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59화 (59/212)

14. 계산하지 말고 느껴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역사가 흐르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가 누리는 삶의 질도 좋아진다고.

물론 크게 보면 그렇다. 매우 그렇다.

하지만 작게 보면 꼭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가령,

수렵 채집 사회였던 구석기시대와 농경을 시작한 신석기시대를 비교해 보자.

놀랍게도 구석기시대가 훨씬 삶의 질이 뛰어났다.

그들은 일단 15살을 넘기기만 하면 보통 60~80세까지 장수하다가 죽을 정도로 삶의 질이 높았다.

그들은 고기 먹고 야채 먹고 과일도 먹고, 지구상의 모든 먹거리를 마음껏 누렸다.

잦은 모유 수유는 어머니들의 호르몬을 조절해 자연 피임을 가능하게 했고, 자식들은 몇 년씩 터울을 두고 천천히 태어났다.

반면에 농경이 시작된 신석기시대엔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삶의 질은 시궁창에 처박혔다.

건강하게 나무 타고 창 던지던 구석기인과 달리, 쭈그려서 밭을 매던 신석기인들은 관절염에 시달리며 집에 오면 먹을 거라곤 곡물 쪼가리밖에 없었다. 불균형한 식단과 인체 공학적이지 못한 노동으로 인해 각종 골병에 시달리며 일찍 죽었다.

안 그래도 힘든 살림에 아이들은 매년 태어나서 서로를 더 불행하게 만들었고, 밀집화된 주거 환경과 가축 사육은 인류에게 최초로 전염병이라는 공포를 선사해 주었다.

이 정도로 드라마틱한 차이는 아니지만, 조선과 지금을 비교해도 조선이 더 뛰어난 부분도 있다.

가령 수공품들.

조선 시대에는 버선 한 켤레도 다 일일이 손으로 짜고 발 모양을 본떠서 맞춤으로 제작했다. 그 비싼 천연 소재 재료들을 천연 염색하고 내 몸에 딱 맞게 손수 바느질해서 만들어 준 옷들은 사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명품 그 이상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것들이었다.

사극을 보면 흔해 보이기만 하는 흑립도 지금 만드려면 최소 400만 원 이상이 든다. 조선 시대 방식대로 대나무를 실처럼 얇게 밀어서 말 꼬리털과 함께 일일이 손으로 짜는 그 과정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정성과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현대 사회는 특정 수준 이상의 제품을 빠르게 대량 생산해 내는 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만들어 내는 정교한 수공품을 만드는 실력은 오히려 퇴보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권승리가 내게 보여 주려고 했던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한 장인이 평생을 바쳐 익혀 낸 기술.

그리고 마치 운석으로 벼려 낸 운철검처럼, 그 시대의 기술을 뛰어넘어 주어지는 매우 신이하고 희귀한 소재.

마지막으로 아주 특별한 자연적 환경 등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기적.

사막의 피라미드처럼, 하얗게 빛나는 타지마할처럼. 시대를 초월해 경이와 감동을 선사하는 역작.

콰콰콰콰-

권승리는 나를 멀리 데려가지 않았다. 그저 서울의 중심부. 예전에는 서울에서 손꼽히는 데이트 코스였지만, 지금은 많이 쇠락했다는 삼청동으로 데려갔을 뿐.

이런 곳에 뭐가 있을까 싶었지만, 우리는 좀 더 깊이 들어갔다. 관광객이 많이 다니는 삼청로를 쭈욱 따라 올라가 더 이상 관광객들이 보이지 않을 때쯤, 길을 두 번쯤 꺾어 골목으로 들어가니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었고 북악산 자락을 따라 자리 잡은 오래된 집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쯤에는 크고 높은 나무들과 북안산에서 내려오는 산 내음이 집들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어서 한여름임에도 상당히 서늘했다. 우리는 거기서도 더 깊이 들어갔다.

몇 개의 암자를 지나고 한옥을 지났다. 대체 뭔가? 삼청동이 이렇게 깊었나? 여기가 서울 한복판이 맞나? 현실이 맞긴 한가? 조선 시대의 신선들이 사는 곳인가? 별별 생각이 다 들 때쯤, 우리는 새로운 골목길로 들어서며 수상한 영력이 느껴지는 안계와 결계를 통과했고 어느새 눈앞엔…….

콰콰콰콰-

거대한 폭포가 있었다. 그건 분명히 폭포였지만 떨어져 내리는 그것은 물이 아니었다. 유령처럼 뿌옇고 반투명한 그것이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서 떨어져 사방으로 부서졌다. 폭포 주변을 둘러싸고 형성된 한옥 마을을 감싸고 있는 뿌연 안개는 모두 반투명한 폭포수의 잔해였다.

깡깡깡-

털컥털컥. 탁!

쏴아아!

폭포 주변에는 물건을 만드는 장인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들이었지만 일에 집중하는 눈빛은 맑고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누구는 쇠를 달구고 두드려서 폭포에 식혔고, 누구는 짜고 있는 직물 위에 계속해서 폭포수를 뿌렸다.

언뜻 보면 고요해 보이지만 자세히 볼수록 분주한 폭포.

그 앞에서 권승리가 나를 돌아보았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웠다.

“유해의 마을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저 거대한 폭포가 바로 이 마을의 상징, 유해의 폭포입니다.”

* * *

세상에는 유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유적도 있으며 유해도 있다.

젠장. 명색이 회귀자인데 이 세상에서 내가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 건지…….

아무튼, 유적이라는 개념은 그래도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만했는데 유해는 그렇지 않았다.

유해遺骸, 송장 또는 타고 남은 유골.

권승리는 그 거대하고 이상한 폭포를 가리켜 유해의 하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저 폭포가 대체 어떻게 송장이나 유골이라는 말인가? 백 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게 대체 누구의 시체인데?

그런 내 질문에 권승리는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냥 옛날부터 그렇게 불러 왔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아무튼 그녀의 말에 따르면 유해는 대격변이 있던 그날 갑자기 등장했다. 북안산과 이어지는 삼청동의 깊은 마을 주변의 공간이 뒤틀리며 확장되었고, 그렇게 생겨난 자리에 갑자기 유해의 폭포가 우뚝 일어난 것이다.

이 유해의 폭포는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어서 이따금 폭포 주위에서는 어디에서도 발견된 적 없는 신물질들이 발견되기도 하고, 저 뿌연 폭포수를 제작에 이용하면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힘이 깃든 물건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곳에 있는 장인들은 모두 대격변 초창기의 무형문화재와 공학자로서, 신비에 매료당해 세상의 부귀영화조차 뒤로한 채 인세를 초월하는 물건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친 구도자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대단한 것을 하준광 협회장이 모른다고요?”

내 질문에 권승리는 이렇게 답했다.

“이런 건 격변기 가장 초창기부터 활약한 몇몇 세력만이 알고 있습니다. 유물과 달리 처음 발견된 이후로 다시 등장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기에 유물처럼 알려질 일도 적었지요. 또한 이곳의 혜택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 받을 수 있는 것이라서… 숨기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입니다.”

그런 특권적인 정보에 나를 접근하게 해 주었다는 생색이 듬뿍 함유되어 있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나는 답답했다.

“…차라리 이곳의 정보를 모두에게 공개하고 연구를 가속화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안 됩니다. 이곳은 인류가 가진 가장 날카로운 무기 중의 하나.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 지구를 호시탐탐 정탐하고 있는 지금, 이곳의 위치를 누설할 수는 없습니다. ”

“그래도 협회장도 모른다는 건…….”

“그렇게 널리 알려서 좋을 게 없습니다. 이곳의 신비는 연구를 한다고 해서 밝혀낼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초기에 이곳을 찾은 수많은 천재 과학자와 공학자가 왜 연구를 포기하고 장인으로 눌러앉았겠습니까? 신비란 그런 것입니다. 이해하기보다는 온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일 때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권승리의 눈에 깃든 건 확신이었다.

그 확신 어린 눈빛을 봤을 때, 나는 어째서인지 가슴 한 켠이 서늘해졌다.

차가운 폭포를 뒤집어쓴 것처럼, 팔에 소름이 돋아났다.

마을에 들어선 권승리는 그 길로 머리가 허옇게 세고 수염을 가슴까지 기른 노인을 찾아갔다. 노인은 권승리를 발견하더니 멀찍이서 외쳤다. 폭포 소리 때문에 소리를 꽥꽥 질러야만 했다.

“웬일로 못 보던 사람을 데려왔어?”

“소시민이라는 헌터예요. 앞으로 큰일을 할 거예요. 이분에게도 출입증 하나만 주세요!”

“아가씨 부탁이면 주긴 하겠지만… 알지? 여기 사람들이 물건 만들어 달라는 대로 만들어 주고 그러지 않어. 아가씨처럼 도움이 되는 능력이 있다면 모를까, 저 친구가 혼자 와서 할 수 있는 건 없을 거야.”

“괜찮아요!”

그녀의 대답에 노인은 목걸이 하나를 휙! 하고 던지고는 다시 자신의 작업대 위로 시선을 돌렸다.

뭘 하는가 싶어 보니 보석을 깎아서 장신구를 만드는 중이었다. 다만 보석을 깎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가 반투명한 폭포수를 고압으로 분출하는 커터기였다. 이곳의 모든 물건은 그야말로 유해의 폭포로 시작해서 유해의 폭포로 끝나는 듯했다.

“자, 받아요. 출입증이에요. 이제 혼자 와도 이곳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권승리가 내게 내민 목걸이에는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이는 구조물이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육면체 내부에 육면체가 또 들어가 있는 이중 구조였다.

내부에 있는 육면체가 밖으로 말려 나가며 점점 커져서 바깥의 육면체를 잡아먹고 외부의 육면체가 되며, 반대로 외부에 있던 육면체는 안으로 말려 들어가 내부에 있는 육면체가 되는… 이런 이상한 반복을 계속하고 있었다.

“회전하고 있는 4차원의 큐브예요. 우리 3차원 공간에서는 그런 이상한 움직임으로 사영되어 보이죠.”

“…네?”

“그냥 유해의 폭포가 아니면 만들어 낼 수 없는 기적의 하나라고 보면 돼요.”

권승리가 옳았다.

기적.

‘그냥 막 던져 준 목걸이가 무슨 이런 무지막지한…….’

[만상공감]이 목걸이가 가진 힘을 낱낱이 파헤쳤다.

이것은 유해의 폭포를 둘러싼 결계를 통과하게 해 주는 힘을 지녔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모든 왜곡에 저항하는 능력 역시 품고 있었다. 아마 이걸 차고 있다면 어지간한 환상이나 정신계 능력은 나를 범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크고… 화려한 오라야.’

당연하다는 듯 활활 타오르는 오라. 이건 타키넷에 가져가도 그 가치를 인정받을 귀물이었다.

이런 보물이 고작 출입증이라니…….

‘지구에도 다 있다고 아주 자신만만하더니…….’

권승리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얼떨떨했고 반쯤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권승리를 따라 유해의 마을을 탐방하고 자존심 강한 장인들에게 인사를 하는 내내 팔에 돋아난 소름은 가실 줄을 몰랐다.

그런데 그 소름이 조금 이상했다.

권승리와 함께 유해의 마을 탐방을 끝내고 다시 사령부로 돌아와서 서민서, 박민희, 강전구를 호출해 놓고 기다릴 때까지도 팔에 돋은 서늘함은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극에 이른 장인들과 그들이 만든 기적 같은 물건들에 기가 눌린 탓이라고도 생각했는데… 이건 좀 이상했다.

‘왜 이렇게 서늘할까?’

뭔가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게 뭘까?

그렇게 의자에 앉아 한참을 고민한 끝에야 나는 그 서늘함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 그랬구나. 그래서 회귀자들이 쇄국 정책을 펼친 거구나.”

차원 간의 연결이니 뭐니 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였다.

권승리가 보여 준 확신에 가득 찼던 눈동자가 눈앞에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신비란… 이해하기보다는 느끼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빌어먹을 놈들…….

진짜 그렇게 믿고 있는 거야?

헛웃음이 나왔다. 느껴? 느끼긴 뭘 느껴! 그래, 그러니까 너희가 그러지.

물론!

완전 틀린 말은 아니다.

심지어 타키넷에서 내가 접한 고급 영능학의 구절들 중에도 이 비슷한 말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실질적인 법칙이 아니라, 정말 ‘고오오급’ 재능을 가진 천재가 툭 내뱉는 그런 직관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상황이다.

여러 사람이 숫자 계산을 앞두고 당황해한다.

“젠장! 1072.327 X 3875.5634가 얼마지?”

“계산기! 계산기를 찾아 와!”

“저희한테는 계산기가 없어요! 계산기를 사 와야 합니다!”

“젠장! 바쁘니까 일단 뛰어나가서 사 와!”

그때 우리의 위대하신 권승리 님이 나서는 거다.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건 4,155,871.2740318입니다. 계산기는 필요 없습니다. 바깥은 위험하니 나가지 않는 게 좋아요.”

그리고 또 말한다.

“여러분도 노력하면 다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계산기 없이도 충분히 우리끼리 잘할 수 있습니다.”

물론 누군가가 반박한다.

“하지만… 저는 아무리 해도 안 되는데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바로 이때, 그런 말이 나오는 거다.

“마음을 비우세요. 수를 계산하려 하지 말고 숫자 그 자체를 느끼세요.”

이게 바로 신비를 이해하지 말고 느끼라는 말의 참 의미였다.

이러니 가슴 한 켠이 서늘했지.

아니, 섬뜩했지.

권승리뿐만이 아니었다. 유해의 마을에 있던 장인들이 다들 그런 상태였다.

슈퍼컴퓨터와 초정밀 생산 시설 없이도 그것들이 해내는 일을 할 수 있는 초인들. 혹은 그런 초인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는 구도자들.

물론 나는 그들이 매우 존경스럽고 그들이 만들어 낸 물건들에 경외를 넘어 경악을 금치 못하는 바이지만…….

‘시벌, 안 돼. 그딴 놈들이 세상을 좌지우지하게 하면 안 돼.’

소름이 끼쳤다.

그런 놈들이 그런 사상을 모두에게 강요한다고?

회귀자들을 견제해야 하는 이유가 더욱더 확고해졌다.

덕택에 마지막 미련을 털어 낼 수 있었다.

‘더 이상 아낄 때가 아니다. 서민서, 강전구, 박민희를 시작으로… 나중에는 데미안 루드비히를 통해 더 넓은 세상에까지…….’

조금씩 조금씩, 타키넷의 영능학을 이 세상에 퍼트려야겠다.

띠링-

그때 마침 알림이 울렸다.

[사령관님, 호출하신 박민희 님이 도착했습니다. 먼저 올려 보낼까요?]

“응. 올려 보내.”

그 첫 번째 발걸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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