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58화 (58/212)

13. 절반만 받어

이성계의 활은 제 초능력으로도 그냥은 다룰 수가 없어요. 제가 던전에서 구한 특별한 용매로 그 난폭한 힘을 한 번 순화했기 때문에 겨우겨우 사용했지요.

결국 유물의 힘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그 힘에 잘 반응하는 특별한 물질이 필요한 겁니다.

고생길이 열린 거죠.

우리는 이제부터 전수조사를 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동원 가능한 모든 소재를 가지고 연구를 해야 돼요. 지구에서 나는 거나 던전에서 나는 거나 가리지 않고!

그러니까,

루드비히 가문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소재를 가져오세요. 제가 일일이 다 실험해 보겠습니다.

네? 그럼 연구진도 보낸다고요? 그건 상관없지만 실험 자체는 제가 해야 돼요. 제 초능력으로 일일이 다 살펴봐야 되는 거라서요.

내 이야기를 들은 데미안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답했다.

“일차적으로 한반도 내에서 수급할 수 있는 소재를 모두 동원할게요. 내일부터 순차적으로 도착할 겁니다. 그리고 다른 소재들도 차근차근 세계 각지에서 구해 오는 것으로 하죠.”

“좋습니다.”

“동원 가능한 모든 소재의 전수조사……. 이건 유물 연구를 떠나서 흥미로운 프로젝트예요. 뭔가 진전이 있을 때마다 바로바로 알려 줘요.”

“네. 하지만 언제 뭐가 걸릴지는 모르는 겁니다. 당장 내일일 수도 있고 내년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10년 뒤일 수도 있다는 말은 꿀꺽 삼키고 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편안하게 웃었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봐야죠. 저는 이걸 제가 성년으로 인정받기 위해 가문에 제출해야 하는, 자기 증명의 업으로 삼을 겁니다. 성실하게만 해 줘요. 틀림없이 뭐든 얻어 걸리기라도 하겠죠. 어디 같이 잘해 봐요.”

도련님은 상큼하게 웃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자기 증명의 업이라…….’

루드비히 가문은 끔찍한 가족 이기주의 집단이지만, 동시에 가문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아주 엄격하게 후대를 길러 내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물론 루드비히의 직계는 아무리 무능해도 그 누구보다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하지만 같은 직계끼리는 실력과 공헌도에 따라 명백한 차등이 존재했다.

루드비히의 직계로서 최초로 그 차등을 정하는 시험이 바로 ‘자기 증명의 업’이었다. 데미안은 그 자격 증명을 내가 하는 연구에 건 것이다.

몇 년이 걸릴 것을 각오한 과감한 투자.

어쩐지 요즘 들어 뻔질나게 내 집무실에 놀러 온다 싶더라니……. 도련님도 이 프로젝트에 나름 사활을 걸었던 모양이다.

‘그러지 말고 그냥 나를 초대해 줘도 되는데…….’

지금도 눈을 감으면 아른거린다.

저번에 봤던 바이올린. 그거 만져 보면 안 되나? 바이올린 켤 줄은 모르지만 [만상공감]이 있으니 어떻게든 될 거 같은데…….

슬리퍼도 저번에 신은 거 말고 다른 거 신어 보고 싶고 또 식기 세트도…….

머릿속에서 미생물처럼 바글바글 늘어나는 번뇌. 고개를 절레절레 털어서 겨우 날려 버렸다.

‘안 그래도 할 일 많다. 집중하자, 집중해.’

머리를 가볍게 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김용수 명장님 들여보내.”

“네.”

지시를 내리고 30초 정도 지나자 내 전속 비서관인 김세희 씨가 드래곤 공방의 주인인 김용수 명장을 모시고 들어왔다. 그들의 뒤로 이십 대 초반, 나와 또래로 보이는 청년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엄숙하게 따라 들어왔다.

김용수가 그 청년을 흘깃 가리키며 말했다.

“내 제자요. 동석 좀 하겠소.”

김용수의 제자가 나를 바라보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권했다. 김용수는 앉았지만 김용수의 제자는 그의 뒤편에 시립했다.

“어쩐 일로 부르셨나?”

김용수는 자리에 앉자마자 무뚝뚝하게 물었다.

나는 그에게 품에 넣고 있던 회칼을 꺼내 보여 주었다. 그걸 보는 순간 김용수의 눈빛에 반가움이 깃들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가 만든 회칼이었으니까.

“안 그래도 궁금했지. 본인이 직접 와서 만져 보고 가져가야 되는데, 다른 사람이 와서 대뜸 들고 가니 찜찜했어. 신랑 얼굴도 안 보여 주고 시집보낸 거 같아.”

“그래서 모셨습니다. 드릴 말씀도 있고요.”

앞에 내려놓은 회칼을 살피는 김용수의 낯에 희미하게 웃음이 걸렸다. 사령관 앞에서도 뻣뻣하기만 한 인간이 자기가 만든 칼을 보며 저렇게 좋아하다니. 스스로 보기에도 잘 나온 물건인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가 만들어 낸 필생의 역작일지도 몰랐다. 한 사람의 모든 역량과 역사가 담긴……. 그 정도로 잘 나온 물건이었다.

“이름은 지어 줬소?”

“네. ‘파도’라고 부르려고요.”

“파도… 잘 지었어. 어울리는 이름이네.”

하얀색도 아니고 푸른색도 아닌. 하얗게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파도를 닮은 검신. 이 어지러운 물결무늬를 지닌 회칼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손잡이 13cm, 칼날 길이 28cm.

청하보다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칼날 길이는 청하를 사용하며 느꼈던 아쉬움을 많이 채워 줄 것이었다.

“사령관님이 쓸 거라고 해서 내가 애 많이 썼어. 평소에 과도 들고 싸운다는 걸 알고 있어서 아예 괴물들 회 치기 딱 좋게 만들었거든.”

“확실히 그랬습니다. 형태는 회칼이지만 무서운 무기더군요.”

내 긍정의 말에 김용수가 씨익 웃었다. 그는 꼭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한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서 말했다.

“흐흐. 보이는 거 그 이상일걸? 여기 이 칼날의 무늬가 그냥 예쁘라고 만든 게 아니라…….”

“탱크도 가루로 만든다는 명장님의 초능력, [쇼크웨이브]를 썼죠? 진동을 흡수하고 기억하는 특수한 금속인 운디늄과 골렘강 이상의 탄성과 경도를 가진 킹슬라임강의 합금을 무지막지한 [쇼크웨이브]로 벼린 칼날. 그래서 이런 특이한 무늬가 나타났죠. 칼날 자체가 강력한 진동을 품고 있는 만큼 베인 부위가 포말처럼 흩어질 겁니다.”

“어……? 그, 그렇지. 근데 그게 다가 아니야! 여기 이 손잡이가 말이야…….”

“잡아 보는 순간 알았습니다. 저번에 만났을 때 그 짧은 순간에 제 손 모양을 완벽하게 숙지하셨다는 걸요. 칼자루를 쥐는 게 아니라 합체되는 것처럼 일체감이 들더군요. 무게중심도 완벽해서 그냥 쥐고 툭 가져다 대기만 해도 어지간한 건 죽죽 잘려 나갈 거예요.”

“…잘 아는구먼? 하지만 진짜 진수는 이 손잡이와 칼날이……!”

“공명하는 거죠. 칼날이 진동을 흡수 방출 하듯이 손잡이도 그렇게 설계가 되었어요. 실프목을 깎아 만들어서 역시나 진동을 흡수 방출 하는데, 그게 칼날의 진동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게 설계되었죠. 칼날에서 시작된 거센 진동이 손잡이를 지날 때쯤에는 기분 좋은 메아리처럼 부드러워질 거고, 반대로 손잡이로 보낸 산들바람 같은 진동이 칼끝에서는 태풍을 일으키겠죠. 물과 바람은 본래 나무들 속에서 서로 만나 조화를 이루는 법. 물의 정령의 힘이 깃들었다는 운디늄과 바람 정령의 힘이 깃들었다는 실프목의 만남은 정말 천재적인 발상이었습니다.”

김용수가 눈을 끔뻑였다.

어쩐지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거 줘 봐.”

파도를 넘기자, 붓을 꺼내서 칼 몸에 ‘파도’라는 글씨를 썼다. 바람처럼 흩날리는 필체. 보통 붓이 아닌지 칼 몸 위에 바로 적었을 뿐인데도 금색의 가느다란 글씨가 새겨졌다.

붓을 소중히 싸서 품에 넣은 김용수가 다시 내 손에 회칼을 들려 주며 조용히 물었다. 어쩐지 그의 눈 주위가 조금 붉어져 있었다.

“…대장간 일을 좀 했었나?”

“아뇨. 그건 아니지만 물건을 좀 볼 줄은 압니다.”

“좀이 아니지, 그 정도면.”

그러고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그럼 이제 전에 쓰던 과도는 어떻게 하나? 팔아 치우나?”

“아뇨. 계속 쓸 겁니다.”

“…양손에 들고 쓰려고? 왼손에는 웬 사슬을 든다면서?”

“그건 아닙니다. 무기가 여러 개여도 다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제 사전에 제가 쓰던 무기를 파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그런가?”

고개를 주억거리던 김용수는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쥐었다.

간절한 손길이 꼭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 같았다.

“잘 부탁해. 아니, 잘하겠지. 내 평생에 만든 놈보다 자기 무기를 완벽하게 파악하는 자는 사령관님 말고는 본 적이 없어. 녀석도 사령관님 같은 주인을 만나서 행복할 거야.”

이런 김용수의 반응에 놀랐는지, 김용수의 뒤에 서 있던 그의 제자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나와 김용수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그 기색을 느꼈는지, 빠르게 눈 주위를 훔친 김용수가 자신의 제자를 야단쳤다.

“이눔아! 뭘 두리번거리고 있어!”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시고 자시고, 기억이나 잘해 놔. 앞으로 사령관님 의뢰가 들어오면 제1순위로 맡아. 네 사형들한테도 다 그렇게 전해! 만약 사령관님이 일 시켰는데, ‘죄송하지만 다른 의뢰가 있어서 좀 기다리셔야…….’ 이딴 소리 하는 놈 있으면 당장 파문이라고!”

“예, 예! 알겠습니다.”

큼-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김용수가 나를 바라봤다. 표정은 계속 무뚝뚝한 체하지만 눈동자만큼은 촉촉하게 깊어져 있었다.

“그래. 그 밖에 또 할 말이 뭐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고 뻔뻔한 기색에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할 타이밍도 잃고 말았다. 그래서 눈 몇 번 깜빡이고 입 한 번 쩝 다시고는 말했다.

“내일부터 합금 가능한 금속들과 레시피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것들로 제가 말하는 장비들을 좀 만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게 언뜻 보면 뭐 이런 물건을 만드나 싶을 수는 있는데, 제가 특수한 방법으로 또 가공을 할 계획이니까…….”

“하지.”

김용수는 짧게 답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 얘기는 그게 끝이요?”

“아… 네. 일단은 그렇습니다.”

김용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돌아서면서 자기 제자한테 또 한마디 했다.

“그리고 이눔아, 앞으로 사령관님한테는 공임 절반만 받아라.”

“네에?”

“뭐, 귓구멍이 막혔어?”

“아니, 아닙니다. 공임 절반만 받겠습니다.”

“흥.”

뭐, 뭐지… 이 갑작스럽고 생색이 전혀 없다 못해 당황스럽기까지 한 이 호의는?

고맙다고 해야 할 타이밍 같은데.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표정은 무섭기만 하니 말을 꺼내기도 쉽지가 않았다.

“고, 고맙습니다.”

그래도 억지로 뒤통수에 대고 고맙다고 말했는데 김용수는 대답도 않고 휭-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나는 [만상공감]으로 들었다. 그가 입속으로 중얼거린 말을.

‘고맙기는 니미. 내가 고맙지, 제기랄. 나보다 내 걸 더 잘 알아봐 주는데, 염병…….’

노인장의 심장은 쿵쿵쿵 뛰고 있었다. 순수한 기쁨이 느껴지는, 그런 감각이었다.

* * *

하준광, 데미안, 권승리와 협상을 끝낸 바로 다음 날부터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용산 2구역의 유력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예비역 동대장들 및 직할대 지휘관들을 면담하고, 용산 2구역의 상황을 보고받고…….

그러는 와중에 몸이 달을 대로 달은 데미안, 하준광과 계속 만나서 유물 연구 일정과 계획을 논의하고……. 그러다 보니 그냥 보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일단 지역 유력자들과의 인사는 괜찮았다. 어쩐 일인지 갑자기 나에게 극도로 호의적으로 변한 김용수는 서부 드래곤힐은 물론이고 다른 동에까지 그 영향력이 미치는 사람이었고, 그 덕분에 많은 유력자가 나에게 우호적으로 다가왔다. 애초에 내가 주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있었던 것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한편 예비역 동대장들과 직할대 지휘관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눈앞에서는 예예 하고 지시 사항을 잘 따르는 것 같지만, 낙하산이나 다름없는 나에 대한 불만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특히나 초상문, 땅울문, 관혼 임가 출신의 신임 동대장들은 내 임관에 불만이 상당히 컸었다는 이야기도 들었기 때문에 더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어떻게 사령관으로서 신고식은 다 치른 것 같았다.

정신없이 지나고 나니 갑자기 여유가 찾아왔다.

그때 나는 문득 모든 게 신기하고 꿈 같다는 생각에 잠겨 들었다.

‘이게 되네?’

분명 계획을 하긴 했다. 노트에도 적었다.

귀환자들과 맞서겠다고. 그러기 위해서 세력을 형성할 거라고.

근데 정말 그 초석이 닦였다. 그것도 아주 튼튼한 반석으로다가.

‘내가 용산 2지역의 사령관이라니…….’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반 평짜리 고시원에 구겨져 자던 내가? 하… 이래서 인생은 한 방이라는 건가?

어쩐지 감격스러운 기분을 만끽하며, 나는 다음 일정을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이제 대충 사령관으로서 해야 하는 기본적인 일들은 했으니까. 내 측근들을 챙겨야지.”

사령관 자리는 결국 초석일 뿐이다.

갑자기 주어진 권력도 좋지만, 역시 개인적으로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 측근들이 중요한 법.

나는 내 측근의 후보들을 떠올려 보았다.

‘일단 서민서, 너는 무조건 들어가야지.’

고아에 친구도 별로 없는 내겐 가족과도 같은 녀석이었다. 부귀영화와 생존을 위한 내 미래 계획. 거기에서 빠지게 둘 순 없다. 싫다고 해도 너는 넣는다. 어디 가서 빌빌대다가 죽는 꼴은 못 보겠거든.

‘그리고 보물 사냥꾼 김민수랑 무게 증가 능력자 강전구. 그리고… 박민희 팀장님?’

내가 사령관이 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들도 포섭만 할 수 있다면 큰 힘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나만의 인명부를 만들어 가던 순간, 문득 핸드폰이 울렸다.

‘권승리?’

무혼 권가의 외동딸. 인류의 영웅. 나에게 이 세상의 비밀을 알려 주기로 약속한 권승리 아가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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