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어비스 게이트
두 번째 삶.
사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첫 번째 삶은 후회 없이 살았고 그래서 후회했다.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내 모든 것을 내던졌기에 후회하지 않았고, 그 목표가 끝내 이룰 수 없는 것이었기에 후회했다.
‘그러니 이번 생은 마음껏 즐기며 편하게 살아 보겠다.’
그런데 사실 그건 목표라기보다는 도피였다.
삶은 주어졌는데 뭘 하고 살아야 할지는 모르겠으니, 그냥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 부귀 영화나 한번 누려 볼까? 그게 전부였다. 목표를 향한 간절함? 그런 거 없었다. 그저 필사적으로 지난 생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을 뿐.
그러니까 나에게 이번 생은 일종의 덤이었다.
본 게임은 이미 지난 생에 말아먹었고, 그냥 재미로 하는 보너스 게임.
그런데.
그런 줄 알았는데…….
막상 좋은 물건들을 다루고,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감각들 속에서 차츰차츰 성장하다 보니… 텅 비어 있는 것 같았던 가슴이 어느새 조금씩 조금씩 차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비가 내리는 것처럼.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강둑을 넘는 홍수처럼.
* * *
여름의 무더운 공기가 쓸고 지나가는 경복궁은 점점 더 난장판이 되어 가고 있었다.
데미안 루드비히는 하준광과 권승리의 눈치를 보며 몰래 주변을 수색하려고 했지만, 토네이도처럼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그들의 싸움에 자꾸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나도 섣불리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만상공감]으로 싸움을 살피며 기회만 엿봤다.
그릉그릉, 거칠게 울어 대는 하준광의 차사검.
쩌엉- 쩍!
쫄깃한 타격감을 선보이는 권승리의 투명한 장갑.
장관은 장관이었다.
“와아-”
그러다가 나는 그만 감탄성을 뱉고 말았다.
하준광이 소리치며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대검, 차사검을 내뻗었기 때문이었다.
“크하하하-! 어디 권도식이가 자식 교육을 잘 시켰나 볼까!”
그 순간 나는 선명하게 느꼈다. 차사검이 가진 어처구니없는 무게를.
저 한 자루 검을 만들기 위해 그 귀한 중성자강을 중심에 놓고 골렘강을 미친 듯이 때려 압축시켰다는 사실을. 초능력과 과학 그리고 혼을 담은 손끝으로 빚어낸 기술. 그 모든 걸을 총동원해 금속을 때리고 비비고 녹이고 식혔을 세월들. 서로 다른 두 개의 금속이 완전히 하나로 다시 태어날 때까지. 장인은 자신의 살과 혼을 태워 가며 밤낮도 없이 저 검신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건 검을 만드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별이 태어나는 순간과도 같은 장엄함이었을 것이다.
심장이 떨린다.
그리고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준광의 대검이 뿜어내는 거력에 맞서는 작은 소녀. 권승리의 손에 끼워진 아주 얇고 투명한 장갑.
이슬누에가 1년에 한 방울씩 맺히는 빙정초의 이슬을 먹고 짜낸 원사에 그 값진 진은眞銀을 입힌 실. 그 실을 삶고 염색한 손길과 초능력을 동원해 실을 단번에 장갑형태로 짜낸 장인의 섬세함이 선명하게 와닿았다. 착용을 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부드러움과 자연스러움. 탱크로 밀어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을 견고함.
그 모든 감각들이 내 심장을 간지럽혔다.
‘정말 좋다…….’
청하. 악몽사슬. 거인창. 절규를 삼킨 밤.
물론, 내 물건들도 훌륭한 물건들이지만… 역시 저런 진짜 보물들은 달랐다. 아울렛에서 살 수 있는 명품과 경매장에서 사야 하는 보물은 이렇게나 다른 것이다.
‘가지고 싶다.’
나도 보물의 오너가 되고 싶다.
가슴속에 저절로 욕망이 차오르고, 그 자리에 있던 허무함은 어느새 사라졌다.
그때 문득 하준광의 목소리가 허공에 쩌렁쩌렁 메아리쳤다.
“으하하하! 어딜 가느냐?”
그의 차사검이 정지 상태에서 1초도 되지 않아 초음속을 돌파하는 미친 가속을 보여 준다. 마치 벼락처럼 이미 검이 목표 지점을 지나친 다음에야 꽈광, 터지는 폭음. 하지만 매번 그런 격렬한 기동을 견디면서도 흠집 하나 없이 빛나는 검은 검신!
그런데 이번 공격의 목표는 권승리가 아닌 데미안 루드비히였다.
은근슬쩍 빠져나갈 기회를 노리던 데미안 루드비히가 그 갑작스런 공격에 제대로 휘말렸다.
“크윽……! 저는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 없습니다!”
어떤 짐승을 잡아 만든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 호화로운 가죽 신발로 땅을 박차며 데미안은 하준광의 공격을 피했다. 갑작스런 방향 전환으로 인한 반동과 충격을 완벽하게 분산시켜 주는 가죽 신발의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감각에 내 뒷목에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쾅! 콰앙!
타닷, 휙!
마치 스포츠카들의 경주처럼 잡으려는 차사검과 가볍게 벗어나는 가죽신이 뒤섞였다.
“살금살금 혼자 유물을 찾으려고 하는데 놔둘 수가 있나?”
“그 유물은 저 권씨 꼬마가……!”
“으하하! 그건 모르는 거 아니냐 애송아!”
“크윽……! 다들 도련님을 지켜!”
무혼 권가, 루드비히 가문, 하준광이 다 함께 뒤엉켰다.
하준광은 두 가문을 상대로도 양 떼 무리 속에 뛰어든 사자처럼 거침없었다.
살과 뼈가 부딪치고 보물과 보물이 부딪쳤다. 싸움이라기보다는 번개 구름 한복판과도 같은… 강력한 힘과 힘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우와…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상황이 아주 혼란스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 내가 유물을 챙겨야 되나?’
사실 유물의 위치는 진작부터 파악하고 있었지만, 눈치가 보여서 바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준광, 권승리, 데미안이 눈을 뻘겋게 뜨고 있는데 대뜸 유물을 꺼내 들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만상공감]으로 그들의 감각을 읽어 예측해 보려 해도 쉽지 않았다. 한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이 얽힌 싸움이다 보니 고려해야 할 변수가 너무 많았다. 현재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는 절대 무리.
‘절대 하준광이나 권승리 손에 들어가면 안 돼.’
하준광이나 권승리가 유물을 차지하면 나는 그 유물을 영영 만져 볼 수 없게 된다.
‘적어도 데미안 도련님이 가져가야지.’
그래야 나중에 졸라서라도 구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계속 싸움 구경을 하며 눈치를 살폈다. 하준광이나 권승리에게 빼앗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유물을 챙길 기회를 엿봤던 것이다.
‘지금? 아니면 조금 더 기다려?’
초조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데, 문득 머릿속으로 데미안 루드비히의 텔레파시가 날아들었다.
- 미치겠군. 아버지 말씀이 옳았어요. 하준광은 진짜 말이 안 통하는 인간이군요.
‘도련님?’
- 텔레파시 아이템이에요. 놀라지 말고, 이쪽 쳐다보지 말고. 자, 임무를 하나 줄게요. 지금부터 침착하게 당신 혼자서 유물을 찾아요.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이 하준광을 데리고 오는 순간, 이쪽의 패가 완성되었다는 걸 알았거든요. 당신이… 내가 가진 조커였어요.
조커?
당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변했다는 것이었다. 두 배는 더 호의적으로 변했고 세 배는 더 확신에 차 있었다.
- 당신 서 있는 곳 오른쪽으로 서른 발자국 지점에 자루 하나가 보이나요?
자루?
데미안 루드비히가 말하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고급스럽기 그지없어 보이는 보랏빛 자루가 하나 있었다. 비로드처럼 잔털이 나 있고 윤기가 자르르 흘렀으며, 고급스런 색실이 묶여 있어서 약간 주술적인 물건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내가 그 자루를 집어들자 곧장 다시 텔레파시가 날아들었다.
- 그거 챙겨서 바로 출발하세요. 유물을 찾으면 절대 유물을 맨손으로 만지지 말고 그 자루 안에 넣어서 나에게 가져오면 됩니다. 하준광이나 권승리는 신경 쓰지 말아요. 우리의 승리는 이미 확정되었으니까, 가서 받아 내기만 해요!
기묘한 말이었다. 마치 미래를 보고 온 사람처럼. 데미안 루드비히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어려 있었다.
그게 초조하게 흔들리던 내 마음을 붙들었다.
꿀꺽.
나는 침을 한 번 삼켰다.
‘지금이다!’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나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달렸다.
쾅! 콰콰쾅!
어쩐지 등 뒤에서 소란이 더 커진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으며 오로지 느껴지는 유물의 기척을 향해서만 달렸다.
‘커다란 게 하나. 비교적 작은 게 하나.’
사삭!
궁궐의 전각이 올라가 있는 바닥돌 하나를 청하로 잘라냈다. 바닥돌을 들어내고 파내자 아주 오래된 석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대에 재건한 것 말고 경복궁이 처음 건립되던 시절의 600년도 더 된 석재였다.
석재에는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홈이 파져 있었는데 그곳에 유물이 끼어 있었다.
‘도장?’
가로세로 10cm 정도 되는 묵직한 황금으로 만든 도장. 거북이 모양의 손잡이가 있었다.
상상하던 모습과는 달랐지만 그게 유물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뭔가… 엄청나네.’
분명 땅속에 묻혀 있던 도장인데도 먼지 하나 붙어 있지 않았다. 아니, 먼지가 문제가 아니라, 표면 전체가 금빛의 신비한 광채를 흘리고 있었고, 도장의 주변 허공으로는 붉은 글씨가 홀로그램처럼 떠 있었다. 지나가던 세 살짜리도 이게 무언가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는 건 한눈에 알아봤을 것이다.
英文睿武 仁聖明孝 大王之寶 영문예무 인성명효 대왕지보.
[학문에 뛰어나고 문예에 통달하셨으며 어질고 존엄하시며 명철하고 효성스러우신 대왕의 도장.]
도장을 감싸고 떠다니는 예사롭지 않은 글씨.
한자를 모름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 와서 저절로 박히는 그 글자의 의미.
‘대, 대체 왜… 이런 게 지구에?’
이건 마치 다른 차원 문명들이 가지고 있는 마도구와도 같은 자태였다.
아니, 아니다. [만상공감]을 통해 전해지는 이 말로 표현이 불가능한 영험한 감각은 그 어디에서도 느껴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다. 전설적인 마도구들도 눈 아래로 볼 수 있을 법한 강렬한 영력이 느껴졌다.
이해할 수 없었다.
‘지구는 분명 영능학적으로 원시적인 동네인데… 어떻게 수백년 전의 물건에 이런 힘이 깃들어 있는 거지?’
그 어처구니없는 상서로움에 감히 손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쳐다보기만 하고 있는데, 머릿속으로 텔레파시가 천둥처럼 울렸다.
- 뭐 해! 찾았으면 빨리 들고 이쪽으로 와요! 자루를 뒤집어서 잡아요. 절대 맨손으로 잡으면 안 돼요!
그 서슬 퍼런 기세에 상념이 그만 날아가고 말았다. 나는 얼른 자루를 뒤집어서 도장을 집어들고 다시 자루를 뒤집어 도장을 집어넣었다. 도장이 자루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막대한 존재감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런데 이 도장을 들고 자기한테 오라는 건가 지금? 하준광이 한 걸음만 뛰어도 내 멱살을 잡아 올릴 텐데?
- 걱정 말라니까요! 이미 우리가 이긴 게임에요! 어떻게든 될 테니까 빨리 오기나 해요!
귀신처럼 날아와 꽂히는 텔레파시.
‘믿어보는 수밖에…….’
나는 입술을 깨물고 걸음을 옮겼다.
한 발, 두 발.
그리고 세 발을 걸을 때, 나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우우우웅-!
도장이 들어간 자루가 크게 흔들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풍경처럼 고요히 떠 있기만 하던 어비스 게이트의 씨앗도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앗? 아아……?’
내가 왜 잊고 있었지? 분명 어비스 게이트에서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그로 인해 주변이 쑥대밭이 되는 거였잖아?
나도 모르게 권승리를 쳐다보았다. 회귀자인 그녀가 이 사실을 몰랐나?
‘큿……! 어째서 벌써!’
[만상공감]으로 그녀가 입속으로만 내뱉는 말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알았는데 타이밍이 다른가? 역시 내가 이 유물을 챙긴 탓인가? 아직 하나는 멀쩡히 남아 있는데……?
나는 황망한 눈으로 데미안 루드비히를 바라보았다.
‘저기 도련님? 분명히 괜찮다고… 우리가 이긴다고 그랬죠? 이거 괜찮은 거 맞아요?’
그런데 그렇게 나와 눈이 마주친 도련님. 얼굴은 창백하게 질리고 눈동자는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뭐, 뭐야. 도련님.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더니 이게 무슨……!’
싸움은 어느새 소강 상태가 되었다. 하준광과 데미안, 권승리는 모두 흔들리고 있는 어비스 게이트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여름의 열기가 5도는 더 낮아진 듯한 팽팽한 긴장감과 오싹함이 장내를 휩쓸었다.
그만큼 게이트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흉악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저게 뭐지?’
온 세상의 차원 문명이 모여드는 타키넷에서도 만나지 못한 흉악한 존재감.
“…다들 내 뒤로 물러서.”
하준광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누가 보면 같은 편인 줄 알겠다. 하지만 권승리와 데미안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뒤로 물러섰다.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더라도 인류의 적이 나타나면 힘을 합한다는 건가?
하지만 그렇게 힘을 합한다고 해서 대항이 가능한 걸까?
그런 의문이 떠오르는 순간.
콰직!
구슬처럼 작던 어비스 게이트가 갑자기 확 벌어지면서 그 안에서 꿈틀대는 오징어 다리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투명과 반투명, 불투명이 모두 뒤섞인 불쾌한 질감과 투명도, 푸른회색, 붉은회색, 온갖 종류의 회색들이 검버섯처럼 피어 있는 불쾌한 색깔. 존재 자체가 불쾌하고 저주스러운 촉수가 튀어나와 하준광을 후려쳤다.
콰아아앙-!
차사검이 지잉지잉 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거울처럼 매끈하던 표면이 움푹 찌그러진 것이 보였다.
쿨럭!
데미안과 권승리가 수십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달려들어도 장난치듯 여유롭기만 하던 그가 단 일격에 피를 한 바가지나 쏟았다.
“이… 무슨……!”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다시 차사검을 치켜드는 하준광. 하지만 그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였다.
“도망쳐야 합니다.”
권승리가 어금니를 깨물며 말했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무혼 권가의 능력자들이 시간을 벌어줄 겁니다.”
씹어 뱉는 듯 말하는 권승리의 그 말에 그녀의 수하들은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꼭 물었다.
“루드비히 가문의 경호팀도…….”
데미안 루드비히가 씁쓸하게 말하자, 그의 수하들 역시 입술을 꼭 깨물고 나섰다.
‘미친. 안 돼. 어림도 없어.’
하지만 나는 느꼈다. 그런 식으로는 어비스 게이트에서 기어 나오는 저 괴물을 따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이중에 나보다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만상공감]이 속삭이고 있었으니까.
저게 얼마나 무지막지한 괴물인지.
그리고…….
우우웅- 우우웅-
자루 속에서 울어 대고 있는 이 유물만이 저 어비스 게이트를 닫을 수 있다는 사실도.
울컥- 벌컥-
잠시 잠잠하던 어비스 게이트가 또다시 요동을 쳤다.
더 이상 생각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덥석.
나는 자루를 열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도장을 맨손으로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