에 닿은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런 말도 안 되는 활용이 가능해졌다.
‘두 배가 되는 거지.’
부우웅-
바로 앞에 휘오가 만든 하얀 게이트가 생겨났다.
저벅.
나는 다시 한 걸음을 걸어 게이트를 넘었다. 동시에, 넘지 않았다. 하나의 평행 우주에서 내가 게이트를 넘었다면 다른 평행 우주에서 나는 게이트를 넘지 않은 것이다.
나를 관측하고자 했던 모든 시도가 부스러졌기에 타키넷으로 떠난 내가 있는 평행 세계와 타키넷으로 떠나지 않은 내가 있는 평행 세계가 중첩된 상태로 공존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1시간 동안, 나는 타키넷을 떠난 내가 있는 세상도 체험하고 지구에 남은 내가 있는 세계도 체험할 수 있었다. 두 평행 세계를 사는 각각의 ‘나’는 서로의 사고와 경험을 실시간으로 공유했다.
둘로 갈라진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내게 어깨를 잡혔던 두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였다.
게이트를 넘은 데미안과 게이트를 넘지 않은 데미안, 게이트를 넘은 까막이와 넘지 않은 까막이가 동시에 말했다.
“이게… 뭐죠?”
“이게 뭐죠?”
“아악! 뭐야!”
“으헉! 뭐지?”
뭐긴. 두 배가 되는 거라니까?
두 세계 속의 까막이는 패닉도 두배로 왔는지 난리 법석을 떠는데, 두 명의 데미안은 동시에 자기 턱을 잡으며 두 배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곤 각각의 세계에서 내게 물었다.
“이거 분신술이에요?”
“이거 분신술이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얼핏 보면 분신술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게 뭐죠?”
“그게 뭐죠?”
분신술과 달리, 1시간 동안 주어진 ‘자유’의 시간 속에서 다른 이들은 결코 우리가 둘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가 없다.
“우리가 바로 옆에 나란히 서 있어도요?”
나란히 서 있어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세계에서 두 명이 된 것이 아니라 두 개의 평행 세계에 각각의 내가 한 명씩 존재하는 것이니까. 1시간이 지나야 그 두 평행 세계가 다시 하나로 합쳐질 때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려워요…….”
1시간이 지나 보면 알게 되겠지.
1시간이 지난 뒤 나의 행적을 추적해 보면, 뭔가 말이 안 되는 흔적을 찾게 될 것이다. 내가 두 명이 되지 않고서는 만들 수 없는 흔적이 발견되겠지. 하지만 적어도 ‘자유’가 유지되는 1시간 동안에는 결코 우리가 두 명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애초에 그런 주문이었다.
“이해 안 되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앞으로 1시간 동안, 지구와 타키넷에서 동시에, 두 배로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니까.”
나는 혼란에 빠진 두 꼬맹이의 등을 탁! 때려 주고 앞서 걸었다.
타키넷에서는 케사리니 아몬의 작업실로 향했다.
지구의 나는 유해의 마을로 향했다.
바쁘다, 바빠. 한시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 * *
만안자의 눈썹은 하얀색이었다.
나이는 이제 갓 마흔이었지만, 20대 때부터 하얗게 센 눈썹은 여전히 눈이 내린 듯 하얗다.
“으음……?”
만안자가 하얀 눈썹을 찌푸리며 머리를 짚었다. 주요 관찰 대상인 소시민이 세계수와 접촉한 것을 확인하고 주의 깊게 들여다보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심안心眼]이 침침해지는 느낌에 이마를 짚은 것이었다.
“어휴. 하필 이럴 때 이러네.”
잠깐 어지러움과 싸웠던 만안자는 어지러움이 가라앉자마자 얼른 다시 [심안]을 발동했다. 혹시나 그 잠깐 새에 소시민이 협정을 어기고 타키넷으로 넘어간 게 아닌가 싶어서 바싹 긴장했다. 아직 한 달의 약속에서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서 협정을 어긴다면 아무리 권승리가 아끼는 소시민이라 해도 더는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으… 음? 잘 있잖아? 이차원으로 간 게 아니라 유해의 마을로 간 거였네?”
만안자는 아쉬움인지 안도인지 모를 감정을 느끼며, 다시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일들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그의 시선을 끄는 사건이 있었다.
“어라? 저거 소시민네 병사들 아니야? 마족을 마주쳤네?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만안자는 고민에 빠졌다.
“이걸 소시민한테 알려 줘야 하나? 아니면 근처에 검웅이 있는데 검웅에게 알려 줘야 하나? 아니면 그냥……?”
* * *
창신 1대와 창신 2대.
타키넷에서 구입한 장비로 무장한 이 정예 부대의 이름은 법고창신法古創新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옛 법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창안하다.’라는 본뜻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사실 지구의 옛 법이라는 건 마누스 같은 것으로, 소시민이 볼 때는 본받을 게 전혀 없는 것이었으니까.
다만, 소시민에게는 이제 와서 모든 것을 새롭게 가르칠 시간이나 여력이 없었다. 결국 차선의 방법으로 택한 것이 바로 옛것을 바탕으로 하되 차츰차츰 그 한계를 깨고 나와 새로워지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창신대創新隊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구에 존재하는 유일한 차원 문명식 신식 부대.
창신 1대의 대대장 박민희는 자신이 이끄는 부대가 지구 최강일 거라 생각하며 항상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시발… 통신도 두절이네.”
휘오의 가지를 잡고 아무리 통신을 시도해도 먹히지 않았다. 마족 놈들이 사전에 수를 쓴 게 틀림없었다.
그녀의 눈앞에 세 명의 마족이 보였다.
셋.
셋이라니.
절묘한 숫자였다.
마족 하나라면 창신 1대의 전력으로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마족이 둘이라면, 이기거나 전멸당하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봤다.
하지만 셋이다.
광화문 경비대에서 군인으로서 오래 복무했던 박민희는 이 순간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앞으로를 생각하면… 강전구와 각 동대장들은 살아야 돼. 일단 내가 남아서 적을 저지한다. 하지만 그걸론 부족해. 길 막고 시간을 끄는 데 가장 적합한 능력을 가진 병사가 누가 있었지?’
누가 죽음으로써 누가 도망칠 시간을 벌어야 할 것인지, 그 짧은 시간 내에 결정한 것이다.
마족 셋이라는 건 그런 의미였다. 우연히 만난 게 아니라 철저히 노리고 기획된 습격.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결심을 마친 박민희가 창신 1대의 주임 원사를 자처하고 있는 강전구를 돌아보며 말했다.
“강전구, 잘 들어.”
하지만 강전구는 박민희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곰 같은 덩치와 달리 눈치가 빠른 남자였다.
6.30 참사 이후 소시민을 용산구 제2지역의 사령관으로 추대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마족이 셋이고, 민희 누님이 결연한 눈으로 나랑 병사들을 쫙 훑어봤는데… 내가 누님 생각을 모를 것 같수?”
툭, 뱉듯이 말을 남겨 놓고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마족을 향해 달려들었다.
“야이, 미친놈아!”
그런데 박민희의 속셈을 눈치챈 건 강전구뿐만이 아니었다.
우우우웅-!
아직 박민희가 아무런 지시를 하지도 않았는데 100개의 캐스터가 일제히 울어 대기 시작했다. 캐스터에서 뻗어 나온 주문들이 마족들에게 착실히 디버프를 걸고 달려드는 강전구에게는 버프를 걸었다. 소시민이 직접 훈련시킨 대마족 전투 교리를 고스란히 따르는 움직임이었다.
박민희는 기가 막혔다. 명령도 안 했는데 먼저 움직인다고?
“야이, 새끼들아! 이거 항명이야!”
박민희가 불같이 화를 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그녀가 간과한 것은 창신 1대는 소시민이 직접 주민들 사이에서 가려 뽑은 자경단과 같은 조직이라는 것이다. 그녀가 예전에 소속되어 있던 광화문 경비 팀 같은 정규 엘리트 부대와는 여러모로 분위기가 달랐다.
아무리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이라도 일단 명령이라면 무조건 복종하는 게 엘리트 정규군이라면, 짧은 시간 많은 실전을 겪으며 끈끈해진 자경단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는 명령이 몇 개쯤은 있는 법이었다.
“요즘 세상에 발에 치이는 게 항명임다.”
“애초에 100명이 한꺼번에 싸우는 법만 배웠지, 찢어져서 도망치는 법은 배우지도 못했슴다.”
결국 박민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 화내지도 않았다. 이미 늦었으니까. 최선이 아니라면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할 상황이었다.
“미친놈들… 시발. 그럼 방법은 하나다! 몰아붙여! 통신 방해를 뚫고 구조 요청을 넣을 수 있게! 한 놈이라도 박살 내!”
터무니없는 가능성에라도 걸어 보는 것.
그녀도 칼을 빼 들고 마족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