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하준광
어떻게 싸웠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건 어느 순간부터 내가 웃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확한 타이밍에 배리어 스틱을 부러뜨리면 빛이 화아악, 번지면서 마족의 주먹이 이불을 때린 것처럼 느려진다.
그 타이밍에 맞춰 반격을 가할 때의 쫄깃함.
마족은 후우욱, 숨을 뱉으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한층 더 빨라진 공격.
하지만 나에겐 절규를 삼킨 밤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방어구도 있다. 소매를 휘둘러 정확히 공격을 흘려냈을 때의 쫀쫀한 촉감!
악몽 사슬로 놈의 팔다리를 감았을 때의 팽팽한 손맛!
네필림의 날개를 펼쳐 아슬아슬하게 놈의 공격권을 벗어났을 때의 상쾌함!
‘아… 내가 쓰는 장비들 정말 너무 좋구나.’
어느 순간 나는 싸움을 잊고 그 아름다운 감각의 향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놈이 쏟아 내는 구름 강기를 다 해소하지 못해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가도 좋았다. 그마저도 좋았다. 점점 더 빠르게 훅훅 대는 마족의 숨소리도 자장가처럼 감미로웠다.
그렇게 마지막 배리어 스틱을 사용하고, 마비휘파람 캔디도 고작 4개가 남고, 물처럼 들이켠 회복 포션 때문에 입 속이 들큼해졌을 때쯤.
쩌어엉-!
삐걱이던 네필림의 날개가 결국 깨지고 말았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날개가 격렬한 기동을 더 이상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위기. 그런데…….
‘나 진짜 미친 건가?’
심지어 날개가 부러지는 그 느낌조차 좋았다. 냉동고에서 갓 꺼낸 아주 얇은 초콜릿을 부러뜨리는 듯한 그 감각. 아아…….
어차피 쓸 만큼 쓴 아이템,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떠오르는 건 그저 더 싸우고 싶다는 생각뿐.
후우욱-
후욱-
하아… 하아악…….
하지만 어느새 마족의 호흡은 심하게 거칠어져 있었다. 헬멧으로도 감출 수 없을 만큼.
얼마나 탈진했는지 어깨가 다 들썩였다.
반면에 나는 오히려 싸우기 전보다 더 쌩쌩했다. 어쩌면 내 온몸을 휘감고 있는 백색 아우라들 탓인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만상공감]도 한 단계 더 성장해 있었다. 싸우는 와중에 물건과 교감해 실시간으로 소모된 영력을 채울 수 있을 정도로.
기묘하게 팽창된 집중력은 그렇게 질리도록 [만상공감]을 사용했음에도 여전히 더 싸울 수 있는 여력을 주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서민서처럼 헛구역질을 해야 할 텐데… 기묘한 고양감이 내 혼 전체를 끌어안고 있었다. 살면서 몇 번 경험할 수 없는 최상의 순간.
그래서 아쉬웠다.
“뭐야? 벌써 끝이야?”
계획대로이긴 했다. 구름 강기를 정면에서 뚫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놈을 지치게 만드는 전략을 짰다. [만상공감]을 활용해 조금도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놈이 쉬려고 하면 일부러 헛점을 드러내 공격을 유도하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배리어 스틱과 마비휘파람 등으로 흐름을 끊고… 체력을 깎아먹을 수 있는 모든 수작을 다 부렸다.
하지만 그래도 훨씬 더 오래 싸울 줄 알았는데…….
‘구름 강기까지 다루는 놈이 왜 비전투병인가 했더니… 체력 조루였어?’
아쉬움에 조금 기다려 봤지만 마족은 좀처럼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오히려 약간의 텀을 주니 더더욱 피로가 밀려오는지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싸움을 끝내야 했다.
“빌어먹을 자식… 다음 생에는 좀 더 튼튼하게 태어나라.”
거인창을 들어올렸다.
“네필림의 날개가 부러진 게 지금은 아쉽네.”
역시 거인창은 하늘에서 내리꽂히면서 찔러야 제 맛인데.
대신 있는 힘껏 발을 굴렀다.
푸우욱!
아우라가 활활 타오르는 거인창은 어렵지 않게 티탄슈트를 뚫었다.
‘아, 근데 이것도 나쁘진 않네.’
하늘에서 내려꽂는 게 케이크를 포크로 뜨는 느낌이라면, 달려서 꽂는 건 두툼하게 익힌 스테이크를 포크로 찌르는 느낌. 둘 다 무척 좋구나.
‘응? 근데 이게 뭐야?’
아쉬운 대로 전투의 마지막 여운을 만끽하려고 하는데, 돌연 [만상공감]이 불온한 움직임을 감지했다.
‘자폭?’
격렬하게 높아지는 티탄슈트 내부의 온도.
‘미친… 적에게 전리품을 내주지 않겠다 이건가?’
들떠 있던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마음이 급했다.
[만상공감]을 최대로 발휘해 티탄슈트를 살폈다. 다행히 티탄슈트의 동력원이자, 제어 장치인 코어를 금세 발견할 수 있었다.
카캇!
번개처럼 청하를 움직여서 코어를 도려냈다.
키이이이…….
당장 폭발할 듯 빛과 열을 내뿜던 코어가 슈트 밖으로 나오자 차갑게 식으며 움직임을 멈췄다. 무럭무럭 뿜어내던 증기도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죽었니?”
코어를 들어 올렸다.
멈춰 버린 코어는 반듯하게 깎인 구체 형태에 표면에 새겨진 다채로운 무늬가 새겨진 돌덩이였다. 겉모습만 보면 절대 움직이지 않을 골동품처럼 보일 정도였다.
긴장한 채로 [만상공감]으로 살펴보았더니 다행히도 휴면 상태에 들어간 것뿐이었다. 적절한 조치만 취하면 충분히 다시 활용할 수 있었다.
“후우… 다행이네.”
슈트 외 장갑도 살펴봤더니 파손이 그리 크지 않았다. 상품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제야 나는 긴장을 풀었다.
“인마, 자폭을 하면 어떡해? 이번에 가지고 있는 타키온 다 털었는데… 너로 한몫 뽑아내야 된다고.”
티탄슈트의 코어를 가방에 잘 보관하고 마족의 슈트를 벗기기 시작했다.
“와… 근데 이 건틀릿 진짜 너무 좋은 물건인데?”
일단 마족 놈이 끼고 있던 커다란 건틀릿을 가방에 챙겼다. 건틀릿을 넣으니 커다란 가방도 순식간에 가득 찼다. 그나마 건틀릿에 자체적인 크기 조절 기능이 없었다면 넣지도 못했을 것이다.
헬멧을 벗기고 슈트를 벗겨서 고이 개 놓고, 마침내 평상복을 입은 마족의 시체를 눈앞에 두게 되니 저절로 입맛을 다시고 손을 비비게 되었다. 오랫동안 모아 온 돼지 저금통의 배를 가를 때처럼 떨렸다.
드디어 놈의 품을 뒤질 시간이었다.
“자… 그래서 너는 얼마나 가지고 있니?”
임무 특성상 자율성이 많이 보장되는 측량관측병이니 생각보다 더 많이 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제 장비로 그렇게 좋은 건틀릿을 가지고 있었으니 굉장한 부자일지도 모른다.
온갖 행복한 상상을 품으며 마침내 두툼한 주머니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으음-!”
주머니를 여는 순간 감정의 동요를 숨길 수 없었다. 심장이 쿵쿵 요동쳤다.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시… 시발, 이게 뭐야.”
눈물이 핑 돌 뻔했다.
머리가 아찔한 것이 싸울 때는 못 느꼈던 초능력 남용의 부작용이 찾아오는 듯했다. 몸이 아프고 컨디션이 수렁으로 빠져든다. 이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시발! 오크만도 못해!”
주머니 속에는 고작 30알의 타키온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깜짝 놀라서 다시 마족 놈의 전신을 뒤졌다. 팬티까지 벗겼다. 하지만 없었다. 진짜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30알? 오크 개짐에서 나온 양이랑 얼마 차이도 안 나잖아? 장난해? 그 난리를 피웠는데 돌아온 게 이게 다야? 정말?
그런데…….
끔찍한 현실 앞에서 아연실색하고 있는 나에게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크흠- 거 뭘 그렇게 만지작거리고 있나? 변태처럼.”
나는 너무 깜짝 놀라면 움찔하지도 못 했다. 뱀과 마주친 개구리처럼 딱 멈춰 버린 몸.
‘누… 누구지? [만상공감]으로도 느끼지 못했어.’
어떻게?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만상공감]은 세상의 모든 것과 감각적으로 동화될 수 있는 능력인데……?
뒤늦게 [만상공감]을 최대로 발휘하자, 그제야 희미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마치 감각이 없는 사람처럼… 아니지, 물 속에서 듣는 소리나 얇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보는 세상처럼 아주 희미한 감각만이 전달되었다.
아니지. 그러고 보면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 있었다. 지난 생의 내가 죽기 5년 전, 참가했던 사열식에서 검웅 최치국이 등장했을 때, 그때도 나는 최치국의 감각을 흐릿하게 느꼈다. 이 정도는 아니지만… 장갑을 낀 촉감이나 이불을 덮어쓰고 듣는 소리 같은 그런 먹먹한 느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나보다 압도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아니, 잠깐. 만약 강해서 그런 거라면… 이 사람은 그 당시의 최치국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하다는 말이야?’
그게 말이 되나?
최치국은 검 한 자루로 대한민국을 구한 영웅인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회색 머리칼을 뒤로 넘겨 동여맨 거구의 노인이 보였다.
‘아, 아아…….’
그 순간 나는 모든 걸 이해했다. 내가 왜 이 사람을 잊고 있었을까.
“아무튼 대단했어. 솔직히 질 줄 알았거든? 그런데 상대의 호흡을 참 절묘하게 끊을 줄 알드만? 아주 얄미웠어.”
노인은 껄껄 웃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가 입을 크게 벌려 미소 지었다.
“그건 그렇고 저놈의 자폭은 어떻게 막은 거야? 좀 가르쳐 줘.”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노인의 커다란 손을 마주 잡았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협회장님.”
내 대답에 노인, 그러니까 대한민국 헌터협회장 하준광의 웃음이 한층 더 커졌다.
* * *
헌터 협회. 처음에는 정부 산하 기관 내지는 공기업과 비슷한 느낌으로 시작했지만, 점점 그 중요성이 커지고 커져서 이제는 사실상 행정부 최고 기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단체였다.
조선 시대의 비변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많은 실권이 헌터협회에게 넘어갔다.
하준광은 그런 대한민국 헌터협회의 3대 회장이자, 현직 회장인 존재. 사실상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자이자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강의 초능력자였다. 호국 가문의 주인들이 대한민국의 귀족이라면, 하준광은 그들 위에 군림하는 왕.
그가 그렇게 죽게 되기 전까진, 그보다 더 강한 사람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오십을 먹었을 때도 전설처럼 회자되던 인물.
‘여기서 하준광을 만나다니?’
혹시 지난 생에 이 마족을 잡아 죽인 게 하준광이었나? 근데 대체 왜 이 난리통에 협회장이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 거야?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던 일에 머리는 하얗게 비고 침만 꼴깍꼴깍 넘어갔다.
그런 나에게 하준광이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저놈한테서 뭘 빼냈지? 그것 좀 보여 줘 봐.”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손을 내미는 하준광. 자기 물건을 요구하는 듯한 그 당당함에 나는 순간적으로 티탄슈트의 코어를 꺼내 줄 뻔했다.
‘정신! 정신차려!’
다행히 가방으로 뻗으려던 손을 제때 억누를 수 있었다.
하준광은 사자와 같은 인물이었다.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협회장이라고 해서 그가 선하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사자에게는 선과 악이 없다. 그가 괴물과 싸우는 건 사자가 영역을 다투는 것과 같은 것이고, 여우나 토끼 같은 건 호기심으로 장난치다가도 물어 죽일 수 있는 법이었다.
마족 놈에게서 타키온이 고작 30알밖에 나오지 않은 지금. 티탄 슈트의 코어와 건틀릿 등의 전리품은 반드시 타키넷으로 가져가서 팔아야 하는 물건이었다. 그걸 하준광에게 아무렇지 않게 보여 준다?
‘그가 곱게 보고 돌려준다는 보장은 없어. 절대 없어.’
싸늘한 긴장감으로 등줄기가 차게 식었다.
이제야 제대로 상황 파악이 되었다.
‘생각, 생각하자.’
힘들게 사냥에 성공했는데 그 평야를 지배하는 사자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온 것이다. 그가 나를 영역을 침범한 하이에나로 느낀다면 물어 죽일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배가 고프다면 먹이를 빼앗을 것이다. 안 뺏기겠다고 발광하다가는… 물리거나 두툼한 앞발에 한 대 치일 수도 있다.
결국, 여기서 전리품들을 지키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키워 볼 만한 새끼 사자로 인정받는 것.’
그리고 그것의 전제 조건은… 하준광이 배부른 사자여야 한다는 것.
물론, 어쩌면 이 모든 게 나의 착각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목숨 같은 아이템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안일하게 굴 수는 없지.’
그러니까…….
“협회장님!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응?”
나는 일단 그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