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부조리
지난 생의 나는 그 어떤 위험한 전투도 마다해 본 적이 없었다.
피곤함? 공포?
그런 건 느끼지 못했다.
그저 괴물이 미웠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다 괴물에게 죽은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서민서도 그랬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님도 그랬고.
내가 50살을 넘겼을 때, 많은 사람이 그걸 기적이라고 말했다. 남들은 일주일에 한 번 싸울 때 나는 이틀에 한 번씩, 어떤 때는 매일매일 전투를 치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도 계속 살아서 괴물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었으니까.
별로 강하지도 않았던 내가 그 와중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그건 [만상공감] 덕분이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태라고 했던가?
그야말로 나를 위한 말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부조리가 존재하는 게 또 이 빌어먹을 세상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이걸 피한다고?’
피할 수 없어야 정상인 공격이었다. 가속도 할 만큼 했고, 딱 적당한 타이밍에 마비휘파람 캔디도 불었다. 이쯤 하면 당연히 아무것도 못하고 꿰뚫려야지!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거인창의 창두가 막 놈의 몸에 닿으려고 하는 순간 느꼈다.
‘미친…….’
[만상공감]을 통해 느낌이 딱 왔다.
파지직-!
마족 놈이 입은 티탄 슈트 속으로 뻗어 나가는 짜릿한 전류. 그 짜릿함이 마비휘파람 캔디의 경직을 풀어 내고, 마족의 몸을 강제로 움직였다. 말도 안 되는 속력으로 내 창의 경로를 벗어났다!
동시에 놈의 시선이 내 전신을 훑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한 점의 동요도 없이.
‘위험ㅎ……!’
즉시 창을 놓고 전방으로 소매를 떨치며 옆으로 굴렀다. 소매에 뭔가가 걸린다 싶은 순간, 폭음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앙!
파라라락-!
소맷자락이 찢길 듯이 펄럭였다. 팔뚝이 칼로 난도질당한 것처럼 아렸다.
‘크윽! 위력이 무슨……!’
삐이이-
이명이 울렸다. 온몸이 징징 울리고 골이 댕댕거릴 만큼 강렬한 충격. 설상가상으로 순간적으로 [만상공감]이 끊어졌다. 온 세상에서 밀려들던 정보는 사라지고 눈 가리고 코 막고 귀 막은 채 물속에 거꾸로 처박힌 느낌이었다.
‘미친… 이러면 공격을 미리 알 수가 없잖아……!’
공포.
[만상공감]을 깨우친 이래로 거의 느껴 본 적 없는 그 감각이 나를 덮쳐 왔다. 놈은 지금 어딨지? 지금 공격하고 있나? 차갑게 얼어붙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일단 뒤쪽으로 굴렀다.
쿠아아앙-!
땅을 뒤흔드는 충격에 겨우 몸을 일으켜 앞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제서야 물 밖으로 나온 것처럼 감각이 되돌아왔다. 다시 보는 세상은 정말이지…….
“하… 부조리하네, 정말…….”
처음에 눈에 띈 것은 희뿌연 증기였다.
마족의 티탄 슈트에서 흘러나오는 영력의 증기.
그리고 거대한 건틀릿.
슈트에서 흘러나온 증기가 담배 연기 수준이라면 건틀릿에서는 증기기관차 수준으로 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살짝 푸른 빛이 섞여서 빛나는 신비한 증기를 두른 채, 마족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안 좋다. 이건 정말 안 좋았다.
“빌어먹을… 측량관측병 주제에 구름 강기를 쓸 정도로 영능 지배력이 뛰어나다고?”
영력이 유형화되어 물질처럼 기능할 정도가 되면 그것을 강기剛氣라고 불렀다.
강도로 따지자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보다 단단하고, 탄성으로 따지면 세상에서 가장 탄성이 강한 물질보다 탄력적이며, 최고의 전도체, 반도체, 비전도체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물질이 아니되 가장 완벽한 물질이라 부를 수 있는 그것이 바로 강기였다.
그중에서도 구름과 같은 형태로 유형화된 강기를 구름 강기라고 불렀다.
그런 게 여기서 등장하다니? 뭔가 난이도 조절에 실패한 게임을 하는 기분이었다.
“절규를 삼킨 밤이 아니었음 죽었을지도…….”
살짝 떨리는 손가락으로 내 까만 가죽 상의를 쓰다듬었다. 넓고 팔락이는 소매로 받아 충격량을 대부분 흡수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순간이나마 [만상공감]이 끊길 정도로 강력한 충격을 받았다. 이 방어구가 없었다면 어땠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그렇게 겨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는데, 마족 놈은 나에게 여유를 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쿵- 쿵- 쿵- 쿵!
슈트를 입은 놈의 키는 2미터 50센티미터가 넘었다. 그런 우락부락한 것이 나를 향해 뛰어왔다. 한 발, 한 발 땅에 닿을 때마다 클로즈업이라도 하듯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야, 야, 잠깐!”
당황하는 와중에도 나는 [만상공감]을 최대로 발휘해 녀석의 움직임을 읽었다.
오른쪽 훅이다!
고개를 낮춰 피하고,
왼쪽 무릎이 올라온다!
땅을 한 바퀴 굴러서 피하고.
오른손이 땅바닥을 쓴다! 점프해서……! 악? 잠깐만 이 타이밍에 몸통 박치기를?
콰앙!
황급하게 소매를 떨쳐서 충격을 흡수했지만 대로 반대편까지 나가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빌딩을 들이받고, 머리 위로 깨진 유리창이 떨어지고 나서야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너무 하잖아!”
[만상공감]으로 놈의 움직임을 미리 읽는 것까지는 아무 문제없었다. 하지만 놈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미리 알아도 대응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게 문제였다.
‘티탄 슈트. 저게 진짜 사기네. 여차하면 전기 자극을 줘서 말도 안 되는 순간에 몸을 움직여 버리니까… 대비를 못 하겠어.’
몸을 일으키는데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심지어 건틀릿도 사기야.’
유독 건틀릿에만 저렇게 많은 구름 강기가 뿜어져 나오는 건 마족 놈의 영능 지배력이 대단해서라기보다는 건틀릿 자체의 강기 강화 효과일 확률이 높았다.
그 덕분에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 강기가 스칠 때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대미지가 닥쳐 왔다. 속은 울렁거리고 피가 자꾸 올라와 입에서 비린 쇠맛이 났다. 방어구가 가리지 못한 장단지나 뺨 같은 곳이 유리가루를 뿌리고 비빈 것처럼 화끈화끈 쓰라렸다. 가만히 있는데도 손발이 떨렸다.
‘막강하다.’
어찌보면 운이 나빴다.
다른 전투 무장의 종류로 보아 측량관측병이 맞기는 한 것 같은데… 그중에서도 유독 강한 녀석이었나 보다. 마족이라는 이름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힘을 보여 주고 있었다.
1류 헌터 중에서도 아무나 상대하지 못할 것이다.
‘정말 강해. 그런데…….’
그런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의외로 해 볼 만할 것 같지 않아?’
공격 하나하나를 막을 때마다 힘에 부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어쨌든 막아 내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만 더 잘 하면 어찌어찌 비빌 수 있지 않을까? 저 괴물을 상대로?
‘짜릿하네.’
언제 이렇게 성장했던 걸까?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쿵쿵!
심장의 박동을 따라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왔다.
‘더 치열하게 싸우고 싶다.’
생사를 겨루고 싶다. 지난 생에 내게 악몽을 선사했던 이 개자식들에게 이번엔 내가 악몽을 선사해 주고 싶다!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화르륵-
청하에서 피어오른 아우라가 내 몸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
‘완전한 동화를 사용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까지는 청하의 특성 내 신체로 끌어올 수 있었다. 내 몸이 중견 요리사가 휘두르는 칼날처럼 약간 민첩해지고 날카로워진다.
‘게다가… 절규를 삼킨 밤을 잘 사용하면……!’
파르르르-
나의 까만 상의 위로 하얀 아우라가 퍼져 나갔다. 소매가 저절로 펄럭이기 시작했다.
[만상공감]을 통해 ‘절규를 삼킨 밤’이 지닌 방어적 특성이 더욱 강화된다.
“감 잡았다고.”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승리의 길.
그 길이 망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침이 배어 나와서 입속이 촉촉해졌다. 혀로 입술을 한 번 핥았다.
힘든 싸움이겠지만 그 과실은 몇 배는 더 달콤할 테다.
‘마족아.’
네가 소지한 타키온도,
입고 있는 티탄 슈트도.
너의 건틀릿도.
‘모두 내 거다!’
나는 허리춤으로 손을 뻗어 배리어 스틱을 손에 쥐었다. 그 상태로 아무 두려움 없이 정면을 향해 마족, 아갈타의 병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빌어먹을 놈들. 그 고생을 시켜 놓고 아무것도 안 줘? 정말로 부조리하군!”
거대한 남자는 느릿하게 담배를 태우며 투덜거렸다. 회색 머리칼은 올백으로 대충 넘겼고 곤색의 가죽 갑옷은 정장처럼 몸에 딱 피팅이 되어 있다. 완전히 세어 버린 머리카락과 깊은 주름이 패인 이마로 볼 때, 칠십은 족히 넘긴 노인 같았지만 큰 체격과 탄탄한 근육이 우악스런 남성미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던 거대한 대검을 아무렇게 던져놓자 쿵, 소리를 내며 그 무겁디 무거운 칼이 땅을 푹 파고 들었다.
그의 앞에는 마족이 둘이나 누워 있었다. 쓰고 있던 헬멧이 부서져서 맨 얼굴이 드러난 채였다. 머리카락과 눈썹의 색이 형광 초록과 형광 오렌지 색으로 특이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지구인과 차이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나이는 열아홉은 될까? 앳되어 보였다.
“진짜 없냐? 어이, 젊은이. 그래도 양심이 있어야지. 정말 없어?”
회색 머리의 거대한 노인은 도무지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믿지 못하겠는지, 이미 죽어 나자빠진 마족들의 슈트를 자꾸 들쑤셨다. 하지만 역시 새하얗게 타 버린 마족들의 슈트에서는 그 어떤 에너지 반응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 간만에 우리 연구실에 가져다줄 장난감이 생긴 줄 알았는데… 이거 이러면 또 엄청 쨍쨍댈 텐데.”
노인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니… 뭐야 대체? 일부러 상처 하나 안 나게 고이 붙잡았더니 자폭이나 하고…….”
노인은 한숨을 푹 쉬며 땅에 꽂아 둔 거대한 대검을 뽑아 어깨에 걸었다. 착잡한 눈으로 마족들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미련 없이 등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설마 저놈들이 마지막은 아니겠지. 다음에는 자폭하기 전에 차라리 조각조각 해체해 버리자.”
이 까망돌이들 어디 또 없나… 노인은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높은 건물에 올라 주변을 탐색했다. 그러다가 발견했다.
용산 아이파크 몰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싸우고 있는 마족과 젊은 헌터 하나를.
“호오? 저놈은 훨씬 쌩쌩해 보이는데?”
마족을 찾았다는 생각에 화색을 띠우며 얼른 달려가던 노인의 발걸음이 멈칫하며 느려졌다.
이번엔 그의 시선이 마족이 아닌 젊은 헌터 쪽에 머물렀다.
“호오오? 이겨 먹을 생각인 건가?”
당장에라도 마족을 잡아 족칠 기세로 달려가던 노인은 느릿느릿 움직여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 번 도약하면 언제든지 전투에 끼어들 수 있는 위치였다.
“이런저런 도구들을 잘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내가 볼 때는 3대 7인데? 과연 이길 수 있을까?”
노인은 아공간 능력이 담겨 있는 오파츠 팔찌에서 큼지막한 돼지 허벅다리 훈제를 꺼내 한 입 뜯으며 중얼거렸다.
“마침 식사 시간이니까… 이거 다 먹을 때까지만 한번 구경해 볼까?”
시간 내로 해치우지 못하면 내가 잡아야지 뭐. 노인은 흐흐 웃으며 소시민과 마족의 전투를 느긋하게 구경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