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70화 (70/212)

6. 해 보지, 뭐

세계 최강의 세력이 어디인가?

누군가 묻는다면 대답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누구는 미국 연방 정부를 말할 것이고 또 누구는 유럽연합 초인 협회를 말할 수도 있다.

사실 알고 보면 중국 무맹이 최고라는 사람도 있고, 영국 왕실 기사단의 저력을 얕볼 수 없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약 전쟁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면 마도사 집단인 흑탑이라거나, 용병 집단 비타협선과 같은 신흥 세력은 물론이고 프리메이슨, 장미 기사회 같은 유서 깊은 비밀결사까지도 꼽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세력이 어딘가?’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모두 같았다.

루드비히 가문.

이들의 부는 단순히 돈으로 계산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어느 세력보다도 방대한 던전 자원과 아이템, 오파츠 그리고 유물을 소유한 집단이 바로 루드비히 가문이었다.

오죽하면 이런 말이 있었다.

‘루드비히 가문이 갖지 못한 것은 인류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물건뿐이다.’

루드비히는 비록 무력으로 그 이름을 떨치지는 않았지만, 그건 그들의 무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애초에 루드비히 가문이 힘자랑을 하는 일이 거의 없었던 탓이다.

그들은 영웅처럼 불가능한 싸움을 이겨 인류를 지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침략자가 되어 다른 인류를 수탈하지도 않았다.

그저 적당한 대가를 받고 이길 만한 싸움에 참가하고, 이해가 상충할 때에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무력을 이용해 적절한 협상과 타협을 이어 갈 뿐이었다.

루드비히에게 무력이란 하나의 협상 도구.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협상 도구를 지니고 있었다.

사실 루드비히 가문의 강성함은 이해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루드비히 가문이 본래 영국의 귀족 가문으로서 지니고 있던 막대한 부와 명예가 토대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루드비히 가문이 1997년의 대격변 이후 이룬 성공은 너무 지나쳤다.

일개 가문이 단 20년 만에 이루어 낸 초국가적인 성공.

이제 세간의 관심은 이 거대한 왕국을 누가 물려받을 것인가로 쏠려 있었다.

현재의 가문을 일궈 낸 루드비히가의 가주 로버트 루드비히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이미 가장 압도적인 실권을 쥐고 있는 건 이제 서른 살이 된 첫째, 자크 루드비히이고.

가주의 가장 압도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건 이제 열네 살이 된 넷째, 데미안 루드비히라고.

* * *

데미안 루드비히의 방.

사방으로 스파크가 튀고 백색광이 점멸했다. 루드비히 가문의 기밀 중 하나인 공간과 공간을 잇는 기술, 마누스 회랑의 발동이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데미안의 방에 깜빡깜빡 기나긴 회랑이 겹쳐지는가 싶더니, 회랑 속에서 데미안 루드비히가 걸어 나왔다. 몹시 피곤한 얼굴이었다.

- 오셨습니까, 도련님.

데미안이 복귀함과 동시에 리디아 위트필드의 텔레파시가 날아왔다. 몹시 기다렸는지 목소리에 반가움과 걱정이 잔뜩 묻어 있었다.

“어, 왔어. 오랜만의 가족 모임이라 피곤하네…….”

수신 호위인 리디아는 항상 오보스(OBOS, 오파츠 기반 궤도 정거장)에서 24시간 데미안을 지켜보았지만, 가족 모임에 참가하는 날만큼은 데미안을 지켜볼 수 없었다.

루드비히가는 비밀이 많고 폐쇄적인 집안이었다. 새로운 아이가 태어날 때조차도 모든 수행원을 물리고 가주가 홀로 아내의 출산을 도울 정도. 일 년에 한두 번 있는 가족 모임에서도 당연하다는 듯이 모든 수행원을 배제한 채 오로지 루드비히들끼리만 회합을 가졌다.

사실 수행원 입장에서는 어쩌다 한 번 있는 휴식 시간인 셈이었지만, 리디아는 그게 달갑기보다는 불안할 뿐이었다.

그녀가 모시는 넷째 도련님에게 가족 모임이란 결코 마음 편한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혹시… 첫째 도련님께서…….

“맞아. 그렇더라고. 한두 번 그런 것도 아닌데… 적응이 안 되네.”

데미안은 쓰게 웃으며 안락의자에 몸을 기댔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하얗게 질린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별거 아냐. 그냥 임무를 얻었어. 꼭 내가, 내 힘으로 해야 된다고 지랄 지랄을 하길래 한다고 했지.”

- 위험한 거 아닙니까?

“…위험하긴 하겠지만, 괜찮아. 리디아가 있잖아?”

- 애초에 도련님이 위험한 곳으로 내몰리는 것 자체가 저에겐 고통입니다.

“고마워. 하지만 걱정 마. 든든한 우군도 데려갈게.”

- 설마?

“그래. 물건 욕심 많아서 다루기 쉬운 사령관 하나 있잖아.”

- 그렇군요……. 기분 나쁜 작자지만, 확실히 쓸모는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니까.”

데미안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소파 위에서 점점 나른하게 늘어졌다.

하얗게 핏기가 빠져 있던 손끝도 점점 분홍색으로 혈색을 되찾았다.

- 편히 쉬십시오, 도련님.

작게 속삭이는 리디아 위트필드의 목소리에는 옅은 습기가 묻어났다.

* * *

“던전이요?”

“네.”

“유물 연구 때문이에요?”

“아뇨. 그저 루드비히의 부탁이에요. 유물은 가져가지 않을 거예요. 연구 팀도 없을 거고요.”

“죄송하지만 도련님, 제가 바빠서…….”

“전에 보니까 신발 장인들과 소재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던데.”

“네?”

“바쁘면 어쩔 수 없죠.”

“잠시, 잠깐만요.”

아니, 이 도련님이 왜 이렇게 성질이 급하실까.

“몇 명이나요? 어느 지역이죠?”

“멀리 가면 피차 피곤해질 테니… 아예 서부 드래곤힐동 공방 거리에 건물 하나를 샀습니다. 재야에 묻혀 있던 신발 장인들만 한 서른 명 정도 모집했어요. 마에스터들이 직접 평가했으니 실력은 다들 확실합니다. 입점 계약을 2년 맺었고, 그중 최초 세 달간 사령부 물량을 최우선적으로 수주하기로 했습니다. 아, 물론 그 세 달간의 공임은 루드비히가 부담합니다.”

솔깃한 제안이었다.

아니, 지나치게 좋은 제안이었다.

단순히 내 신발을 만들어 주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내 관할 구역인 서부 드래곤힐동 수공업 자체의 중흥을 불러올 만한 딜.

그래서 불안했다.

“…대체 어떤 던전이길래 그럽니까?”

도련님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다만 위험할 겁니다.”

“많이요?”

“네. 엄청나게요.”

아니, 근데 그렇게 위험한 걸 왜 도련님이 직접 해?

나는 도련님의 얼굴을 살폈다. 여드름도 없이 뽀얀 얼굴이 나를 올려다본다. 근데 왜일까? 저 세상 부족한 것 없이 귀하기만 한 얼굴이 어딘가 불안하고 슬퍼 보이는 이유는.

“끄응…….”

저절로 신음이 나왔다. 불현듯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마 이 도련님이 처음부터 슬퍼 보이는 얼굴로 부탁을 해 왔으면 그냥 아무것도 받지 않고 도와줬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단지 그늘이 필요해 찾았던 사람인데, 어느새 내 심리상 중요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지난번에 나를 구하러 달려와 준 게 컸던 걸까?

고아인 내게는 이렇게 가까워진 인연 하나하나가 가족처럼 다가올 때가 있었다. 서민서가 그랬고… 도련님도 조금 그랬다. 아프면서 안 아픈 척하는 고집불통 막냇동생을 보는 기분.

‘안 돼. 대가는 철저하게 받아야지. 정신 차려.’

나도 모르게 ‘그냥 도와줄게요.’ 소리가 나올 뻔해서 꿀꺽 삼켰다. 그냥 도와줄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건 진짜 진짜 어쩔 수 없는 인생의 위기에서나 그렇게 하는 거다. 잊지 말자. 지난 생이 얼마나 쓸쓸하고 괴로웠는지.

“좋아요. 서른 명, 서부 드래곤힐동에 입점. 석 달간 무료. 그 조건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뭐… 저도 저번에 진 빚이 있으니, 위험한 순간이 와도 버리고 혼자 도망치진 않겠습니다.”

“그거 참 믿음직스럽군요.”

데미안의 입가에 유쾌한 미소가 그려졌다.

나도 그를 따라 피식 웃었다.

* * *

한반도에서는 남쪽이고 필리핀에서는 동쪽에 있는 필리핀해.

내가 꾸린 던전 탐사 팀과 데미안의 던전 탐사 팀이 비행기에서 내린 곳은 필리핀해 내에 있는 여의도만 한 크기의 섬이었다.

“섬이 상당히 크네요?”

“대격변 이후로 솟아난 섬입니다. 이곳에 섬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많죠. 이곳에 던전이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겁니다.”

도련님의 목소리에는 루드비히로서의 자부심이 가득 묻어났다.

하지만 나는 그의 주장에 쉬이 동의할 수가 없었다.

“어… 근데 최치국 씨는 왜 있는 거죠? 혹시 도련님이 불렀어요?”

“네? 최치국? 그게 누… 아! 혹시 이번에 제주도에서 활약한 무혼 권가의 신임 돌격조장이요?”

“모르셨구나?”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자 푸른 게이트가 눈앞에 펼쳐지고 그 앞에는 내가 [만상공감]으로 미리 느꼈던 것처럼 최치국이 서 있었다. 최치국뿐만이 아니었다. 제주도에서 보았던 무혼 권가의 전투조원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어, 어떻게……. 이건 말이 안 되는데……!”

당연히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던 던전에 먼저 와 있는 이들이 있다. 그 사실에 데미안 도련님은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반면에 최치국은 눈만 잠시 크게 떴다가 곧 무언가 수긍한 듯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짐작이 가는 게 있었다.

‘미래 정보를 토대로 움직인 거구나.’

모르긴 몰라도 미래에 이 던전에서 굉장한 보물이 발견되었던 모양이다. 귀환자들이 그런 기연들을 빼먹는 클리셰를 놓칠 리는 없을 테니 선수를 치러 온 것이다. 다만 시기를 잘못 계산했는지 이렇게 마주쳐 버리고 만 것.

최치국이 우리 쪽으로 다가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또 보는군…요, 소시민 사령관님? 그리고 이쪽은… 루드비히가의 데미안… 도련님이겠군요. 반갑네…요. 나는 무혼 권가의 최치국입니다.”

어색한 존댓말이었다.

최치국은 오크 던전에서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열여섯 살 소년 같은 느낌이 남아 있었는데, 요즘은 볼 때마다 카리스마 넘치는 과거 검웅劍雄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 스스로도 존댓말이 어색한지 뒤늦게 말꼬리에 요 자를 붙였다.

그런데 우스운 건, 그 모습을 보니 검웅을 향해 가지고 있던 내 과거의 팬심이 더 맹렬하게 반응한다는 것이었다.

와, 검웅이 나한테 먼저 인사를 한다! 와, 검웅이 내 이름을 기억한다!

상황에도 안 맞고 주책도 없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두 손으로 덥석 잡았다.

“반갑습니다! 제주도에서 보고 또 보네요. 어? 그러고 보니 저희 세 번째 만남 아닙니까? 이거 인연 아니에요?”

그런데 내가 이렇게 오버를 하는 와중에 나보다 더 심하게 오버하는 인물이 있었다.

“진짜 그래요, 선배!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던데 세 번이나! 최치국 조장님하고 우리는 인연이 틀림없네! 영광입니다!”

아니, 나는 과거의 기억 탓이라고 해도……. 민서야, 너는 왜 나보다 더 난리인데?

서민서가 눈을 반짝이며 최치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서민서 님.”

“제 이름, 기억하고 계셨어요?”

“제주도에서 용맹하게 싸우시던 모습, 기억하고 있습니다.”

“조장님께서 기억을 해 주시다니……. 영광이에요!”

서민서가 호들갑 떠는 틈을 타 박민희와 강전구도 슬금슬금 다가왔다.

“아, 강전구 님.”

“영광입니다!”

강전구가 고작 열여섯 살짜리에게 고개를 90도로 숙였다.

“박민희 님도 반갑습니다.”

“큼, 크흠. 나도 반가워.”

박민희는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최치국이 자기를 알아봐 준 게 기쁜지 입꼬리가 실실 올라가고 있었다.

뭐야, 언제 이렇게 서로 친해진 거야?

“선배가 후방에서 그 이상한 힘 한 번 쓰고 골골거릴 때 우리는 앞에서 괴물들이랑 직접 싸웠잖아요. 쌓아 놓은 전우애가 다르다, 이거죠.”

“아니, 내가 유물을 썼으니까 너희가 쉽게……!”

“아아, 그건 모르겠고. 아무튼 다르다, 이거죠.”

내 입을 틀어막으며 실실 웃는 서민서였다.

와, 씨……. 이거 은근히 기분 상하네. 야, 검웅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때 내가 없었으면……!

그런데 그때,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갑습니다. 그런데 무혼 권가는 한반도에서만 활동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가 봐요? 여기를 다 알고 찾아오네.”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최치국을 살피는 데미안이었다.

그제야 우리 일행은 현재의 입장을 깨닫고 조용히 고개를 숙인 후 데미안의 뒤로 물러섰다.

보물이 담긴 던전은 하나.

던전을 탐사할 팀은 둘.

분위기가 좋을 수가 없었다.

“운이 좋았었지…요. 그런데 진입 직전에 이렇게 마주치다니, 그건 참 운이 없군요.”

최치국은 혼자 꿀꺽하려고 했는데 아쉽게 되었다는 말을 대놓고 하고 있었다.

뿌득.

그런데…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흘깃 돌아보니 이를 꽉 깨문 데미안 도련님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래도 도련님이 이를 간 게 맞는 모양이다.

‘도련님이 평정심을 잃었다고?’

루드비히 가문의 막내는 어지간해서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적어도 던전 하나 나눠 먹게 생겼다고 평정을 잃을 정도로 배포가 작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따지면 애초에 루드비히 가문의 막내는 직접 던전에 들어가지도 않지.’

생각할수록 지금의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도련님은 한술 더 떠서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던전 탐사에서 절대 밀리면 안 돼요. 다른 건 몰라도… 던전 코어는 우리가 공략해야 합니다.”

이를 악물고 그렇게 말한 데미안은 나를 바라보며 한 번 더 당부했다.

“절대로, 최치국에게 뒤처지면 안 됩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데미안 도련님에게는 던전 코어를 먼저 공략하는 게 무척 중요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나더러 검웅을 이기라고?

그 검웅을?

내가?

어쩐지 눈이 밝아지고 온몸에 기합이 바짝 들어갔다.

‘그래. 해 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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