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서부 드래곤힐동의 대장장이
던전이란, 지구라는 해안에서 좌초된 난파선과 같다.
난파선에 타고 있는 건 8할이 이미 멸망한 차원의 잔해.
자신의 본질조차 잊어버린 채 머나먼 지구까지 흘러들어 온 괴물들.
그들은 필연적으로 안정된 차원을 갈망하며 침략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이 타고 온 난파선은 말하자면 해안가 암초에 걸린 상태였다. 해안에 오르고 싶어도 강력한 차원 격류 탓에 엄두가 안 나는 위태로운 상황.
막상 게이트가 열려도 던전 브레이크가 쉬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죽음조차 무릅쓰고 차원 격류 속으로 뛰어든다면 어떨까?
사실 위험만 감수한다면 언제든 난파선에서 뛰어내려 육지로 헤엄칠 수 있는 법. 당장 눈앞에서 다른 난파선이 하나둘씩 파괴되고 있는 게 보이고, 자신이 타고 있는 난파선이 곧 부서질 게 분명하다면?
그럼 그들이 취할 행동은 뻔했다.
괴물들의 반격은 용산 2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던전을 절반쯤 소멸시켰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우우웅-!
웅-!
붉게 물드는 게이트와 곳곳에서 뛰쳐나오는 괴물들. 급격하게 소멸한 던전들을 보며 놈들도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육삼공 사태가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입장에서 일제히 붉게 물드는 게이트는 트라우마를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
“억지로 게이트를 열고 나온 괴물들이다! 평소보다 현저히 약해져 있어! 박살 내!”
그때부터 시가전이 시작되었다.
나는 거인창을 아공간 가방에 처박은 채 청하를 들고 뛰어나갔다.
쓰르르릉- 쓰르륵-!
아… 이걸 뭐라고 해야 될까? 인챈트되어 새롭게 태어난 청하는 아주 묵직한 손맛을 보여 주었다. 무게가 무거워졌다거나 날이 무뎌졌다거나 하는 종류의 묵직함이 아니었다. 그저 청하의 날이 단번에 중심 깊숙한 곳까지 갈라 버렸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기분 좋은 묵직함이었다.
“와! 우리가 오우거를 잡았어!”
“리자드맨 다섯 마리와 싸워 이겼다고!”
평소보다 현저하게 약해진 괴물들 덕에 사람들은 마치 슈퍼 파워라도 얻은 기분으로 신이 나서 전투를 즐겼다.
그렇게 기나긴 싸움이 이어졌다.
얼마나 싸웠을까?
피 분수로 샤워를 해서 걸어 다니기만 해도 허우적거리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을 때, 피투성이가 된 시민군들이 서로를 보며 미친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다가 진이 다 빠진 팔을 들어 또다시 전투를 준비할 때.
문득 소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음모오오오-!
체고만 3미터는 될 듯한 거대한 소들이 줄지어 달려들고 있었다.
“태, 태산소!”
자신만만하게 싸우던 헌터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아무리 약화되었다고 해도 태산소였다. 단지 그 무게만으로도 도시를 파괴할 수 있는 괴물.
그 거대한 소들은 이마에서 등줄기를 지나 꼬리까지 이어지는 라인을 따라 산맥을 얹고 있는 듯했다. 말 그대로 태산을 등에 얹은 채로 놈들은 달렸다.
쿵! 쿠르르르!
놈들이 달리는 길목을 막아서고 있던 4층 건물이 태산소 한 마리와 충돌하는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돌진 한 번으로 건물을 무너뜨린 태산소는 고개를 한 번 푸르륵 흔들고는 다시 무리를 따라 달렸다. 그런 놈이 무려 열 마리나 됐다.
압도적인 무게감.
압도적인 파괴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터무니없는 내구성.
태산소 열 마리가 모이면 오우거 스무 마리도 당해 내지 못한다는 말이 있는 공포스러운 무리 돌진.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뒤돌아 도망치고, 나는 그저 자리에 못 박힌 채 서서 몸을 떨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생각했다.
‘짜릿하다.’
[만상공감]을 타고 전해지는 저 거대한 소들의 감각이 강렬한 드럼 비트처럼, 스포츠카의 묵직한 엔진 소리처럼 나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빙그르르- 탁!
손등 위로 청하를 한 바퀴 돌렸다가 잡는다. [만상공감]으로 전해지는 감각에 집중했다. 나의 신체와 청하의 칼날, 돌진하는 놈들의 몸을 동시에 느끼며 구분하다 보면 저절로 눈앞에 길이 펼쳐지고 리듬이 펼쳐졌다.
쓰릉-!
쓰르릉-!
청하는 칼날이 짧았다. 고작 15센티의 칼날로 체고만 3미터가 되는 소를 쓰러뜨리려면 칼질 한두 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회칼 정도의 길이만 됐어도 훨씬 쉬웠을 테지만… 그럼 또 이런 재미가 없었겠지?’
과도라서 그런가? 썬다기보다는 깎아 내는 이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안 맞지!”
나는 태산소의 돌진을 슬쩍 피하며 놈의 가슴팍에 딱 붙어서 칼질을 했다.
써걱- 하면 갈비뼈가 갈리고.
다시 써걱 하면 그 안의 근육들이 벌어지고, 또다시 써걱 써걱 싸악! 하면 마침내 심장을 분리해 낼 수 있었다.
“와우. 그거 국거리로 쓰면 맛나겠네.”
중간에 걸리는 것이 뼈든 산처럼 딱딱한 등껍질이든 가리지 않고 감자 깎듯 썰어 버렸다. 아아, 이 기가 막힌 손맛!
달려들던 태산소가 세 걸음을 넘기지 못하고 심장을 잃은 채 고꾸라졌다.
그 순간 짜릿한 감각과 함께 수많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단계 발전한 [만상공감] 덕분에 더 멀리, 보다 많은 이의 감각이 손쉽게 공유되고 있었다.
‘와! 태산소를 단번에!’
‘소시민 님이 다 정리하는 거 아냐?’
그중에는 승리를 예감하는 낙관적인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 반대였다.
‘아, 아니! 진짜 위험한 건 지금부터야!’
‘상대는 태산소라고!’
그래.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음모오오오오-!
하나가 쓰러지자 나머지 태산소들이 일제히 울부짖었다. 동족에 대한 애착이 강하기로 유명한 괴물들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쿠드드드!
지축을 흔들며 달려오는 나머지 9마리의 태산소. 놈들의 주위로 피어오르는 영력이 보였다.
그래. 영력,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힘.
태산소라는 괴물들은 어떻게 그렇게 무겁고 단단한 등껍질 조직을 이고 생활할 수 있는가? 놈들은 그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빨리 달릴 수가 있는가?
그 모든 의문의 비밀은 영력이었다.
그리고 지금 청하에는 영력을 소멸시키는 힘, [안티소울]이 각인되어 있었다.
“가자, 청하야.”
우우웅-
청하가 울었다. 녀석의 새하얀 손잡이 위로 황금빛 문양이 불꽃처럼 떠오르고, 검푸른 칼날은 동이 트듯 하얀 빛으로 물든다.
스으-
칼날이 지나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뼈를 자르는 손맛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크림 떠내는 듯 부드러운 촉감. 아까는 짧게 짧게 베었다면 지금은 그냥 청하를 박아 넣고 쭈욱 달렸다. 내가 지나갈 때마다 태산소의 속살이 육사시미처럼 부드럽게 갈라졌다.
나는 악몽사슬을 던지고 당기며 태산소의 사이사이를 누볐다.
[안티소울]이 태산소의 영력을 소멸시키기에 질기기 짝이 없던 태산소의 가죽과 근육은 부드러워졌고, 한 번 청하에 베인 태산소는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힘이 풀려 비틀거리다가 이어진 칼질에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안티소울]은 일종의 독과 같았다. 그 어떤 신비 현상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독. 그 앞에서는 강대한 태산소들도 어쩔 수 없었다.
쿵-
쿵-
태산소들이 고꾸라졌다. 여덟 마리를 죽이고 마지막 한 마리가 남았을 때, [안티소울]의 발현이 끝나고 청하가 내뿜던 빛이 가라앉았다.
우웅- 우웅-
나는 헐떡이듯 가늘게 진동하는 청하를 내려다보았다.
‘대충 발동 시간은 8분. 재사용 대기시간은 2시간쯤 되는 건가? 오케이…….’
청하를 가방 속에 집어넣고 거인창을 꺼냈다. 한 마리를 상대할 때는 이만한 무기도 없지.
콰직!
마지막까지 투지를 꺾지 않고 달려들던 태산소가 거인창에 꿰뚫려 꼬치 신세가 되었다.
쿵!
넘어가는 태산소를 피해 내고 나는 겨우 숨을 돌렸다.
“와아…….”
“태산소 무리를 잡았어.”
“아무리 약해져 있었다지만 열 마리를 한 번에…….”
사람들의 탄성이 들렸다.
어느새 도망쳤던 헌터들이 모두 돌아와 있었다. 아니… 그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던 이들도 모두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피를 뒤집어쓰고 몹시 피로해 보이는 행색이었지만, 그들의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누군가가 외쳤다.
“이겼습니다!”
방금 정리한 태산소가 용산구 2지역에 존재하는 마지막 괴물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용산 2지역의 사령관이 되었다.
* * *
그러고 보면 지난 생에는 심심할 때마다 상상했었다. 만약 내가 지역 사령관이 된다면 어떨까?
꽤 재밌는 상상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 가는 지구에서 십만이 넘는 사람의 번영과 안전을 책임지는 지역 사령관이 되는 것이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그 권한을 가지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항상 전투와 전쟁에 관해서만 생각했다. 언제나 가장 밑바닥에서 싸웠던 헌터로서 어디에 방어선을 꾸려야 할지, 편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던전은 어떤 순서로 해치워야 하는지.
하지만 10년, 20년이 지나면서 내 상상은 점점 발전해 갔다.
막연히 방어선을 쳐야지 했던 상상은 방어선을 만들 벽돌과 시멘트, 하다못해 모래주머니의 수급을 고민하게 되었다.
어떻게 적을 타격할까 고민하기 이전에 적의 공격을 막아 낼 방어구와 적을 분쇄할 무기의 제작법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엔 그런 무구들을 만들 자원을 채굴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
수십 년간 지는 싸움을 수행해야만 했던 내가 느낀 것.
그건 바로 전쟁은 보급이라는 사실이었다.
달리 말하면 전쟁은 경제다.
그래서였다.
- 어때, 선물은 마음에 들었나?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사실 엄청난 일이거든. 아무리 육삼공 참사라지만 민간인을 사령관으로 만든다? 대통령과 국회는 물론이고 언론까지 구워삶아야 하거든. 크하하.
“솔직히… 아주 마음에 듭니다. 어쩐지 군부가 파격적으로 움직였다 했더니 협회장님께서 힘 좀 써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 오오, 내가 점수를 좀 땄구먼그래? 크하하. 잘됐어. 앞으로도 서로서로 도우면서 지내자고. 사령관 노릇 하다 보면 내가 도울 일도 많을 거야. 피차, 상부상조. 알지?
“물론입니다.”
- 크하하하! 좋군, 좋아. 아무튼 축하하네. 그래, 지역 사령관의 첫 업무는 무엇인가? 거나하게 마시고 뻗기?
“아뇨. 오늘 아주 바쁠 겁니다. 나중에 말씀드리죠.”
번갯불에 콩 볶듯이 임명장을 받고 개인 수행원들과 인사한 직후 하준광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때 나는 벌써 서부 드래곤힐동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하준광은 나와 술 한잔 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나는 정중하게 거절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서민서가 전화를 걸어왔다.
- 선배!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사령관이라니……! 와! 선배, 그럼 당장 이사부터 해야죠! 사령관이 고시원에 사는 게 말이 돼요?
“그래, 그것도 천천히 해야지. 근데 오늘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나는 이번에도 적당히 말을 맺고 서민서의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아예 핸드폰의 전원을 꺼 버렸다.
그러고 나니 목적지인 서부 드래곤힐동에 도착해 있었다.
‘하… 오랜만이네.’
지난 생에도 많이 찾아왔던 곳이었다. 서부 드래곤힐동의 공방 거리.
과거 용산 미군 부대가 있던 이 자리에 지금은 제법 큰 공방 거리가 자리 잡았다.
대격변 초기에 미군 부대 내부에서 열린 게이트들로 인해 미군 부대는 완파되었다. 하지만 현대 화기로 무장한 군대를 상대로 괴물들 역시 온전할 수는 없는 법.
결국 이 자리는 파괴된 건물 잔해와 괴물들의 사체가 널브러진 채 방치되었다. 그런데 그런 흉흉한 환경도 기술자들에게는 꽤나 매력적이었던 모양이다. 국가가 제 기능을 못 하던 그때, 기술자들은 이곳에 들어와 임시 거처를 만들고 괴물들의 시신을 활용해 물건을 만들고 연구를 수행하며 생존을 모색했다. 그렇게 옛 미군 기지를 동서로 가르는 서부 드래곤힐동과 동부 드래곤힐동은 기술자들의 공방이 밀집한 동네가 되었던 것이다.
그중에서 서부 드래곤힐동이 내 관할로 들어온 거고.
그걸 생각하면 조금 아쉽기도 했다.
‘여기가 동부 드래곤힐동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동부 드래곤힐동은 청계천 공방 거리와 청담 공예 거리의 뒤를 잇는 서울 3대 공방 거리로 꼽혔지만, 서부 드래곤힐동은 동묘, 성내동 등과 경쟁하며 서울 내 공방 거리 중 열 번째 안에 간신히 드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아쉬움을 금방 떨치고 나는 오늘 처음 만난 비서가 안내해 주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나를 안내한 곳은 낡은 건물이었다.
겉으로는 굉장히 좁아 보였지만, 내부를 터서 몇 개의 건물을 합치기라도 했는지 좁은 복도를 따라 들어갈수록 넓어지는 신기한 구조였다.
마누스 화로, 초능 프레스, 모루와 망치…….
오래되었지만 알짜 장비들이 들어찬 그 대장간 한가운데에는 이마에 주름이 굵게 박힌 노인장이 앉아 있었다.
그가 나를 슬쩍 올려다보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사령관님이시구먼. 드래곤 공방의 대장장이 김용수외다.”
털털하게 손을 내미는 김용수는 말투는 무뚝뚝했지만 눈에는 나에 대한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부임하자마자 대장간부터 찾다니. 역시 남다르구먼.”
그는 기분 좋게 웃으며 내게 자리를 권했고 나는 그와 마주 앉았다.
“대충 왜 왔는지 예상이 가기는 해. 군 소속 그리고 예비군 소속 헌터들을 위한 새로운 무기 계획이 아닌지……?”
김용수가 눈을 번쩍이며 물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한 번 저었다. 김용수가 그건 대체 무슨 뜻이냐며 눈썹을 찡그릴 때 나는 말했다.
“그것도 하긴 할 건데, 일단 좀 급하게 만들어 줬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뭐요?”
“제가 쓸 무기입니다.”
“오, 사령관의 무기. 그것도 중요하지. 안 그래도 내 듣기는 했지. 과도를 쓴다던가? 범상치 않아 보이는 물건이라던데……. 그래도 그건 좀 짧지? 역시 장검을 원하는 거요?”
장검.
장검 좋지.
하지만 내가 만들고 싶은 무기는 따로 있다. 인챈트에 특화된 무기.
그걸 만들려면 타키넷에서만 구할 수 있는 금속을 써야 하고 그 금속은 아주 비싸다.
그러니까… 장검까지는 못 만들 거다.
“대체 어느 정도 길이를 바라길래?”
눈을 치켜뜨며 묻는 김용수에게 나는 답했다.
“회칼 정도요. 하지만 회칼이라고 얕보면 안 됩니다. 제작비는 아낌없이 쓸 겁니다. 김용수 장인님은 공임으로 장난치는 분이 아니라고 들었기 때문에 믿고 맡기는 겁니다. 대금은 사령관 품위 유지비까지 탈탈 털어서라도 충당할 테니 아낌없이 최고로 만들어 주십시오.”
“네에?”
꼿꼿이 서 있던 비서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