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악마라는 이름
전쟁은 보급이다.
도구에 의지하는 짐승들조차도 큰 다툼을 하기 전에는 든든히 먹는다.
아갈타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나는 타키넷을 다녀올 때마다 아갈타의 침공이 얼마나 임박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갯펄 시장의 비밀 상점가에선 아갈타의 보급 장교들이 자주 보였다. 놈들은 원시 차원인 지구를 얕봤는지 보안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덕분이었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구매했는지를 샅샅이 알아낼 수 있었다.
지난번에 캐스터를 샀던 놈들은 그 후에는 강렬한 차원 격류를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10~15인용 차원 강습함을 대량으로 사들였다.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소모품이었지만, 그 한 번의 성능이 좋은 물건이었다.
그 밖에 정신 간섭 장치, 저주 토템, 자동화 건축 장비…….
‘격이 떨어지는 인간들은 정신 간섭 장치로 제압하고 능력이 강한 인간은 저주 토템으로 힘을 못 쓰게 만들고, 자동화 건축 장비로는 자신들의 거점이 될 요새를 만들겠다는 거네.’
놈들이 사들이는 물건을 통해 놈들의 의도와 전략을 읽어 냈다.
그러던 와중에 놈들은 식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놈들이 준비하는 식량은 두 종류였다. 하나는 먹지 않고 지니고만 있어도 한 달간 저절로 몸에 영양을 공급해 주는 ‘배터리형 식량’. 궁극의 휴대성과 보존성을 자랑하는 것으로, 생김새도 딱 휴대폰에 들어가는 배터리처럼 생겼다. 탐문 끝에 아갈타인들이 그것을 12개들이 팩으로 6,000상자를 주문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갈타인들은 또 다른 종류의 식량도 준비했다. 이번엔 제대로 된 식사였다.
그들은 아갈타 차원에서 식재료를 공수해 와서 각종 아갈타식 음식을 만든 후에 보존 주문을 걸고, 공간 확장 주문이 걸린 포장지 속에 쑤셔 넣는 작업을 일주일에 걸쳐 진행했다.
덕분에 비밀 상점가에는 한동안 아갈타의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그 냄새는 빵을 바싹 마를 정도로 태웠을 때 나는 고소함과 비슷했지만, 버터와 설탕이 적어서 딱딱하기나 하지 별로 맛있을 것 같지는 않은 인상을 주는 그런 냄새였다.
하지만 그 냄새가 아갈타인들에게는 무척이나 그립고 정겹고 군침이 도는 모양이었다. 한국인들로 따지면 삼겹살에 김치찌개 같은 것일까?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확신했다.
‘이제 임박했다.’
놈들의 보급 상황과, 지난 생에 겪었던 전쟁의 양상을 조합해 보니 답이 나왔다.
이미 1인당 2년을 버틸 수 있는 배터리형 식량을 준비하고도 또 제대로 된 식사까지 준비하는 이유는 뻔했다.
‘놈들은 이번 침공을 장기 임무로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또 한 가지.
‘일차적으로는 각지로 흩어져 게릴라전으로 지구의 주요 시설을 마비시킬 작정인 거야.’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 후 그 혼란을 틈타 자신들의 거점을 요새화하고, 향후 대규모 침공을 위한 교두보를 만들 것이다.
그렇게 최소 6개월에서 1년은 이어질 장기간 게릴라 작전을 예상했기에 병사들의 향수병을 막아 줄 제대로 된 고향 음식들을 준비한 게 틀림없었다.
모차원이 아닌 타키넷에서 직접 요리를 한 것은, 차원 격류를 건너며 발생할 수 있는 신선도의 하락을 최소화하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고향의 맛을 느끼게 하려면 조금의 맛의 변화라도 방지하는 편이 나았을 테니까.
그렇기에 침공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보존 주문을 걸어 보관한다고 해도, 굳이 신선한 음식을 한두 달 묵히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이건 비단 나만의 판단이 아닌, 타키넷에서 만난 상인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다들 아갈타의 침략이 임박했다고 보고 어디에서나 관련한 주제들을 떠들어 댔다.
“그런데 상대가 어디라고?”
“몰라. 그냥 무슨 원시 차원이라고 하더라고.”
“원시 차원에 차원 강습병 3,000이라……. 잔혹하네.”
“그런데 또 소문에 의하면 그 원시 차원엔 유독 권능을 발현하는 존재가 많다던데?”
“권능? 정말? 음… 그러면 만만치 않겠는데?”
“에이, 그래도 차원 강습병이잖아. 그런 야만인들이 정규군을 어떻게 상대해? 장비의 급은 좀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차원 강습병으로서의 요건은 다 갖춘 것 같더만.”
“하긴…….”
“그나저나 아갈타도 참 대단한 발전 속도야. 4세기 전만 해도 원시 차원이었다더니, 벌써 차원 강습병을 운용하는 수준이잖아?”
“운이 좋았지. 침략자들이 닿기 전에 신사적인 문명과 교류를 먼저 시작했으니, 평화롭게 기술을 발전시켰지.”
“그렇게 꿀 빨면서 평화롭게 발전한 놈들이 정작 자신들은 주변 침략이나 하고…….”
“우리야 물건 많이 사 주니 좋지, 뭘.”
“그건 그래.”
상인들이 이렇게 떠들고 있으면 요즘 자주 다니며 안면을 익힌 나는 은근슬쩍 끼어들어서 질문을 던졌다.
“아, 그런데 차원 강습병이 그렇게 무서워요? 제가 좀 시골 출신이라……. 어떻길래 그러시죠?”
그리고 나는 그때 많은 대답을 들었다.
차원 강습병이란 정규군 중에서도 고도의 훈련을 받은 병종.
지구로 따지면 해병이다.
내가 이 말을 전해 줬을 때 서민서는 말했다.
“음… 비유가 막 그렇게 엄청나게 들리지는 않는데. 해병이래 봤자…….”
해병이 들으면 발끈할 만한 평가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국민개병제의 사회였기 때문에 서민서 역시 해병과도 함께 작전 수행을 해 본 경험이 있었고, 그렇기에 나오는 소리였다.
사실 해병 한 명 한 명의 무장은 대단한 게 없었다. 고도화된 현대전에서 소총이나 수류탄 같은 개인화기의 화력은 결국 보잘것없는 것이었으니까. 결국 남는 건 고도의 훈련을 받았다는 점뿐인데……. 그 정도로 나나 서민서 같은 능력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긴 무리였다.
그래서 내가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그 해병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나타난다면?”
“아……!”
그제야 서민서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말할 것도 없다. 활과 창 따위로 무장한 조선의 병사들은 현대식 화기로 무장한 해병을 당해 낼 수 없다. 당장 150년 전인 신미양요 때도 미군 3명이 전사하는 동안 조선군은 350명이 전사했다. 현대 해병과 임진왜란 조선군의 차이는 그보다 훨씬 더 클 것이다.
“그뿐만 아니야. 규모가 3,000명이라고. 한 명 한 명의 개인 무기뿐만 아니라 공용 무기도 있고 부대 단위의 지원 무기도 있겠지.”
쉽게 말해 소총에 수류탄뿐 아니라 기관단총과 박격포, 자주포와 다련장 로켓 시스템 같은 무지막지한 것들도 가지고 올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차원 문명 규모로 훨씬 광범위하고 강력할 것이다.
그런 막강한 놈들이 고도로 전략적인 움직임을 보인다면, 지구 전체가 전란에 휩싸이는 건 당연했다.
“에이… 그래도 3,000명밖에 안 되는데 지구 전체가? 지구상에 나라가 100개 정도 있다고 치면 한 나라당 30명밖에 배정 안 되는데요? 구석에 잘 숨어 있으면 그냥 지나가는 거 아니에요?”
또, 또. 서민서 이 녀석, 안일한 소리를 한다. 지난 생에는 사마귀 던전 따위에서 죽었던 주제에.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 녀석에게 말했다.
“헛된 희망은 버려. 자, 계속 수련한다. 불타는 뱀 동작 100회 실시!”
“에? 100회요?”
“복창 똑바로 안 하지! 150회 실시!”
“배, 백오십 회!”
“마음에 안 든다. 200회!”
“으악! 잠깐만요!”
“잠깐? 300회!”
“삼! 백! 회!”
“좋아. 150회 실시한다. 실시!”
“실시!”
불타는 뱀 동작은 서민서의 영력 수련을 위해 내가 직접 고안한 동작이었다. 결국 영력 수련은 영혼을 단련하는 것. 신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여 한 인간의 바닥을 드러내면, 그 바닥에는 영혼이 찰랑거리기 마련이었다.
이 동작은 서민서가 가장 힘들어할 수밖에 없는 동작으로 구성되었다. 단 100회만 해도 초능력자인 그녀가 탈진할 정도로 복잡하고 어렵다.
“하느아! 두우울! …여어얼!”
“영력 호흡 똑바로 안 하지! 다시 하나!”
“하느아! 두우울!”
“힘내라. 지금 흘린 땀방울이 전장에서 피 한 방울을 아껴 줄 거다.”
“시…에에엣!”
뭔가 셋이 아니라 다른 상스러운 소리를 하려고 했던 것 같지만, 봐주기로 했다. 저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만상공감]으로 선명히 느껴졌으니까. 제대로 된 영력 수련 방법을 찾지 못해서 만들어 낸 궁여지책. 이런 고문과 같은 과정을 어쨌거나 따라와 주는 서민서가 고마울 뿐이다.
우우웅-
서민서의 근육이 불타는 뱀처럼 배배 꼬이고 요동칠수록 그녀의 의지는 더욱 강하고 끈질기게 타올랐고, 그녀의 영력은 그 의지에 붙어서 점점 더 커지고 더 단단하게 응축되었다.
“하악, 하악, 후우, 후우… 휴……. 그래서, 선배 생각엔, 헤엑… 아갈타 놈들의 첫 번째 공격은 어떻게 후… 이뤄질 거 같아요?”
막간을 이용해 숨을 헐떡이며 묻는 서민서.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내 얼굴은 저절로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이 났으니까, 지난 생에 아갈타의 본격적인 침공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걸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까?
“국가 지도자들이 있는 시설에 타격이 가해지겠지. 청와대나 헌터 협회나 무혼 권가 같은 곳들…….”
“살벌하네요……. 미사일 같은 걸까요?”
미사일? 그럴 리가. 고도화된 차원 문명의 공격 체계는 단순한 물리적 분쇄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적들에게 트라우마를 심어 주고 저항의지를 완전히 분쇄해 버리는 심리적 파괴를 반드시 염두에 둔다.
“우리 지구인들의 병기와는 개념부터가 다를 거야. 염동력과 저주와 정신 간섭이 모두 조화를 이룬… 그래. 그날, 끔찍한 악몽이 펼쳐질 거야.”
지구인들은 아갈타의 병사들을 악마라고 불렀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들에게 악마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선명히 깨닫는 나날이 될 것이다.
아직 그걸 겪어 보지 못한 서민서는 그저 고개를 한 번 갸웃할 뿐이었다.
* * *
12월 24일.
그때 권승리는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밖은 절정에 이른 연말 분위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곳곳에 들어선 성탄절 장식들, 멀리서 아련히 들리는 캐럴, 따뜻한 옷을 입고 서로 마주 보며 걷는 커플들.
늘 바쁘게만 지내다가 문득 찾아온 여유에 창밖을 바라보았을 뿐인데……. 권승리는 어쩐지 속상해졌다. 그러고 보니 벌써 크리스마스 이브인가?
“망할 아갈타 놈들.”
호륵-
아갈타 놈들을 욕하며 따뜻한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부드러운 목 넘김을 따라 달고 진한 초콜릿 향기가 가득 피어오른다. 열어 둔 창문에서 들어오는 공기는 싸늘하지만, 방은 따뜻하고 몸을 감싼 캐시미어 스웨터는 부드럽고 벽난로는 아늑하다.
덕분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약간이나마 연말 느낌을 함께 즐기게 된 것 같아 뿌듯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아쉽다.
“올해 연말 정도는 평범하게 즐겨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회귀하기 전, 십 몇 년간을 전쟁터에서만 보냈던 권승리였다. 감성이 이미 완전히 말라 버린 최치국과 달리 권승리는 항상 지구의 평범한 연말이 그리웠다.
더도 덜도 말고 딱 반나절.
아침과 오후 내내 수련에 매진해도 좋으니 딱 오후 6시부터 새벽 1시까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거리를 걸으며 사람들 구경을 하고, 따뜻하고 맛난 음식을 먹고 싶었다. 그렇게 딱 7시간만 보내도 전생에서부터 쌓여 온 수십 년의 피로가 깨끗하게 날아갈 것만 같았다.
“소시민 씨 노는 데 껴서 같이 놀고 싶었는데…….”
비밀도 많고 친구도 많은 사람.
타키넷에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시간을 들여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는 사람.
연말을 계기로 좀 더 친해지고자 하는 계획도 가지고 있었는데…….
다 망했다.
모두 아갈타 때문이었다.
후르르륵-!
권승리는 컵에 남은 코코아를 홀랑 마셔 버리고 창 옆에 세워 둔 장비 꾸러미를 살폈다. 벌써 한 달째 어디를 가든 저 장비 꾸러미를 떨어뜨려 놓지 않았다. 점점 늘어난 아갈타의 정찰은 이제 언제 쳐들어와도 이상할 게 없는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부디 연말에 쳐들어오지 않기를 바랐지만… 적의 입장에서는 지금만큼 쳐들어오기 좋은 시기도 없을 것이다.
권승리는 아침부터 어떤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랬기에, 만안자의 다급한 통신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경보! 경보! 대규모 차원 이동을 감지! 불규칙 던전들이 다수 생성됩니다! 전 세계적으로 총 251개의 게이트 발견! 게이트로부터 공격이 감지됩니다. 공격 유형은 ‘CKM 복합체’로 추정! 대한민국에서는 청와대, 헌터 협회, 그리고 무혼 권가가 타깃팅되었습니다. 크윽……! 이 이상의 관측은 어렵습니다. 적이 관측 저항 아이템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CKM 복합체
저주(Curse) - 염동력(Psychokinesis) – 정신 간섭(Mind control) 복합체.
인류의 기술로는 온전히 막아 낼 수 없는 악몽 같은 공격이었다.
권승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당연히 그것부터 시작하겠지.’
지난 생에도 그랬으니까.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다.
권승리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벌써 예전에 등록해 두었던 경고 메시지가 청와대와 헌터 협회로 날아갔다.
내용은 단순했다.
- 외차원 문명의 침략입니다. 지금 즉시 이탈하여 안전한 장소로 피신하십시오.
당연히 곧장 답변이 돌아왔다.
- 저번에 말씀하셨던 그것이군요. 알겠습니다.
무혼 권가와 강력한 동맹을 유지하고 있는 대통령은 금방 협조했다. 하지만 하준광은 아니었다.
- 그게 무슨 개소리야?
사실상 무혼 권가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자 폭군인 하준광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방법 따위, 권승리에게는 없었다.
하지만 하준광에게는 별다른 경고가 필요 없기는 했다. 권승리는 짧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 에디슨의 전구 있지 않습니까? 그거 확인하고, 그 반경으로 잘 숨으십시오. 침략이니까.
- 그러니까 그게 무슨 개소… 응? 전구가?
전구가 발동했음을 느꼈는지 하준광이 입을 다물었다. 전구는 주변에 위협이 있을 때만 발동하니, 권승리의 말을 허투루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권승리는 하준광을 걱정하지 않았다. 반경 100미터 안의 침입을 완벽히 막아 주는 유물, 에디슨의 전구. 그게 하준광의 소유인 이상 협회의 핵심 시설은 안전할 터였으니까.
권승리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버지 권도식에게 연락을 보냈다.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자신을 믿어 주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 아버지.
- 아버지, 시작이에요.
- …알겠다. 무운을 빈다.
- 무운을 빌어요.
휘이이이-
이 모든 게 불규칙 게이트가 생성되고 20초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시간, 사람들은 여전히 연말 분위기에 취한 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마누스를 고도로 익힌 헌터들만이 희미한 육감으로 무언가를 느꼈을 뿐이다.
“응? 뭔가 지나갔나?”
그들이 하늘을 올려다본 그 순간.
은빛 안개와도 같은 그것들은 이미 하늘을 가로질러 청와대, 헌터 협회, 무혼 권가의 심장부를 차례로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