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어둠 속의 뼈
고수는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물론 기운이 넘치고 몸의 균형감도 뛰어나고 집중까지 잘되는 날이라면 무기가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다.
칼날이 무디면 더 세게 베면 되고 칼의 균형이 엉망이면 그걸 고려해서 잘 휘두르면 된다. 아무리 쓰레기 같은 칼을 쥐어도 백 번 베면 백 번을 똑같이 벨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육이 어묵처럼 흐늘흐늘해지고 몸이 어질어질하고, 머릿속에 게이트가 열린 것처럼 아프고 몽롱한 날에는 다르다.
충분한 힘이 들어갔다고 생각한 칼날이 겉돌고, 똑바로 휘둘렀다고 생각한 칼이 옆으로 빠질 것이다. 백 번을 휘두르면 백 번 다 내 맘과 다르게 칼이 논다.
그러므로.
좋은 무기란 언제 써도 좋지만, 역시 그 진가가 드러나는 건 무기를 다루는 사람의 체력이 한계에 달했을 때였다.
그게 내가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파악!
신발이 땅을 밀어내는 감각은 구렸다. 충격을 일정하게 분산시켜 주는 것도 아니고, 탱탱하게 추진력을 더해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벼운 것도 아니고.
가뜩이나 지친 몸이 천근만근 더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구렸다.
부조리하다.
‘명색이 내가 신발 팔아먹는 사람인데, 정작 내가 신는 신발은 이렇게 형편이 없냐…….’
이게 다 유해의 마을, 송일 장인 탓이었다. 맞춤 신발을 제작해 주기로 약속해 놓고 대체 며칠째 감감무소식인 건데?
스가가각-
아아… 하지만 신발 때문에 상했던 기분은 파도를 휘두르는 순간 깨끗하게 치유되었다.
좋은 칼이란 무엇인가?
너무나 예리해서 내가 뭘 베는지도 모르고 상대도 베였는지 모르는, 그런 게 좋은 칼일까?
그런 일방적인 기준을 세우면 파도는 좋은 칼이 될 수 없었다.
파도는 강력한 충격파를 머금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증폭시킬 수 있는 칼이었다. 베는 쪽의 손맛도 확실하고 베이는 쪽의 고통도 확실한, 그런 칼이었다. 어떻게 봐도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예리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도는 아주아주 훌륭한 칼이었다.
파도를 쥐고 있으면 베지 못할 게 없었으니까.
‘파도의 칼날은 예리함이 아니야. 파동이지. 파동으로 베는 거야.’
김용수 명장의 초능력인 [쇼크웨이브]를 기억하고 있는 운디늄 합금 칼날을 손잡이인 실프목이 감싸고 있다. 칼날에서 시작된 진동은 정령의 힘을 만나 또 다른 신비의 영역으로 확장, 강화됐다.
그 진동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파도의 칼날에 닿으면 그 주위로 날카로운 실금이 퍼져 나갔다. 물리적 실체는 물론이고 그 안에 담긴 혼魂마저도 가루로 만들 수 있는 강렬한 파동.
때문에 파도로 벨 때 느껴지는 손맛은 청하로 벨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대상을 뿔뿔이 흩어 버리는 듯한 바삭함!
바삭하고 얇은 과자는 귀퉁이만 찢어도 전체를 바사삭 쪼갤 수 있는 것처럼, 이 짧은 칼날로도 그 어떤 거대한 것도 죽일 수 있었다. 칼날은 짧아도 칼날이 품은 파동은 길고 길었으니까.
‘파동이 진짜 무서운 것은… 그것이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하며, 넘을 수 없는 것을 넘어간다는 점이야.’
파동의 위엄을 설명하기 위해 양자 하나가 두 가지 구멍을 모두 지나가는 이중 슬릿 실험이나, 막힌 벽을 넘어가 버리는 터널링 현상을 설명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내가 담에 가려 보이지 않는 사람을 향해 외치면 그 담장 너머에 있는 사람에게서 대답이 돌아온다.
파동은 유연하게 휘어 장애물을 뛰어넘는다. 공기나 물처럼 부정형의 사물조차 특정한 배열로 베어 낼 수 있다. 지금은 그 정도로 충분했다.
‘벨 수 있어.’
다가오고 있는 괴물의 정체.
나는 [만상공감]으로 그것의 속성을 완벽히 파악했다.
‘보이지 않는 어둠. 어지간한 공격은 모두 흡수하는 거대하고 유동적인 몸체. 그 몸체 속에 숨기고 있는 흉악한 뼈. 그 뼈를 타고 흐르는 흉포한 영력.’
그런데 다른 걸 다 떠나서 기이할 정도로 거대한 녀석이었다. 너무 거대하고 너무 강성해서 [만상공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영역 한참 멀리에 있어도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이 괴상한 놈이 얼마나 크고 강하든, 대체 정체가 무엇이든, 나는 파도로 녀석의 살을 바르고 뼈까지 자를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최치국에겐 무리겠지.’
그에겐 나처럼 놈의 뼈를 찾아낼 예민한 감각도 없고, 공격을 흡수하는 놈의 살점을 베어 낼 칼도 없을 테니까.
그게 내가 여기서 차이를 벌릴 수 있다고 확신한 이유였다.
“기척을 죽여.”
내가 속삭이는 순간 서민서와 강전구, 박민희가 투지를 억제하며 괴물들을 최소한의 힘으로만 상대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영력을 가르쳐 준다고 열심히 굴렸더니 이런 갑작스러운 지시에도 곧장 따라왔다.
데미안 루드비히 쪽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데미안이 주먹을 들어 올리는 순간, 그의 곁을 지키던 임훈이 빠르게 부하들을 통제했다.
거침없이 괴물들을 죽여 나가던 우리가 손을 아끼기 시작하자, 괴물들의 기세가 달라졌다.
끼긱, 끽.
키드드드득!
줄곧 귓가를 스치던 소름 끼치는 소리마저 더욱 크게 들려왔다. 갑자기 약해진 우리의 기세에 우리가 더 만만하고 약하다고 판단했는지, 차츰차츰 줄어들던 괴물의 숫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 소시민 사령관님! 무슨 생각입니까?
데미안 루드비히의 텔레파시는 무척 다급했다. 그럴 수밖에. 최치국을 겨우겨우 누르고 있던 우리였는데, 기척을 줄이라는 내 요구 탓에 갑자기 전세가 역전되고 말았다. 자칫하면 전세 역전이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위협을 느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무거운 짐을 들 때도 한 번 자세가 무너져서 무게에 짓눌리게 되면 힘을 발휘하기가 어려운 법.
눈앞에 괴물이 쌓이면 쌓일수록 놈들을 밀어내기란 점점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군말 않고 따라주다니…….
새삼 동료들과 데미안이 고마웠다. 인정받는다는 건 좋은 일이야.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질 만큼.
덕분에… 계획대로 되었다. 머리 꼭대기 위로 스멀스멀 다가오던 그 거대한 괴물이 방금 목표를 정한 것이다. 내가 의도했던 대로 놈의 감각은 우리 쪽이 아닌, 여전히 날뛰고 있는 최치국 쪽을 향해 오롯이 고정되었다.
다른 괴물들이 약자를 노릴 때, 이놈은 더 위협적인 자를 먼저 노린다.
하지만 놈의 크기는 [만상공감]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말이 안 되는 수준이라서, 아무리 놈이 최치국을 노려도 그 피해는 우리에게까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일행에게 경고했다.
“다들 긴장하고 있어요. 놀라지 말아요. 거대한 게 덮칠 겁니다. 피할 틈도 없이.”
- 그게 대체 무슨 소리…….
“지금입니다!”
여러 가지를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보면 알 거고 알면 알아서 대처해야 한다.
고오오오-
시작은 어떤 소리였다.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
우주만큼이나 거대한 기계장치가 천천히 돌아가면서 만드는 듯한 낮고 무거운 소리.
이어서 우리의 머리 위.
갈색 암벽으로 막혀 있지만, 도시 중앙에 떨어져 내리는 빛으로 인해 환하게 밝혀져 있던 그 돔 형태의 벽면이 서서히 반투명한 어둠에 잡아먹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릿하게 벽면의 일부를 잠식한 것처럼 보이던 어둠은 세상을 꿀꺽꿀꺽 삼켜 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시각각 그 영역을 넓히더니, 순식간에 최치국 일행이 있는 곳을 덮치고 이어서 우리가 있는 곳까지 덮어 버렸다.
역시나 피할 틈 따위는 없었다.
파도치는 날 동해 바다에 튜브를 두르고 떠 있으면 순식간에 덮쳐 오는 커다란 파도에 몸이 휩쓸려 버리듯이, 어둠이 순식간에 사위를 덮었다.
* * *
그 세계에는 낮과 밤이 있었다.
낮에게는 환하게 빛나는 몸과 조금은 까슬거리는 털이 있었다. 하루의 절반 동안은 낮이 세계를 그러안았다.
한편 밤의 몸은 어두웠고 털도 없이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하루의 나머지 절반은 밤이 세계를 품었다.
모든 생명을 지닌 이는 깨어서는 낮과 부대꼈다. 삶을 자신의 방식대로 살기 위해 치열한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가 밤이 낮과 교대를 하면 마음을 놓고 눈을 감았다. 밤에 몸을 맡긴 채 편안한 휴식을 취했다.
그런 세상이었다.
밤은 자신의 세계를 사랑했다.
태곳적부터 이어져 온 의무, 정해진 시간마다 낮과 교대하며 세상을 품어 주는 그 일이 단 한 순간도 지루해 본 적이 없었다.
밤새 세계를 품어 주고 낮과 교대하여 잠시 쉬고 오는 그 짧은 시간마다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다가 마침내 크게 변화하는 세계가 매 순간 경이로웠다. 이 세계가 어디까지 발전하고 변화할까? 상상만으로도 가슴의 달덩이가 터져 버릴 것처럼 설레고 기대되는 그런 나날이었다.
이토록 경이로운 세계가 내 품 안에서 휴식을 취한다니…….
어제와 같이 오늘도 설레고, 오늘과 같이 내일도 설레는 나날. 축복으로 가득했던 나날.
하지만 밤의 행복은 영원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 세계에 나타난 검은색 구멍이 모든 것을 망쳐 버린 탓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구멍에서 나온 회백색의 반투명하고 길쭉한, 흐물거리고 구부러지고 늘어나고, 낭창거리고 찐득하고 질깃하며 강력한,
역겹고 강력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 탓이었다.
그것이 세계를 뜯어 먹은 탓이었다.
밤은 신은 아니었지만, 세계의 탄생과 함께했을 만큼 오래 살았기에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 검은 구멍은 대항할 수 없는 재앙이라는 것을, 태초의 위대한 힘이 만들어 낸 이 세상 자체를 부정하고 뜯어 먹는… 생명과 세계의 정반대에 존재하는 무언가라는 사실을.
결코 존재하지 말아야 할 그것이 어째서 자신의 세계에 나타났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저 운이 나빴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낮과 밤이 힘을 합쳐도 상대할 수 없었던 그 공포스러운 존재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듯이 하루쯤 세상을 헤집고는 또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 존재가 뜯어 먹은 세계는 이전과 같지 않았다.
공간이 뒤틀렸다. 세계는 황금색의 피를 흘렸다. 공간이 뒤틀리는 곳마다 황금색 알갱이들이 쏟아져 나와 공간의 균열 사이를 떠다녔다.
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세계가 흘리는 황금색 피가, 그 황금색 알갱이들이 이 세계를 지탱하는 힘이라는 것을. 세계가 상처받은 몸을 스스로 치유하고자 한다는 것을.
덕분에 밤은 잠시 안심했었다.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치유되고 다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어리석게도 그런 착각을 했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다른 세계의 침략자들이 까맣게 달려들어서 세계의 피를 끝도 없이 뽑아 가 버린 다음이었다.
그 침략자들은 세계를 착취하며 이렇게 말했다.
“운이 좋다! 창조신의 꿈속을 헤매지 않고도 이렇게 많은 타키온을 얻다니!”
그렇게,
너무 많은 피를, 타키온을 잃어버린 세계는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붕괴되고 말았다. 밤도 그 거대했던 몸이 산산이 찢기고, 간신히 세계의 조각 하나를 품은 채 헤아릴 수도 없는 긴 세월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그날 이후로,
설렘으로 가득했던 밤의 나날은 분노와 절망으로 물들었다.
하루하루 성장하고 진보하던 세계의 주민들이었는데… 이제는 그들이 하루하루 변질되고 퇴화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세상을 쉬게 한다는 숭고한 의무와 사랑으로 부드럽고 윤택하던 밤의 몸 역시 날카롭고 단단한 뼈를 품게 되었다.
밤은 자신이 변하는 걸 느꼈다.
그게 역겨웠지만, 가끔씩은 달갑기도 했다.
차라리 괴물이 되고 싶었다. 더 끔찍한 괴물이 되어서 자신의 세계를 이렇게 만든 침략자들에게 똑같이 갚아 주고 싶었다.
그렇게 이를 갈던 밤의 세계에 또다시 침략자가 들어왔다.
그날 이후 처음으로 보는 침략자들이었다.
밤은 분노했다.
억겁의 세월 전부가 분노로 타올랐다.
밤은 보았다. 그 침략자들이 세계의 주민들을 도륙하는 모습을. 그 순간 밤은 몸을 던졌다. 과거 주민들을 부드럽게 감싸고 그들에게 편안한 어둠과 달콤한 휴식을 주었던 그 몸으로, 이제는 침략자들의 눈을 가리고, 팔다리를 짓누르고, 몸속에 자라난 이빨과 발톱으로 가루로 만들어 버리기 위해서!
카라라라랑!
까강! 까강!
하지만 눈에 거슬리던 조그마한 침략자는 밤의 이빨과 발톱을 모조리 쳐 냈다. 하지만 상관없다. 놈은 이미 밤의 품속에 있었고, 밤은 밤이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도 상처를 입지 않았으니까. 밤은 천천히 시간을 들여 놈을 잡아먹을 작정이었다.
따끔.
몸의 한구석에서 시작된 따끔한 통증이,
서커커커컥!
속살이 다 터져 나가는 고통으로 변해 밤을 덮쳐 오기 전까지는.
우우우우우웅-
밤은 울었다. 아주 거대한 고래가 우는 것처럼.
작은 것이 커다란 상처를 만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게 뭐지? 어떻게 된 거지?
“소, 소시민 사령관! 어디를 가는 겁니까?”
“저, 저기… 어디까지 가는 거야? 아까 말한 계획은 이게 아니었잖아!”
“어떻게 어둠을 벨 수 있는 거지?”
작은 침략자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것을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들도 알지 못하는 듯했다.
밤은 경악했다.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처음으로 느끼는 고통에 밤은 절규했다.
그리고 그 고통이 가슴에 품은 달덩이를 향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더욱더 큰 절규가 밤의 뇌리를 휩쓸었다.
아,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