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자, 이제 누가 갑이지?
전투에 필요한 스펙은 아주 다양하다.
파괴력과 속도, 정확성과 내구, 사용 가능한 기술과 초능력, 체력과 영력의 한계 등등.
나처럼 예민한 감각이 있다면 이런 걸 수치화해서 대략적인 전투력을 표시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따졌을 때… 내 전투력이 100쯤 된다면 현재 박민희의 전투력은 96쯤 되었다. 서울에서도 요충지인 광화문 던전을 책임지던 엘리트 능력자, 박민희를 상대로 한 수 정도의 우위를 점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감개무량할 정도로 빠른 성장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박민희를 압도한 건 아니었다. 수치상으로는 그랬다. 복싱 경기로 따지면 매 라운드마다 한 대 정도 더 때리면서 꾸준히 앞서 나가고 결국 판정승을 하는 정도. 딱 그 정도의 우위였다.
하지만 실제 싸움은 그런 식으로 흐르지 않는다.
싸움이라는 것을 가장 단순화해 보면 결국 공격이 방어를 넘어서느냐 못 넘어서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수치를 평균 내서 비교하는 게 아니라, 어떤 한 부분에서라도 상대의 대비를 훌쩍 넘을 수 있으면 그 순간 바로 승부가 나 버리는 것이다.
작디작은 세균이 거대한 코끼리를 죽여 버리는 것. 그게 싸움이었다. 대비할 방어 체계가 없을 때, 그 어떤 강대한 적도 단숨에 고꾸라지는 싸움의 미학.
박민희는 그것도 모르고 으스대고 있었다.
“이참에 확실히 보여줄게. 내가, 생각보다 더 강해. 이래 봬도 행보관급 던전도 클리어해 봤다고, 내가.”
그래. 자신만만하다는 건 알겠다.
‘근데 행보관급 던전은 뭐지?’
던전은 S급에서 F급까지 알파벳 순으로 분류되는데?
“뭐야, 그것도 몰라? 민간인이었던 티를 너무 내네.”
박민희의 설명에 따르면 그건 주로 군에서 사용하는 등급 체계였다. 던전들을 크게 사병, 부사관, 장교. 이렇게 세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하는데, 이때 부사관과 장교의 분류는 던전 공략에 얼마나 많은 변수가 작용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했다.
던전에 유독 괴물의 수가 많거나 괴물들이 전략적으로 움직이거나, 혹은 특수 능력이 있다든가 하는 식의 변수가 많으면 장교 던전으로 분류되었다.
이런 던전은 변수에 대처할 수 있는 특수 능력과 섬세하게 조율된 전략과 준비, 뛰어난 임기응변까지 갖춰야 공략 허가가 떨어졌다.
반면에 부사관 던전은 순수하게 역량만 갖춰지면 부딪혀 볼 수 있는 정직한 던전이었다.
따라서 똑같은 A등급 난이도의 던전이라고 해도 부사관 던전이 장교 던전보다 결과 예측이 쉬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부사관 던전의 공략이 마냥 더 쉽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정직하게 역량을 겨루는 만큼 역량이 받쳐 주지 못하면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다 알면서도 질 수밖에 없는 곳. 그게 바로 부사관 던전이었다.
탄탄한 기본기와 빼어난 기술을 가졌지만, 별다른 특수 능력이나 임기응변이 없었던 박민희는 줄곧 부사관 던전에만 동원되었다.
거기서 그녀는 A+등급이라고도 불리는 유독 난이도가 높은 던전을 공략하는 데에도 성공해서, 평범한 상사급을 뛰어넘는 행보관급 던전을 공략했다는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행보관급이라니……. 그 위로 원사급과 준위급밖에 없으니 그녀가 자신만만해 할 만도 했다.
‘근데 이놈의 세상, 진짜 너무하네.’
세상에, 부사관 던전이랑 장교 던전이라니. 지난 생의 나는 너무나 X밥이어서 이런 용어도 몰랐던 거구나……. 어디 가서 회귀자라고 하기도 부끄럽다.
예기치 않게 의기소침해져 버린 나. 그런 나에게 박민희는 계속해서 잘난 체를 했다.
“봐. 이게 바로 듀렌달사의 2017 다크 에디션이야. 이번에 새로 샀지.”
박민희가 자신의 검은색 장검을 뽑아 들며 자랑스러워했다.
“뭐, 어쩌다 보니 내기 싸움을 하게 됐지만… 사실 상대가 너라는 게 기뻐. 많이 강해졌다는 거 알아. 이 다크 에디션의 첫 상대가 새로운 영웅, 용산 2지역의 사령관이라니…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다.”
박민희가 나를 추켜세우며 매력적으로 웃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너는 나와 내 파도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시작하죠.”
싱긋 한 번 웃어 주고 박민희에게 파도를 겨누었다.
박민희 역시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한순간, 우리는 서로 부딪혔다.
어떻게 보면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에 서로 간을 보는 탐색전이었다.
무게 중심을 뒤로 빼놓고 언제든 물러서거나 방어를 단단히 할 준비를 갖춘 첫 번째 부딪힘.
박민희가 선택한 스킬도 정석적이었다.
<파열검!>
그건 흔히 ‘교과서’라고 불리는 공용 마누스 스킬 중 하나였다.
검이 맞닿는 순간 폭발과도 같은 강력한 반발력이 일어나 상대를 흔드는 기술. 가벼운 검격으로도 상대의 자세를 무너뜨리고 몰아붙일 수 있어서 수많은 프로헌터에게 사랑받는 [반탄검]의 상위 버전이었다.
말하자면… 툭툭 쳐도 상대의 가드를 흔들어 버리는 일류 복서의 고오오급 잽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행보관급 던전을 클리어했다면 으스댈 만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사실 이게 내 눈에는 어떻게 보이냐면…….
‘잡스러워.’
그래. 그냥 잡스러울 뿐이다.
영력이라는 건 영혼의 힘이다. 육체를 초월해서 발동하는 힘.
하지만 지구인들이 다루는 마누스라는 건, 그 영력을 육체에서 온전히 정제해 내지 못하고 근육과 뼈에 중구난방 섞여 있는 영력을 통째로 쥐어짜서 이용하는 것과 같았다.
거의 철광석을 뗀석기로 이용하고 석유를 흙이랑 반죽해서 벽돌로 만드는 수준.
박민희의 검에서 난폭하게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저 파괴적인 마누스는 무기와 전혀 융화되지 못하고 날뛰고 있었다. 빈틈은 더욱 명확해 보인다.
나는 파도에게 영력을 주입했다. 영력은 [만상공감]의 인도를 따라 파도와 단단히 결합하며 파도의 잠재력을 한계 너머까지 이끌어 냈다.
‘가자, 파도야.’
웅-
웅-
구와아앙-!
실프목을 깎아 만든 손잡이에서 시작된 작은 울림이 운디늄과 킹슬라임강의 합금으로 이루어진 검신을 만나며 태풍과도 같은 떨림으로 변이되었다.
김용수 명장의 [쇼크웨이브]를 기억하고 있는 이 검날이 파괴적인 진동을 머금었다.
나는 그 상태로 파도를 마주 휘둘렀다.
늘씬한 길이가 아주 건방진 듀렌달사 2017 다크 에디션과, 작지만 알찬 우리 파도가 맞부딪혔다.
쩌엉!
결과는 자명했다.
파도와 단단하게 결합된 내 영력은 잡스러운 마누스를 베고 박민희의 검에 닿았다. 그리고 강화된 쇼크웨이브가 박민희의 검을 휩쓸었다. 그녀의 허접한 마누스는 결코 그녀의 소중한 검을 지켜 줄 수 없었다.
‘감히 그따위 칼을 파도에게 가져다 대?’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면 무지했다는 것이고, 그 대가는 아주 컸다.
쩌저적… 파스스스…….
“어? 어어……?”
박민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눈앞에서 길쭉하고 아름다운 검이 부서지고 있었으니까.
난 애초부터 박민희를 노리지 않았다. 그녀의 건방진 검을 노렸을 뿐.
쏴아아아!
휘릭! 척!
박민희의 검이 은구슬 같은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쏟아졌을 때, 파도는 검을 깨뜨리고 그대로 나아가 박민희의 목을 겨누었다.
내 승리였다.
그녀와 나는 수치상으로는 전투력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내 영력을 읽지 못했고, 또한 내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무기를 지켜 낼 수단이 없었다. 그게 그녀가 단 한 수 만에 패배한 이유였다.
‘이러니까 장교 던전이 아니라 부사관 던전에 투입되지.’
상정 범위를 벗어나는 돌발 상황에서 대응 능력이 떨어졌다.
나는 오연하게 그녀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박민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건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을 겨눈 파도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눈동자도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너… 너… 방금 이 기술 뭐야? 이, 이런 건 사람이 쓸 법한 기술이 아닌데……? 어떻게 한 거야?”
그야… 이런 걸 할 수 있는 건 사람이 아니라 외차원의 존재들뿐이긴 할 것이다.
그녀가 아기 새처럼 내 시선을 쫓고 있었다. 저건 무슨 표정일까?
‘아, 그러고 보니까… 뭔가 새로운 걸 찾고 있다고 했지?’
나는 그녀의 눈에서 충격과 당혹을 넘어서는 환희와 경탄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래.
막연하게 찾던 ‘새로운 것’을 실제로 눈앞에서 목도한 사람의 표정이 딱 저럴 것이다.
심지어 그 새로운 것이 자신의 상식을 뒤엎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라면 더더욱 전율을 참지 못할 것이다.
이건 좋은데?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궁금해요?”
내가 묻자 박민희가 열렬하게 달려들었다.
“응. 가르쳐 줘, 가르쳐 줘!”
“싫어요.”
“뭐, 뭐?”
“아까는 나랑 교육 사업 하기 싫다면서요. 맘 상했어요.”
“아, 아니! 뭔 소리야. 교육 사업 하자며? 할게! 뭐든 할게! 하자!”
“마음이 바뀌었어요.”
“자, 잠깐만.”
“공짜로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가소롭다며 비웃은 게 누구였죠?”
“아, 아니… 내가 잘못했어. 응?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글쎄요? 모르겠네. 유학 잘 다녀오세요.”
“아! 아! 시민 씨! 아, 쫌! 잠시만 얘기 좀……!”
이야… 좋다.
쩔쩔매며 매달리는 박민희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래야지.
생각해 보니 그렇잖아? 영력을 가르쳐 주는 건 난데, 왜 내가 매달려야 돼?
이건 돈 주고도 못 배우는 거잖아?
불에 뛰어들라고 하면 즉시 뛰어들 마음가짐으로 말야, 응? 그렇게 겸손하게, 섬기는 마음으로 와야지!
타키넷과의 무역. 이게,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 그런 일을 배울 기회를 준다는데, 얼마나 좋아?
일을 배운다 생각하고, 응? 공짜로라도 일하겠다는 각오로 와야지. 아니, 오히려 내가 돈을 받아야 돼.
정말이지. 잘 보이기 위해 노오오력을 해도 받아 줄까 말까인데. 어디서 고개를 빳빳이 들어?
‘와… 이게 갑이 되는 기분인가?’
상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게 이렇게 후련한 기분일 줄이야. 이래서 다들 권력, 권력 하나 보다.
‘자, 그럼 을답게 나에게 뭘 줄 수 있는지 잘 고민해 보라고.’
나는 나를 붙잡는 박민희의 손길을 피해서 총총 자리를 떠났다. 뒤에 남은 박민희는 혼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 이거 퇴직금 털어서 산 검인데……. 이거 수리 안 되겠지? 아, 근데 이거 가루만 팔아도 돈이 나오긴 할 텐데……. 아, 아… 씨…….”
박살 난 듀렌달 2017 다크 에디션을 보며 쩔쩔매다가, 떠나는 내 등을 보며 눈치를 보고 갈등하던 그녀는 결국 부서진 검을 내버려 둔 채, 손을 번쩍 들고 내 뒤를 따랐다.
“시민 씨! 아니, 사령관님! 사령관님, 잠시만요!”
그 간절한 목소리가 무척 듣기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