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선빵 필승
그놈에 대해 생각했다. 기껏 한강대교를 부숴 놓고는 더 이상 개입하지 않고 물러선 마족. 둥근 헬멧에 검고 거대한 슈트를 입은 놈.
‘틀림없이 아갈타에서 온 측량 관측병이야.’
아갈타는 우리 지구 차원과 가장 가까이에 존재하는 차원문명이었다. 말하자면 조선과 일본의 관계. 지구를 자기 주머니 속에 든 물건쯤으로 믿고 있는 개자식들. 회귀하기 전의 삶에서 인류가 겪은 뼈아픈 패배의 60퍼센트는 아갈타와 관련이 있었다.
측량관측병은 아갈타가 침략을 본격화하기 전에, 각지의 지리를 익히고 차원 격류의 주기 등을 조사하기 위해 측량과 관측임무를 띠고 파견되는 비전투 병사였다.
하지만 말이 좋아서 비전투지, 앞선 기술을 가진 그들은 지구 차원에서는 깡패나 다름없었다. 시기상 지금은 한창 측량관측병들이 지구에 파견될 때였다.
‘그러고 보니까… 6.30 참사 때 아갈타의 측량관측병들이 지구에 짱박혀서 수작을 부렸다고 했었는데?’
지금 들어온 병사 중 몇몇이 앞으로 지구에서 암약하며 데이터를 수집하고 1년 뒤에는 인위적으로 게이트를 열게 될 것이다. 덕분에 지난생의 인류는 아갈타의 갑작스런 기습을 견뎌야만 했고, 그때 한국에서만 10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알려졌다. 아마 일반에 ‘마족’이라는 명칭이 쓰이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저놈이 그놈인지, 아니면 다른 놈인지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서둘러야겠다. 내가 잡아야 돼. 저놈은 내 거야.’
만약 저놈이 훗날의 참사를 일으키는 그놈이라면? 회귀자들이 나서서 놈을 노릴 게 분명했다. 한 놈을 잡아 10만 명을 살리는 가성비 좋은 일을 회귀자들이 안 할 리가 없었으니까.
혹시 그놈이 아니라면? 그래도 경우의 수는 두 가지였다. 원래의 역사에서 놈을 죽였던 헌터가 있다면 그가 놈을 잡게 되거나 혹은 아예 놈이 딴 짓 하지 않고 조용히 있다가 본 차원으로 귀환하거나. 어느 쪽이든 좋지 않았다. 나로서는 닭 쫓던 개신세가 될 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누가 끼어들기 전에 최대한 빨리 잡아야 했다.
‘아갈타 측량병의 기본 지급 장비는 티탄 슈트와 디멘션 포인터. 그밖의 무기는 전투 스타일에 따라 달라진다.’
놈의 무기 중 가장 위력이 강한 것은 디멘션 포인터였다. 차원연안에 머물고 있는 모선에서 쏘아 내는 파괴광선을 유도하는 장비. 그 위력은 한강대교를 단숨에 박살 내 버린 풍경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발동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움직이는 대상을 맞힐 만큼 정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상황에서는 무시해도 괜찮았다.
‘결국, 가장 주의해야 할 무기는 티탄 슈트.’
녀석이 걸치고 있는 까만색의 슈트. 80cm 두께 이상의 철판도 뚫어 버리는 날탄을 퍼부어도 뚫리지 않을 만큼 단단하고 탄력적이었으며, 착용자에게 거인과 같은 괴력을 부여하고 심지어 착용자의 영력마저 대폭 증폭시켜 주는 강력한 무기였다.
아갈타를 비롯한 여러 차원 문명에서 사용하는 기본 무장이며 화승총처럼 차원 전쟁의 판도를 바꾸어 버린 획기적인 물건이라고 들었다.
‘잘못했다간 아차 하는 순간에 끝장날 수도 있겠네.’
녀석은 슈트로 온몸을 덮었지만 나는 방어구라곤 상의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
‘현재 남아 있는 영력은 콩 한쪽 정도 크기.’
쌀알 크기도 안 되던 영력이 그동안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이제는 대두大豆 한 알만큼 커졌다. 지난 생의 내가 보유했던 영력의 80퍼센트에 육박할 정도로 엄청난 성장이었다. 청하가 완벽 단계에 오른 것과 치트키나 다름없었던 데미안 루드비히의 방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절대적인 기준에서 보면 내 영력은 여전히 2류 수준에 불과했다.
‘방어하지 못한 부분은… 놈의 손가락이 스치기만 해도 부어오를 거다. 운이 나쁘면 찢길지도…….’
초능력자의 신체적 능력은 그가 보유한 영력의 크기와 비례했다. 현재 내 몸은 마족 놈에 비하면 종잇장이나 다름없었다.
이 모든 조건을 고려하면 결국 결론은 한 가지였다.
‘단 한 대의 정타도 허용해선 안 돼. 가능하면 단시간 내에 결판을 봐야 해.’
정면으로 맞붙어서 개싸움을 벌이기에는 스펙이 떨어지는 만큼, 전략적인 움직임으로 싸움을 끝내야 했다.
생각을 마치고 나는 박민희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광화문 경비팀장이었고 내가 회귀하기 직전을 기준으로 봐도 당당한 1류 헌터였다. 만약 그녀가 나를 도와준다면 아갈타의 측량관측병을 잡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저놈 잡을 거야?”
내 눈빛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그녀는 결의가 담긴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내가 같이 가자고 하면 기꺼이 같이 달려 나가겠다는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팀장님은 사람들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게 이곳을 지켜 주세요. 아, 특히 제 동료. 아까 보셨죠? 서민서라고. 그 친구 좀 잘 챙겨 주세요. 지금 초능력을 너무 많이 써서 정신 못 차리고 있거든요. 부탁입니다. 걔 죽으면 저 울어요.”
어쩔 수 없었다. 서민서를 지켜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였지만, 그보다도 박민희 팀장과 함께 간다면 마족 놈을 놓칠 수밖에 없다는 게 더 큰 이유였다.
놈의 보직은 어디까지나 측량관측병. 행여라도 불리한 전투가 발생할 상황이 오면 적극적으로 도주를 선택할 병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박민희는 강하다는 게 너무 티가 나는 사람이었다.
‘지구식 마누스를 익힌 능력자의 단점이지.’
대기를 일그러뜨릴 정도로 선명하게 피어오르는 영력.
영력을 다루는 원시적인 기술인 ‘마누스’를 익힌 이들은 당최 자신의 힘을 숨길 줄을 몰랐다.
그녀와 함께 간다면 아갈타의 측량관측병은 지구 끝까지 도망칠 것이다. 아니 마누스를 익힌 초능력자와 함께 가면 다 마찬가지였다. 실시간으로 우리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결국, 놈을 잡으려면 나 혼자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뒤를 부탁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려고? 혼자 이 많은 괴물을 뚫고 그 이상한 놈을 추격하겠다고?”
박민희 팀장의 눈썹이 여덟 팔 자로 휘어 있었다. 나를 걱정하고 있는 마음이 손에 닿을 듯 전해졌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씨익 웃어 주었다.
“걱정 마십쇼.”
나에게는 타키넷이 있다. 지구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물건들이 지천에 널린 시장.
품에서 노란 부적을 꺼냈다. 붉은색 먹물로 현란한 문양이 그려진 그것을 양 다리에 붙이자, 부적 중앙에서 화르르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렇다고 부적이 타는 것은 아니었다. 불꽃이 다리 전체를 감싸 안고 타오르고 있어도 전혀 뜨겁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달리기 속도가 증가돼요.”
내 설명에 박민희 팀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아직 놀라긴 이르지. 이번에는 품에서 포션을 하나 꺼내 꿀꺽꿀꺽 마셨다. 그러자 내 몸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투명해졌다. 특별한 능력이 있지 않는 이상 내가 코앞에 있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었다.
“자, 이렇게 하면 괴물을 뚫고 추적하는 거 문제 없죠? 뒤는 잘 부탁해요.”
내 목소리를 듣고 내 위치를 파악한 박민희 팀장이 그제야 내쪽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혹시 별명이 도라X몽이야?”
* * *
괴물들은 새까만 파도처럼 우글우글했다.
나는 놈들을 정면에서 뚫었다.
[만상공감]이 전해 주는 감각들. 수십, 수 백 마리 괴물의 감각이 한데 뒤섞였다. 그 혼란스러운 감각들 사이로 나는 하나의 길을 찾아냈다. 그 길을 따라 달리면 우글우글한 괴물들 사이를 전력으로 달려도 어깨 한 번 스치지 않을 수 있었다. 투명화 물약을 먹은 덕분에 괴물들은 내가 자신들의 코앞을 지나갔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휙- 휘휙!
괴물들이 차창밖의 풍경처럼 좌우로 계속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 상태에서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로 소모성 아이템들을 한 번씩 점검했다.
‘상대는 마족. 아껴선 안 돼.’
타키온을 탈탈 털어서 산 소모품들을 모두 꺼냈다.
일단 입에는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캔디를 하나 물었다.
‘마비 휘파람 캔디’
결정적인 순간에 입에 물고 불면 마족을 1초 정도 경직시킬 수 있었다.
12개들이 한 패키지에 타키온 6알이 들었다.
허리춤에는 15cm 길이의 투명한 막대 세 개를 꽂아 두었다.
‘배리어 스틱’
강렬한 충격이 예상될 때 배리어 스틱을 꺾으면 빛이 퍼지는 영역에 강력한 충격 흡수 효과를 부여했다.
3개들이 한 묶음에 타키온 6알.
‘거인창에는 폭풍, 악몽사슬에는 벼락.’
무기 강화 버프도 마쳤다. 하루는 지속될 것이다.
그밖의 각종 회복 포션과 정화 포션들도 모두 점검했다.
“오케이, 이제 준비 끝.”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풀며 품에서 연초 하나를 꺼내 물었다. 이건 몸에 해로운 담배가 아니었다. 차라리 일종의 영약이었다.
영력을 증폭시켜 주는 연초. 다섯 개들이 상자에 타키온 6알짜리.
다 피우고 나면 3시간 동안 영력의 위력이 30~40퍼센트로 증폭되었다. 물론, 그 후에 부작용이 있을 수는 있었다. 12시간 동안 약한 두통과 오한, 영력 약화. 하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만한 리스크였다. 마족을 잡는 거니까.
“후우우우-”
크르르?
캬악?
하얀 연기를 뿜으며 지나가자 그 냄새를 맡았는지 괴물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나는 이미 거길 빠져나간 다음이었다. 나는 손가락 사이에 연초를 끼우고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푸후우…….
와, 고소해라. 왜 이렇게 맛있지?
‘갑자기 저번에 죽었을 때 생각도 나네.’
그러고 보니 회귀한 이후로 첫 번째 흡연이었다. 심지어 전에 죽을 때는 연초 하나도 다 못 태우고 죽었었다.
와…….
‘그렇게 생각하니까 갑자기 더 맛있다.’
천천히 그 고소하고 뭉게뭉게한 연초 하나를 다 피웠을 때, 나는 드디어 아갈타의 측량관측병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다 피운 연초를 던져 버리고 놈을 관찰했다.
‘멀리 가지도 않았네.’
용산 아이파크 몰. 4DX에 IMAX로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인기가 많은 장소였다.
놈은 그 건물 앞에 청록색으로 빛나는 장비들을 여기저기 꺼내놓고 분주하게 뭔가를 하는 중이었다. 측량이니 관측이니 하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겠지.
‘오케이…….’
천천히 창가방에서 거인창을 꺼냈다. 2미터짜리 가방에서 7미터짜리 창을 천천히 꺼내는 동안 마음은 침착하게 가라앉는다.
‘그 무엇이든 뚫어 주마.’
스르륵-
네필림의 날개도 천천히 펼쳤다. 상대는 마족이라 불릴 정도로 강하고 영리한 족속. 아무리 비전투병과라고 해도 자칫 방심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
‘이번에는 뛰어오르지 말고… 땅에서 수평 방향으로 돌진한다. 은밀하게.’
상대가 강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리 싸움을 끝내고 싶을 때.
그럴 때 사용하는 유구한 전략이 있었다. 바둑이나 장기의 정석과도 같은 그것.
‘선빵 필승.’
뱀을 잡을 때는 모가지를 눌러놓고 시작하는 것이고
용을 사냥할 때는 날개를 찢어 놓고 시작하는 법.
나는 일단 놈의 티탄슈트에 금이라도 그어 놓고 시작할 작정이었다.
위력은 다소 약해지더라도 놈이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최대한 기세를 억누르며 첫 번째 일격을 확실히 명중시키는 것에만 집중했다.
후-
호흡을 딱 한 번 고르고.
타탁!
발을 굴렀다.
팔락-
네필림의 날개를 조심스럽게 뿌렸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휙-!
마족은 마족이었다. 놈의 장비는 빌어먹을 정도로 좋았다.
내가 달리는 순간, 놈이 입은 티탄 슈트 내부에 알람이 울려 퍼진 것이다.
놈이 정확하게 나를 바라봤다. 투명화 물약도 소용없었다.
나는 이 모든 상황을 [만상공감]으로 느끼고 한숨을 쉬었다.
‘시작부터 조졌네…….’
하지만 들켰다고 해서 선빵을 포기할 수는 없지.
삐이이익-!
물고 있던 마비휘파람 캔디를 불었다. 파삭, 입속에서 부서지는 캔디에선 박하맛이 난다.
나를 응시하며 회피하려고 하던 마족이 제자리에 덜컥, 멈춰 섰다.
‘놈의 예상 경직 시간은 약 1초. 어디 한번 해 보자고!’
꾸웅-!
돌진 와중에 땅을 한 번 더 박찼다. 파라락, 투명한 깃털이 거칠게 휘날리고 나는 한 번 더 가속할 수 있었다.
피이이잉-
멍청하게 굳어진 마족이 순식간에 10미터 안까지 당겨져 왔다. 이제 곧 창끝이 닿을 거리.
뿌드득-!
거인창을 비틀어 잡고 무게 중심을 앞으로 살짝 쏠리게 잡고, 팔을 옆구리에 딱 붙이며 외쳤다.
“딱 대, 인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