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93화 (93/212)

10. 근거를 가져오시라구요

최치국은 회귀를 하며 대부분의 기억을 잊었다. 하지만 시간을 거스르는 격류 속에서도 잊을 수 없던 감각도 있었다.

자신의 애검 ‘수호’가 실낱같은 가능성을 뚫고 발록의 목을 베었을 때. 얇은 막 같은 것이 칼끝에 걸렸었다. 주르르 갈라지며 그 안에 가득 차 있던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실제로 가른 것은 발록의 살가죽이었고 터져 나온 것은 피와 살과 뼈였지만, 최치국은 그 얇은 막과 같았던 가죽을 칠흑 같은 밤으로, 그 안에서 터져 나온 것은 찬란한 빛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구원의 감각이었다.

이후 최치국의 삶은 그 감각을 뒤쫓는 나날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날처럼 무기의 끝에서 찬란한 빛을 느끼는 일은 다시는 없었다. 기껏해야 가로등같이 허약한 빛을 느끼는 날이 대부분.

그러다가 만난 게 권승리였다. 그녀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손끝에선 매 순간마다 아침이 밝아 오는 것 같았다. 그 어떤 어둠도 손쉽게 찢어발기는 힘. 최치국은 거기에 자신의 남은 인생과 희망을 걸었다.

그랬는데…….

‘찬란했다…….’

최치국은 멍하니 방에 앉아 있었다. 침대에 누운 소시민의 머리맡이었다. 그의 눈이 소시민이 메고 다니는 가방, 탐貪을 흘깃 살폈다. 정확히는 그 안에 있을 ‘이성계의 활’에 대해 생각했다.

‘찬란했어…….’

이성계의 활을 처음 본 것도 아니었다. 지난번에도 봤었다.

그때도 무지막지하게 강했지만 그뿐이었다. 빛이라기 보다는 토네이도 같은 재해처럼 느껴졌었다. 그런 것은 구원이 아니다. 도리어 위협마저 느꼈다. 그랬기에 권승리가 소시민을 과대평가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분명 활을 꺼내던 그 순간까지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흉포한 재앙처럼 같았지만… 소시민이 화살을 얹고 시위를 당기는 그 순간, 최치국은 온 세상을 감싼 얇은 막 같은 것이 함께 당겨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마침내 시위를 놓는 순간 태양이 떠올랐다.

어둠을 헤치고 떠오르는 태양.

그 단단한 활대와 파르르 떨리는 시위. 공간을 찢어발기는 화살. 그 모든 것이 그저 눈부셨다.

이성계의 활이 가진 본연의 광채가 드러났다. 그걸 해낸 소시민이 위대하게 느껴졌다.

최치국은 리프 얀센에게 말을 걸었다. 리프 얀센은 모든 회귀자들과 항상 텔레파시를 연결해두고 있기에 언제든 호출이 가능했다.

“리프. 들려?”

- 응? 무슨 일이야?

“소시민 사령관 말이야.”

- 왜. 또 마음에 안 들어?

“…내가 잘못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 잘못 생각했다고? 뭐가? 역시 악마의 풀을 키우는 게 위험해 보여? 가만히 두면 안 될 거 같아?

“아니, 그 반대다.”

- 반대라고?

최치국은 침대에 누운 소시민을 내려보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정말… 아가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구원의 방법은 하나뿐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 너까지 왜 그래?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정색을 하는 리프 얀센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최치국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 * *

일어났을 때 느낀 것은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최치국이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뼈와 근육. 하지만 그 안에 들어찬 감각은 놀랄 만큼 예민하고 섬세하다. 소년들 특유의 산만함은 전혀 없이 오래 수행한 고승처럼, 산처럼, 하늘처럼 고요하게 세상을 주시하는 감각. 이게 인생 2회 차 영웅이 세상을 느끼는 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감각을 느끼는 즉시,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주먹을 날렸다.

뻐어어억!

어? 맞았다고?

내가 눈을 뜬 것, 몸을 일으키는 것, 자신을 향해 적대감을 뿌리며 주먹을 날리는 것. 최치국은 그 모든 것을 느끼고 있었으면서도 군말 없이 자신의 뺨을 내주었다.

그리고는 내게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말했다.

“…마족 토벌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과 존중이 가득 담긴 그 말 앞에서 나는 그만 맥이 빠지고 말았다.

‘미친놈…….’

아까 휘오를 불태우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미친 듯한 분노가 치밀었었다. 그리고 그걸 참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가감 없는 분노를 보여 줘야 했다. 그래야 녀석들이 휘오를 두고 오판을 하지 않을 테니까. 놈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모든 세계수의 절멸.

그런 놈들이 휘오를 건드리지 않는 건, 단지 나와의 관계를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로서는 휘오를 건드리는 순간 전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더 명확하게 해 줄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메시지는 잘 전달이 되었는지 최치국은 한발 물러선 태도를 보였다.

마족들을 화살 한 대로 날려 버린 게 퍽이나 인상적이었는지, 전에는 보여 준 적 없는 극진한 태도마저 보여 주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정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유물까지 다루실 수 있는 분께서 왜 자꾸 이차원의 조악한 물건들을 탐내시는 것입니까?”

최치국은 또 금세 헛소리를 시작했다.

자기 딴에는 이걸 충언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이차원의 물건이 조악하다고요?”

“네. 유물을 써 보셨으니 아실 것 아닙니까? 지구의 물건이 훨씬 위대합니다.”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는 물건을 무슨.”

“사령관님께서는 다루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이거 안 보여요?”

나는 침상에 반쯤 누워 있는 내 자신을 가리켰다. 나를 가리키는 손가락 끝이 아직도 파르르 떨리고 있다.

최치국은 그런 내게 똑바로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지난번에는 훨씬 더 심하셨습니다. 앞으로 점점 더 잘 다루게 되실 겁니다. 이번의 그 한 수는… 정말 눈부셨습니다.”

뭔가 눈이 반짝반짝하고 태도는 진지하고. 이상으로 가득 찬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얼굴만 보면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눈앞의 이 소년은 사실 서울을 구한 장년의 영웅. 그런 자가 이렇게 맑은 눈으로 내게 아첨을 한다고 생각하면 영 거북하다.

이런 내 속내를 까맣게 모르는 최치국은 오늘 뭔가 작심을 했는지 팔까지 휘두르며 열정적으로 말을 쏟아냈다.

“유물뿐만이 아닙니다. 지구는 위대한 땅이고 우리에겐 위대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초능력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외차원의 잡기술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심오한 힘입니다. 모든 해답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밖에서 찾을 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갈고닦기만 하면 됩니다. 이미 다 가지고 있는데, 굳이 외차원의 강도들과 만날 통로를 남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보라. 이게 어딜 봐서 이제 17살이 되는 소년이 하는 말이란 말인가? 그는 훌륭한 위정척사의 표본을 보여 주고 있었다.

잠깐.

그런데.

흐음……?

그러니까 최치국이 하고 싶은 말은 지구인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외차원의 것보다 더 낫다 이건가? 그걸 내게 증명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이고?

그러고 보니 전에도 그런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권승리라고. 그때 그 친구는 나한테 지구의 위대함을 보여 준다면서 유해의 폭포와 유해의 마을을 소개해 주었다.

‘정말 큰 도움이 되었지…….’

사실상 유해의 마을에서 만든 시제품을 발판으로 타키넷에서의 신발 사업을 일으켰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줄곧 시큰둥하던 최치국이 내게 열의를 보이고 있었다. 내게 지구의 위대함을 설파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그가 얼마나 안달이 났는지는 손발 끝까지의 모든 감각이 ‘나’를 향하고 있는 최치국의 이 간절한 집중력이 [만상공감]으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건…….

‘기회 같은데?’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조금 삐뚜름하게. 최치국의 말을 못 믿겠다는 듯이.

“그거 증명할 수 있습니까?”

“증명이요?”

“네. 지금 말하는 거 솔직히 다 뇌피셜이잖습니까? 저는 물건을 만들고 쓰는 사람입니다. 좋은 물건을 만들 수만 있다면 지구든 외차원이든 알 바 아니에요. 그런데 보십시오. 마족들이 엄청난 아이템을 들고 날뛸 때, 지구의 능력자들은 속수무책 아닙니까? 벌써 사망자가 몇 명이죠? 10만 명? 아니, 그것도 벌써 예전 얘기지. 지금은 사망자 30만 명에 능력자도 2,500명은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구가 더 뛰어나다고요? 스스로 갈고닦으면 되지, 외부로 눈 돌릴 필요가 있다고요? 납득이 될 거 같습니까?”

내 반박을 들은 최치국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흥분한 모양이다.

“그게 당장은 좋아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독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근거가 뭐냐고요.”

“……!”

워후, 또 이글거린다. 최치국의 눈빛. 하지만 이젠 무섭지 않다. 나는 그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어디 할 말 있으면 해 보든가?

최치국은 씹어 뱉는 듯한 어투로 반박을 시작했다.

“딱 두 가지 근거를 대겠습니다. 첫째. 천고의 보물을 가진 자가 강도와 교류를 이어 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그 보물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문을 걸어 잠그고 낯선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유물이 있고 유해가 있으며 심지어 비정상적으로 많은 초능력자들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다른 차원에서는 흔한 일이 아닙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침략자들만 늘어날 뿐입니다.”

생각보다 사태를 꽤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절반짜리일 뿐이다. 우리가 가진 것들이 차원 문명의 관점에서 보아도 특이하고 특별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탓에 지구가 표적이 된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그는 나머지 반쪽은 보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가진 게 값진 것은 사실이지만 외차원의 문명들이 가진 것은 그 이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가진 보물들을 신주단지 모시듯 꽁꽁 감싸고 돌수록 새로운 것을 배울 기회는 멀어진다.

‘이래서야 외적의 침략이 두려워서 도로를 건설하지 않았던 조선과 다를 바가 없지.’

나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는 태도를 분명히 한 채 계속 물었다.

“그럼 두 번째 근거는 뭡니까?”

최치국은 자기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으며 답했다.

“이미 무혼권가와 광명기사단, 제13 성전, 말세의 탑, 보리수 등의 전 세계의 유수한 조직들의 공동 연구로 밝혀낸 사실입니다. 세계수는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힘을 주지만, 그 세계수가 힘을 사용하면 할수록, 성장하면 할수록… 우리 차원을 지켜 주고 있는 차원 격류는 점점 더 약해집니다. 다른 차원과 교류하면 할수록 우리와 그들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진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남는 방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모든 교류를 끊고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우리를 지키는 것!”

“…그런 연구를 했다고요?”

“네. 원하신다면 직접 해당 조직에 확인도 시켜 줄 수 있습니다.”

이거 봐라?

아마 저런 연구를 하긴 했을 거다. 하지만 이번 생이 아니라 지난 생에 했겠지.

그런데 확인도 가능하다라… 예기치 않게 아주 쏠쏠한 정보를 얻어 버렸다.

‘다른 회귀자들이 누군지 감이 딱 오네. 덕분에.’

대기사 군다르, 성녀 나타시아, 대마도사, 미르 존자… 모두 각 조직을 대표하는 영웅들이었다. 그들 모두와 같은 편이라면, 현생에서는 하지도 않은 연구를 했다고 우기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뭐, 이런 트릭 정도야 귀엽게 넘어가 준다고 쳐도, 최치국의 논리에는 여전히 치명적인 문제점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교류를 하지 않아도 차원 격류는 어차피 계속 약해지고 있던 거 아닙니까?”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물론, 차원 간의 교류가 차원격류를 더 약하게 만들기는 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차원격류는 점점 약해진다.

애초에 왜 이능력이 없던 지구에 갑자기 이능력이 생기고 던전이 생겨났겠는가? 차원격류가 약해지고 다른 차원 문명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은 이미 어떤 짓을 해도 막을 수가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하지만 내 반론에도 최치국은 눈에 이글거리는 불을 꺼뜨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독이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지구를 지켜 주는 차원격류를 되살리는 방법. 그건 지구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외차원의 잡기술에 의존할 게 아니라, 우리가 타고난 초능력을 계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명, 한 명이 충분한 힘을 갖추고, 충분한 양의 유물과 유해를 확보했을 때……! 그때 우리는 차원격류를 다시 흐르게 할 수 있습니다. 자꾸 밖으로 눈 돌릴 시간 따위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근거가 뭐냐고…….

정말 모르겠다. 최치국의 말을 듣다 보면 그럴 듯한 말과 사이비 교리 같은 이상한 미신이 두서없이 마구 뒤섞여 있는 것 같아서… 혼란하다, 혼란해.

회귀자인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중요한 정보를 애써 숨기는 걸까?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답답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점점 최치국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게 되었을 때, 최치국은 내가 생각도 못 했던 한마디를 꺼냈다.

“우리 능력자들이 만들어 내는 초능력. 지구인들의 역사와 염원이 담긴 유물들. 그 힘은 우리의 예단을 아득히 뛰어넘습니다. 함부로 규정짓지 마십시오! 그건… 시간조차 거꾸로 흐르게 할 수 있습니다! 분명 죽어 버린 차원격류도 분명 다시 흐르게 할 수 있습니다!”

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청동종이 왕왕 울린다.

시간도 거꾸로 흐르게 할 수 있다고?

언뜻 들으면 비유인가 싶은 말이지만,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이건 실제로 실현된 일이었다. 나와 최치국이 경험한 일.

회귀.

‘그럼… 정말로 차원격류도 다시 흐르게 할 수 있다고?’

모르겠다. 차원격류를 조작한다는 말은 타키넷에서조차 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시간을 조작한다는 말도 들어 본 적이 없기는 하다.

여전히 근거는 빈약했지만 내가 직접 겪은, 내가 아는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현상을 들고 나오자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이들이 정말 옳은 걸까?

머릿속이 아주 어지러웠지만 나는 애써 티를 내지 않고 감정을 감췄다.

‘몰라. 모르겠어. 모르겠을 땐, 일단 당장의 이득을 취하자.’

나는 삐딱한 자세를 풀지 않고 부정적인 말을 이어 갔다.

“하? 그렇게 잘난 초능력이 있어서 지금 30만 명씩 죽어 나가는 겁니까?”

내 비웃음에 최치국은 미간을 구겼다.

“인정하죠. 모두가 초능력을 제대로 다룰 수는 없습니다. 특정 수준까지는 힘들게 초능력을 갈고닦는 것보다는 그냥 아이템을 사용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결국 궁극에 다다르는 이는 사도를 걷지 않고 스스로를 단련한 이들뿐입니다.”

어깨를 펴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최치국.

좋아. 이제 빌드업은 끝냈다.

머리 아프니까 일단 받아 낼 것만 받아 내고 턴을 넘기자.

그렇게까지 생각한다면…….

“증명해 보시죠?”

“네?”

“증명해 달라고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마족들을 포획해 주시죠. 분명히 말합니다. 생포입니다. 산 채로 잡아서 내 앞으로 가져오세요.”

“…그게 무슨 증명이 됩니까?”

“증명이 되죠. 마족들의 장비는 기밀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폭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말한 것처럼 초능력에 대단한 잠재력이 있어서 세상의 법칙에까지 간섭할 수 있을 정도라면… 그 자폭을 막아 내고 놈들을 살려서 내 눈앞에 대령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요?”

최치국이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가 실소를 머금었다.

“하… 그러니 결국 이차원의 문물을 연구하시겠다는 거군요? 그걸 극구 반대하는 저희의 손을 빌려서라도?”

맞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최치국이 내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죠. 사죄의 의미로라도 한번 속아 드리겠습니다. 저희에게까지 부탁한 걸 보면 사령관님이 교류하고 있는 외계의 문물로도 자폭 기능을 해제하는 게 불가능한 모양인데… 아주 제대로 요리해서 사령관님 앞에 대령해 드리죠. 샘플량도 부족하지 않게 준비하겠습니다. 저희 서비스를 마음껏 즐기시고… 지구가 가진 잠재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 최치국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방문을 나섰다.

나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침대에 다시 누웠다.

최치국이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헤엄쳐 다녔다.

궁극에 이른 초능력. 충분한 숫자의 유물. 그것들이 모여서 차원격류를 다시 흐르게 한다? 그렇게 되면… 지구는 예전의 평화를 되찾게 되는 걸까?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건가?

지난생 평생을 다 바쳐서 꿈꿔 왔던 결말이 꽤나 그럴 듯한 근거를 가지고 제시되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직접 시간을 거스른 나였으니 덮어 놓고 부정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지구의 운명이 달린 그 심각한 생각이 채 10분을 넘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 대신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아갈타의 마족들이 입고 다니는 ‘차원 강습 시스템’이라는 전투 슈트였다.

그 영롱한 자태와 그 괴물 같은 출력과 기능…….

정말 그것들을 눈앞에 놓고 마음껏 뜯어 보고 실험해 볼 수 있게 되는 걸까? 솔직히 어떻게 그걸 가능하게 할지는 상상도 안 가지만… 최치국 정도 되는 사람이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나오면 정말 되는 게 아닐까?

만약 이게 잘만 된다면… 그러면 차원 강습 시스템을 카피할 수도 있지 않을까?

두근. 두근.

생각을 더해 갈수록 점점 더 심장의 박동이 거세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지구 멸망? 구원?

이젠 내겐 정말로 그런 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아니, 중요하긴 하지만…….

새로운 물건, 새로운 기술을 향한 내 설렘을 이길 정도는 아니다.

“빨리… 받아 보고 싶다.”

츄릅.

천정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입가로 주르르, 침이 떨어지는 줄도 모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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