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새로운 목표
도장의 손잡이 모양이 거북이였기 때문에 쥐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손에 찰싹 달라붙는 부드러운 그립감이 전해졌다.
그리고 그 직후.
후욱-!
헛숨을 들이켜게 하는 아찔한 고통이 찾아왔다.
온몸으로 짜릿하게 퍼지는 감각이 심상치 않았다.
‘괜찮아. 예상했던 거잖아?’
지금도 [만상공감]으로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 유물에 얼마나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는지. 문제는 그 힘이 조금도 길들여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채로 급발진하는 스포츠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하는 안전장치 없는 폭탄.
이건 근본적으로 사람이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러니 내 역할은 이 유물을 제어하는 게 아니라 파도타기를 하듯 거스르지 않고 붙어 있는 것. 그렇게 슬그머니 다가가 목적지에 살짝 손바닥을 올려놓는 정도.
‘하나둘… 흐읍!’
나는 타이밍을 맞춰 도장을 꺼내 들었다. 아니, 자루 밖으로 나오려고 한 건 도장이었고 나는 그 흐름을 따랐을 뿐이다.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유물?”
“…미쳤군.”
“매, 맨손으로… 왜?”
순서대로 권승리, 하준광, 데미안의 반응. 표현 방법은 저마다 달랐지만, 그들 눈에 깃든 감정은 비슷비슷했다. 경악과 불신, 분노와 경멸.
“저 머저리 새끼가!”
“이 시국에 탐욕에 눈이 먼 건가? 제일 먼저 죽겠군.”
“당장 그거 내려놔! 진짜 죽는다고!”
그들은 나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내 귀엔 들리지 않았다. 그저 느껴지는 건 온몸을 휘감는 고통과 도장 속에서 휘몰아치는 강대한 영력뿐.
후우-!
훅-!
숨을 몰아쉬며 걸었다. 하준광을 한번 후려치고는 잠시 잠잠해졌던 어비스 게이트의 씨앗이 또다시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가로세로로 벌어지며,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진동했다.
‘망할… 조금만 더 빨리…….’
아까 그 오징어 다리 같은 게 튀어나와서 나를 공격하면 그날로 인생 하직. 첫 번째 생보다 더 허무한 죽음이 아닌가?
숨을 멈췄다. 천천히 천천히 앞으로 도장을 뻗었다. 무중력 상태에서 도킹을 시도하는 비행선처럼 느릿하게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어비스 게이트 씨앗의 표면에 도장면이 접촉했다.
“흑……!”
나도 모르게 숨을 내뱉고 말았다. 도장 너머에서 전해지는 불길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찔함이 엄습해 왔다.
어느새 주위는 조용했다.
하준광도 권승리도 데미안도 모두 입을 다물고 나만 바라본다.
콰직-!
어비스 게이트의 씨앗이 크게 벌어졌다. 그리고 느낄 수 있었다. 그 너머에 있는 공포스럽고 두려운 존재가 지금 나를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참아… 참아야 돼.’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비누처럼 녹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도장을 던지고 도망칠까? 지금이라도 이 힘을 폭발시킬까? 그냥 차라리 죽는 게 편하지 않을까? 어처구니없는 압박감이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하지만 견뎌야 했다.
‘두 가지 타이밍을 일치시켜야 돼. 도장이 스스로 움직이려는 타이밍. 어비스게이트의 씨앗이 약해지는 타이밍.’
도장이 움직이기도 전에 내가 멋대로 손을 떼거나 영력을 휘두르려고 하면 저기 세 사람이 경고한 것처럼 도장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폭사해 버릴 것이다. 어비스게이트의 씨앗이 약해지는 순간을 노리지 못하면 도장의 힘과 게이트의 힘이 충돌해 역시나 거대한 폭발을 일으킬 것이었다.
아, 설마… 지난 생에 경복궁이 소멸한 게 바로 유물과 게이트의 힘이 충돌한 결과였나?
아마 내가 없었으면 게이트와 유물이 서로 반응해서 그런 결과가 일어났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섬뜩했다. 손끝이 떨리려고 하는 걸 억지로 억눌렀다.
‘정신 차려. 내가 돌이나 바람이라고 생각해.’
[만상공감]으로 감각을 최대한 확장했다. 돌처럼 바람처럼… 땅에 굳건히 뿌리를 박은 고목처럼.
그때 문득 머릿속으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휘오오오오-!]
[휘오 휘호오 위호오오오-!]
‘음……? 위험하다고?’
간절한 듯 걱정하는 듯 보채는 소리. 나뭇잎에 바람이 스치는 듯한 이 소리는 익숙한 소리였다. 다만 여기서 들릴 리가 없는 소리였고, 평소랑 달리 그 바람소리가 꼭 말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너, 휘오 맞아?’
[휘오- 휘오-]
세계수의 묘목, 휘오가 맞았다.
아니. 인왕산 공백 던전에 있는 녀석이 여기까지 말을 건다고? 세계수라는 게 성장하기에 따라서는 한 차원을 지탱할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을 잘 알지만… 직접 겪으니 정말 신기하네. 애기가 처음으로 아빠, 하고 부를 때 이런 기분이려나. 나를 걱정해 주는 녀석의 마음이 느껴져서 어쩐지 마음이 더 단단해졌다.
‘괜찮아, 인마.’
덕분에 짧은 순간에 긴장과 두려움을 많이 해소할 수 있었다.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어비스 게이트를 노려보았다.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분 나쁜 회색빛의 촉수를 보았다.
‘와라.’
푸화하아아앗-!
작은 게이트를 찢으며 물이 쏟아져 나오듯 쏟아지는 촉수. 푸르고 붉은 온갖 종류의 회색이 투명하게 반투명하게 나를 뒤덮었다.
“안 돼!”
“빌어먹을……!”
“아… 이럴 리 없는데…….”
세 사람이 경악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눈앞이 차츰 어두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촉수들 사이에 완전히 파묻힌 상태에서 최후의 최후까지. 단 한 번의 기회만을 노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바로 지금!’
마침내 족수가 나를 쥐어 터뜨리려는 순간, 나는 내뻗고 있던 도장에 모든 영력을 쏟아부었다.
지이이이잉-!
도장에서 떠오른 붉은 빛무리가 어둠을 몰아낸다.
세종世宗 장헌莊憲 영문예무英文睿武 인성명효仁聖明孝 대왕지보大王之寶.
‘뭐야… 그 대왕이 세종대왕이었어?’
대체 어떻게 세종대왕과 관련된 유물에 이런 말도 안 되는 힘이 깃들어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세종대왕님 압도적 감사!
‘그럼 그대로… 잠근다!’
딸깍.
앞으로 뻗은 도장을 왼쪽으로 돌렸다. 무언가가 손끝에서 격렬히 저항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끝내 왼쪽으로 완전히 잠겨 버렸다. 보이진 않지만 그 순간 어비스 게이트가 닫혔을 것이다.
푸화아아앗-!
어비스 게이트를 빠져나와 나를 덮치던 촉수가 잘려 나가며 폭발했다. 기분 나쁜 회색 덩어리가 분수처럼 줄줄줄 뽑혀 나오더니, 여기저기 너브러져서 검은 연기로 증발했다.
다시 하늘이 보였다.
쏴아아아-!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눈앞에서 요동치던 어비스 게이트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고, 내 손에 들려 있던 황금 거북이 도장도 하얀 연기로 변해 천천히 증발했다.
‘아… 젠장.’
유물이 소멸하는구나.
이럴 것 같더라니. 유물의 힘도 강력했지만 어비스게이트의 힘은 더 무시무시해서… 이럴 것 같더라니…….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하던가?
딱 떠오른 생각이 그거였다.
정작 도장을 쥐었을 때는 어비스게이트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몰랐는데, 막상 손에서 도장이 사라지자 그 매끈한 촉감과 손에 달라붙는 그림감이 너무나 아쉬웠다.
‘아… 뭐야 이거…….’
너무나, 정말 너무나 아쉬웠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나는 어느새 텅 비어 버린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도장을 쥐었던 감각이 여전히 손에 남아 있었다.
‘유물…….’
그때 나는 내 삶에 새로운 목표가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휘오오오-!]
휘오가 나의 승리를 축하해 줬다. 그리고…….
“무슨… 게이트의 씨앗을 소멸시켰다고? 말도 안 돼.”
“허… 오늘 상식이 여러 번 뒤집히는데?”
“아… 아… 역시 내가 본 게 맞았어!”
권승리, 하준광, 데미안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다들 보고 있나?
나는 직감했다. 방금 이 세상에서 나의 발언권과 존재감이 떡상했구나.
이제부터 나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구나.
* * *
쏴아아아-
6월 30일에 시작한 비는 7월 15일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았다.
육삼공 참사가 끝난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쏟아지는 비.
- 무혼 권가의 저녁 만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 자네, 잘 지내나? 비도 오는데 경회루 마루에 앉아서 좋은 술에 파전 어떤가?
- 오늘은 숙소에 계신가요? 놀러갈까 하는데, 아니면 제 방에 놀러 오시겠습니까? 이번에 새로 수집한 컬렉션이 있는데…….
‘6.30 참사’의 사태가 조금 안정되고 통신망이 다시 회복된 7월 13일부터 매일매일 문자와 전화가 오고 있었다. 물론 그 대부분은 무시했지만.
‘음… 도련님 방에는 놀러가고 싶네.’
경회루에 술과 파전도 끌리기는 하지만… 루드비히의 새로운 컬렉션이라는 건 정말 저항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하지만.
- 죄송합니다, 도련님. 당분간 급히 할 일이 있어서요.
지금도 경복궁에 묻혀 있을 두 번째 유물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는 나였다. 첫 번째, 세종대왕의 어보를 그렇게 떠나보냈는데 두 번째 유물까지 그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두 번째 유물을 찾아서 손에 쥘 때까진, 그 어떤 유혹도 나를 붙들 순 없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건 포장지.’
유물이라는 게 맨손으로 덥석 잡을 수 있는 만만한 물건이 아니라는 걸 이번에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 존재감도 감추면서 운반도 할 수 있는 포장지가 필요했다. 그날 데미안 도련님이 나한테 준 그 자루 같은 것. 일이 끝나자마자 나에게서 칼같이 회수해 간 그 자루. 그 자체로도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마도구. 딱 그런 게 필요했다.
나는 절규를 삼킨 밤을 뒤집어쓰고 청하를 품에 넣고 악몽사슬을 왼팔에 감고 거인창이 든 가방을 등에 비껴 찼다.
이로써 외출 준비 끝.
그 난리통에도 용케 무너지지 않은 고시원을 빠져나오니 미리 불러 둔 서민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선배? 갑자기 불러내고. 근데 선배 얼굴이 왜 이리 상했어요?”
“그러는 넌 왜 이렇게 피둥피둥 살 쪘냐.”
“뭐, 뭐요? 아니거든? 몸무게 재 봤는데 똑같았거든요?”
그래. 똑같겠지. 사실 이쁘기만 하다.
참사 때 제법 무리를 했던 서민서는 그 보상 심리 탓인지, 루드비히의 안전 가옥에서 아주 그냥 잘 먹고 잘 잤는지 얼굴이 확 살아 있었다. 계속 잠을 설쳐서 수척해진 나와는 때깔이 달랐다. 재수 없다.
“그냥 선배도 가문에서 주는 숙소 들어가지 그래요? 요새 도련님이 아주 선배님 노래를 부르던데.”
얘는 그사이에 말하는 게 완전 루드비히 사람이 다 됐다.
“나는 안 돼.”
“왜요?”
“그 전에 묻자. 너 내가 루드비히 가문에서 나오라 그러면 나올 수 있냐?”
서민서가 속눈썹이 긴 눈을 깜빡깜빡하더니 답했다.
“…나와야 돼요?”
내가 나오라 하면 일단 나오기는 할 건데, 그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가득 담긴 그 눈동자를 보니 웃음이 픽 나왔다. 일단 내 말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 자체엔 어떤 의문도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어깨가 으쓱했다. 나 꽤나 신뢰받고 있구나? 나도 모르게 녀석의 머리를 헝클어줬다. “아 왜요!” 반항하는 게 귀엽다.
“아무튼 내가 도련님한테도 들키면 안 되는 게 있어서 같이 사는 건 좀 그래.”
“…여기 살아도 도련님이 알아내려고 하면 다 알아낼 텐데?”
“뭐…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멀리 있는 게 숨기기 좋으니까.”
“대체 뭔데 그래요?”
“차차 알게 될 거야.
서민서는 왠지 심통이 난 표정으로 입술을 삐쭉거리다가 물었다.
“근데 진짜 왜 부른 거예요?”
“너, 여행 가고 싶다고 그랬지?”
“네. 그 난리를 겪으니 마음이 영 싱숭생숭해서… 그런데 막상 여행을 가면 어디든 다 난장판일 거라 더 싱숭생숭해질 거 같네요.”
“아냐. 오늘 갈 곳은 안 그럴 거야.”
“…에?”
서민서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그… 러니까 여행을 간다는 거예요?”
“응.”
“미… 미쳤… 두… 둘이…?”
서민서의 발음이 부정확해지고 목소리는 작아지고, 심장은 뛰고… 뭐야? 얘 갑자기 왜 이래?
일단 뭐라고 하는 건지 잘 모르겠으니 일행을 마저 부르기로 했다.
“근데… 어이! 허묵 사장님! 언제까지 거기 숨어 계실 겁니까?”
담벼락을 노려보며 말하자 담벼락의 모습이 일그러지더니 단정한 회사원 같은 인상의 허묵이 나타났다. 서민서가 움찔 놀라며 허묵을 경계했다. 허묵은 그런 그녀를 보며 코웃음을 한 번 치더니 내게 씹어 뱉듯이 말했다.
“저번에도 말했을 텐데? 너는 아직 계약을 지키지 않았어. 그 세계수의 씨앗인지 뭔지를 싹 틔워 준다고 말만 해 놓고 대체 뭐 하는 거지? 네가 아무리 하준광과 권승리와 데미안의 총애를 두루 받는다고 해도… 제길! 젠장! 아무튼 잘나간다고 막 이렇게 계약도 안 지키고 자꾸 오라가라 하고 그러면…! 나도… 어? 잘나간다고 해도… 나도… 막! 어? 젠장!”
허묵은 나에게 뭔가 협박을 가하고 싶은데 여의치가 않은지 고통스러워 했다. 아이고… 안타까워서 어떡하냐. 좀만 더하면 울겠다 싶어서 내가 먼저 용건을 꺼냈다.
“아아, 그러니까 오늘 계약도 지키고 미리 세계수 체험도 시켜 주고 그러려고 부른 거죠.”
“…체험?”
“네. 바로 이거요.”
나는 씨익 미소를 짓고 박수를 쳤다.
‘휘오야?’
[휘오오오-]
그동안 꾸준히 타키온 먹인 게 빛을 발했다. 한층 더 성장한 휘오는 세계수로서의 권능을 하나 더 일깨웠다. 눈앞으로 나타나는 휘오의 두 번째 권능.
첫 번째가 차원이라면 두 번째는 그보다 간단하다. 공간에 간섭하는 힘일 뿐이니까. 다만 좋은 점은 매번 타키온을 소모해야 하는 차원 권능과 다르게 이 공간 권능은 휘오가 자체 섭취한 영양분으로도 충분히 실현이 가능하는 것이었다.
부우우웅-!
“……!”
“게… 게이트? 하얀색?”
하얀색 게이트가 일렁거렸다. 휘오가 있는 인왕산 공백 던전으로 통하는 게이트.
내가 알기로는 지구 최초의 하얀색 게이트일 것이다. 휘오가 지구에서 싹을 틔운 첫 번째 세계수일 테니까.
“자, 따라오세요. 참고로 오늘은 아주 멀리 여행을 갈 겁니다.”
놀란 두 사람에게 잘난 체를 하며 천천히 여유롭게 게이트를 넘어서려고 했는데.
“아, 빨리 가요!”
짜악!
서민서가 내 등짝을 따갑게 때리며 날 앞으로 밀었다.
그녀의 심장은 쿵쿵 뛰고 온몸으로 피가 빠르게 돌고… 뭐지? 새로운 여행지라니까 신이 났나? 허묵 때문에 긴장했나? 에이… 설마 자기 부려 먹으려는 거 깨닫고 화난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