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49화 (49/212)

4. 소시민이 잠든 사이에

고시원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나무 상자를 내려놓았다.

겉으로 보면 평범해 보이는 이 나무 상자가 사실은 유물의 힘을 숨기기 위해 만들어 온 굉장한 아이템이었다. 이 상자 하나를 위해서 재료비에서 공임까지 무려 타키온 500알이 증발하는 마술을 목격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구에서는 이런 거 절대 못 만들지.’

이런 물건은 재료 준비에서부터 제작까지 모든 순간 동시적으로 술식을 짜올려서 만드는 물건이었다. 지구의 영능 기술로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초고도의 영능학!

“후…….”

나는 먼저 숨을 고르고 뚜껑을 열었다. 스아아, 검은 기운이 상자 바닥에 낮게 깔리고 먼지라도 뒤집어쓴 듯 퇴색된 이성계의 활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땅속에서도 찬란했던 세종대왕의 어보와는 또 달랐다. 하지만 나는 속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상태가 활성화되기 전의 상태라는 거지?’

[만상공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근처에 어비스게이트가 있었다면, 이성계의 활도 세종대왕의 어보처럼 빛났을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은… 적이 없기에 비활성화된 상태.

‘바로 이때를 노려서 고삐를 채워 놔야지.’

촤르륵-

타키넷에서 구해온 재료들을 늘어놓았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릇 위에 담긴 붉은 액체.

10그램이나 될까 싶은 적은 양이지만, 레드 드래곤의 피를 주 소재로 만든 극히 귀한 영적 용매였다. 쓰레기 거리에서 이런 귀한 물건을 찾아낸 서민서에게 박수! 물론, 가격은 타키온 300알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가격을 자랑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나는 길고 투명한 붓을 들어 10g의 드래곤 피 혼합물을 살짝 찍었다. 붓이라고 하지만 진짜 붓처럼 액체를 흠뻑 머금는 그런 야만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 어떤 물질이든 나노 수준으로 얇게 딱 한 줄씩 코팅을 할 수 있는 초박형의 붓.

나는 붓끝으로 용매가 스르르 번지는 것을 느끼며 이성계의 활을 안아 들었다.

‘후욱!’

그래. 안아 들었다. 원래라면 이 막대한 에너지덩어리를 봉인 상자 안에 눕혀 놓고 칠을 해야 할 테지만… 그렇게 해서는 완벽한 칠이 불가능하다. 나는 직접 활을 안고, 그 안에 요동치는 에너지의 결을 느껴 가며 칠을 시작했다.

사르르-

스르르-

아, 유려한 곡선. 그 위로 붓을 미끄러뜨린다.

아아, 손에 꼭 감싸이는 이 그립감. 묘하게 따스한 나무와 뿔의 재질. 그 차분하고 우아한 감촉 아래에 요동치는 태산도 조각낼 강렬한 탄력!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잊었다. 그저 존재하는 건, 이 아름다운 세상과 이 완벽한 활뿐.

스으윽-

슥-

‘…끝인가?’

마침내 칠을 다 마치고 이성계의 활을 나무 상자 속에 다시 봉인하는 순간,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설렘에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칠이 마르면… 이제 이 활을 쓸 수 있어.’

물론 여러번은 어렵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무리하면 두 번까지도. 시위를 당기고 휘몰아치는 힘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내가 이런 엄청난 녀석을 당길 수 있다니?’

상상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사람은 간사한 것이어서 감격과 동시에 진한 아쉬움도 함께 찾아왔다.

‘어서 타키넷의 등급을 높이고 싶다!’

고작 일주일에 한 번이라니! 방금까지 감격스럽던 게 또 순식간에 아쉬웠다.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미쳤나 보다.

이성계의 활이라는 말도 안 되는 보물 앞에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쓰레기 거리를 벗어난다면 이 활을 길들일 수 있는 귀한 물건들을 더 쉽게 구매할 수 있을 텐데…….’

어떻게 해야 될까? 앞으로 무얼 하며 살아야 이 황홀한 감각을 만끽할 수 있을 정도로 성공할까?

생각할수록 답은 하나였다.

‘현실에서의 기반이… 필요해.’

루드비히가의 식객이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권승리나 하준광?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힘을 보태 줄 수 있겠지만 그 모든 건 엄밀한 의미에서 내 것이 아니었다. 이 유물을 지키고, 더 많은 유물을 찾고. 온 세상에 모든 끝장나는 물건을 소유하고 즐기려면…….

‘결국, 나는 홀로 서야 돼.’

충성을 대가로 무언가를 인정받는 게 아니라, 온전히 나의 힘으로 내가 쟁취한지지 기반. 자본. 그래, 나에겐 그런 게 필요했다.

언제까지 데미안네 방에 놀러 가서 히히덕거릴 거야? 내 방이 그 정도 돼야 하지 않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좁은 고시원 방에 대각선으로 걸쳐진 기다란 거인창의 주머니가 보였다.

‘망할… 이게 현실인가?’

내 창 하나 제대로 보관할 수 없는 작은 방이라니…….

‘소설 속에서처럼 다른 차원의 영지라도 하나 뚝딱 생겨나면 참 좋을 텐데.’

거기서 자원도 채취하고 상품도 만들고, 세력도 쌓는…….

그런 상상을 하며 벌렁 드러누웠다. 타키넷에 다녀와서 이성계의 활을 챙겨 오고 칠까지… 너무 무리하게 움직였다. 무거운 눈꺼풀 위로 캄캄한 잠이 쏟아져 내렸다.

* * *

그 시각.

용산구 2지역 사령관 길준태는 도무지 자신이 들은 보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그게 청파동, 원효로 1동, 한강로동, 이촌 1동, 서부드래곤힐동 이렇게 다섯 개 동의 예비역들이 동대장을 인정할 수 없다며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말이야 방구야! 파업이라니! 예비군은 군인도 아니다 이거야? 미쳤나… 지금 전시라는 거 몰라? 싹 다 잡아들여!”

“그… 그게 그러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그럼 즉결 처분해 버려! 한두 놈 시범으로 조지면 나머지는 다 수그리겠지!”

“사령관님… 지금 그런 분위기가 아닙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용산 1구 지역 사령부가 날아갈 겁니다. 파업에는 대부분의 주민은 물론이고 예비역 헌터와 심지어 프로 헌터들까지도 대거 가담했습니다.”

“뭐라고?”

바로 그때, 엄청난 함성아 길준태의 고막을 두드렸다.

“물러나라! 물러나라!”

“동네를! 버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재부임이냐! 청파동 동대장으은! 물러나라, 물러나라!”

“경험도 없느은! 낙하산 애송이! 이촌 1동 동대장은! 물러나라 물러나라!”

“육삼공 참사때! 서부드래곤힐동의 동대장으은! 뭘 하고 있었나! 뭘 하고 있었나!”

드르륵-

창문을 열어 보니 한강대로를 가득 메운 인파가 보였다. 참모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용산 2지역 인구의 절반은 거리로 쏟아져 나온 듯했다.

그건 명령 불복종은 다 사형이라면서 흥분하고 있던 길준태가 순식간에 냉정을 되찾을 만큼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뭐… 뭐야? 대체 왜들 저러는 거야?”

“이번 참사 때 용산 2구의 피해가 유독 크지 않았습니까?”

“그야 그랬지……?”

“그때 동대장들이 제 역할을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니… 그때 제 구실을 한 정부 기관이 몇이나 된다고 이 난리야?”

“아무래도 유독 피해가 커서 다들 흥분한 모양입니다.”

“하… 그래서? 요구 사항이 뭐야?”

“사실 그와 관련해서 시위대의 대표가 면담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그 말부터 하라고! 당장 들여 보내! 아니다. 아예 관련 동대장들도 다 집합하라고 해! 어디 서로 까놓고 얘기해 보자고! 빨리 움직여 새꺄! 넌 참모라는 놈이!”

길준태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가는 부관 뒤통수에 곽 휴지를 집어던지고 연초를 꺼내 뻑뻑 피웠다.

시간이 지나자 다섯 명의 동대장이 먼저 들어왔다. 아무래도 시국이 시국인 만큼 사령부에 이미 와 있었던 모양이었다.

흥분했던 길준태 사령관은 그들이 눈에 잡히자 금세 흥분을 누그러뜨리고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직급은 그가 더 위였지만, 여러 사회적인 관계를 생각하면 부드럽게 대해야만 하는 젊은이들이었다.

“아이고. 다들 마음고생이겠구만.”

“아닙니다. 부족한 모습 보여 드려서 죄송할 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청파동과 한강로동은 동대장이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나머지 다른 세 지역의 동대장은 두 명은 실종되었고 한 명은 승진으로 보직 이동 되었다. 때문에 이 자리에 온 것은 신임 동대장들이었다.

길준태는 신임 동대장 세 명과 눈을 마주쳤다.

“부임하자마자 곤욕스럽겠어.”

“아닙니다.”

“아냐, 아냐. 자네들이 어떤 인재들인데? 내로라하는 호국 가문인 초상문, 땅울문, 관혼 임가의 적전 제자들이 아닌가? 이런 훌륭한 인재들이 동대장으로 왔으면 두 손을 들고 기뻐하지는 못할 망정… 쯧쯧.”

길준태의 말에 신임 동대장들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지만 표정으로는 길준태의 말에 동조하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드러났다.

바로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용산 2지역 시민 대표 강전구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선 남자는 체구가 당당한 반팔 티의 청년. 솟아오른 근육의 굴곡만큼이나, 다부진 입매에서 끈끈한 고집이 느껴졌다.

길준태는 그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래. 요구 사항이 뭔가? 왜 이 난리를 치는 건가?”

길준태의 삐딱한 태도에 강전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요구 사항이요? 저희의 안전입니다.”

길준태의 미간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래? 그렇다면 뭐가 문제지? 이렇게 훌륭하신 동대장들을 모셨는데?”

다섯명의 동대장들이 당당하게 서서 강전구를 쏘아보았다. 강전구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훌륭하다고요? 제 눈에는 자기 동대를 내팽개치고 줄행랑을 놓은 두 명의 겁쟁이와 세상 물정 모르는 세 명의 애송이만 보이는데요?”

“하?”

관혼 임가의 자손인 임현우가 코웃음을 터뜨렸다. 비록 이제 스무살로 겨우 성인이 되었다고는 하나, 그는 헌터계의 왕도를 걸어온 엘리트였다. 근본도 없는 헌터가 나타나 자신들을 애송이 취급하는 게 우습기만 했다.

하지만 강전구는 오히려 그런 임현우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한강대교가 끊어졌을 때, 뭘 하고 있었습니까? 서울 전역에 나타난 괴물의 15퍼센트 이상이 우리를 포위하고 달려들 때, 어디서 싸우고 계셨습니까? 소시민 씨가 만든 얼음 다리 위로 어린아이들과 노인들 먼저 피난하고 있었을 때! 그때, 끝까지 후방에 남아 싸우던 우리들에게 지금 여기 있는 애송이 지휘관들이 필요했을 것 같습니까?”

길준태가 헛웃음을 흘렸다.

“하! 소시민 씨? 결국 나오는구만 그래. 용산 2지역의 영웅 소시민 씨 말이지? 표창을 준다고 그렇게 불러도 대꾸 한 번 없는, 외국 가문인 루드비히 가문에 소속되어 있다는 그 사람? 그래. 그래서 원하는 게 그건가? 그 소시민 씨가 동대장을 맡아 주면 속 편하겠나? 그래. 그럼 어디를 원하나? 근데 그가 동대장을 해도 다른 동 사람들이 납득하겠나? 한 사람 몸을 다섯조각으로 찢을 수도 없고?”

그 말에 강전구가 한심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소시민 님이 동대장? 농담이겠죠.”

“그럼 뭔가?”

강전구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용산 2지역 사령관. 당신 자리를 주거나, 아니면 최소한 당신에 준하는 지위를 보장해 줘야지.”

“뭐, 이 새꺄?”

꽈앙-!

감히 자신의 자리를 탐하다니? 분노한 길준태의 주먹이 강전구의 뺨을 후려쳤다. 하지만 강전구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의 초능력 [무게증가]로 그 자리에 버티고 선 것이다. 무게가 증가하면 몸도 단단해지는 법. 비록 사령관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뺨이 빨갛게 부풀었지만, 강전구는 조금도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서 불똥이 튀는 것 같았다.

“우리 용산 2지역의 시민들은 우리 목숨을 구해 준 소시민 님을 따릅니다. 그분을 설득해서 모셔 오십쇼. 그렇지 않으면 이 사령부도 남아나지 못할 겁니다.”

그러자 신임 동대장중 한 명인 땅울문의 황태성이 외쳤다.

“흥! 반역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대체 뭘 믿고 까부는 거지? 소시민이라는 그 작자는 그저 운 좋게 적당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야! 정면에서 붙으면 제대로 훈련을 받은 우리의 상대가 될 거 같아? 일대일로도 얼마 버티지 못할 거다!”

“글쎄?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너 같은 건 나도 이길 거 같은데?”

“하? 어디서 깝……!”

황태성이 땅을 박찼다. 꾸웅, 하고 울리는 땅.

그와 동시에 황태성의 온몸으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진동계 초능력자들만이 모여서 만든 땅울문의 비기였다. 진동의 힘에 마누스를 접목시켜 강력한 파괴력을 내는 전투술. 쏘아지는 황태성의 몸은 그 자체로 고중량의 포탄과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강전구는 황태성의 머리를 한 손으로 받아 쥐고 그대로 땅에 내리꽂았다.

[무게증가] 탓에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강전구의 손으로 인해 황태성의 머리를 콘크리트 속에 손쉽게 박아 넣을 수 있었다.

“쳐… 커… 억……!”

황태성은 눈을 까뒤집으며 정신을 잃었다. 투둑, 툭. 물론, 강전구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황태성의 초능력 [충격파]에 마누스까지 더해진 힘을 왼손 하나로 맞받았으니… 왼손의 혈관이 온통 터져서 피를 뿜었다. 하지만 황태성은 그깟 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주먹을 불끈 쥐고 다른 동대장들을 둘러봤다.

“내가 사령관님한테 한 대 맞아 줬다고 너희한테까지 맞아 줄 줄 알았냐?”

원래도 잠재력이 뛰어난 헌터였던 강전구는 육삼공 참사에서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다시 한번 각성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여전히 마누스를 다루는 것은 어설펐어도 초능력만으로도 이 자리에 있는 동대장들은 충분히 압도할 수 있었다.

“두 번 말 안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시민 님을 우리 다섯 개 동의 책임자로 임관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10만이 넘는 시민들의 분노를 맞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말한 강전구는 창문으로 다가가 문을 활짝 열었다.

와아아-!

“물러나라!”

“물러나라!”

“소시민 님을! 사령관으로!”

그와 동시에 터져 나오는 함성들.

강전구의 기백과 10만 명의 기세를 차마 이기지 못하고 용산 2지역 사령관 길준태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육삼공 참사 이전의 시대와 이후의 시대는 같을 수 없었다.

사실상 정부의 방위 계획이 실패하고 사회 시스템이 파괴된 무질서의 시대.

자신들의 안전을 책임져 줄 새로운 시스템을 바라는 민중과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지배층의 갈등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비단 용산구 2지역뿐만이 아니라 전국이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그 어떤 지역에서도 이렇게 사람 하나를 요구하는 일은 없었다.

정작 당사자인 소시민이 고시원 한구석에 쓰러져 잠이 든 동안, 용산 2지역의 주민들은 소시민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세워 달라며 극렬한 투쟁을 이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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