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지구에도 다 있어요
협상이 끝나고 하준광이 말했다.
“흐흐. 이거 하나만 알아 둬. 우리 협회에도 유물은 딱 두 개밖에 없어. 그걸 만져 보게 해 주는 거야. 이만큼 밀어주는데 실망시키지 말라고.”
어차피 다른 대안도 없으면서 센 척하기는……. ‘닥치고 유물이나 내놔.’라고 말하고 싶지만 물론 그러지 않는다.
얼굴에는 자본주의의 미소를 띠우고 답한다.
“물론이죠. 열과 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이 얼마나 고마운 분인가? 유물을 만지게 해 준다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유물이다. 그냥 만지기만 해도 주르르 감동의 눈물이 흐른다. 이건 사람이 아니라 신이 만든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유물을 만지게 해 준다니……. 물고 뜯고 핥아도 연구 목적이었다고만 하면 만사 오케이.
아아,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또 어쩌면 이번처럼 크게 성장하는 계기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고.
하지만 그것의 실제 가치는 그런 내 개인의 만족과 성장 그 이상이었다.
‘결국 이 세상의 권력 구도는 몇 차례나 바뀌게 되어 있어.’
지금만 보면 하준광의 치세가 끝날 것 같지 않지만 역사는 그렇게 흐르지 않았다. 심지어 회귀자 무리들이 음지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지금, 권력의 지각변동은 더 빠르게 더 자주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혼란기에, 중요한 자원 근처에 있는 자에겐 어마어마한 기회가 찾아온다.
‘촉망받는 신예 정도였던 전두환이가 대통령을 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기회가 주어지는 게 바로 역사의 급변기이니까.’
물론 까딱 잘못하면 모가지가 날아가는 수도 있다. 연구 성과가 나지 않을 때 하준광과 데미안이 어디까지 인내해 줄 것인가? 만약 혼란이 발생했을 때, 누군가 유물을 빼앗으려고 한다면 내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온통 리스크투성이. 호랑이 등에 탄 형세.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전생의 최치국은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칼 한 자루를 들고 발록과 맞섰잖아?’
이미 한국에서 이름을 떨치던 강자들이 모두 패배하여 갈가리 찢겨 죽은 상황. 발록이라는 괴물 하나 때문에 서울이 패망해 가던 그런 시절이었다.
최치국은 촉망받는 신예였으나 레전드급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모두가 최치국의 패배를 예측했고 심지어 최치국 본인도 스스로 패배를 예상했노라고 후일 인터뷰에서 말했다.
하지만 그는 싸웠고 이겼다.
나는 그런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그건 그때 감당하기로 하고, 일단 지금은 유물을 만진다. 그리고 모든 경우의 수를 미리 떠올려 본다. 예방접종을 맞듯이.
‘여차하면 그냥 들고 튀거나 타키넷에 팔아 버릴 수도 있어. 이걸 빌미로 협상을 할 수도 있고… 하준광이가 미쳐 날뛰면, 최악의 경우엔 타키넷에서 맹독을 사서 놈을 쓱싹해 버릴 수도 있어. 상상에 한계를 두지 마.’
나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하준광과 악수를 나눴다.
곧이어 데미안 도련님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유물이라면 세 점까지 제공 가능합니다. 그 밖에 필요한 자원이나 기술 등 어떤 것이든 제 재량으로 가능한 선에서 무엇이든 제공해 드리죠.”
역시 루드비히다! 하준광보다 유물이 하나 더 많네.
거기에 루드비히의 자원과 기술이라. 그것도 너무나 좋다. 안 그래도 서부 드래곤힐동의 공방 거리를 발전시키려면 이것저것 필요한데.
‘커다란 과자를 먹다 보면 부스러기도 많이 떨어지는 법이지.’
기분 좋게 시선을 돌리자, 이번엔 권승리였다.
그녀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새처럼 무감정해 보이지만 그녀는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게 분명했다. 가슴팍에 느껴지는 답답함과 살갗을 간지럽히는 꺼림칙한 감각이 그녀의 복잡한 심사를 역설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나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무혼 권가가 소유 중인 유물 하나를 제공하겠습니다. 다만 저희는 실전에서 행해지는 연구를 원합니다. 마침 대통령께서 주신 임무가 있으니 던전 공략과 연구를 병행하면 되겠군요. 공략 과정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 일체는 저희 무혼 권가가 부담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도 좋다. 임무 성공에 따른 보상도 있을 것이고, 실전을 통해 유물 사용에 대한 감각을 기를 수 있으니까. 그것도 아주 안전하게.
이제 마무리다. 나는 웃음을 띠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럼 말씀하신 보좌진이 도착하는 대로 연구를 진행해 보겠습니다.”
“그래. 유물은 보좌진을 통해서 같이 보내도록 하지. 잘 부탁해.”
“네. 맡겨 주십시오.”
말이 좋아서 보좌진이지 사실 감시역이다.
그래. 열심히 감시하라고.
내가 뭘 하는지, 얼마나 알아볼지는 모르겠지만.
하준광, 데미안, 권승리가 차례로 나가고, 나는 소파에 기대 한숨을 돌렸다. 일단 어떻게 넘기기는 했다.
‘이제 빡세게 움직여야겠네.’
할 일이 정말 많다. 타키넷 등급도 올리고, 용산 2지역도 발전시키고, 김민수나 강전구 같은 인재들과의 관계도 돈독히 하고… 서민서도 좀 강하게 키워야겠다.
그러는 틈틈이 장비도 업그레이드해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을 유물 통제에 대한 연구와 버무려서 지원을 최대한 뜯어내야 했다. 어휴… 빡세다, 빡세.
잠깐 한숨 돌리는 시간도 아까워서 얼른 소파를 박차고 일어서려는 찰나, 갑자기 머릿속으로 텔레파시 하나가 날아들었다.
방금 전에도 들었던 목소리였다.
[잠깐, 얘기 좀 나눌까요?]
‘권승리?’
[네. 접니다.]
하… 이건 귀환 직전에 들었던 텔레파시와 아주아주 비슷한 방식이었다. 소리 내서 말할 필요 없이, 내 머릿속을 직접 들여다보고 대답이 오는 텔레파시. 휘오가 가지를 통해 내 의지를 읽는 것보다도 훨씬 더 고차원적이었다.
일반적인 텔레파시와 비교해도 훨씬 은밀해서 텔레파시를 도청하는 오파츠가 있다고 해도 이건 도청하지 못할 것이었다. 사실상 이건 텔레파시와 독심술이 합쳐진 형태의 기술이었으니까. 아니, 기술이라기보다는 고차원적인 초능력 같다.
설마 귀환 직전에 들었던 텔레파시가 권승리? 아니. 아냐. 그렇다기에는 그때랑은 느낌이 달라.
마음을 얼핏 읽기는 하지만, 그때처럼 내 속마음 깊숙한 곳까지는 읽지 못하고 있다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만 전달되도록 조절이 충분히 가능했다.
아니나 다를까 권승리는 내 생각을 읽지 못했다.
[잠깐만요… 잘 안들려요. 마누스를 이용해서 목소리를 전달하는 느낌으로… 하고 싶은 말을 선명하게 떠올리며 마누스를 공명시켜 보세요.]
요구 사항도 많네.
그치만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궁금하니까, 일단 하라는 대로 했다. 하고 싶은 말을 떠올리며 영력을 공명시켰다.
‘이제 들립니까?’
[아! 들립니다. 음… 근데 엄청나게 크고 명확하게 들리네요. 조금만 작게 말해 주셔도 될 것 같아요.]
어지간히 소리가 크게 들렸는지 권승리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당황이 느껴졌다.
하긴, 노이즈투성이인 마누스와 순수한 영력은 질적인 차이가 엄청나지.
아무튼 하라는 대로 더 작게 다시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갑자기 이런 짓을 한 겁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단도직입.’
[하지 마십쇼.]
‘예?’
[유물을 통제하는 연구, 하지 마세요. 위험해요.]
왤까?
그러고 보면 권승리는 줄곧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게 유물 통제법을 데미안, 하준광과 공유하게 되어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권승리는 줄곧 유물 연구가 아닌 탐사와 던전 공략에 무게를 싣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왜?
유물 통제법을 얻으면 아무튼 좋은 거 아냐? 다른 이들과 공유하게 된다고 반대까지 할 일인가?
이런 내 의문에 권승리는 단 한마디로 답했다.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답이었다.
[당신… 다른 세계를 오가고 있죠?]
아…….
머릿속에서 벼락이 쳤다.
만안자萬眼子가 활동을 시작했구나!
이 순간이 올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고 또 껄끄러웠다.
누구든 만안자의 존재를 안다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 생에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구상의 그 무엇도 만안자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권승리, 최치국 등이 속해 있었던 아틀라스 클럽이 지구 전역에 독재에 준하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만안자의 감시 능력이 있었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빅 브라더.
그가 활동을 개시한 이상 내가 휘오를 이용해 타키넷을 오간다는 사실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그나마 지구 차원 외부에 있는 타키넷까지는 그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랄까?
머릿속이 헝클어지듯 복잡했지만, 권승리에게 하는 대답에선 여유를 가장했다.
‘놀랍네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무혼 권가의 정보력을 얕보지 마세요.]
무혼 권가가 아니라 만안자의 정보력이겠지. 아무튼 나는 계속 모르는 척을 했다.
‘그런데 제가 다른 세상을 오가고 있다는 것과 유물 통제를 연구하지 말라는 게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왜냐면 당신은… 유물 통제를 위해서 다른 세상의 물건을 잔뜩 사 올 생각이니까.]
와, 들켰다. 아니… 하긴, 상식적으로 당연한 판단인 건가? 유물을 통제하는 데 필요한 강력한 자원들을 지구에서 수급하기란 불가능할 것이었으니까.
권승리와 회귀자들은 쇄국 정책을 추진 중이다. 그러니 당연히 유물 통제 연구가 탐탁지 않을 것이다. 그걸 하려면 정말 막대한 물자와 기술을 교류해야 할 테니까.
나는 권승리의 반대를 이해했지만 그걸 드러내지는 않고 끝까지 능청을 떨었다.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좀 사면 안 됩니까?”
와, 내가 그 권승리에게 삐진 듯한 목소리를?
상황과 맞지 않는 감개가 등줄기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다.
이들이 날 방해할 때조차, 내 머릿속에는 그들이 지난 생에 이루었던 빛나는 업적이 가득해서… 자꾸 황송한 기분이 든다. 하… 병이네, 이것도.
[외차원과 교류하면 교류할수록, 외차원과 우리 차원의 경계가 희미해집니다. 침략은 더 가속화되고 우리는 그걸 막을 수 없게 될 겁니다. 이건 친애의 마음을 담은 조언이자, 단장斷腸의 마음으로 하는 경고입니다.]
거 말 한번 살벌하다. 창자를 끊는 마음으로 경고를 하다니.
그런 말을 들으니 고집을 꺾고 따라야 할 것 같았다. 과거 나의 영웅이었던 이들 중 하나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이번 생은 그렇게 살지 않기로 벌써 다짐했는 걸.
그러자 문득 서러웠다.
오늘은 진짜 하준광이도 그렇고 징하게 협박을 해 대네.
소시민 주제에 영웅 행세 한다고 왕따라도 당하는 거야, 뭐야?
‘…근데 그러면 저는 어떻게 강해집니까? 저는 장비가 좋아야 강해질 수 있는데, 지구의 자원과 기술은 한계가 있단 말입니다.’
진짜 너무해.
나한테 타키넷을 쓰지 말라는 건 장기 두는 데에 차포상마사 다 떼고 싸우라는 거잖아?
내 목소리에 실린 진솔한 억울함을 느꼈는지 권승리의 어조도 조금 누그러졌다.
[외차원의 힘을 빌릴 필요 없어요.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지구에도 외차원에 지지 않을 훌륭한 기술과 자원들이 있어요. 어떻게 보면 유물도 그중의 하나일 뿐이죠. 우리 무혼 권가는 그런 각종 비밀스러운 전승을 많이 물려받았습니다. 외차원과의 교류를 중단하신다면 하준광 협회장조차 알지 못할 이 세계의 비밀을… 그 진수를! 보여 드릴게요.]
뭐? 그런 게 있어?
그건 눈을 번쩍 뜨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그러면… 타키넷의 문명과 지구의 비밀을 섞으면 더 대단한 게 나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