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95화 (95/212)

12. 메이드 인 어스

아갈타는 차원 문명 중에서 역사가 짧은 곳이었다. 타키넷에 진출하고 다른 차원 문명들과 교류

하기 시작한 지도 고작 몇백 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정도.

하지만 아갈타는 벌써 많은 차원 문명인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아갈타가 고작 몇백 년만에 이룩해 낸 엄청난 발전상 때문이었다.

‘아갈타? 아아, 멋진 곳이지. 참 좋은 사람들이야. 겸손하고 예의 발라. 배울 자세가 되어 있지. 똑똑하기까지 하고. 거기 수도를 가 봐. 어지간한 주요 문명들의 도시 못지않다니까?’

아갈타인들은 새로운 지식에 목말라 있었으며, 더 빠르게 발전하고 싶다는 야망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렇기에 보다 진보한 차원에서 오는 이들을 아주 극진하게 대접했고, 그들이 투자라도 하는 날에는 반드시 몇 배의 이득을 되돌려 주었다.

당연히 점점 더 많은 이가 아갈타를 찾아 교류를 희망했다. 그럴수록 아갈타는 더 빠르게 발전했다.

이제 그들의 위상은 타키넷 평의회 입성을 눈앞에 둘 정도였다. 차원 문명 중에서도 상당히 진보한 ‘진정한 차원 문명’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차원 문명을 좌우하는 국제 정치의 장에 뛰어들 정도의 자격을 갖추었다는 의미였다.

그래서였다.

제637 차원강습연대의 사령관직을 맡고 있는 퀴니세인은 이 상황을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개전하고 한 달. 전사자 및 실종자가 60명을 넘었다… 어떻게 생각해?”

그의 질문에 부관들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떨구었다.

퀴니세인의 노란 눈동자가 뱀의 그것처럼 세로로 쭉 찢어졌다.

“말해 보라고. 대 아갈타의 정규군이 60명이나 당했다. 원시 차원에서. 자, 무슨 생각이 들어?”

부관들은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정규군 60명이 당하는 동안 지구에는 일만 배, 십만 배는 더 되는 큰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60명이라니…….

선진 차원으로 도약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원시 차원과 후진 차원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아갈타였지만, 개전 한 달 만에 60명이라는 피해는 쉽게 들어 볼 수 없는 참혹한 성적표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극동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지휘관은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퀴니세인이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말해 봐. 그중에서 스물세 명이 어디서 사라졌다고?”

극동 지역 지휘관의 입술은 창백했다. 회색빛 얼굴은 더욱 꺼멓게 죽었다. 하지만 그는 용케 목소리를 떨지 않고 답했다.

“한반도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발생했습니다.”

“한반도에 파견된 인원은?”

“마흔한 명입니다.”

“마흔한 명 중에 스물세 명? 전멸이네 전멸.”

퀴니세인이 실소를 터뜨리며 극동 지역 지휘관의 앞으로 다가섰다. 덩치는 왜소했지만 그의 몸을 타고 흐르는 영력은 흉악하기 그지없다.

우우웅- 우우웅-

바로 그때, 퀴니세인이 차고 있는 두 번째 팔찌가 소리를 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극동 지역 지휘관은 식은땀을 흘렸다. 퀴니세인은 세 가지 팔찌를 차고 다닌다. 그중 두 번째 팔찌는 유독 악명이 높았다.

팔찌의 이름은 오르피앙페르

퀴니세인이 자랑하는 무구 중 하나였다. 강력한 원심력을 이용해 태산조차 분해할 수 있었다. 내부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원심력을 대부분의 존재들은 어떻게 막아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하고 피는 피대로, 살은 살대로 뼈는 뼈대로 분리되어 죽고 만다. 심지어 영혼조차도 그 신비한 원심력에 휘말리면 산산이 분해되어 버린다는 초월 병기.

꿀꺽.

극동 지역 지휘관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는 자신이 이 자리에서 즉결 처분을 당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퀴니세인은 평온한 어조로 물었다.

“고대신의 기운이 검출되었다고?”

지휘관은 얼른 자세를 바로잡고 답했다.

“네. 한반도 남단인 한라산에서 검출되었습니다. 두 가지 종류의 기운이었습니다. 하나는 우리 병사들의 흔적을 추적했고 하나는 단숨에 병사 여섯을 소멸시켰습니다.”

“재밌는 차원이야. 벌써 발견된 고대신의 흔적이 몇 갠지… 좋아. 그런데 백두산은 아예 흔적조차 읽을 수 없었다고?”

“예. 고대신의 힘도 아니고… 뭔가 강력한 권능이 작용했다는 것만 읽어 낼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퀴니세인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래서 범인은?”

“하준광이라는 자도 병사들을 살해했지만… 그 자의 강함은 고대신의 힘과는 무관합니다. 그래서 현재 가장 가능성 높은 용의자는 최치국입니다. 예전에 침투시킨 관측병들의 보고에서도 이름이 등장했던 인물이긴 하지만… 본래 그의 실력으로는 한라산에 파견된 우리 병사를 당해 낼 수 없어야 옳았습니다.”

“그래? 그자가 고대신의 힘을 가지고 있다……?”

“네. 자체 조사 결과 95퍼센트의 확률로 그렇습니다.”

퀴니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걔를 죽이고 고대신의 힘을 회수해. 그때까지 리트리안 대위, 모든 직책과 계급을 박탈한다.”

백의종군이었다. 엄격한 계급 사회인 아갈타에서는 특히나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극동 지역 지휘관, 리트리안 대위는 안도했다. 불명예스럽게 죽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었다. 적어도 명예를 회복할 기회는 얻을 수 있었으니까.

“싫어?”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딱 세 명. 너 따라간다는 애는 데려가도 좋다.”

“감사합니다!”

리트리안은 즉시 지휘관 휘장을 내려놓고 회의실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잠깐.”

퀴니세인이 그런 그에게 자신의 팔찌, 오르피앙페르를 꺼내 던졌다.

“항상 차고 있어라. 네가 죽일 수 없는 적을 죽일 수 있게 해 줄 거다. 무려 별의 영혼석을 뽑아 만든 무기니… 그 어떤 권능을 대적해도 밀리지 않을 거다.”

“가, 감사합니다!”

극동지역 지휘관은 발을 쿵쿵 두 번 구르고 반듯하게 차렷 자세를 취하는 아갈타식 경례를 마치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빠져나간 뒤 퀴니세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신의 부관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거 가져와 봐.”

“옛!”

부관이 가져온 것은 한 자루의 지구식 검이었다.

퀴니세인은 그 검을 묘한 눈빛으로 살펴보았다.

“그냥 길쭉하고 날카롭기만 한 무기라니… 정말 원시적이야. 어지간한 원시차원을 가도 박물관에나 모셔 놨을 이런 무기를 진짜로 쓰고 있다니.”

지구인들에게는 최상품의 명검이었겠지만, 퀴니세인의 눈에는 원시 부족의 무기처럼 투박하고 단순하기만 했다. 차라리 예술품이라면 모르겠지만… 이런 걸 정말 무기로 쓴단 말인가?

그가 자랑하는 오르피앙페르와 비교하면 레일건과 비파형 동검 수준의 말도 안 되는 문명 격차였다.

그러니 그가 이 지구식 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검의 디자인 때문이 아니었다.

퀴니세인은 검날을 손으로 쓸었다. 손가락으로 태애앵, 소리가 나도록 튕겨 보기도 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니까 미치겠는 거지. 무기는 이렇게 원시적인데 정작 재료로 쓴 금속에는 고대신의 힘이 담겨 있어.”

퀴니세인이 부관에게 물었다.

“이런 물건이 몇 개 더 있다고?”

“지금까지 열 한 점을 노획했습니다.”

“기가 막히는군.“

차원 10개를 뒤져야 하나 있을까 말까 한 고대신의 흔적이 심심하면 발견되는 세상.

심지어 이런 원시적인 기술로 고대신의 힘이 담긴 금속을 가공해 냈다.

‘정말 어떻게 한 거야? 유해에 넣고 담금질이라도 한 거야?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상한 문명이야.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퀴니세인은 검날을 자꾸만 쓸어 보았다.

혀로 입술 핥았다.

입에 자꾸만 침이 고였다.

“또 뭐가 얼마나 더 나올까? 빨리 샅샅이 한번 털어 보고 싶네.”

환하게 웃음 짓는 퀴니세인.

모여 있던 지휘관들은 그저 그의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이었다.

* * *

콰콰콰콰-

유해의 폭포.

하늘에서 떨어져서 땅을 뚫고 사라지는 폭포. 유령 같기도 하고, 유성우 같기도 하다. 지상에 있기에는 너무나 크고 위대한 존재감.

나는 오늘도 그 앞에서 넋을 잃었다. 늘 똑같은 의문에 사로잡혔다.

‘대체… 유해라는 건 뭘까?’

지금까지 [만상공감]으로도 읽어 내지 못한 존재는 셋이었다.

하나는 하준광. 너무나 강한 힘을 지니고 있어서 [만상공감]으로 꿰뚫어 볼 수가 없었다.

두 번째는 권승리. 너무나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힘을 지니고 있어서 보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가 바로 유해의 폭포였다. 이건… 정말 모르겠다. 권승리의 힘이 내가 풀 수 없는 난해한 수학 문제 같다면 유해의 폭포는 착시 현상과도 같았다. 본 것 같기는 한데 돌아서면 모르겠고, 다시 생각하면 말이 안 되고, 이렇게 보면 이렇게 보이고 저렇게 보면 저렇게 보이는… 자꾸 보면 어지럽고 훅, 빠져들 것만 같았다.

‘근데… 사실 별로 상관은 없어.’

그렇다. 유해의 폭포가 무엇이든지, 지금은 그 정체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 위대한 폭포가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 이 위대한 폭포 아래에 어떤 이들이 모여 있느냐, 그것 아니겠는가?

나는 신발 명장 송일 장인의 공방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저 왔습니다!”

“…….”

어……?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나는 큰 변화를 느꼈다. 송일 장인은 분명히 내 목소리를 들었다. 온 감각이 다른 데 집중되어서 들어도 못 듣는 그런 상태 말고, 제대로 내 목소리에 반응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기다리니 송일 장인의 대답이 들려왔다.

“어? 왔구만? 어서 오게.”

요 몇 달간 이런 적이 없었다.

두 번, 세 번 외치기 전에 대답이 돌아오다니? 어색했다. 그 덕분에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 완성됐구나!’

송일 장인과 인사를 나누고 그의 작업대를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와 다르게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영롱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신발이 한 켤레 놓여 있었다.

“와아아아…….”

세상에…….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을 뻔했다.

송일 장인이 내 눈치를 살피고는 씨익 웃었다.

“죽이지?”

네! 네! 죽입니다. 대체 무얼 만드신 겁니까?

“나는 자네가 더 신기해. 이 설계며 가공이며… 대체 어디서 뭔 짓을 했길래, 이런 게 만들어지는 건가? 난 솔직히 처음에 자네가 날 놀리는 줄 알았어… 근데 진짜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이야… 자네 외계인인가?”

말은 타박하는 듯했지만,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뿌듯함이 묻어 있었다. 그렇겠지. 뿌듯하겠지. 이런 말도 안 되는 걸작을 완성했는걸?

보통 작업이 아니었다. 유해의 폭포의 도움과 송일 장인의 예민한 손끝과 생산에 특화된 최상급 초능력으로도 확신할 수 없는 작업이었다.

이 신발의 설계를 도운 건 다름 아닌 케사리니 아몬. 그가 고급 인챈트를 위해 설계한 신발은 한 짝당 무려 108개의 부속으로 이루어졌다. 한 켤레면 216개나 되는 그의 부속 하나하나를 송일 장인에게 설명해 생산해야만 했다. 각각의 모양은 물론이고 부피, 무게, 밀도 등의 물성과 영력 전도율 등의 영성 하나하나까지도 세세하게 설명하고 바로잡아 주었다. 내 [만상공감]이 가진 정확한 감지 능력과 몇 마디 말만 하면 감을 착착 잡아 움직이던 송일 장인이 아니었다면, 이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는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수많은 실패가 있었다. 귀한 재료들을 아낌없이 소진했다. 중간에 데미안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실패하거나 현실에 타협해야 했을 것이다.

부속 하나를 만들면 그걸 아몬에게 가져가서 인챈트를 받고 그렇게 총 216개의 부속을 만들고 마침내 하나로 엮어 냈다.

그 위대한 여정이 이 한 켤레의 신발에 고스란히 담겼다.

내 떨리는 눈동자를 살피던 송일 장인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딸의 결혼을 허락해 주는 장인어른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계수의 걸음. 그렇게 부르게.”

“세계수의 걸음…….”

작업대 위에 놓인 신발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손에 닿는 감촉은 부드럽고 손에 올라간 무게는 공기를 올린 듯 가볍기만 했다.

그냥 봐도 훌륭한 물건이었다. 주 재료는 예전에 잔뜩 뜯어 두었던 휘오의 나뭇잎이었고, 거기에 새로 얻은 밤의 괴수 공야恐夜의 심장과 각종 소재들을 엮어 넣었다. 무려 200가지 넘는 재료들이 위화감 없이 어우러져 튼튼하고 가벼운 신발을 만들었다는 사실부터가 걸작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이것의 진가는 216개의 인챈트된 부속이 모여 만들어 낸 하나의 위대한 마법이었다.

케사리니 아몬은 그 마법을 이렇게 불렀다.

‘자유.’

자유. 그것의 구체적인 의미는 사람들마다 다를 것이다. 애초에 자유라는 단어 자체가 추상적인 개념이니까.

하지만 나는 이 마법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구현했다고 생각한다.

A냐 B냐의 선택지에서 어느 한 가지를 고르는 것? 그건 반쪽짜리 자유가 아닐까? 진정한 자유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아무리 모순적이라도!

말이 안 되지. 하지만 그 말이 안되는 걸 가능하게 하기에 ‘자유’가 위대한 마법이 되는 것이다.

그런 마법을 지닌 물건이 심지어 활활 타오르는 아우라까지 가졌다.

안 그래도 위대한 마법에 아우라까지 입혀졌으니… 내 [만상공감]으로 강화하면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까?

“신어 볼 건가?”

송일 장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세계수의 걸음을 착용했다. 내 발에 맞춰서 제작한 신발. 단지 이것을 신는 것만으로도 내 기량은 상승할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아몬의 마법 ‘자유’가 더해진다면?

‘그건 그냥 발걸음이 아니야. 지구 문명의 큰 도약이 될 거야!’

설계와 인챈트는 타키넷의 영능학을 빌렸지만, 제작은 철저히 지구에서 해낸 ‘메이드 인 어스.’ 최고의 장인이 몇 달을 달려들어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그 의미는 절대 작지 않았다. 지구의 기술로도, 차원 문명의 진보한 기술을 흉내 낼 수 있다는 첫 번째 증거.

‘이걸 성공한다면… 차원 강습 시스템을 카피하는 것도 결코 불가능하지 않아.’

이미 카피를 위한 기반은 만들어졌다.

최치국이 생포해 온 14명의 차원강습병이 있으면 차원강습 시스템의 설계도를 카피하는 건 문제도 아니었으니까.

이제 남은 것은 그 설계대로 물건을 만들어 줄 기술자.

그것도 기왕이면 물건에 아우라를 담을 수 있는 기술자.

나는 오늘 그 가능성을 보았다.

‘세계수의 걸음’을 만들었듯이… 이렇게 자꾸자꾸 고급 제작을 성공해 나가다 보면 차원 문명의 설계대로 물건을 제작할 수 있는 고급 기술자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지 않을까?

차원 강습 시스템 정도는 카피를 넘어 더 낫게 업그레이드시키는 날도 오지 않을까?

그렇기에 이 한 걸음은 인류의 위대한 도약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만상공감]을 극대화한 채, 한 걸음을 내디뎠다.

후우우웅-

내 눈앞에서 세상이 두 개로, 네 개로, 끝도 없이 갈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