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82화 (82/212)

18. 가이드

“허묵 씨, 갑시다.”

- 너, 이 사기꾼 자식아.

전화기 너머로 허묵의 분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왜요?”

- 이 사기꾼!

“그러니까 왜.”

- 네가 분명히 말했잖아.

“뭘요?”

- 오파츠들을 구할 수 있는 곳을 안내해 준다며!

“안내해 줬잖아요, 타키넷. 심지어 세계수의 씨앗도 틔워 줬는데, 이제 자력으로 타키넷에 오갈 수 있지 않아요?”

허묵이 가지고 있는 세계수는 휘오에게 종속된 상태였다. 휘오가 최초의 세계수인 이상 향후 우리 차원에서 싹을 틔우는 모든 세계수는 다 휘오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그래서 알고 있었다. 허묵은 지금까지 나 없이 총 여섯 차례나 타키넷을 오갔다. 잘만 오가고 있잖아?

- 그래! 갈 수 있지! 갔지! 그런데 가면 뭐 해!

“오파츠가 필요하면 가서 거래를 하든 빼앗든 하라고 했잖아요. 요령도 보여 줬구만.”

- 안 돼! 안 팔려! 못 사! 내가 가져가는 건 하나도 안 팔리고 뼈 빠지게 모은 타키온으로 뭐 하나 사도… 시발! 가져와서 보면 불량품이라고! 사기라고!

아, 저런.

쓰레기 거리가 좀 중고로운 평화 나라 같긴 하지.

나야 [만상공감]이 있고, 까막이는 내가 지정한 품목에서 내가 가르쳐 준 특징을 가진 물건만 사니까 그런 사기에 안 당하는 거고.

저런, 고생이 많았겠네.

“뺏어요 그럼.”

- 뭐, 뭐? 뺏으라고! 시발! 안 뺏기면 다행이다! 그 새끼들이 얼마나 살벌하게 ‘인사’해 오는지 알 거 아냐!

허묵이 강한 편이긴 하지만, 타키넷을 오가는 외차원 놈들도 보통은 아니지.

특히나 쓰레기 거리의 ‘인사’는 모퉁이에 숨어 있다가 기습을 가하는 걸 말한다. 불안정한 차원 때문에 영력을 사용할 수 없는 만큼, 첫 번째 기습에서 재미를 못 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지나치기 때문에 만나면 일단 찔러보는 행위를 인사라고 부른다.

그러니,

허묵의 목소리에선 사무친 한이 느껴졌다.

그간 많이 당했구나?

‘역시 그러네.’

사실 예상한 일이었다.

지난 생에도 그랬으니까.

향후 30년이 지나도 인류는 타키넷과 제대로 거래하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다. 뭐, 그때쯤 되면 많은 사람이 쓰레기 거리에서 어찌어찌 거래를 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심하게 밑지는 장사만 했다.

거래는 이런 식이었다. 지구인이 던전을 공략해 골동품들과 이상한 돌덩어리 몇 개 그리고 괴물의 사체를 찾아낸다. 그것들의 용도를 모르는 지구인은 그걸 타키넷에 팔고 금과 다이아몬드 그리고 무기를 만드는 데 쓰는 금속 등으로 바꿔 온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골동품과 이상한 돌덩어리가 영능학적으로 정말 가치 있는 물건들이고, 금이나 다이아몬드 같은 게 거기에 비하면 그냥 돌덩어리라는 식이었다.

지구인들이야 더 잘 알고 있고 잘 쓰는 물건으로 바꿔 간 것이지만, 차원 문명인들은 그런 지구인들을 뒤에서 비웃을 뿐이었다.

그들의 시각에서 지구인들의 거래는 인디언이 24달러에 맨해튼 전체를 팔아 치웠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수준인 것이다.

아니, 다른 걸 다 떠나서 상당수의 지구인은 타키온이 차원 간의 공용 화폐인지도 모를 정도로 무지했다. 사람들은 타키온을 세계수에 주는 비료 정도로만 알았다.

쓰레기 거리의 약삭빠른 이들이 지구인들에게 물물교환을 유도했고, 그게 하나의 관례처럼 자리를 잡은 탓이었다. 그때쯤에는 나도 내가 지구인인 것을 무던히도 숨겨야 했다. 지구인이라는 사실만 알면, 멀쩡하던 놈도 죽어라고 똥배짱을 부렸기 때문이다.

‘이걸 생각하면 영웅들이 쇄국정책을 추진하는 것도 조금은 이해가 가.’

그들은 이 상황을 문호 개방 앞에 선 조선이 아닌, 유럽에게 침략당한 아메리카 원주민에 이입했을지도 모른다. 막아 내지 못하면 몰살당하고 영영 긍지를 잃게 되는 그런 끔찍한 조우.

그러니 허묵이 성공했다면 오히려 놀랐을 것이다.

한 번도 문명과 접촉한 적 없는 아마존 오지의 원주민이 월 스트리트로 가서 성공한다면 그게 더 놀라운 일이지.

그러니까 허묵은 애초에 타키넷에 눈을 떴을 때, 미끼를 물어 버린 것이다. 분명 거대한 기회이지만, 그 기회는 내가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제 그걸 똑똑히 가르쳐 줄 때였다.

“허묵 씨, 거래가 어려워요?”

- 그래! 네놈 말 하나만 듣고 최치국 정보도 빼돌리고, 네놈 심부름도 해 줬는데 내가 얻은 건 하나도 없다고! 빌어먹을 사기꾼 자식!

“아… 그럼 어쩔 수 없네. 거래하는 방법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 뭐?

“아니, 타키넷에서 거래하는 법도 알려 주고 도와주고 그러려고 했는데… 나더러 사기꾼이라고 하니 어쩔 수가 없네요. 끊어요.”

- 아, 아니! 잠깐만… 이 새끼가……! 또 그렇게 여지를 남겨! 내가 또 넘어갈 줄 알아? 안 되겠다. 일단 보자! 너, 거기서 딱 기다려라! 오늘 담판을 짓자! 너, 네가 아무리 사령관이고 승승장구한다고 해도!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나를 그렇게 졸로 보면 안 되는 거야! 내가 허묵이야!

뚝!

허묵이 거칠게 전화를 끊었다.

하여튼 결국 온다는 소리였다. 와서 내가 하는 말을 들어 보고 뒤집어엎을지, 아니면 얌전해질지 선택하겠다는 결심으로 보였다.

근데… 허묵 씨. 과연 소란을 피울 배짱이 되려나?

* * *

허묵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래야지.

허묵의 눈동자가 내 옆을 힐끗거린다.

그래야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데미안 루드비히인데.

나는 슬쩍 그를 놀려 보았다.

“허묵 씨! 아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왜 그럽니까?”

오? 존댓말이 나온다?

“아니, 아까 뭐… 담판 지을 게 있다고…….”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의 대화에 흥미가 생겼는지 데미안이 궁금하단 눈빛으로 허묵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누구시죠? 처음 보는 얼굴인데…….”

허묵이 화들짝 놀라서 손사래를 쳤다.

“아… 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하청 업체입니다, 하청 업체.”

“하청 업체요?”

데미안이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였지만, 허묵이 스스로 나서서 별것 없는 존재임을 극구 강조하니 더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사이 허묵은 품고 있는 휘오의 가지를 통해 내게 말을 걸었다.

- 아니, 자꾸 왜 그래? 얌전히 말 듣는다니까?

- 사기꾼이라고 욕할 때는 언제고?

- 미안하다니까. 이제 말 잘 들을게. 내가 정말 잘못했어.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기본적으로 허묵은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다.

타키넷에서 거래하는 방법을 알려 준다고 해서 왔는데 내가 데미안과 함께 있다?

심지어 데미안과 함께 타키넷으로 넘어간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정도로 둔하지 않았다.

-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루드비히와 거래할 정도의 비밀을 나와 함께 해 주다니…….

그랬다. 루드비히라는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들의 한 걸음, 한 걸음에 거대한 돈이 오가고, 온갖 가치 있는 정보가 등장하고, 세계의 판세가 바뀐다.

그런데 루드비히가 걷는 그 길을 바로 옆에서 함께할 수 있다? 그건 지금 자신이 되는 판에 앉아 있다는 증거였다. 허묵이 갑자기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 하지만… 무섭다고. 나, 죽은 듯이 있을 테니까 나한테 신경 좀 안 쓰게 해 줘. 나, 야망 없어. 그냥 안전한 곳에서 잘 먹고 잘사는 정도면 된다고.

하지만 결국 허묵은 킬러 회사의 사장이었다. 법을 지키지 않는 대신 법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그런 부류. 그런 이들에게 ‘루드비히’와 같은 거대 집단은 그냥 걸어 다니는 재해나 다를 바 없었다.

어둠에 숨어 일을 도모하기에 먹고살 수 있는 존재인데, 상대는 작은 관심만으로도 자신이 어떤 팬티를 입었는지까지 탈탈 털어 버릴 수도 있는 태양과도 같은 권력자.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국회의원들은 그냥 형식적으로 시찰을 다니지만, 그 방문을 맞이하게 된 하급 부대들에는 큰 고통이 뒤따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때론 강력한 권력자의 관심이 오히려 후환이 되는 법.

때문에 허묵은 정말 부하1처럼 조용히 나를 수행했다. 아, 이것도 괜찮네.

아무튼 오늘의 나들이는 데미안에게 내 거래처를 알려 주기 위함이었고, 나는 현재 데미안과 허묵 그리고 서민서를 대동한 채 쓰레기 거리를 찾아왔다.

좁고 지저분한 골목길. 어디선가 들리는 환풍구 돌아가는 소리. 방음이 되지 않아 골목길까지 새어 나오는 이차원 존재들의 목소리.

“…불결하고 불길한 던전이군요.”

데미안의 목소리에는 긴장이 묻어났다. 아직도 이곳을 무슨 던전 정도로 알고 있는 데미안. 나는 쓰레기 거리를 관통해 지나가며, 타키넷이 무엇인지, 쓰레기 거리에서의 거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하고 직접 보여 주었다.

때마침 모퉁이를 돌 때, ‘인사’를 해 오는 놈이 하나 있었다. 녹색 슬라임처럼 거대한 점액질로 이루어진 몸이 특징적이었다. 다짜고짜 제 몸을 보자기처럼 펼치며 덮치길래 잽싸게 동료들을 밀어 버리고 나도 한 발자국 물러섰다.

칙! 치이익!

놈이 떨어뜨린 점액이 단단한 바닥을 녹이며 타올랐다.

“뭐, 뭡니까!”

데미안이 당황해서 무기를 빼 들었지만, 내가 말렸다.

점액질의 괴물은 우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지글지글 끓는 듯한 소리를 냈다. 놈이 하는 말은 타키넷의 고대 마법에 의해 번역되었다.

[안 통하네……. 지나간다…….]

“뭐, 뭐 저딴 게……!”

- 이 정도에 놀라다니 도련님이 아직 무르네. 이런 일은 하루에도 열 번씩은 당하는 건데…….

데미안이 황당함에 입을 뻐끔거리고, 허묵은 휘오의 가지를 통해 자조적으로 말했다.

하긴, 일상적인 ‘인사’이긴 했다. 하지만 이 인사를 그냥 인사로만 받아들이고 지나가니까 허묵이 안 되는 거다.

나는 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잊지 말아요. 이렇게 ‘인사’를 해 온다는 건 오히려 좋은 신호예요.”

“기습이 좋은 신호라고요?”

“네.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의미니까요.”

대충 설명을 해 주고 곧장 점액질을 불러 세웠다.

“야! 너, 배고프지?”

꾸물꾸물 지나가던 점액질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점액질이 길게 늘어나더니 뒤를 돌아본다. 음… 그런데 그쪽이 머리였냐? 애초에 머리라는 게 있기는 했던 건가?

녹색으로 번들거리는 점액질은 어딘가 간절해 보이는 몸짓을 보였다.

[우리는 아무거나 먹지… 않아…….]

나는 허묵을 돌아봤다.

“괴물 시체 하나만 줘 봐요.”

허묵은 잠깐 움찔했지만 곧 군소리 없이 자신의 아공간 가방을 뒤졌다. 그럼 그렇지. 킬러 회사의 사장이 가방에 시체 하나 안 넣고 다닐 리 없었다. 사람 시체든 괴물 시체든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해부하고,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고 연습하는 게 킬러들의 일상이었으니까.

마침내 허묵이 꺼낸 건 오크라고 불리는 흔한 괴물의 시체였다.

나는 오크의 시체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점액질은 시체를 향해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이건 먹지? 맛있게 먹을 거 같은데?”

[그, 극상품!]

점액질은 무척이나 굶주린 놈이었다. 아마 본인의 고향 차원에서는 점액질들이 너무 창궐을 해서 이렇게 제대로 된 시체는 맛볼 수 없게 된 지 오래된 게 아닐까? 그래서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키넷을 기웃거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너는 뭘 줄 수가 있어?”

[타키온은… 줄 수 없다. 차라리… 굶는다……. 우리… 안 먹어도 오래 산다…….]

오, 먹을 것의 유혹도 이겨 낼 정도로 정신력이 강한 녀석이었구나. 그렇게 안 생겨서는.

“그럼 타키온 말고 뭘 줄 수가 있는데?”

내 말에 점액질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꿀렁꿀렁 움직이더니 몸속에서 녹색 구슬을 하나 뱉어 냈다.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작은 구슬이었다.

[탱탱 튀어 다닐 수 있게 해 주는 마도구다. 난 더 좋은 게 있으니 그거 준다……. 좋은 물건은 아니지만, 시체 하나로 수지가 맞지는 않는다……. 그래도 바꾼다…….]

“콜.”

어차피 시험 삼아 보여 주는 거래치고 나쁘지 않았다. 나는 곧장 수락했다.

점액질 녀석은 그 자리에서 오크시체를 통째로 배 속에 넣은 채로 통통 튕겨서 떠나갔고, 나는 녹색 구슬을 서민서에게 던져 주었다. [점멸]이라는 초능력 덕에 기동전에 익숙한 서민서라면 탱탱볼처럼 튀어 다니면서 싸우는 것도 잘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아싸. 잘 쓸게요! 역시 선배를 따라다니면 뭐가 떨어진다니까.”

그렇게 좋은 물건도 아닌데 서민서는 좋아라 한다. 벌써 아이템을 사용한 것인지, 텀블링이라도 하는 것처럼 땅에서 통통 튀어 오르는 서민서였다. ‘이거, 다른 걸 다 떠나서 재밌는데?’ 하는 녀석을 보며 나는 픽 웃고는 다시 데미안을 돌아보았다.

“쓰레기 거리에서 거래는 이런 식으로 해요.”

그런데 데미안이 그런 나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빤히 바라본다.

“왜요? 제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아뇨……. 제가 예상한 것보다 천 배는 더 신기한 곳이구나 싶어서요.”

데미안은 새삼스럽다는 시선으로 쓰레기 거리의 퇴락하고 지저분하고 좁은 골목길을 돌아보았다.

하긴… 지금까지 인류가 마도구를 얻는 방법은 던전을 공략해서 괴물을 죽이고 빼앗거나 던전에 잠들어 있는 보물들을 노획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괴물과 ‘거래’를 통해 아이템을 획득한 것이었다.

데미안이 신선한 충격을 받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여기 또 한 명, 충격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 그, 그렇게 거래를 할 수 있었다고? 아… 아니, 근데 다른 걸 다 떠나서 너… 점액질이 배가 고픈 건 어떻게 알았어? 아니, 저 점액질이 괴물 시체를 먹는다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

쓰레기 거리에 올 때마다 헛물만 켰던 허묵이었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간단하고 쉬운 거래가 너무나 충격적이었던 나머지 눈동자를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뭐… 억울하면 너도 [만상공감]을 쓰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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