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60화 (60/212)

15. 너, 나보다 약하잖아

- 결정하셨으니 따르지만, 저는 여전히 그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리스크야 있겠지. 하지만 결정이라는 것은 리스크와 리워드를 견주는 행위니까.”

-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그는 세계수를 지니고 있고 외차원 문명과도 교류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추정이 사실이라면… 지금 이 시점에서 말이 안 될 정도로 큰 규모죠. 그게 위험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부탁했잖아. 외차원과의 교류를 멈춰 달라고.”

- 하지만 그는 아직 약속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유해 하나를 공개하셨고요…….

“아니, 모르는 척하는 거야? 유해 하나에서 그칠 생각 없어. 전에 말한 대로 유물도 획득하게 해 줄 거거든. 외차원과의 교류에 목맬 필요가 없다는 걸 분명히 보여 줄 거야.”

- …심지어 그는 루드비히 가문과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그 배신자 가문과요! 그는 최악의 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아군이 될지도 모르잖아?”

- …말했다시피 저는 따릅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유념하십시오. 만안자도 그를 주시할 겁니다.

“알았어. 하지만 나는 예감이 좋아. 그는 분명 우리와 함께 싸우게 될 거야.”

권승리는 미소를 띠우며 리프 얀센과의 텔레파시를 종료했다.

드르륵, 창문을 열자 사방에 자욱한 회색 안개가 보였다.

안개 속에 서 있는 폭포와 그 주위에서 분주하게 일하고 있는 장인들.

권승리는 소시민이 이곳에 서서 보여 준 표정을 잊지 못했다.

입은 크게 벌어지고 눈동자는 와들와들 떨리고 감격과 전율을 느끼는 듯하던 그 표정.

‘초능력이… 최하급 독심술이 아니라 대상의 정보를 읽어 내는 종류의 것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그런지 반응도 더욱 극적이었다. 더 잘 느낀다면 더 잘 알 수밖에 없겠지. 지구의 위대한 저력을. 그러니…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강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결국 넘어올 수밖에 없을 거야.’

그 생각만 하면 어깨가 가벼웠다.

아틀라스 프로젝트에서 항상 들어 온 말.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 하나뿐이라는 말. 그동안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제 돌아보니 그 말이 몸서리치게 외롭고 무거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권승리는 뿌옇게 흐려진 유리창에 사람 인자를 그렸다.

人.

획 두 개가 서로 기댄 모양새.

두 사람.

그리고 그 위에 획을 두 개 긋는다.

天.

무거운 하늘을 떠받드는 것도 둘이다.

혼자가 아니다.

권승리는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아, 오글거려. 미친…….”

진저리까지 치며 돌아섰다.

하지만 창문에 그려진 天자를 지우지는 않았다.

* * *

‘아니, 그걸 왜 짊어지고 앉았어?’

나는 권승리와 회귀자들을 생각하며 혀를 쯧쯧 찼다.

생각해 보면 아틀라스 클럽이라는 이름부터가 문제다. 아틀라스, 하늘을 떠받드는 거인. 그 거대함과 강력함은 분명 멋지고 경이롭지만, 벌써 어딘가 답답하지 않은가? 끝도 없는 고련과 희생. 그런 건 이미 지난 생에 죽을 때까지 해 봤다. 할 만큼 했다. 마음의 빚 따위 없는 거다.

‘당장 내일 멸망할 것처럼 즐기기나 해야지.’

어차피 나 하나 더 견디고 더 불행해진다고 결과가 바뀌는 것도 아니잖아?

참고 견뎠던 지난 생의 결과가 어떠했던가? 언제든 대체 가능한 칼 받이 73,158번쯤 되려나?

성장이라는 게 그랬다.

권승리처럼 덮어놓고 참고 견디며 스스로 깨닫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키우는 방법은 저마다 제각각이어서 나처럼 적절한 자극과 다양한 문물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지난 생의 고행은 오히려 내 성장을 가로막고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고통만 받고 얻은 건 없다.

‘그래. 지구를 구하고 뭐,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는 거야. 그냥 내가 얼마나 덜 초라해질 수 있는가. 내 가능성이 어디까지인가. 그것만 생각하면서 살아도 충분했던 거야.’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브레이크 밟지 않겠다.

이번 생은 후회 없이 전속력으로 살아가겠다.

그래서,

한번 일을 제대로 벌여 볼 작정이었다.

타키넷과 지구.

그 사이에서.

‘할 거면 아주 크게.’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심복.

그런 의미에서 광화문 경비 팀의 박민희 팀장은 뛰어난 스펙을 가진 인물로서 반드시 끌어들여야 할 인물이었다.

“불렀어?”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그녀가 들어왔다. 청바지에 깨끗한 셔츠. 단순한 차림인데도 모델처럼 팔다리가 시원시원한 그녀가 입으니 시선을 확 잡아끈다.

제복을 입었을 때 그녀가 믿음직스러운 미녀 팀장님이었다면, 지금은 그냥 미녀다. 어쩐지 어렵던 느낌은 사라지고 밥 잘 사 주고 잘 웃는 예쁜 누나 같다.

‘뭐지? 진짜 복장 탓인가? 아닌데……. 묘하게 더 프리한 느낌이 있는데?’

군인으로서 항상 어딘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그녀였는데, 오늘 전해지는 느낌은 상당히 느슨했다. 상쾌하고 평화로운 감각이 기분 좋게 밀려온다. 휴가라도 받았나?

“웬일로 다 불렀어? 괜히 반갑게, 흐흐. 아, 참고로 나 전역했다? 그래서 경례도 안 한 거야. 사령관님 됐다고 짬 부릴 생각은 하지 마라?”

뭐? 전역을 했어?

깜짝 놀랐다. 내가 멍하니 올려다보니 박민희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나를 놀렸다.

“왜? 설마 진짜 사령관 됐다고 이 누님을 갈궈 보려고 부른 거니? 응?”

박민희가 내 어깨를 툭 치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군인다운 절도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전역은 했다 쳐도… 이렇게 빨리 군대 물이 빠질 수도 있는 건가?

‘뭐, 나쁘진 않지.’

그녀는 예상보다 훨씬 더 격의 없이, 호의적으로 나를 대하고 있었고 그건 아무리 봐도 초록불이었으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도 이리저리 간 볼 것 없이 씩씩하게 한 발을 내딛기로 했다.

“아뇨, 누님. 그게 아니라, 부탁을 좀 드리고 싶어서요.”

“오호! 부탁? 그래요. 우리 귀여운 시민 씨 부탁이라면 이 누.님.이 힘을 쓸 수 있지. 암.”

내 입에서 누님이라는 단어가 떨어지자마자 과하게 눈을 반짝이는 박민희 누님이었다. 하긴, 그동안 군대에서 박박 기면서 직책으로만 불리다가 갑자기 누님 소리 들으면 기분이 새롭긴 할 것이다.

좋다. 사무실 가득한 훈훈한 바람. 이대로 가자.

“네, 누님. 저랑 교육 사업 하나 해 봅시다.”

“어… 뭐?”

상냥하던 박민희의 얼굴이 벙쪘다.

“어차피 전역했으니 일자리 알아보셔야 할 거 아니에요? 제가 새로 하려는 사업이 있는데 도와주시죠.”

“사업? 교육?”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파하하 웃으며 내 어깨를 때렸다.

“야, 됐어. 무슨 사업이야. 거기다 교육이라니.”

“아, 왜요? 뭐 다른 할 거라도 있어요?”

“흐음~.”

아, 뭐가 있긴 한가 보다. 콧소리를 내며 나를 요리조리 뜯어보던 박민희가 말했다.

“다른 거 있지. 유학 갈 거야.”

“유학이요?”

“응. 이번에 덕택에 여러 가지를 느꼈거든. 나름 산전수전 다 겪어 본 엘리트라고 생각했는데… 육삼공을 겪으면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대로 안 된다……?”

“응. 열심히 내 임무만 잘 완수하면 모든 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잖아? 완전히 새로운 게 필요해. 이대로 멈춰 서 있다가… 또 그렇게 무력해지는 건 싫어.”

박민희는 분명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은 어쩐지 날카롭고 슬퍼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서 과거의 내 모습을 보았다.

세상을 지키고 싶은 선의. 그리고 무력해지고 싶지 않다는 오기.

“세계 속에서, 더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거야. 괴물을 상대할 더 나은 방법과 비전들을 찾아낼 거야.”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조금 눈부셨다.

그랬기에 나는 더 자신감이 생겼다. 내 제안은 그녀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녀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그런 거라면 오히려 저랑 같이 일을 해야죠.”

“엥? 뭐, 교육 사업이라며?”

“아니, 그냥 교육 사업이 아니에요. 자신의 진정한 힘과 참모습을 깨닫게 해 주는 그런 가르침……. 음… 그러니까 영혼을 수련하는 방법을 알려 드리는 그런 거예요.”

아, 영력이라는 개념을 모르는 지구인에게 영력을 설명하기란 너무나 어려웠다. 그래도 쭉 전체적인 그림을 한 번 설명했다. 영력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세상에 알리고 타키넷의 아이템들도 시중에 유통시킨다는 그런 커다란 그림을.

“영혼을 수련하는 법을 익히고 나면, 전투에 도움이 되는 그런 주사나 포션 같은 것도 판매할 거예요. 그걸 최대한 대량으로 팔아 치우면 그것만으로도 전력 강화 효과가……. 그러니까 누님이 교육과 판매를 도와서 이렇게 해 주면…….”

그렇게 나는 내 구상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교류를 멈추라는 권승리의 제안과는 반대로 오히려 교류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구상이었다.

본격적인 차원 무역에 대한 스케치.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민희는 문득 내 말을 멈추고 이렇게 말했다.

“…뭐야? 그 신흥 종교 건강 보조 식품 다단계 같은 소리는…….”

시리도록 짜게 식은 눈빛이었다.

* * *

오해를 풀기 위해 한참을 쩔쩔매야 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국 박민희는 내 말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그거네? 네가 영력이라는 새로운 마누스 운용법을 알고 있고 그걸 나한테 가르쳐 줄 테니까, 내가 배워서 또 남에게 가르쳐 줘라? 그리고 틈틈이 소모성 아이템 거래를 대량으로 할 것이다?”

“거의 정확합니다.”

하지만 박민희는 내 말을 얼추 이해하고도 뭔가가 납득이 안 가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근데 네가 마누스를 알아?”

마누스도 없는 게 무슨 마누스를 가르친다고 까부냐는 뜻이었다. 그녀는 영력을 느낄 수 없었으니까.

“그냥 이해하기 좋으라고 마누스라고 한 거지, 사실 영력은 마누스와 전혀 다른 겁니다. 마누스보다 훨씬 더 좋죠.”

하지만 박민희는 내 설명을 신뢰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건 네가 진짜 대단한 마누스를 못 봐서 그렇겠지. 내가 이번에 유학 가서 배우려는 레드라인 마누스 같은 거 말야.”

레드라인 마누스. 그건 독일을 대표하는 마누스 운용법으로서, 세계 최정상급의 수준을 자랑했다.

특이하게도 이 마누스 운용법은 독일 정부 차원에서 누구에게나 무상으로 전수해 주었는데, 다만 레드라인을 익히고 나면 반드시 일정 시간 동안 독일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조건을 따라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잘난 마누스 운용법이라 해도 그런 걸 영력과 비교하다니… 우스울 뿐이었다.

“영력이 레드라인보다 훨씬, 훨씬 더 좋아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진짜예요.”

“아, 쫌! 나보다 약한 게 입만 살아 가지고는?”

“네?”

“뭐?”

우리 둘 다 서로를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문득 박민희의 심장이 쿵쿵 뛰고 전신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빛에 광채가 일렁였다.

“이거 봐라? 나보다 약하다는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이네?”

“어이없죠. 당연히 제가 더 강한데.”

“하?”

박민희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떻게 보면 진짜로 신난 것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진짜로 화난 것 같았다. 박민희란 사람의 호승심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박민희가 입술 한쪽 끝을 잔뜩 비튼 채로 말했다.

“네가 부자인 건 알아. 그래서 장비가 좋은 건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네?”

“뭐가!”

“부자요? 제가?”

“그래. 맞잖아? 명품만 가지고 다니지, 오파츠급의 값비싼 소모성 아이템도 팍팍 쓰지……. 육삼공 참사랑 저번 의병 활동 때 네가 쓴 아이템들, 돈 주고도 못 구하는 거라고 기사까지 났더만?”

말문이 막혔다.

뭐야, 그 잠깐 사이에 대중들 사이에서 내 이미지는 대체 뭐가 된 거야?

오늘은 이래저래 정말 벙찌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렇게 내가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박민희는 말을 계속 이었다.

“아주 빠르게 실력이 늘고 있다는 건 아는데… 그래도 나한테는 한 천 년쯤은 이르지.”

박민희는 진짜로 그렇게 믿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먹히지 않는 것이다.

참사 당시 내가 동원한 온갖 아이템들 모두 리스펙트하고 있고, 내가 보여 준 행보에도 무한한 지지와 호의를 보이지만. 그렇지만, 어쨌든 싸우면 자기가 이긴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뭐, 좋다.

이 이상 무슨 이야기가 필요할까.

스릉-

나는 품에서 회칼, ‘파도’를 꺼내 들었다.

“그럼 내기해요. 제가 이기면 제 사업 돕는 걸로.”

“내기를 하겠다고?”

“네. 왜요? 질까 봐 무서워요?”

내 도발에 박민희의 눈썹이 와락 구겨졌다.

“오냐! 하자! 코찔찔이 벗겨 먹는 거 같아서 안 그럴려고 했는데, 보자… 대신 네가 지면 내 유학 비용은 네가 다 내는 거다? 부자니까 그 정도는 아무렇지 않지?”

“좋습니다.”

나도 시원하게 승낙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대보죠. 어느 쪽이 더 긴지.”

스릉-

그런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민희의 길고 까만 장검이 내 회칼인 파도 위로 포개듯 겨누어졌다.

반사적으로 박민희를 돌아보았더니 그녀는 한 번 픽! 웃고 나를 지나쳤다.

“칼은 벌써 내게 더 긴데?”

그 한마디에 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와…….

기가 막힌다.

뭐?

…하!

치가 떨린다.

‘젠장… 파도야, 신경 쓰지 마라.’

웅-

우웅-

파도의 검명이 오늘따라 애처롭게 들렸다.

생각할수록 화나고 괘씸했다.

감히 우리 파도 기를 죽여?

용서할 수 없다.

나는 입술을 꼭 깨물고 박민희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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