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71화 (71/212)

7. 변질되고 있는 세계

영웅에게는 전설이 뒤따르는 법이다.

‘검웅劍雄 최치국’ 하면 떠오르는 전설은 그가 발록을 단신으로 꺾은 사건이었다.

서울이 소멸할 거라고 모두가 체념한 순간에 쟁취해 낸 불가능한 승리. 영웅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일화.

하지만 최치국을 보고 모두가 발록을 떠올리던 그때에도, 나는 발록 말고 다른 일화를 떠올렸다. 더 생생하고 실감나는 일화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내가 생각할 때는 발록을 꺾은 것만큼이나 위대했던 전투.

그날 나와 40명의 헌터는 위험지역 한복판에 고립되어 있었고, 본대에서는 지원군을 보내는 것에 대해 무척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여기! 홍수찬 의용대대입니다. 구원이 오긴 옵니까? 최초 구조 요청을 보낸 지 48시간이 지났습니다! 저희는 고립되어 있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너무 많아 자력으로 탈출할 수 없습니다.”

괴물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잃은 사람들이 보수도, 안전도 모두 포기한 채 오로지 괴물과의 싸움을 위해 들고일어난 의용군. 그때 나는 홍수찬 의용대대라는 전투 집단을 따라다니며 매일같이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전전했었다.

모두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사실 더 이상 다른 사람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싸우는 처절한 나날이었다.

- 조금 더 견뎌 주십시오. 지금 사방에서 지원 요청과 구조 요청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급한 순서대로 해결을 하다 보니 시간이 좀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고립된 지 48시간이 지났는데! 지금 저희가 급하지 않으면 누가 급하다는 겁니까!”

- 조금만 더 견뎌 주십시오. 우리 모두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네, 알겠습니다. 근데 글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홍수찬 대장의 목젖으로 침이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제대로 사용할 줄도 모르던 [만상공감]으로도 맥이 탁 끊어지는 그 감각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것 같았다.

그래도 그때는 나도 아직 30대 초반이었고, 분노에 미쳐 있을 때라서 죽음이 그렇게 쓸쓸하고 허무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보다는 ‘그래, 죽자! 근데 죽을 땐 죽더라도 괴물 새끼 귀때기라도 물어뜯어 줘야지!’ 하는 혈기가 솟구쳤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왜 막 팔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눈에서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는지 모르겠다.

최치국이 나타났던 게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전에 혼선이 있었던 건지 뭔지 모르겠다. 최치국을 향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전이 아주 시끄러웠다.

- 아니, 검웅 님! 지금 그쪽을 신경 쓸 때가 아닙니다!

- 20분 내로 포항에 지원 나가셔야 해요!

- 백 명을 구하려다가 만 명이 죽는 꼴을 보실 겁니까!

그리고 사방에서 괴물들이 몰려들었다.

괴물이 이렇게 많았나? 얼이 빠질 정도로 많은 괴물이 언덕을 넘어 몰려나왔다.

그런데 괴물들은 점점 몰려들다 못해 하나의 덩어리처럼 밀집되기 시작하더니, 거대한 파도처럼 이리저리 출렁거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 한복판에 있는 사람이 보였다. 젊었다. 20대 중후반? 그런 청년이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가십시오! 길을 열었으니 빨리 가십시오!”

- 검웅 님! 공간 능력자가 대기 중입니다. 10분 내로 여기 오셔야 합니다! 지금 상황이……!

“10분 내로 처리하고 갈 테니까 좀 닥쳐! 의용군을 버리고 가란 소리야?”

- ……!

그때 얼굴을 붉히며 소리치던 그 얼굴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는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검을 휘둘렀다.

그의 지휘를 따라 괴물들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출렁거렸다. ‘군대’ 규모의 적을 제어하는 신묘하기 짝이 없는 검술.

그게 바로 서울을 구하고 대한민국을 구한 영웅의 검이었다.

“빨리! 탈출하십시오!”

그렇게 우리는 살아남았고, 다행히 검웅도 시간 내에 포항으로 넘어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

그 후로 나는 그의 팬이 되었다.

나이를 쉰 살이나 먹다 보니, 중간중간 검웅에 대한 가십거리를 들었고, 그가 대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희생시켰다는 비난도 여러 번 접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검웅과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검웅이 정말 그랬더라도 나는 그를 믿는다고.

그 사람이 그럴 정도였다면 다 이유가 있었을 거다, 라고.

그는 물론 세계 최강의 영웅은 아니었다.

하지만 ‘영웅’ 하면 내 마음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언제나 최치국, 그 세 글자였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돌아와 다시 만난 그는, 내 기억 속에서처럼 여전히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이렇게까지 강했다고?”

얼마나 환하게 빛났는지, 우리 도련님이 충격을 먹을 정도였다.

키에에에!

끼에에에에엑!

사방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울음소리들.

이번 던전은 진입하자마자 그 종류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우선 이곳의 풍경은 아주 아름다웠다.

하늘에서 폭포처럼 빛이 쏟아져 내리는 화사한 지하 공동 속에 지어진 도시. 바닥과 벽면을 따라 지어진 정갈한 석조 건물들, 잘 구획된 밭과 과수원 그리고 숲……. 언뜻 보면 요정들이 살 것만 같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게 그 거주민들은 아주 끔찍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변질되고 있는 세계.’

멸망한 세계는 조각나서 세상을 표류한다. 그렇다면 그 조각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이것이다.

세계가 사멸하면 뿌리를 잃은 존재들은 서서히 변질된다.

그 변질 과정에서 대부분의 세계는 소멸하지만, 아주 가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변질을 끝내고 적응, 안정을 이루는 경우도 있었다. 바로 오크니 오우거니 하는 흔한 괴물 족속들이 바로 변질을 끝내고 온전한 괴물로 탈바꿈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차원에 침습해 그들 사이에 섞여 살거나, 토착종을 밀어내고 주류종을 차지하는 데 특화되었다. 세계 전체가 일종의 바이러스인 셈이다.

하지만 그 전에, 변질의 과정을 겪는 세계.

소멸과 존속의 경계에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잃고 뒤죽박죽되어 있는 세상.

그건 정말 몸서리쳐질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다.

‘차라리 변질이 끝난 세계가 낫지. 변질되고 있는 세계보다는.’

본래 백골만 남은 스켈레톤보다 살점이 붙어 있는 좀비가 더 혐오스러운 법이었으니까.

이 던전의 주민들은 몸소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키에엑!

께에엑!

아름다운 거리 위로 사지가 기괴하게 뒤틀리고 눈이 이상한 곳에 튀어나오고, 신체 비율이 제각각인 괴물들이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생전에 입었던 아름다운 옷은 넝마가 되어 대롱거리고, 거리마다 자기들끼리 캬악거리고 때로는 서로를 잡아먹는다.

한 마리만 보아도 속이 거북해질 괴물들이 숨어 있던 벌레가 튀어나오듯 끝도 없이 우수수, 거리를 가득 채우며 튀어나왔다.

세계에 존재하던 대부분의 것이 변질되어 괴물로 변하는 것인 만큼, 괴물의 수는 압도적으로 많았다.

‘한 마리 한 마리는 약하지만, 별별 기상천외한 괴물들이 중간중간 비수처럼 찔러 오는… 까다로운 던전이란 말이지.’

본래 돌연변이라는 것은 불안정하고 약한 법이었다. 변질 중인 괴물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놈들이 약하다고 여포에 빙의해서 날뛰다가는 중간중간 찔러 오는 특이하고 강력한 개체들에게 당하기 십상이었다.

돌연변이는 보통 약하지만, 그들에게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의외성 역시 있는 법이었으니까.

‘이거 아닌데?’ 하고 뒤늦게 몸을 빼려고 할 때는 이미 늦는다. 너무 많은 괴물에게 둘러싸여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태일 테니까.

그래서 변질 중인 세계를 탐사하는 정석은 며칠 정도 탐색 작업을 벌여 대략적인 괴물들의 분포와 놈들의 능력, 돌파 포인트와 후퇴 포인트 등을 잡아 놓고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치국은 냉큼 달려들었어.’

변질 중인 세계를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잘 알고 있을 최치국이, 푸른 게이트를 넘자마자는 ‘먼저 갑니다.’라는 얄미운 인사를 던지고 곧장 돌격을 감행했다.

우리도 그 뒤를 따라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련님의 입이 경악으로 벌어진 것이다.

“모든 자료의 예측이 틀렸어! 어떻게 저 나이에 이렇게까지 강할 수가……?”

도련님이야 목 졸린 비명을 내질렀지만, 사실 나는 조금 반가운 기분이었다.

거리에서 쏟아져 나온 온갖 괴물이 최치국 주위에서 파도치고 있었다. 최치국이 검을 오른쪽으로 쳐 내면 괴물 무리가 오른쪽으로 출렁이고, 최치국이 검을 올려 치면 괴물 무리가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그때 그게 이거였구나!’

홍수찬 의용대대 시절에 봤던 광경이었다. 그 광경을 다시 보자 똥꼬까지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와, 맞아! 이거였어!

‘그렇다니까! 최치국의 나인소드는 일대일에 특화된 게 아니라 그냥 강대한 힘과 맞서는 모든 상황에 유용한 거야! 상대가 거인이든 군대든 상관없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발록을 꺾은 최치국은 일대일에 특화되어 있는 거라고.

하지만 내가 본 최치국은 달랐다.

최치국은 일대일 싸움이든 홀로 군대를 감당하는 전투에서든, 모두 다 강했다.

지금 그 사실이 다시 한번 증명되고 있었다. 나는 신이 나서 데미안 도련님에게 최치국의 싸움을 설명해 주었다.

“저 사람 초능력은 [굴절]이에요. 신체 그리고 신체의 연장인 칼에 닿는 힘의 방향을 굴절시킬 수 있죠. 그걸 엄청난 센스로 활용하면 저렇게 끝도 없이 밀려드는 괴물 무리를 휩쓸고 지나가는 겁니다.”

최치국이 칼을 휘두르면 그 앞에는 제대로 서 있는 괴물들이 없었다. 이리 휘청, 저리 콰당탕.

소름이 돋는 건 눈앞의 적들만 치우고 끝이 아니라, 그렇게 중심을 잃은 괴물이 다른 괴물들과 부딪히고 진로를 방해하게 하면서 무리 전체를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포켓볼을 하나 쳐서 공 1,000개를 맞춰 버리면 이런 기분이 들까? 그 정교함에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아니, [만상공감]도 없는 양반이 저런 건 어떻게 하는 거야?

‘나도 [굴절] 같은 능력만 있으면 진짜 좋겠다…….’

너무 멋있어서 도전해 보고 싶어지는 그런 기술이었다.

내가 입을 헤 벌리고 최치국의 전투에 정신이 팔려 있자, 데미안 도련님이 소리를 질렀다.

“저기, 소 사령관! 지금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곧이어 서민서도 내게 소리를 질렀다.

“선배, 저기! 괴물들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요!”

끼에에에에!

꺄아캬아아!

어라?

서민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선 이제 막 밀려오고 있는 괴물들이 있었다.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자기들끼리 밀치고 짓밟으며 달려오던 괴물들이 문득 속도를 늦추더니, 오른쪽 왼쪽으로 잠시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고민은 잠시. 그들 중 대부분은 왼쪽으로 방향을 잡고 미친 듯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참고로 오른쪽에 있는 건 최치국의 원정대였고, 왼쪽에 자리 잡고 있는 건 데미안과 나의 원정대였다.

“왜! 왜 우리 쪽으로 달려드는데!”

서민서가 비명을 질렀다.

크드드드드!

끼에에에!

달려드는 괴물들의 발자국 소리는 무슨 산사태 소리처럼 들렸다.

“…아무래도 이곳의 괴물들은 적의 강약을 가늠해서 더 약한 쪽을 노리는 본능을 지니고 있는 모양입니다.”

데미안 도련님의 수하인 임훈의 분석이었다. 예전에 나를 마에스터 유진에게로 안내했던 임훈. 상당한 실력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분석 능력도 뛰어난 모양이다.

‘고블린처럼 눈치 빠른 괴물로 진화 중인 건가?’

세계가 변질에 적응하는 방식은 다양했다. 그런데 이곳은 아무래도 약한 쪽을 먼저 노리는 전략을 발전시키고 있던 모양이다.

‘아주 경쟁을 하라고 판을 깔아 주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룰이 명백한 게임이었다. 내가 최치국을 압도하면 최치국 쪽으로 더 많은 괴물이 쏠린다. 반대로 최치국이 나를 압도하면 우리 쪽으로 더 많은 괴물이 쏠린다.

더 강할수록 더 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갈 수 있고, 더 약할수록 더 많이 발목이 잡히는 구조.

흘깃 돌아보니 도련님의 얼굴이 초조하다 못해 창백해 보였다. 최치국보다 먼저 던전 코어를 정복해야 하는 그에게, 지금 상황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니 나는 얄궂은 생각이 들었다. 도련님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어떻게 보면 지금이 이 질문을 던지기 가장 좋은 타이밍 아닌가?’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곧바로 행동이 이어졌다.

나는 도련님의 거친 호흡을 끊으며 불쑥 질문을 던졌다.

“저기, 도련님.”

“네, 네?”

“이유나 좀 압시다.”

“지, 지금 무슨……. 그럴 때가…….”

“왜 꼭 직접 여기까지 와서 던전 코어를 먼저 정복해야 하는 겁니까? 당신은 루드비히의 직계잖아요?”

내 물음에 데미안 도련님은 어딘가를 찔리기라도 한 듯 흠칫, 어깨를 떨었다.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는 금세 동요를 감추고 대답했다.

“가문의 명령이에요.”

참으로 루드비히의 직계다운 처신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도련님이 내게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걸 깨달은 이상, 한 발 그 이상을 다가가야겠다.

“그러지 말고 자세히 얘기 좀 해 줘요. 저희 이제 좀 친하게 지낼 때도 된 거 같은데……. 제가 듣기로 현 가주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는 게 도련님 아니었나요? 이 상황은 뭡니까? 소문에는 첫째 도련님하고 무슨 문제가 있다던데.”

데미안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급박한 상황에서 이런 질문이나 받고 있는 상황이 짜증이 났겠지.

“개소리. 첫째 형님…은 저를… 무척 아낍니다. 그보다…….”

“어? 방금 망설인 거, 뭡니까?”

“안 망설였어요.”

“아닌데? 망설였는데……. 아니, 상식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데 이런 곳까지 들어올 리가 없잖습니까? 만약 정 아니라고 한다면 혹시 가주님과의 관계가 사실…….”

“아뇨! 아버지와는 관련 없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일단 지금은…….”

“에이, 저도 제가 어떤 싸움에 끼어들어 있는지는 알아야지요. 그럼 가주님도 아니고 첫째 도련님도 아니면, 누굽니까? 가모님?”

“아니……!”

데미안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말문이 막히는지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다 문득 그의 어깨가 축 처졌다.

어쩌면 너무 짜증이 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진솔한 속마음인지, 아니면 짜증 섞인 아무 말인지. 뭔가 알 수 없는 말이 갑자기 튀어나온 건.

가을바람처럼 스쳐 가는 목소리로 데미안 루드비히가 속삭였다.

“그런 말, 들어봤어요?”

“어떤 말이요?”

“루드비히 가문은 악마와 거래를 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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