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유물
‘생각하자. 생각해야 한다, 시민아.’
뭐가 있을까? 지금 이 시점에서 하준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사건이!
그때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
‘그건 안 돼, 미친놈아!’
한 줄기 남아 있는 내 이성이 나를 붙잡았지만 위기감에 짓눌린 나의 입은 벌써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제가 오다가 이상한 걸 봤습니다!”
하지만 하준광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요즘 세상에 안 이상한 일이 어디 있어? 그보다도 아까 그거…….”
하지만 그런 그도 이어지는 나의 말에는 더 이상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검은색 게이트였습니다!”
“…뭐라고?”
우득.
하준광이 그 커다란 손으로 내 손목을 붙잡았다. 무슨 탱크로 짓밟은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힘에 내 손목이 감자칩처럼 부서졌다.
“끄…….”
짜릿한 고통에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하준광은 부러진 내 손목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질문을 이어 갔다.
“검은색이라고?”
서슬 퍼런 기세에 입술을 깨물고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디서?”
“경복궁… 입니다.”
“안내해. 저건 일단 내가 챙길 테니까.”
치덕.
하준광은 손목을 놓아 주며 다른 손으로는 내 부러진 손목에 골절 치료용 젤을 척! 발라 주었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듯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젤을 바른 손목은 처음에는 시원하더니 이내 화끈, 뜨거워지며 부러진 손목을 꽉 압박했다. 5분 내에 그 어떤 뼈도 붙여 준다는 유명한 던전 부산물. 대량으로 발견되는 던전이 있어서 일반에도 제법 잘 알려져 있었다.
장점은 말도 안 되게 빠른 시간에 부러진 뼈를 붙여 준다는 것이고, 단점은 무척 아프다는 것이었다.
‘끄으으… 손목이 가운데 급소가 된 것처럼 아프잖아……!’
하지만 꾹 참고 움직여야 했다. 누구의 명령인데 거역을 한단 말인가?
볼살을 파들파들 떨고 식은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경복궁을 향해 걸음을 돌리는 나를 보며 하준광이 한마디 했다.
“잘 참네. 그래야지.”
그리고는 큼지막한 웃음을 입에 걸었다.
웃어?
갑자기 사람 손목을 이 꼴로 만들더니, 또 이번엔 웃어?
종잡을 수가 없는 빌어먹을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속내를 내비칠 수는 없는 법. 억지로 억지로 똑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하준광은 껄껄 웃으며 내 등짝을 퍽퍽 치고는 말했다.
“자, 그럼 빨리 가자고.”
그리고는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나를 자기 옆구리에 끼고 달리기 시작했다.
쿵! 콰앙!
발을 한 번 구를 때마다 땅이 푹푹 꺼져나가고 건물을 몇 개씩 뛰어넘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곳이 광화문이었다. 아직 손목도 다 붙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게… 사람인가.’
경이로운 속도에 넋이 빠져 있는데 하준광이 침음을 흘렸다.
“음… 진짜 심상치 않잖아? 싹 쓸려 있네?”
하준광은 광화문 앞에 형성되어 있는 던전, ‘증명의 전장’을 기웃거렸다. 원래는 손을 대면 머릿속으로 긴 도전 목록이 생성되어야 하지만 지금은 손을 대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텅 비어 있었다. 증명에 전장에 묶여 있던 괴물들이 모두 풀려났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이상했다.
증명의 전장에서 많은 괴물이 풀려난 게 틀림없는데 이 일대는 괴물 한 마리 없이 조용했다. 마치 누군가가 모조리 정리한 것처럼.
“어디 보자…….”
쿵!
하준광은 나를 데리고 다시 훌쩍 뛰었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광화문 앞에서 근정전 꼭대기를 밟은 그는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의 입가에 커다란 웃음이 그려졌다.
“허, 뭐야? 저긴 무혼 권가의 여식이고 저쪽은 루드비히의 막내잖아? 여기 모여서 자기들끼리 파티를 하고 있었어? 날 빼놓고?”
그 말에 나도 눈이 번쩍 뜨였다.
둘러보니 저 경복궁 뒤편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하준광처럼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데미안 루드비히라고 생각하고 보니 그렇게 생긴 꼬맹이가 하나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데미안보다도 더 작은 꼬마 하나가 어렴풋이 보였다.
‘무혼 권가의 여식……? 응? 잠깐? 설마 권승리?’
분명 그런 풍문이 있었다. 흑색전선의 권승리가 무혼권가의 외동딸이라는 소문이.
‘진짜? 진짜로?’
권승리. 다른 영웅들과 달리 모든 게 베일에 감싸여 있던 영웅. 누군가는 그 존재를 도시 전설로 취급해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만약 그 소문들이 사실이라면, 저기에 서 있는 저 꼬마가 권승리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관련한 소문의 10분의 1만 사실이라고 해도, 감히 짝을 찾을 자가 없는 영웅 중의 영웅인 권승리가!
두근.
가슴이 떨렸다. 지금 이렇게 설렐 상황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건 거의 51구역에 감금되어 있다는 외계인을 만나는 기분이었으니까.
‘진짜 권승리야? 그런데… 다들 저기서 뭐 하는 거지?’
데미안도 데미안이지만 특히 권승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그녀가 내 예상처럼 회귀자라면, 이곳이 무척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 * *
경복궁이라면 분명히 하준광의 관심을 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 그렇기 때문에 말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경복궁이 앞으로 5년 뒤, 무적일 것만 같았던 하준광이 전사하는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를 전사시켰던 검은색 게이트는 그때로부터 5년 전… 그러니까 정확히 오늘, 육삼공 참사 때 발아했다고 알려졌다.
막을 수도 없고 대적할 수도 없는 절망. 어비스급 게이트의 최초 등장이었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괴물들이 창궐하는… 아갈타의 침략자들마저 필사적으로 기피하는 멸망의 씨앗.
하준광은 5년 후, 검은색 게이트가 발견되었다는 말을 듣고 주저 없이 경복궁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전사한다.
그런 하준광이 벌써 경복궁에 와 있다. 그런데 그뿐 아니라 데미안 도련님과 회귀자로 추정되는 권승리까지도 경복궁에 와 있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목을 쭈욱 빼고 기웃거리는데, 하준광이 내 뒷덜미를 달랑 들더니 몸을 날렸다.
쿵! 쿠- 쿠- 쿵!
딱 세 걸음 뛰어 경복궁을 가로 질러 권승리와 데미안 사이에 착지했다. 내려서 보니 분위기가 살벌했다. 무혼권가와 루드비히 양 세력이 무기를 꺼내 들고 서로를 노려보는 게 금세 한판 벌이기라도 할 것 같은 모양새.
물론 지금은 갑자기 등장한 하준광 때문에 다들 눈이 동그래진 상태였다.
“네가 말한 게 저거야?”
하준광은 주위의 분위기는 신경도 쓰지 않고 나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검은 구슬 같은 것이 있었다. 허공에 떠 있는 검은 구멍. 멀리서는 안 보이더니 여기서는 보이네.
‘그런데… 진짜 저게 있었구나.’
어비스 게이트는 씨앗 형태로 처음 발현한 직후 거대한 파괴를 일으키고는 자취를 감춘 후 다시 3~10년이 지나서 더 크게 발현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일명 잠복기였다.
5년 뒤 하준광을 죽인 어비스 게이트는 정말 오늘 이곳에 씨앗을 내렸던 것이다.
“네, 네. 맞습니다.”
“흐음…….”
나는 하준광이 어비스 게이트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하… 큰일 났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난 대체 왜 하준광을 여기로 불러들였는가? 아무리 급했다지만 한 사람을 그가 죽었던(아니 죽게될인가?) 장소로 불러내다니. 도덕적으로도 옳지 않고 위험하기까지 한 판단이 아닌가?
‘어떻게 발을 빼지?’
심지어 여기에 계속 있는 건 위험했다.
‘언제, 어떤 방식인지는 몰라도… 곧 사단이 벌어진다.’
어비스 게이트의 씨앗이 발견되면 머지않아 그 일대는 쑥대밭이 된다. 하지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는 모두 극비 사항이어서 내가 알 수 없었다.
그저 분명한 건 뭔가가 일어나고 그로 인해 경복궁이 흔적도 없이 소멸한다는 것. 육삼공 참사가 남겼던 여러 미스터리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사건.
나는 거기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내 시선이 저절로 데미안 루드비히를 향했다.
‘도련님! 여기서 빠져나가야 돼요!’
그런 간절한 염원을 담았다. 부디 하준광이라는 괴물의 손에서 도망치게 해 주소서.
그런데 그런 나를 바라보는 데미안 도련님의 눈빛이 이상하게 흔들렸다.
‘왜 그래?’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놀랍다는 듯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갑다는 듯이?
쿵, 쿵쿵, 콩닥.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과 톡톡 곤두서는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뭐, 뭐야? 쟤, 왜 이래? 마치 목숨이 걸린 도박판에서 마지막 카드를 뒤집는 순간처럼 바싹 긴장한 채로.
그때 하준광이 말했다.
“자네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그러자 데미안 도련님과 대치하고 있던 꼬마 여자아이가 공손히 답했다. 그러니까… 권승리일지도 모르는 아이가.
“어르신, 저희는…….”
“흐. 사실 말 안 해도 알아.”
거기까지 말한 하준광은 히죽 웃었다.
“그래서 유물은 지금 누가 가지고 있어?”
응?
유물?
지난 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처음 듣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 단어를 모르는 건 나뿐이었나 보다.
움찔 놀라는 권승리와 눈치를 살피는 데미안.
‘뭐야? 너희는 다 그게 뭔지 알아?’
회귀자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30년 미래에서 돌아온 나도 모르는 걸 13살, 14살짜리 꼬마들이 벌써 알고 있다니… 이 더러운 세상.
“휴우…….”
그때 권승리가 살짝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동자는 불이 붙어 이글거리는 듯했다.
“협회장님, 이번엔 빠져 주시지요.”
그녀의 도발적인 말에 그녀 뒤에 서 있던 무혼 권가의 초능력자들은 물론이고 데미안 도련님마저도 깜짝 놀랐다. 한국 땅의 지배자는 협회장 하준광이다. 협회장이라는 단어가 친숙하다고 해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위원장이라는 직위도 단어만 보면 사실 딱히 권위적인 단어가 아니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왕처럼 군림하지 않는가?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한국 땅에서는 날고 기는 루드비히의 혈족도 하준광에게 한 수 접어야 했다. 그런데 대한민국 소속인 권승리가 이토록 맹랑한 반응을 보이다니?
‘대체 유물이 뭐길래?’
하준광의 얼굴에 험악한 웃음이 만발했다.
“맹랑하구나. 이름이 뭐라고?”
“무혼 권가의 권승리입니다.”
아, 역시 권승리가 맞았다. 그런데 아무리 회귀자라고 해도 아직은 옛 기량의 반의반의 반도 회복하지 못했을 텐데 뭘 믿고 하준광에게 뻗대는 거지?
하준광이 이를 드러내며 권승리에게 으르렁거렸다.
“내 귀엔… 꼭 자네가 유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권승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중에 다 설명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물러서 주십시오. 위험합니다.”
“위험? 꼬마야. 검은색의 작은 게이트다. 그 근처에서 유물을 본 게 이번이 처음일 것 같으냐? 무엇이 나를 위험하게 할 수 있을까?”
“이곳은… 지금까지와는 다릅니다.”
“조언 고맙군. 아무튼 그건 내가 알아서 하고.”
성큼.
하준광이 위압적으로 다가서자 권승리를 중심으로 돌풍이 불었다. 그녀의 손끝과 머리칼 끄트머리가 하얗게 탈색이 되었다.
뭐지? 저건 어떤 초능력이지? [만상공감]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너무나도 복잡했다. 감각을 공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지럽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대체 뭐지?
한쪽은 [만상공감]으로도 그 감각을 읽어 낼 수 없는 미증유의 강함을 지닌 하준광, 다른 한쪽은 [만상공감]으로 감각을 읽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없는 미지의 힘을 지닌 회귀자 권승리. 그 둘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기세를 피워 올렸다.
“그만. 그 이상 다가오면 공격으로 간주합니다.”
채채채챙-
뒤늦게 무혼 권가의 능력자들이 각자의 무기를 꺼내 하준광을 겨눴다. 일단 그들의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빼 들기는 했지만, 차마 하준광과 싸울 엄두가 나지 않는지 눈동자를 연신 여기저기로 굴려 대는 모습이었다.
대한민국 최정예로 불리는 무혼 권가의 능력자들마저 오합지졸로 보이게 만드는 힘, 그게 바로 하준광의 위엄이었다. 그런 하준광 앞에서 조금도 주눅 들지 않는 권승리의 모습은 경이로움을 넘어 기묘해 보이기까지 했다.
“호오?”
크그그극-
하준광이 재밌다는 듯이 콧소리를 흘리며 거대한 대검을 수평으로 들어 올렸다. 일검을 휘두르기만 해도 무혼 권가의 능력자들은 빗자루질 앞의 먼지처럼 쓸려 나갈 것만 같았다.
“물건 하나냐. 아니면 수십의 목숨이냐. 꼬마야 네가 선택할 테냐?”
명백히 자신들을 무시하는 그 말에 무혼권가의 능력자들은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소시민 씨, 대답하지 말고 들어요.”
그때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온 데미안 도련님이 속삭였다.
“저 꼬마애가 아까부터 유물을 가지고 있는 척하는데 사실 저는 안 믿어요.”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본인이 유물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주변을 수색하려고 할 때 못 하게 방해할 이유가 없거든요. 지금도 그래요. 무리해서 하준광의 시선을 자신에게 붙잡아 두고 있잖아요.”
잘은 모르지만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고…….
“그러니까 저 둘이 대치하는 동안 우리는 유물을 찾을 겁니다. 참고로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보는 순간 알 수 있을 거예요. 당신도 표나지 않게 주변을 수색하세요. 혹시 탐지 종류의 능력이나 아이템이 있으면 지금 바로 사용하고.”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대체 유물이 뭔데? 그게 뭔지 알아야 찾든 말든… 응?
‘…가만?’
반사적으로 펼친 [만상공감]에 뭔가 말도 안 되는 물건이 걸려 들었다.
‘뭐, 뭐, 뭐야 이건……?’
이게 뭐지? 사람이 만든 물건인가?
지금 느껴지는 이 물건이 태양이라면 마에스터 유진의 물건은 반딧불이에 불과했다.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정말 그 정도로 현격한 차이가 느껴졌다. 사람이 아니라 신이 만든 물건이 아닐까? 이런 굉장한 물건을 어떻게 이제야 느끼게 된 건지? 아니, 그건 어쩌면 당연했다. 태양을 똑바로 바라보면 오히려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되듯이, [만상공감]에 너무나 강렬한 자극이 전달되니 오히려 인지하는 데 늦어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눈을 끔뻑이며 데미안과 권승리 그리고 하준광을 바라보았다.
아직 드러나지도 않은 하나의 물건을 두고 벌써부터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 유물이라고 불리는 단 하나의 보물을 차지하기 위한 쟁투. 한데…….
‘두 개잖아? 하나가 아니라.’
잠깐 이거…….
꿀꺽.
저절로 침이 목구멍을 넘어갔다. 달다. 어디선가 다디단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