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느이는 이런 거 할 줄 아니?
“아, 근데 자존심 상하네.”
처음에는 그냥 이게 뭔 상황인가 싶었다.
하지만 점차 생각이 정리가 되면서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데미안 루드비히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낼 때마다 속은 더 부글부글 끓었다.
데미안 루드비히.
미래에 녀석은 정말 엄청난 유명 인사였다.
그 엄청난 재능과 지혜는 말할 것도 없었고, 파도 파도 계속 나오는 흥미로운 개인사도 그랬지만… 결국엔 파란만장하고 비극적이었던 최후로 인해 전설이 된 인물이었다. 미국의 대통령 존 F. 케네디나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같은 반열. 아니, 어쩌면 그 이상.
데미안 루드비히는 대격변 이후 가장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기고 젊은 나이에 훌쩍 세상을 떠났다.
근데 그건 나중 얘기고.
“이렇게 보면 그냥 애잖아……?”
애는 잠든 모습을 볼 때, 진짜 애 같다. 누군가를 지켜 줘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보호를 받아야 하는 나이라는 걸 선명하게 깨닫게 되는 순간.
데미안이 나중에 겪게 될 파란만장하고 비극적인 미래? 그건 뭐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래도 지금은 그냥 한참 어린 꼬마잖아? 근데 그런 녀석이 한밤중에 찾아와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자는 동안 손을 꼭 잡고 있으라고? 그래야 리디아가 나를 지켜 줄 거라고? 하……!’
제한적으로나마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이 도련님이 뭘 보긴 봤으니까 이러는 것일 테지만… 역시나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 인정한다. 비범한 사람은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어깨에 짊어진 무게가 다른 거겠지. 지난 생에 너는 스물일곱 살에 죽었지만, 그때까지 네가 경험하고 밝혀 낸 세상의 비밀은 100살 노인의 그것보다 훨씬 깊고 농밀했겠지.
그러니 고작 열네 살이면서도 나를 지키겠다고 자신의 안전과 건강까지도 주저 없이 내어놓는 배포를 보인 거겠지.
이전 같았으면 그냥 감탄하고 말았을 것이다. ‘역시 나 같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인물이구나.’ 하고.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영웅들과 어깨를 견주기로 마음먹은 내가, 아무리 데미안 루드비히라고 해도 아직 14살에 불과한 꼬마 아이의 보호를 받는다?
녀석이 이렇게 끙끙 앓는 꼴까지 보면서?
…까불지 말라고.
나는 품고 있는 휘오의 나뭇가지를 잡고 속삭였다.
‘까막아, 그동안 구매처 좀 찾아 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덜 깬 목소리로 까막이가 답했다. 잠을 털어 내려고 하는지 큼큼 목을 가다듬고 푸르르 고개를 터는 소리가 섞여서 들렸다.
[아… 형! 안 그래도 아침에 보고하려고 했어요. 켈록! 큼! 적어 주신 품목들 중에 세 개를 찾아 놨어요. 형이 강조했던 어… 영력 회복 주사하고 영력 강화 주사 그리고 내구성 강화 주사. 이렇게 세 가지예요.]
‘왜 다 주사 형태야?’
[그게 제일 가성비가 좋거든요. 운 좋게 뛰어난 주사 기술이 발전한 문명에서 온 친구를 만나서요.]
‘그래? 개당 가격은?’
[효과가 확실한 만큼 단가는 좀 센 편이에요. 세 개들이 세트가 15알. 나름 유통망이 확실한 친구라서 가격을 후려칠 수도 없어요.]
매번 가격을 후려치는 행운을 기대할 수는 없다. 특히나 이렇게 물건을 급하게 구해야 할 때는.
‘두 세트만 사서 보내. 5분 내로.’
[옙! 사러 가는 길입니다! 근데 형.]
‘왜?’
[그게 급하게 필요한 거면 막 싸우는 상황인가 봐요? 어떤 싸움인지 물어봐도 돼요? 네? 맨날 혼자 여기 있다 보니까 지구 소식도 막 궁금하고 그래서요… 히히.]
나는 미간을 살며시 찌푸렸다.
‘얘가 또 이러네.’
저번에 허묵과 서민서가 다녀간 이후로 자꾸 농담도 던지고 실없이 대화도 나누고 그러려고 한다.
은근슬쩍 편하게 지내려고 혈안이 된 것이다.
아주 빠졌지, 자식이. 내가 네 친구냐?
나는 매정하게 대꾸해 줬다.
‘신경 꺼.’
[혀엉, 열심히 일할 테니 살짝만 알려 주시면 안돼요오? 저 진짜 궁금해요.]
이게 애교를 부려?
휴… 그래도 나름 고생하고 있다는 걸 아니까 또 마냥 모질게 굴지는 못하겠고… 살짝만 알려 줄까?
‘14살짜리 꼬마 애를 지킬 일이 있어서 그래. 이렇게만 알고 있어.’
[오? 14살이요?]
‘그래.’
[저랑 또래네요? 걔가 막 위험해요? 그래서 영력 회복제에 강화제까지 먹고 막 싸우려고 하는 거예요? 올~ 형, 멋진데요?]
‘…….’
[누구예요? 남자예요, 여자예요? 이름은 뭐예요? 아, 걔는 좋겠다. 누가 지켜 주기도 하고.]
‘…시끄러! 빨리 사 오라는 거나 사 와, 인마!’
[네, 네. 갑니다. 가고 있어요!]
자기 또래라니까 더 신이 나서 떠드는 녀석에게 한 번 와락 소리를 질러 줬더니 까막이는 금방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에 나는 살살 솟아나는 양심을 다독였다.
‘음… 또래였어?’
음… 아냐. 원래 착하게 대해 줘야 착하게 크는 애들도 있고, 뭐 좀 오히려 짓밟아 줘야 잘 크는 애들도 있고 그런 거지. 음… 그래. 그렇고 말고.
‘그래도 이번 일 잘 처리하면 까막이 숙소나 좀 챙겨 줘야겠다. 맨날 노숙하게 둘 수는 없으니까. 큼…….’
참 기분 이상해지는 날이었다.
그 대단한 인물인 데미안 루드비히가 가련한 꼬마 아이로 보이지를 않나, 그 1류 킬러 까막이한테 미안해지질 않나……. 지난 생에 놈한테 죽은 능력자가 몇인데. 그중에 나랑 안면 있던 전우도 몇이나 됐는데…….
근데 지금 보니 다 애들이다.
상황이 바뀌면 사람도 바뀌고 또 사람을 보는 관점도 바뀐다.
‘중요한 건 지난 생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이 흐름을 받아들이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절규를 삼킨 밤을 뒤집어쓰고,
왼손에 악몽사슬을 감고,
거인창의 가방을 열어 어깨에 비껴 걸고,
이성계의 활이 담긴 상자를 꺼내 옆에 두고,
청하는 무릎에 올려놓았다.
그 상태로 비서 겸 부관인 김세희 씨를 불렀다.
“김세희 씨.”
리디아가 틀어막고 있는 통로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그녀는 내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고개를 번쩍 들고 대답했다.
“네!”
“지금 공방 거리로 달려가서 회칼 수령해요. 지금쯤 다 됐을 겁니다. 긴급 상황이니까 공임은 나중에 준다고 하고 차용증만 써 주고 바로 가져와요.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이 새벽에 뜬금없는 명령이었지만 김세희는 반문하지 않고 바로 뛰어나갔다.
시원시원한 게 맘에 쏙 드네.
여기까지 처리하고 나니 까막이에게 연락이 왔다. 녀석도 뛰었는지 숨이 턱 끝에 차올라 있었다.
[하악, 하아… 앞에 왔어요. 30알 보내 주시면… 후… 즉시 구매 가능합니다.]
‘휘오, 보내 줘.’
부르르르-
품에 넣은 세계수의 가지가 흔들리더니 내 손바닥 위로 3자루의 주사기가 담긴 상자 두 개가 떨어졌다.
나는 얼른 상자 하나를 까서 청하와 함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뭐 하십니까?”
통로 앞에 버티고 서서 정면만 바라보고 있던 리디아 위트필드가 내게 물었다.
[만상공감]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감각은 드라이아이스를 연상케 했다. 펄펄 끓는 분노를 차갑게 가라앉히고 손을 대는 것은 그 무엇이든 차갑게 물어뜯을 준비를 하는 드라이아이스.
무서워 죽겠네.
“전투 준비를 합니다.”
내 대답에 리디아는 눈썹을 모으며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의 감각으로는 아무것도 잡아내지 못했다는 말이겠지. 실은 나도 그렇다.
다시 한번 [만상공감]의 범위를 넓혀 보았다. 회귀한 지 반년도 안 됐는데 내 초능력은 벌써 지난 생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성장해 있었다.
덕분에 땀을 주르르 흘릴 정도로 열심히 집중하면 어찌어찌 지역 사령부 건물 내부 정도는 [만상공감]으로 느끼는 게 가능했다. 바닥 면적이 100평에 5층짜리 건물이라는 걸 생각하면 절대 작은 범위는 아니었다.
상황실, 3분 대기조, 당직 휴게실, 근무자 숙소, 사령관 직할대, 직할 호위 팀 생활관, 통성명은커녕 서로 안면도 제대로 못 익힌 부하들을 감각으로 하나하나 구분해 보았지만, 이상한 낌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부가 아니면 외부라는 소리지.’
나는 창문을 향해 악몽사슬을 던졌다.
휘릭- 탁!
사슬 끝에 달린 갈고리가 문틀에 찍히는 즉시 당겨서 창문을 열었다.
드르륵-!
그런데 문을 엶과 동시에 내 뺨으로 한기가 훅 끼쳐 왔다. 관용적인 표현이 아니라 숨이 하얗게 얼어붙을 정도의 진짜 한기였다.
리디아 위트필드가 말했다.
“문 다시 닫아.”
그 서슬 퍼런 기세에 턱이 살짝 떨렸지만,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저격의 위험보다 미리 대비하지 못하는 위험이 훨씬 큽니다.”
그리고 손목을 휘둘러 내 집무실에 연결된 모든 창문을 열어젖혔다.
사방에 커다란 창문이 있는 구조여서 다 열어 놓고 나니까 한옥에 들어 앉은 듯 시원한 느낌마저 들었다. 깜깜한 밤들이 사방 창문을 통해 넘실넘실 파도치는 것 같다.
리디아가 나를 무섭게 노려봤지만, 내 말이 일리 있다고 여겼는지 행동을 막지는 않았다.
나는 그대로 창밖을 살폈다. 오른손은 이성계의 활을 숨긴 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여차하면 주저 말고 써야 돼.’
조금도 안일해서는 안 된다. 미래의 편린을 읽는 데미안 루드비히가 이러고 찾아올 정도면 절대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뭔가 있다. 분명히 오늘 밤, 무슨 일이 벌어진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파도라도 타듯이 진동음이 퍼져 나간다.
나도, 데미안 루드비히의 경호 팀도, 리디아도, 복도에 주저앉아 있던 내 직할 호위대도 저마다 핸드폰을 꺼내 들고 경보 메시지를 읽었다.
- [긴급 경보] 경복궁에서 발생한 소형 폭풍이 남하 중.
- [긴급 경보] 단순한 폭풍이 아닌 것으로 확인! 폭풍을 소멸시키려던 1급 바람 계열 능력자 전사! 변종 괴물이거나 차원 이상 현상일 가능성이 유력! 경복궁 이남 지역 소개령 발동!
웨에에에엥!
붉은빛이 번뜩이고.
동시에 사방에서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내 집무실에서는 격앙된 무전이 흘러나왔다.
- 여기는 수도 방위 본부! 여기는 수도 방위 본부! 각 지역 사령관들은 즉시 응답하라.
- 여기는 수도 방위 본부! 여기는 수도 방위 본부! 용산구는 즉시 소개 작전을 실시하라!
- 으악! 빌어먹을! 막을 수가 없어! 저거 대체 뭐냐고!
귀를 때리는 온갖 소음.
‘시작됐다.’
나는 일단 무릎에 올려놓은 상자에서 주사기를 하나씩 꺼냈다.
영력 회복 주사를 왼쪽 가슴 위에 꽂는다. 탄산처럼 짜릿한 것이 심장으로 밀려들어 왔다. 이윽고 심장박동을 따라 전신으로 영력이 퍼져 나갔다. 잠시 기다렸다가 영력 강화 주사와 내구성 강화 주사는 두 개를 한꺼번에 심장에 꽂았다.
“후우!”
짜릿하고 아프고… 아무튼 짜릿하다.
나는 고개를 푸르르 털어서 주사의 이물감을 날려 버리고 오른손으로 이성계의 활을 보관한 상자의 잠금장치를 열었다.
딸깍.
상자를 열기 전에는 깊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경복궁 방향으로 열린 창문으로는 빠르게 다가오는 폭풍이 분명히 보였다. 그건 정확히 직선으로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경로에 걸린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만상공감]을 최대한 발휘했다. 직접 닿지 않으니 주변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라도 폭풍의 실체를 파헤쳐 보려 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이게 대체 어떻게?’
글쎄…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는 알 수 없지만, 바람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산천초목이… 생명이 없는 무생물들마저 벌벌 떨고 있는 것만 같은 이 끔찍한 감각. 세계 자체를 부정하는 끔찍하고 두려운 무언가가 다가오는 듯한 감각.
나는 전에도 이런 것을 느껴 본 적이 있었다.
‘어비스 게이트…….’
지금 다가오는 건 폭풍이 아니었다.
차원의 균열이 마치 파도처럼 이어지고 있는 것뿐이다. 찢어지고 깨어지는 차원 탓에 바람이 불고 빛이 번쩍이는 것뿐. 폭풍처럼 보일 뿐, 그 본질은 폭풍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분명 닫았는데…….’
경복궁에서 시작된 어비스 게이트. 하지만 그 게이트는 내가 분명 세종대왕의 어보를 희생해 가며 닫지 않았나? 저게 어떻게 다시 열린 거지? 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거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의문을 풀 시간이 없었다.
“음… 으으으… 리디아……!”
소란을 느꼈는지 혼곤하게 잠들어 있던 데미안이 몸을 일으켰다. 녀석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곤 목숨을 걸고서라도 저 폭풍을 저지하라고 리디아에게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리디아는 그 명령을 거부했다.
“도련님, 저는 도련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 가주님께서 제게 내린 명령은 오직 하나. 도련님의 안전입니다.”
리디아는 폭풍에 맞설 마음이 없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어후… 눈빛 살벌한 거 봐.’
리디아는 데미안의 경호 팀을 다 죽여서라도 데미안을 데리고 도망을 치려고 작정을 한 게 틀림없었다.
데미안도 그걸 느꼈는지 내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갈 땐 가더라도… 얘는 꼭 데려가야 될 거야. 버리려면 둘 다 버리고 구하려면 둘 다 구해.”
“도련님!”
데미안과 리디아의 눈빛이 서로 부딪혔다. 그렇게 폭풍도, 둘 사이의 기세도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 나는 데미안의 손을 살며시 놓고 녀석의 머리를 툭 눌러 주었다.
“어?”
데미안은 당황하고
“저, 저게?”
리디아는 황당해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반응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됐어. 그냥 자던 꿀잠이나 마저 주무세요.”
끼이익-
나무 상자의 문을 열었다. 그 순간 훅- 하고 감겨 오는 진득한 영력.
검은색 영기가 자욱하게 깔리고, 붉게 빛나는 이성계의 활이 내 손에 잡힌다.
주머니에서 꺼낸 활깍지를 엄지손가락에 끼고 타키넷에서 함께 제작한 화살 하나를 시위에 걸었다.
숨은 전혀 쉬지 않았다.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의식이 들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유물의 힘을 거스르지 않고 시위를 당겼다. 둑을 허물듯, 있는 영력을 전부 쏟아부으니 시위가 20cm쯤 당겨졌다.
나는 천천히 폭풍의 중심부. 차원의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어비스 게이트의 중심부를 겨냥하고, 시위를 놓았다.
훅-!
검은 섬전이 폭풍의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거대한 파괴를 일으키던 폭풍이 바람 앞의 촛불이 꺼지듯 돌연 사라져 버렸다.
“어?”
“으엉?”
그건 너무 갑작스러웠다. 눈앞에 있던 동전이 사라지는 마술처럼 갑자기 폭풍이 사라져 버리다니? 다들 체면을 잊고 입으로 이상한 소리만 흘렸다.
하지만 잠시 뒤,
콰르릉! 쾅! 쾅!
거대한 천둥소리와 함께 밝은 빛이 쏟아지고 그 한가운데로 검디검은 글자가 벼락처럼 새겨졌다. 그사이로 산산조각이 난 회색 촉수의 피와 살점이 후드득 떨어지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쏴아아아아-
다시 평온해진 하늘에서는 별안간 소나기가 쏟아졌다.
다들 할 말을 잊고 빗소리 가득한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무전이 미친 듯이 울렸다.
- 폭풍 소멸! 폭풍 소멸!
- 용산구 2지역 사령 본부에서 뭔가가 날아갔어!
- 2지역 사령관! 응답해! 2지역 사령관!
- 2지역… 에이, 씨! 이봐! 소시민 사령관! 빨리 보고 좀!
웅성웅성 울리는 소리들.
하지만 귓속을 가득 채우는 삐이이 하는 이명 때문에 제대로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나는 흐릿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내 비서인 김세희 씨가 눈에 들어왔다. 손에는 보자기에 싸인 상자 하나를 들고, 빨갛게 상기된 얼굴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등을 바짝 곧추세우고 나에게 집중한다.
나는 다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휘… 지휘를 맡아…….”
거기까지 말하는데 눈앞이 깜깜해졌다.
“소시민 사령관!”
내 어깨를 붙드는 작은 손길이 있었다. 도련님인가……?
어땠어, 인마?
느이는 이런 거 할 줄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