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함 칠까?
루드비히가의 가주, 로버트 루드비히는 자신의 침실로 불쑥 소환된 리디아 위트필드를 보고도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버튼을 눌러 비서실에 ‘방해 금지’를 표시하고, 천천히 일어나 장갑을 끼고 침상 머리맡에 항상 놓아두었던 상자의 덮개를 걷어 냈을 뿐이다.
덮개가 걷히자 유물 투탕카멘의 가면이 찬란한 빛을 드러냈다.
황금색 바탕에 화려하게 채색된 가면. 투탕카멘의 가면은 파라오의 안식을 위했던 물건이기에 절대적 정숙을 상징했다. 그래서 투탕카멘의 가면이 빛을 발하는 한, 그것이 놓인 방에서는 모든 종류의 신호가 차단되었고, 그 어떤 신비도 침습할 수 없었다.
이제 오늘 이곳에서 나누는 대화는 과학으로도, 신비로도 엿들을 수 없이 오로지 로버트 루드비히와 리디아 위트필드 사이에만 남겨질 것이다.
로버트 루드비히는 그제야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결국 자네가 날 찾아왔군. 14년 만인가?”
“그렇습니다.”
“오늘이 그날이었나?”
“네. 도련님이 지금이 그때라고 했습니다.”
“혹시 저번에 말한 그 소시민이라는 자가 시작이었나?”
“그렇습니다.”
“어때 보였지?”
로버트 루드비히의 질문에 리디아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편견을 모두 지우고 순수하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만을 기준으로 소시민을 평가했다.
“믿을 만했습니다.”
“…다행이군.”
로버트 루드비히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피로로 물든 얼굴을 한 번 쓸었다. 손바닥이 두 눈두덩을 덮었다가 뺨을 따라 한 번 쓸고 내려갔을 때,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피로가 묻어 있지 않았다.
로버트 루드비히는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말했다.
“그래도 오늘이 와서 다행이다. 데미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엿봤을 때는… 분명 한 번은 죽고 한 번은 사는 모순된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불안했다. 오늘이라는 ‘분기점’이 오지 않을까… 그게 두려웠지.”
“저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 첫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니, 이제부터가 중요하겠지요.”
“그래. 필요한 것은 ‘비밀스러우면서도 전폭적인 지원’이었지……. 변동 사항이 있나?”
“다른 지시는 없었습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알겠다. 데미안에게 이걸 전해라.”
로버트 루드비히는 투탕카멘의 가면이 놓인 상자 바닥을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유물의 힘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장갑을 끼고도 식은땀을 흘리며 조심스럽게 열쇠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 길이에 준할 정도로 길고 고풍스러운 열쇠였다.
로버트 루드비히가 열쇠를 리디아의 손바닥에 대고 ‘임시 사용자 승인.’이라고 중얼거리자, 그 커다란 열쇠가 리디아의 손바닥 속으로 스며들었다.
로버트가 말했다.
“유사 아공간 창고를 열 수 있는 열쇠다. 아무 벽에나 꽂으면 그 즉시 비밀 창고를 열 수 있다. 용량은… 너희가 있는 대한민국의 모든 물류 센터를 합친 정도는 된다.”
리디아의 눈이 반짝였다. 말도 안 되는 크기의 비밀 창고였으니까. 분명, 유물에 준할 정도로 귀한 오파츠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용량이 큰 대신 일반적인 아공간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일단 공간이 안정되어 있는 상태에서만 발동한다. 그러니까 어떤 결계 내부에서나 [점멸] 등의 힘으로 인해 주변의 공간이 교란된 상태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또한 지구 밖에서도 사용이 불가능하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안에는 내가 평생 일구어 낸 비밀스러운 부富가 모두 들어 있다. 조금 과장을 더한다면 우리 가문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 안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종류도 다양하고 수량도 넉넉하다. 데미안에게 마음껏 쓰라고 전해라.”
“안 그래도 도련님께서 소시민에게 선언하셨습니다.”
“선언?”
“네. 루드비히의 자본을 보여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로버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친구를 기절초풍시킬 정도는 될 거다.”
“네. 지켜보십시오. 도련님이 소시민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놀라게 하는 그날까지, 제가 똑바로 지켜 내겠습니다.”
로버트 루드비히는 전의를 불태우는 리디아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변했구나.”
“네?”
“14년 전에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냉혹했는데… 지금 네 모습은 꼭 제 동생을 지키려는 누이 같아. 이제 좀 사람 같구나.”
리디아의 뺨이 당황으로 붉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도련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책망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기쁘다. 데미안의 비밀을 알고 있으면서, 녀석이 자라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네가 아니냐. 어쩌면 데미안에겐 이 못난 아비보다 네가 더 부모처럼 느껴질 것이다. 네가 데미안을 아껴 주는 것 같아 고맙구나.”
리디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로버트는 그런 리디아를 복잡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더 몇 마디를 해 주고 싶어서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로버트는 결국 고개를 한 번 젓고 마지막 용건을 꺼냈다.
“그럼 이제 하나가 남았군……. 준비되었나?”
리디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준비되었습니다.”
로버트는 리디아의 눈을 보았다. 리디아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오히려 그 눈빛에 흔들린 건 로버트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로버트는 입술을 꾹 깨물어 흘러넘치려는 감상을 억누르고 말했다.
“리디아 위트필드. 현 시간부로 네게 주어졌던 제어 시스템의 해제를 명한다.”
“리디아 위트필드. 명을 받듭니다.”
리디아가 왼손을 털었다. 고리 하나가 땅에 떨어졌다.
쿵!
대체 저 가는 팔이 어떻게 이렇게 무거운 것을 차고 있었을까? 고작 팔찌 하나일 뿐인데 방 전체가 들썩일 정도의 무게였다.
스으으으-
고리가 풀린 리디아의 왼손에서 새하얀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쿵! 쿵! 쿵!
곧이어 리디아의 오른팔과 양쪽 다리에서도 각각 고리가 하나씩 떨어졌다. 이제 냉기는 리디아의 전신을 감쌌다. 그녀의 은색 머리칼이 겨울 하늘처럼 투명하고 푸르게 물들었다.
으드득. 으드득.
그녀가 스트레칭을 할 때마다, 스파크가 튀고 그녀의 몸에 새겨져 있던 보이지 않는 마법진들이 반짝이는 빛을 내뿜으며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후우우…….”
리디아 위트필드가 하얀 숨을 내뱉었다. 쭈글쭈글하던 풍선에 바람이 들어가는 것처럼, 덤덤하던 그녀의 표정에 밝은 에너지와 자신감이 가득 들어찼다.
그녀의 존재감과 영력이 끝을 모르고 팽창하기 시작했다. 초능력과 마누스가 뒤섞인 그녀의 압도적인 힘이 방 전체의 풍경을 일그러뜨렸다.
우우우웅-
자신이 있는 방에서 모든 신비를 억누른다는 투탕카멘의 가면이 리디아의 힘을 당해 내지 못하고 파르르 떨리고 있다.
‘엄청나다……. 과연 지금의 리디아를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이 지구상에 있긴 한 걸까?’
자신이 거두고 길러 낸 괴물을 바라보며 로버트 루드비히는 침음을 삼켰다.
무력적인 면에서는 당초의 목표치를 뛰어넘는,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그 모습. 하지만 로버트는 그 모습에 마음껏 기뻐할 수가 없었다. 미안했기 때문이다. 가슴 한 켠이 아플 정도로.
그가 리디아에게 말했다.
“…결말은 알고 있겠지?”
리디아는 그저 웃었다.
“물론입니다, 가주님.”
로버트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미안하다.”
“아뇨. 제가 원해서 하는 일입니다. 오히려… 기쁩니다.”
오히려 기쁘다. 그 말이 되돌아왔다. ‘진심으로 데미안을 아껴 주는구나.’ 로버트는 생각했다. 미안하다는 말이 맞지 않다 하니, 그럼 무어라 말할까……. 14년 전부터 기약 없는 임무를 지금껏 충실히 수행했고, 이제 오늘 이후로는 마지막 순간까지 영영 보지 못할 이 충직한 아이에게 무어라 말해야 할까? 역시 고맙다고 말해야 할까? 하지만 리디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행여나 치하의 말씀을 하신다면, 그 말은 도련님에게 듣고 싶습니다.”
그녀가 웃었다. 팔을 사선으로 내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신사의 인사법이었지만, 리디아의 길쭉한 팔다리와 어울려서 멋들어진 포즈가 되었다.
“리디아 위트필드. 목숨을 다해 도련님을 지키겠습니다.”
고양이과 맹수의 그것처럼 흉포하며 자존심 강한, 하지만 다정한 구석도 있는, 그런 예쁘고 강한 얼굴로 리디아가 말했다.
로버트 루드비히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과 거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아주 깊고 느리게.
* * *
웅장한 집무실.
화려한 조각은 없지만 값비싼 메탈과 목재의 질감을 살려 고급스러우면서도 현대적으로 꾸며진 집무실이었다.
그 한복판에서 최고급 던전 나파가죽 의자에 기대앉은 하준광은 인상을 팍! 찌푸리고 있었다.
“기분이 더러워.”
그가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펴자, 하준광의 비서는 재빨리 담배를 꺼내 하준광의 손가락에 찔러 넣었다.
퐁!
담배가 하준광의 손가락에 안착함과 동시에 비서는 다시 빛의 속도로 지포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였다. 한두 번 하는 일이 아닌지 하준광은 비서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손에 잡힌 담배를 깊게 빨아들었다.
스으으읍-
후우우우-
담배는 숨 한 번에 반이 넘게 타들어 갔다. 하준광의 입에서 담배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내가 모르는 게 말이 돼? 뭔데 다들 이렇게 혈안이 되어서 무기를 사들이냐고?”
스으으읍! 푸후우!
단 두 모금 만에 장초 하나가 꽁초가 되었다. 하준광이 꽁초를 툭! 던지자 비서가 빠르게 손을 뻗어 꽁초를 잡았다. 초능력자가 아니고서는 보여 줄 수 없는 속도였다.
이어서 비서는 하준광의 손에 새 담배를 들려 주려 했지만, 하준광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얼른 담배를 집어넣고 대신 커다란 시가를 찔러 넣었다.
시가를 피우기 시작하자, 하준광은 이제 유황 연기를 뿜어내는 지옥의 짐승처럼 보였다.
마침내 하준광이 비서를 보며 물었다.
“무혼 권가가 무기를 가장 많이 사들였다고?”
“그렇습니다.”
“진짜 나랑 한판 하겠다는 거야, 뭐야?”
“그런데 갑작스러운 무기 매입은 세계적인 현상이라서… 뭐라 확신하기 애매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미치겠다는 거지. 갑자기 모든 무력 집단이 우연히 같은 시기에 무기를 구하고 전력을 재정비한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 분명 이유가 있겠지. 근데 그 이유가 뭐냐는 거야. 그걸 어떻게 내가 모를 수가 있냐는 거야! 미치겠네. 이유도 모르고 따라서 무기만 사고 경계 태세만 내리고 있자니 이건 뭐…….”
푹푹 뿜어지는 담배 연기 사이로, 하준광의 두 눈에선 새빨간 귀화가 타올랐다. 두 눈에 타오르는 귀화는 하준광식 마누스의 특징이었다.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상황 탓에 인상만 뻑뻑 쓰고 있던 하준광이 문득 뭐가 생각났는지 미간을 풀었다. 오랜만에 착한 할아버지의 얼굴로 물었다.
“아, 그렇지. 그 소시민이는 요새 뭐 해? 유물 연구가 좀 뜸해진 거 같은데. 혹시 소시민이도 무기 입수에 열을 올리고 있나?”
그 질문에 비서는 얼른 대답했다.
“그게… 조금 묘합니다.”
“뭐가.”
“재래 무기 시장에서 용산구 2지역 인사의 움직임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응? 모두가 군비 경쟁을 하는 이 시점에, 혼자 손 놓고 있다고? 정부에서 지원을 안 해 주나?”
“그게… 분명 무언가 새로 사들이는 무기는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지역 내부에 심어 놓은 정보원들을 통해서는 새로운 장비가 계속 도입되고 있다고 합니다.”
“사는 무기가 없는데 새로운 무기가 도입이 돼? 직접 만드는 거야?”
“일부는 직접 만드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무기는 던전에서 가져온 물건들처럼 낯선 기술이 적용된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대체 어느 던전에서 가져왔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습니다.”
그 말에 하준광이 인상을 구겼다.
“혹시 요즘 데미안이 거기 드나들어?”
“아, 네. 매일 붙어 지낸다고 합니다.”
쾅!
하준광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망할! 감히 돈으로 애를 꼬시려고 들어! 가자!”
집무실 문을 박차고 나가는 하준광을 후다닥 따라가며 비서가 물었다.
“무엇을 준비할까요?”
“돈은 데미안만큼 없어도, 한국 땅에서 무력으로 우리를 따라올 집단은 없지. 협회 집행부 3팀을 데려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몰라도 일단 판에는 끼어들자고!”
“네!”
“흠… 꼬투리는 어떻게 잡아 보는 게 좋을까.”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하준광의 입가에 장난스러우면서도 흉포한 미소가 걸렸다.
* * *
데미안과 함께 타키넷을 다녀온 후, 모든 게 좋았다.
루드비히는 과연 루드비히! 데미안의 전폭적인 지원이 더해지자 구상만 해 오던 모든 일에 빠르게 탄력이 붙고 있었다. 거의 솔로 게임에서 자원 무한 치트키를 사용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빌어먹을 세상은 참 빌어먹게도 솔로 게임이 아니었다.
망할 다른 플레이어들이 자꾸 끼어든다.
나는 한숨을 쉬고 김세희 씨에게 되물었다.
“누가 찾아왔다고요?”
“하준광 협회장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갑자기 왜요?”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할 말? 뜬금없이? 제일 부담스러운 이유다. 가슴에 돌이 떡하니 얹힌 것 같았다.
“…잠시만 시간을 끌고 있…….”
내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쿵! 하고 연무장 위로 뭔가가 떨어졌다. 새로운 장비를 들고 훈련에 임하고 있던 용산구 2지역 방위군들이 깜짝 놀라 우르르 자빠졌다.
연무장 위에 떨어진 하얀 머리의 거대한 존재……. 당연히 하준광이었다. 그래. 이 늙은이가 그 잠깐을 기다려 줄 리가 없지.
하준광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여어 반갑네! 사령관!”
나는 그를 한 번 보고, 옆에 있는 데미안을 한 번 봤다. 데미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사실 그간 나는 유물 문제로 인해 무혼 권가와 하준광 그리고 루드비히, 세 명의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중립지대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데미안과 내가 동맹 관계를 형성하면서 이 균형은 크게 흔들렸다.
최대한 표를 안 내려고 했지만,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소극적으로만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이 눈치 빠른 늙은이가 낌새를 챘나 보네…….’
살기 넘치게 웃으며 나와 데미안을 번갈아 보며 다가오는 하준광. 저 눈빛은 그거였다. 어이, 순순히 나도 끼워 줘.
‘이걸 어쩐다.’
한국에서의 기반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준광을 대놓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준광을 데미안과 동등하게 대우해 줄 수도 없었다. 일단 그만큼 믿음이 가지 않는 인간이었으니까.
에라, 모르겠다. 일단은 인사를 하자.
나는 억지웃음을 만들어 냈다.
“협회장님 아니십니까? 여기에 어쩐 일이십니까?”
“하하! 왜? 내가 오면 안 될 곳에 왔나?”
“아뇨. 그런 말이 아니라, 바쁘신 몸인데 와 주신 게 놀라워서…….”
“어허, 섭섭하게 왜 그러나. 자네 만나는데 내가 바쁜 게 문제인가!”
“아이고, 영광입니다. 자자, 일단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래, 그래. 우리 얘기 좀 하세.”
“네. 경청하겠습니다.”
“뭐… 사실, 말 안 해도 알 거라고 생각해.”
“네?”
“응? 알고 있지 않나?”
“네? 무엇을… 말입니까?”
“어허… 자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나?”
“네?”
“어허! 이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 하나? 너무하구먼그래!”
어?
무언가 익숙한 논리 구조였다.
‘잠깐. 이거… 그거 아냐?’
생각할수록 분명했다.
‘우리 얘기 좀 해.’로 시작해서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를 거쳐, ‘그걸 말로 해야 알아? 정말 너무해!’로 이어진다는 전설의 그것?
‘삐졌어?’
물론 아니다.
하준광 같은 괴물탱이가 내가 데미안하고만 놀았다고 진짜 삐지고 서운해서 이럴 리는 없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어깃장이었다. 닥치고 자신을 끼워 주지 않으면 아주 진상을 떨어 버릴 거라는 선고.
그런데 이 어깃장… 누구 머리에서 나왔는지는 몰라도 진짜 진심 너무…….
‘역겹다.’
나도 모르게 하준광을 보는 두 눈에 불손함이 깃들 정도의 역겨움이었다.
아, 나… 대한민국 최강이고 뭐고…….
…함 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