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96화 (96/212)

13. 버그성 플레이

하아아-

새하얗게 일어나는 자신의 한숨을 보며 데미안 루드비히는 중얼거렸다.

“벌써 겨울이네.”

아버지, 로버트 루드비히는 말했다.

‘사람이라는 짐승은 1년 365일 필요한 게 참 많지만, 그중에서도 겨울에는 특히 더 많은 게 필요하단다.’

겨울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걸 어디에서 살 수 있는지, 데미안은 그걸 벌써 5살 때 배웠다.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수요와 공급은 경영에 있어서 기본 중의 기본이었으니까.

뭐, 하지만 사실 루드비히의 막내 도련님쯤 되면 이런 기본은 일일이 챙길 필요가 없었다. 매년 비슷하게 찾아오는 변화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맡겨 자동화하는 편이 합리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전쟁 시기에는 달랐다.

편의점에 즉석식품이 가득하고 정육점에 고기가 가득한 게 당연하던 시절은 이제 없는 것이다. 기초적인 운송 체계부터가 완전히 달라져야 했다.

“루드비히가의 협력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던전 공무원이 찾아와 데미안 루드비히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던전 공무원의 뒤에는 2개의 대괴수 대대와 수호 가문에서 파견된 능력자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너브러진 괴물들의 사체를 정리하고 있었다.

시체만 봐도 괴물의 수가 너무 많았다. 지금 보이는 병력으로는 상대했다가 전멸을 면치 못했을 만큼.

하지만 데미안 루드비히가 데려온 경호 팀이 가세했기에 이들은 큰 피해를 보지 않고 보급로를 방어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돼지고기, 소시지, 상추, 만두, 전투식량… 온갖 식량을 한가득 실은 트럭 운전수들도 데미안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데미안은 기품 있게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를 받아 주었다.

물론 데미안이 공짜로 이들을 도와준 것은 아니었다.

진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도로. 진주에는 데미안이 꼭 챙겨야 하는 공장들이 밀집해 있었던 까닭이다. 꼭 챙겨야 하는 물자들이 가득했고, 안보에 협력함으로써 더 많은 물량을 할당 받을 수 있는 특권도 챙길 수 있었다.

때마침 데미안이 기다리던 트럭 행렬이 도로를 지나갔다.

“아, 저기 우리 물량도 오는군요.”

우르르르-

땅을 울리며 다가온 트럭 무리를 데미안은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게 다 이 혹독한 겨울을 이겨 내게 해 줄 물건들이었다.

경호 팀의 능력자들이 데미안을 대신해서 트럭 내부에 적재된 물건들을 검사했다.

“롱 패딩 1,000개, 겨울용 부츠, 장갑 1,000켤레씩. 골렘강 100kg, 만월갈대 50kg, 유령모래 1톤, 월령 녹용 30kg…….”

롱 패딩. 전쟁을 겪고 있는 겨울에 이만한 생존 필수품이자 사치품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물건을 바라보는 데미안의 표정은 조금 씁쓸해져 있었다.

“실은 좀 얇은데 박음질은 꼼꼼하지 못하네. 실밥도 나오고… 마감이 아쉬워.”

데미안의 옆을 지키는 채점관 임훈이 답했다.

“아무래도 전쟁 중이니까요.”

그냥 쓸 만한 물건을 만드는 데 10의 시간이 걸린다면, 마감이 완벽한 명품을 만드는 데는 15 또는 20, 때론 그 이상의 시간도 걸리는 법이다. 전쟁통에 그런 물건을 만드는 것은 사치.

때문에 던전숍 명품관을 가도 신상품이 안 들어온 지 오래되었고, 루드비히 가문의 마에스터들도 너무 바빠져서 데미안조차 제작 주문을 넣을 수 없게 된 지도 꽤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싸구려 물건들조차도 품질이 더 형편없어졌다.

‘세상 전체가 구려지고 있네.’

잘 만든 물건의 만듦새만 보아도 기분이 좋아지곤 했던 데미안으로서는 착잡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이 추운 전쟁의 겨울, 결국 데미안에게 위안을 주는 건 공산품들보다는 제작 재료들일 수밖에 없었다. 골렘강, 만월갈대, 유령모래… 이런 던전 부산물들을 이용해 만들어 낼 <테라>의 신발과 또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신상품들.

그리고 신묘한 기술로 만들어진 상품들이 즐비한 그곳.

‘아아, 빨리 타키넷에 가고 싶다.’

소시민과 무혼권가가 맺은 약속 탓에 무려 한 달간이나 타키넷 출입이 제한되는 바람에 데미안은 요즘 아주 우울했다.

‘그런데 이상해. 무혼권가가 우리 가문에서도 모르고 있던 세계수를 알고 있었다고? 심지어 세계수가 차원문을 열면 그걸 감지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고?’

원래 같으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무혼권가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내부에서의 이야기.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루드비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루드비히가에서는 아직 하나도 발견하지 못한 세계수를 무혼권가는 이미 알고 있고, 심지어 그 활동을 감시까지 할 수 있다고?

말이 안 되는데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이상한 일이 자꾸만 일어났다.

무혼권가뿐만이 아니었다. 온갖 나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새로운 인물들이 자기들끼리 이면에서 힘을 합치고 조직적으로 행동하는 정황이 여러 차례 감지되었다.

특히 이번에 최치국이 14마리의 마족을 잡아오는 과정은 아주 노골적이었다.

루드비히 가문에서는 이미 자신들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국제조직이 탄생한 것으로 가정을 하고 심층 조사에 착수한 상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소시민을 만나고부터… 갑자기 세상이 다른 세상으로 뒤바뀌어 버린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 변화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슬슬 카드를 또 뽑아 봐야 하나?’

제한적으로나마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는 데미안이었지만, 능력을 자주 사용할 수 없었기에 이렇게 빠른 변화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후… 이럴 때는 타키넷에 가서 거래를 트고 신문물을 보고 배워야 기분 전환이 될 텐데. 아쉽네.’

데미안이 또다시 타키넷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던 그때, 품에 넣어 둔 휘오 가지가 우우웅 하고 울었다. 머릿속으로 소시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아. 도련님, 지금 바쁘신가요?

- 바쁘기는 하죠. 용산 제2지역으로 들어가는 보급량이 엄청나잖아요. 거기에 타키넷 물건들 제작과 연구에 필요한 물자들도 모아야 하고… 쉴 틈 없이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 그래도 잠깐 와 주시죠?

- 무슨 일이죠?

- 몰래 타키넷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생겼습니다.

아.

데미안의 입술이 벌어졌다.

- 지금 바로 갈게요!

답답하던 가슴이 활기찬 심장 소리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 * *

전 세계가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지만, 대한민국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그중에서도 용산구 제2지역은 일상을 이어 갈 수 있을 정도로 안전했다. 그냥 항상 완전무장을 해야 한다는 것, 쉬는 날 없이 일주일에 하루이틀씩은 예비군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평소와 비슷했다.

예비군 근무가 아닌 날이면 사람들은 무기를 들고 회사로 출근했다. 퇴근하면 회식을 하러 가기도 했다. 식당 종업원들도 완전무장을 한 상태로 밥과 술을 내줬다. 물론 메뉴는 보급이 되는 것 위주로 값싼 식재료로 바뀌었고, 허용되는 음주량도 하루에 소주 한 병이 고작이었다. 이게 너무 답답하고 짜증 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사제 밥을 사 먹고 술도 마시고 자기 집에서 잘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꿀 같은 나날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회사가 문을 닫은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에는 군수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 수 있었다. 예비군 작전에 지원하여 짜디짠 전공 점수를 보상으로 받는 것보다는 그 편이 더 나았다. 전쟁이 끝난 이후의 삶에 대비도 할 수 있었으니까.

매일매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는 다른 지역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고 안전한 셈이었다.

물론 용산 제2지역 주민들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이 삶이 거저 주어지지 않았음을.

술자리마다에서 누군가는 꼭 이 한마디를 꺼냈다.

“정말이지… 소시민 사령관님을 추대한 것은 신의 한 수였어.”

6.30 참사 이후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용산 제2지역의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나서서 소시민을 사령관으로 추대했다. 자칫하면 군부에게 폭도로 찍혀 아주 위험해질 수도 있는 모험이었지만… 그 결과는 이토록 달콤했다.

용산구의 주민들은 그 누구라도 용산 제2지역 방위 사령부 건물을 보면 존경을 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덕분에 전쟁통에 방위 사령부 건물이 증축되고 개축되는 모습을 보아도, 불만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 거대한 건물을 보며 더 든든함을 느끼는 이들이 있을 뿐.

용산 제2지역 방위 사령부 신축 건물.

뭇 사람들이 존경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바로 그 건물에 앳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악! 또 실패했어!”

오랜만에 지구 공기를 쐬고 있는 까막이었다.

서민서와 함께 전국을 누비며 기술자들을 데려오고 있는 까막이는 잠깐잠깐 짬이 날 때마다 자기 방에 틀어박혀 게임에 몰두했다.

게임이 잘 안 풀리는지, 이따금 녀석이 내지르는 비명이 복도에까지 울려 퍼지곤 했다.

“무슨 게임을 그렇게 열심히 해?”

내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녀석은 화들짝 놀랐다.

“아후, 깜짝이야! 누구……! 아, 형이에요?”

험악한 인상으로 돌아보다 말고 나를 확인하는 순간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돌변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까막이 놈, 사령부 사람들한테 싸가지 없이 군다고 악명이 자자하던데… 내 앞에서는 이렇게 착한 놈이 없었다. 전형적인 약강강약. 권력에 예민한 놈이다.

뭐… 아직까지는 애가 어려서 귀여운 수준이다. 언제 한번 버릇은 고쳐야겠지만.

아무튼 나는 방으로 들어가며 까막이의 모니터를 슬쩍 확인했다. 무슨 게임을 하고 있는 거야?

‘…응? 이거?’

화면 전반을 차지하는 여성 캐릭터. 어딘가 밀당이 오가는 대사.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어여쁜 여성 캐릭터들과 썸을 타고 클리어율에 따라 약간의 노출 신도 나온다는 소문의 게임. 흔히 자랑스럽지 못한 취미로 취급당하고 사회적으로 백안시되기도 한다.

“까막이 너…….”

뭔가 가슴에 묵직한 게 내려앉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탓인가?

한창 이성에 눈을 뜨는 나이의 녀석을 외계인만 가득한 타키넷에 가둬 뒀더니 연애 욕구를 이렇게 2D의 세상에서 풀게 된 거니?

하지만 까막이는 내 애잔한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녀석은 전혀 부끄러울 게 없다는 태도였다.

하기야. 제대로 학교도 나온 적도 없고 또래 친구도 없는 녀석이다. 오타쿠니 혼모노니 하는 말이 뭔지도 모르겠지.

녀석은 오히려 천진난만한 얼굴로 내게 대답하기 꺼림칙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아우… 이거 너무 어려워요. 형, 형은 여기서 뭐라고 대답할 거예요?”

까막이가 보여 준 화면에는 금발의 여자애가 화라도 난 듯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두 가지의 대사 선택지가 보였다.

A. [부탁인데… 잘 곳이 없어졌어……. 창고라도 좋으니까 하루만 신세질 수 있을까?]

B. [어이, 집 좀 빌리자.]

…뭐야, 이 이상한 대사들은? 변태야? 왜 다짜고짜 여자애 집에 가겠다는 거야?

잠시 혼란에 빠져 있으려니 까막이가 날 재촉했다.

“그래도 형은 연애 경험도 많을 것 아니에요. 좀 가르쳐 주세요!

…전쟁을 위해 모든 걸 다 바쳤던 삶이다. 연애 경험이라고는 수십 년 전, 중학생 때 같은 고아원을 다니던 친구 이후로 없다. 한 다섯 달 사귀었나? 그렇게 헤어지고 고등학교 진학할 때쯤에 그 애가 괴물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게 전부였다. 당시에는 꽤 충격이었는데, 금세 다른 죽음들로 잊혔던 기억이 난다.

이젠 너무 오래 전이라 얼굴은커녕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

오히려 그래서였다. 까막이의 질문을 무시하지 못한 건. 미천한 연애 밑천을 보여 주기 싫어서 뭐라도 아는 척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일단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뭐라 답할지 알 수가 있지. ”

“델리아요.”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아냐? 좀 자세하게 말해 봐. ”

“음… 세계관 최고의 부잣집 막내딸이에요. 아후… 진짜 부자들은 다 그런가요? 성격 까탈스럽고, 변덕스럽고, 예민하고… 미쳐 버린다니까요? 처음부터 델리아만 노렸는데 쓸데없이 다른 캐릭 엔딩만 주구장창보고… 벌써 열 번째 시도예요.”

“…꼭 걔를 깨야 되는 거야? 그렇게 까다로운 애를?”

“당연하죠! 다른 캐릭은 몰라도 델리아 엔딩은 꼭 봐야죠. 처음부터 델리아 때문에 시작한 게임인데.”

그렇게 좋나……?

흠. 금발이고 몸매 좋고. 까막이 이상형이 이런 느낌인 건가?

“그렇게 예뻐?”

“네?”

“아니, 고통받으면서도 일편단심이길래.”

문득 까막이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예쁘죠. 다른 캐릭터들도 다 예쁘고.”

응? 의외의 대답이었다. 예뻐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듯한 뉘앙스.

얼굴 말고 다른 걸 볼 줄 아는 성숙함이 까막이에게 있었던 건가?

그럼 뭐가 좋지? 성격? 분위기? 표정? 성우의 연기?

“아니, 당연한 것 아니에요? 형님은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뭔데?”

“돈이 제일 많다니까요? 세계관 제일의 부잣집 막내 따님이라고요! 막막 학교 교장 선생님도 델리아 씨한테는 존댓말 붙인다니까요?”

까막이의 뺨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었다.

아, 그래. 돈과 권력에 미친 꼬맹이, 그게 너였지……?

그때 까막이가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앗? 잠시만… 그렇죠. 델리아는 부자죠! 그러니까 역시 비굴한 건 싫어할 거예요. 차라리 강하게 나가는 거지. 이럴 때는 B! 어이, 집 좀 빌리자! 어? 어? 으아악?! 호감도가 떨어졌다고?”

까막이가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으로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안 돼! 이건 자동 세이브 되는 게임이란 말야! 아악! 어째서! 어째서 선택을 한 번에 하나씩밖에 할 수 없는 거지? 아아… 부조리해! 원하는 엔딩으로 향하는 루트를 이렇게 하나하나 일일이 찾으라는 거야?! 난 바쁘다고! 그냥 한꺼번에 찾아내면 안 되는 걸까?”

까막이는 인생의 쓴맛을 보고 철학적인 고민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는 나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지. 그게 우리네 사는 방식이지.’

선택은 한 번에 하나씩만. 선택을 내리는 순간 되돌릴 수 없게 되어 버리는 잔혹한 삶.

‘그런 의미에서 [자유]라는 이름은 참 적절해.’

새로운 신발, 세계수의 걸음을 떠올렸다.

우리는 모두 선택을 해야 된다.

그런데… 그런데 만약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어떤 가능성도 죽이지 않고, 어떤 루트도 막히지 않은 상태로, 모든 걸 살려서 엔딩까지 갈 수 있다면?

그 얘기를 했더니 까막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에? 그게 말이 돼요?”

물론 말이 안 되지. 보통의 방법으로는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만약 그 어려운 걸 해낸다면… 게임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한 번에 하나씩 확인할 필요가 없어진다. 모든 스토리라인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내가 원하는 엔딩만을 골라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막히지 않은 루트들의 상호 간섭을 일으키게 해서 애초에 존재하지 않던 엔딩을 보는 것도 가능했다. 가령 원래대로라면 A라는 히로인과 이어지기 위해서는 팔이 잘리고 기계 팔을 다는 루트를 타야만 한다면, 어떤 선택도 내리지 않고 모든 루트를 연 상태로 엔딩에 도달하면 멀쩡한 두 팔로 히로인 A와 이어지는 엔딩을 보는 버그성 플레이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또 뭐가 가능할까?

그래. 그냥 게임 자체를 오류로 멈춰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적절한 물건만 있으면 할 수 있지.”

[자유]가 인챈트된 세계수의 걸음 덕분에 나는 현실에서 그 비슷한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천 개의 길을 앞에 두고 그 전체를 모두 겪은 뒤 내가 원하는 나의 길만 선택하는 것.

그런 걸음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잠시 상념에 빠져 있었더니 까막이가 나를 꺼림칙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형, 저 핵은 안 써요.”

자신이 얼마나 순수한 플레이어인지 열변을 토하는 까막이. 나는 그냥 고개를 젓고 녀석을 일으켜 세웠다.

“아무튼, 기왕 망한 게임이니까 나와. 갈 데가 있어.”

“네? 오늘은 오프인데…….”

“그래도 가야 돼.”

“어디 가는데요?”

“타키넷.”

“네? 아직 한 달 안 됐잖아요?”

“방법이 생겼어. 데미안 도련님도 불렀다. 곧 오실 거야.”

“어? 데미안이요? 빨리 준비할게요!”

까막이의 눈빛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근데 데미안이라니…….

“너는 도련님한테 말버릇이!”

“아, 왜요. 나랑 나이도 똑같은데!”

까막이는 꿀밤을 맞으면서도 입가의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데미안을 만나는 게 진심으로 반가운 기색이었다.

타키넷 다니면서 대화도 거의 하지 않는 주제에… 언제 저렇게?

‘그러고 보니 까막이랑 도련님이 얼추 나이가 비슷한가?’

꼽아 보니 까막이 주변에 또래라고는 데미안밖에 없었다. 그래서 저렇게 신난 걸까?

음…….

문득 가슴이 묵직해서 까막이의 머리를 헝클었다.

까막이가 그런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헤헤. 데미안… 세계 최고의 부자라고 그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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