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너 뭐라 그랬냐
제주도는 전설 속의 섬이었다.
지난 생에는 정말 평생 동안 제주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제주도엔 가 봤어?’ ‘못 가봤다고? 아쉽네…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는데.’ 전투를 끝내고 피와 황혼에 젖은 채 던전 연초를 피우고 있을 때면, 꼭 그렇게 감상에 빠지는 아저씨 아줌마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벌써 옛날에 화산 폭발로 멸망해 버린 섬을 이제 와서 어쩌자고…….’ 그때 나는 이미 멸망해 버린 섬보다 더 가슴 아프고 더 애절한… 현재 진행 중인 비극들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미 그 무게에 짓눌려 돌아 버릴 지경이었기에, 이미 멸망해 버린 섬에 대한 애상까지 그 위에 얹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내가 제주에 서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부대 단위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홀로 서서 바라보니 느낌이 또 다르다.
그래서 화이트 게이트를 넘어오는 순간, 잠시 넋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서울의 하늘빛과는 어딘가 달랐다. 신비한 색채와 안개를 머금고, 그 아래 늘어선 오름들이 보였다. 바람에서는 다른 냄새가 났고, 나무들은 원시림처럼 크고 울창했다.
휘오도 나와 같은 걸 느꼈는지 가지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여긴 냄새도 조아아.]
그러네.
가슴이 간질간질하다.
‘지난번엔 이런 섬이 멸망을 했던 거였구나.’
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사라지고, 대신에 치솟은 화산재로 한반도 전체에 겨울이 찾아왔구나. 그해, 몹시도 추었던 여름, 굶어 죽고 얼어 죽은 이들의 주검이 아직까지도 눈꺼풀에 잔상처럼 남았다.
그래서였다.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권승리의 연락을 받고 제주도로 바로 날아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 최치국 씨가 제주도에서 마족과 싸우고 있다고요?
- 예. 저희도 지원군을 파견했지만, 마족들도 계속 증원되고 있고… 무엇보다 워낙 게릴라식으로 나오는 바람에 토벌이 너무 어려워요.
- 아… 마족 탐색을 도와 달라는 건가요?
- 아뇨. 탐색 자체는 최치국 씨가 모종의 방법으로 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하루에 한 번만 돼서요.
- …그럼 찾아내도 이기기가 어려워서 증원을 바라시는 건가요?
- 그것도 아니에요. 놈들이 상대가 안된다는 걸 알고 귀신같이 도망다녀서 그래요. 여러 가지 이능력들을 사용하는 탓에 잡기가 어려운 모양이에요.
- 아아, 그래서 숨으면 다시 내일을 기약해야 하고요? 탐색을 하루에 한 번만 할 수 있으니까?
- 맞아요. 그래서 놈들이 도망치기 전에 단숨에 녹일 화력이 필요합니다.
- …이성계의 활을 염두에 두신 거군요.
- 네.
- 음… 그런데 지금 아시다시피 제 관할 지역도 난리라서…….
- 알고 있어요. 하지만 꼭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어째서죠?
- …놈들이 한라산을 분화시키려고 하고 있어요. 계속된 추격으로 많이 지연시켰지만… 이대로라면 곧입니다.
권승리는 주저하다가 말을 꺼냈다. 내가 화산 분화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믿을지 안 믿을지 확신이 없는 듯한 말투였다.
하긴.
만약 내가 아닌 하준광에게 화산 이야기를 털어놓았으면 하준광은 대번 눈을 가늘게 뜨고 추궁했을 것이다. ‘근거는?’ 그는 이 대한민국에 자신보다 더 뛰어난 정보력을 가진 존재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불쾌해할 것이다. 그리고 개수작을 부리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할 것이다. 그를 움직이려면 객관적 증거가 필요한데 그런 게 있을 리가. 회귀했다고 밝힐 수도 없는 거고.
하지만.
하지만 나는 달랐다. 한라산분화 그 다섯 글자를 듣는 순간 누가 주먹으로 친 것처럼 가슴이 아파 왔다.
‘바보같이··· 왜 이걸 잊고 있었지?’
뒤통수도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이 멍청이. 아갈타가 빠르게 침공을 했으니 화산 분화도 더 빨라질 수 있다고 예측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물론, 변명거리는 있었다. 지난 생의 나는 참 하찮았다는 거. 화산이 폭발했던 그때, 나는 그저 분노와 슬픔에 잠겨, 그 배후에 어떤 움직임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통찰하지 않았다. 그냥 세상과 괴물과 아갈타에 대한 분노가 구분 없이 뒤섞여서 절규하기만 했었다는 거…….
그때는 화산 폭발을 전략의 관점에서 복기하지 않고 그저 개인적 트라우마로만 받아들였으니… 그걸 통해 배운 점도 없었고 따라서 다시 반복될 재앙을 예상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젠 그런 식으로 살면 안 되잖아.’
나는 더 이상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삼류 초능력자가 아니었다. 발생한 문제와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 슬픔과 분노 이외에, 그 원인을 통찰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뼈아프네…….’
아무리 영웅이었다곤 해도 같은 회귀자인데… 나보다도 어린 최치국과 권승리도 예상하고 움직였는데… 난 뭐냐? 지난 생의 한 맺힌 일을 다시 반복할 뻔했을 뿐만 아니라, 기껏 기술자를 영입하고 쏟아부은 투자의 성과마저 크게 깎아먹을 뻔했잖아?
아무래도 이번 일을 계기로 지난 생에 겪었던 일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후… 좋아. 반성은 계속 꾸준히 하기로 하고, 지금은 일단 검웅 씨 도우러 가 볼까?”
나는 탐을 뒤적여 나무상자를 꺼냈다. 나무상자 위로도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영력. 오랜만에 꺼내 본다.
이성계의 활이 담긴 상자를 품에 안고 최치국을 만나기로 한 장소를 향해 걸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좀 멀었다.
휘오가 게이트 여는 게 아직 좀 서툰지, 지정한 위치에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휘오야.”
[응?]
“언제쯤 지도에 표시한 위치에 정확하게 게이트를 열어 줄 거니?”
[시민은 도옹경 126.33도에 부우귀 33.56도가 어디인지 알아?]
어? 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거기가 어딘데?
[나도 모올라.]
모른다고?
[그걸 알면 거어기에 내려 줬겠지이. 거어기가 목적지였는데.]
아… 그러니까 너도 정확히 위치를 못 찾아서 적당히 내려 줬다는 거니?
[그래도오 시민보다는 낫다 내가아.]
어린 놈이 말도 참 잘했다. 따박따박.
* * *
최치국은 나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다시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빨리 오셨군요.”
“네. 제가 좀 빠르게 움직이죠.”
“세계수를 쓰셨습니까?”
어라? 이걸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세계수를 말살시키려고 했던 회귀자들. 최치국도 그 선봉에 서 있었다. 그래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상당히 서늘했다. 내게 유독 호의적인 권승리와는 온도차가 확연했다.
“네. 세계수 덕이죠. 무혼권가에서는 세계수 안 키웁니까?”
아무튼 직접적으로 말을 꺼냈으니 나도 직접적으로 물어봤다. 사실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무혼권가는커녕 지구 어디에도 세계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구에서 최초로 뿌리내린 세계수인 휘오가 확인해 준 내용이니 틀림없다. 현재 지구에 존재하는 세계수는 휘오와 내가 허묵에게 내어 줬던 세계수, 이렇게 두 그루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내를 떠보기 위해 물어보았다.
그리고 최치국은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그딴 악마의 풀은 키우지 않습니다.”
와오. 발언이 센데?
“악마의 풀이요?”
“네. 당장은 쓸모 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지구의 모든 이들을 위험하게 만들 풀쪼가리죠. 제가 당신이라면 당신의 그 세계수, 불태울 겁니다.”
뭐가 어쩌고 어째?
그냥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멱살을 잡고 최치국의 뺨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그 모든 행동은 무의식 중에 반사적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탁!
최치국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내 주먹을 붙잡은 뒤에야 나는 내가 주먹질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후끈한 분노는 오히려 그 뒤에 찾아왔다. 열기가 머리를 휘어 감는다. 온 세상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분노. 두 눈을 뜨고 주위를 보고 있지만, 그게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너… 뭐라고 지껄였냐?”
끼리리링-!
치링!
내 분노에 반응한 청하가 두둥실 떠올랐다. 악몽사슬도 독사처럼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몸을 흔들었다.
검웅? 하, 이 재수 없는 얼굴을 찢어발기고 싶었다.
나한테 뭐? 휘오를 불태우라고?
검웅 새끼는 얼어붙을 것 같은 눈동자로 나를 직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감정 앞세우지 말고 논리적으로 생각해. 갑자기 마족들이 왜 쳐들어왔을까? 왜 이들의 침공 속도가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빨라진 걸까? 외차원과의 교류가 필연적으로 놈들을 이곳에 끌어들이는 빌미와 명분이 될 수 있다. 그런 생각 안 들어? 소시민 사령관. 당신이야말로 이 재앙의 책임이 있을 수도 있다고.”
이 새끼가 웃기는 소리를 하네.
“너 안 되겠다. 오늘…….”
이를 악물며 품고 있던 상자를 떨구고 파도를 꺼내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최치국이 손을 뻗었다.
“가만! 조용히!”
최치국이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유해의 메아리다.
뭐, 뭐야. 그게 뭔데?
휘이이이이이-
그것은 강력한 영력을 품은 바람이었다. 돌연 나타난 바람이 최치국을 휘감고 소용돌이쳤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대체…….’
지나치게 강력한 바람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나도 모르게 바닥에 내려 두었던 이성계의 활을 집어들 정도로 압도적이고 위압적인 힘이 느껴졌다. 그 바람이 최치국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족… 남서쪽 10킬로미터 지점. 6명. 언제든 도주할 준비를 하며 화산 분화 작업을 가속화하는 중… 여섯?’
바람은 오직 최치국에게만 마족의 정보를 알려 줬지만, [만상공감]으로 그의 감각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나도 그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근데… 마족이 여섯이나 있어? 그런 전력을 최치국 하나랑 무혼권가 능력자 서른 명으로 여태 이기고 있었다고? 그게 말이 되나?’
파아아앗!
정보를 모두 전달한 바람이 최치국을 지나쳐 떠나가는 순간, 나와 최치국은 동시에 남서쪽을 바라보았다.
최치국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치잇!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닙니다! 따라오세요!”
그의 온몸에 바람이 깃들었다. 위력은 훨씬 약했지만 방금 느낀 강대한 바람과 꼭 닮은 힘이었다. 지구인의 원시적인 마누스가 아닌, 궁극에 가깝게 정련된 고차원적인 영력 덩어리. 그것은 차라리 영력이라기 보다는 초능력… 아니, 권능이라 불러야 옳은 그런 종류의 힘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최치국이 마족 여섯을 압도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동시에 이해할 수 없었다.
‘얘는 뭐 주인공인가? 뭘 했다고 뜬금없이 강해져 있는 건데?’
초능력을 하나 더 각성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뭐지? 진짜?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의문이 아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상자를 열었다. 상자가 열리는 순간 어마어마한 영력이 상자를 부술 듯이 분출되었다.
“자, 잠깐, 그건 무슨……!”
최치국이 화들짝 뒤로 물러섰다. 분명 이성계의 활에 대해 들어 봤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감에 화들짝 놀란 눈치다. 그럴 만도 하지. 나도 매번 이 뚜껑을 열 때마다 식은땀이 나니까.
크게 심호흡을 하고 이성계의 활을 잡았다.
“흐, 흐읍!”
활을 잡는 건 난데, 오히려 최치국이 잔뜩 긴장해서 헛숨을 들이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순간부터 나는 주변을 모두 잊고 이성계의 활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검은색 영기가 자욱하게 깔리며 글자를 만들어 냈다.
[성 위에 일흔 살을 쏘시어 일흔의 낯이 맞으매, 개가로 돌아오시니.]
[아기살 하나에 섬도적이 놀라니…….]
드래곤의 피를 발라 힘을 억누른 이성계의 활은 금방이로 피가 뚝뚝 배일 듯한 선홍색이었다. 나는 그것을 천천히 들어 올려 시위를 걸고 화살을 얹었다.
숨을 고르고 활깎지를 낀 엄지손가락으로 시위를 당겼다.
잠깐 사이에 물 흐르듯 진행된 동작.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내가 쌓아 온 모든 영력이 뿌리 채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아찔한 통증과 두려움이 온 몸을 두드렸지만 나는 견뎠다. 그저 견뎠다. 흔들리는 활 끝이 마족을 향해 정렬될 때까지.
그리고 마침내 화살촉이 내가 원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순간.
훅-!
손을 놓았다.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내 영혼이 화살을 따라 뽑혀 나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세상을 꿰뚫고 사라지는 화살의 꽁무니가 보였다.
그리고···….
“…어?”
최치국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은 그 이후였다.
꽈아아앙-!
콰콰콰콰콰콰-!
한라산이 통째로 흔들리는 듯했다. 폭심지를 중심으로 상승기류가 발생해 용오름이 일어났다. 모든 나무와 풀이 눕고 머리카락이 아프도록 바람이 불었다.
폭발한 영력으로 인해 제주의 하늘 가득 오로라와 같은 서광이 일렁였다.
“후우… 시발, 죽겠네…….”
내가 한숨을 내뱉고 이성계의 활을 정리해 상자에 넣어 봉인하고 다시 탐 속으로 집어넣을 때까지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뒤늦게 정찰조 한 명이 뛰어오며 외치는 게 보였다.
“소멸! 마족 여섯의 소멸을 확인했습니다!”
그 순간, 최치국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슨 괴물을 보듯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시 청하와 파도를 꺼내 들어 그런 최치국을 겨눴다.
“됐지? 이제 방해꾼 없으니까 하던 얘기 마저 하자고.”
나는 분명 최치국을 존경했다.
그가 하는 일이라면 어지간한 것들을 다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금 한 말은 아무래도 끝장을 봐야 할 것 같다.
“X발 뭘 불태우라고?”
청하에 [안티소울]의 힘이 감돌고 영력을 머금은 파도가 투명하게 [유체화] 상태가 된다. 그걸 본 최치국이 입술을 꾹 깨무는 게 보였다.
‘이제 와서 사과한다고 안 봐준다. 찌른다……!’
근데… 어?
갑자기 최치국이 나를 피하며 옆으로 누웠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넘어가는 중인가?
아… X발.
이거 왜 이래?
빙글. 하고 온 세상이 뒤집혔다. 온몸에 맥이 탁 풀렸다. 아, 이거… 설마 영력 고갈? 이성계의 활 때문에?
으아아! 이게 뭐야! 야! 최치국! 너 딱 가만히 있어!
소리를 지르며 버둥거리려고 했지만 물속에 빠진 것처럼 모든 게 멀어지기만 했다. 내가 마지막에 본 건 최치국이 나를 받쳐 드는 모습이었다. 놈의 눈동자에는 혼란과 착잡함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그건 알 바 아니고, 놈을 때려야 하는데… 혼내 줘야 하는데…….
분하게도 눈앞은 점점 흐려져 갔다.
‘너, 너… 딱 기다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