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38화 (38/212)

13. 한강의 영웅

‘할 수 있을까?’

시작 전에는 항상 이런 걱정이 들고는 했다.

왜냐면 한강은 어지간해서는 얼지 않기 때문이다.

영하 13~15도 정도의 한파가 최소 이틀은 지속되어야 비로소 얼기 시작하는 것이 한강.

그런 한강을… 초여름에 꽝꽝 얼린다?

과학기술의 힘을 빌린다면 국가 단위의 힘을 빌려야 될 것이며 빙결 초능력자의 힘을 빌린다면 최소 2개 대대 규모로 인원을 꾸리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나는 혼자서도 가능하긴 하지.’

나에겐 타키넷이 있고 외차원의 문명은 지구와 비대칭적으로 발전했으니까. 지구에서는 별짓을 다해도 어려운 일이 타키넷에서는 큰돈 들이지 않아도 가능해진다.

타키온 열 다섯 알을 주고 구매한 ‘서릿돌’.

서릿돌이 가진 냉기라면 충분히 한강을 얼릴 수 있다는 계산도 섰다.

스르릉-

이런 내 생각을 확신시켜 주듯이 청하도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래. 지난 며칠간, 청하를 삭삭 갈아 대느라 얼마나 힘들었던가! 칼갈이봉인 서릿돌이 완전히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리고 고행의 결과물은 과연 압도적이었다.

‘후와아… 칼날 봐라. 이것만 보면 아무 문제없을 것 같네.’

만지기도 전에 벌써 베일 것 같다. 베이기 전에 먼저 얼어붙을 것 같다.

서릿돌의 냉기가 온전히 축적된 청하는 면도날로 비비는 듯한 냉기를 사방에 쏟아 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한강을 얼릴 수 있는가? 그렇게 묻는다면 미간을 찌푸리고 ‘으음…….’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여름이야. 더워. 비가 내려서 물도 불었고 유속도 상당해. 시간도 별로 없고.’

설령 한강을 꽝꽝 얼리기에 충분한 냉기를 지니고 있어도 문제였다.

‘한강은 넓어. 폭이 1km에 육박할 정도니까.’

아무 계획 없이 무턱대고 얼리다가는 도중에 얼음이 부러지고 조각나 따로따로 떠내려가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얼리면 떠내려가고 얼리면 떠내려가 버린다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과 다름이 없다.

퍼부어야 할 냉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설계와 요령이 부족해서 망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불안도 어디까지나 [만상공감]을 발휘하기 전까지만 존재할 뿐이었다.

“후우우…….”

한숨과 함께 근심을 털어 내고 [만상공감]을 발휘하는 순간, 불안은 스르르 지워지며 사라졌다.

왜냐하면 보이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

강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중간에 떠 있는 노들섬이 보이고 그 뒤로 펼쳐진 한강도 보였다.

천천히, [만상공감]이 내 전신을 장악했다.

헤아릴 수도 없는 긴 시간 동안 이 땅을 흘러온 한강과 나는 점차 하나가 되었다.

일렁이는 작은 물결 하나, 그 속에 살아가는 미생물 하나하나, 물에 녹아든 미네랄과 각종 혼합물들의 농도. 느린 듯 빠른 유속… 그 모든 것이 내 핏줄 속에 흐르는 것처럼 생생했다. 그렇게 나는 한강을 가로지르는 ‘길’을 보았다.

‘아하, 이렇게 요리하면 되겠구나?’

거대한 한강이 한 마리의 싱싱한 활어가 되어 내 앞에 누워 있는 느낌이었다.

휘리리릭- 탁!

손에 든 청하를 빙글빙글 돌리다가 잡았다. 손맛 짜릿하고 등골은 서늘하고 흥분이 전신을 내달렸다.

뿌드드드득!

영력을 한계까지 불어넣은 네필림의 날개에서는 깃털이 날리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오래 못 쓰겠네. 앞으로 열 번? 괜찮아. 좋아. 충분해.’

4,000명을 받아 내겠다고 무리를 한 게 수명을 크게 줄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깝지 않다. 이제 와서 아낄 것도 없다. 타키온 열 알을 주고 산 물건을 이 정도 썼으면 엄청 잘 쓴 것!

‘아낌없이 써 주마. 이미 밥값은 넘치도록 했으니!’

뿌드드득!

이미 활짝 펼친 날개를 더욱더 강하게 펼쳤다.

키르르르릉-!

내 기세에 동조하며 청하가 새파랗게 한기를 뿜었다. 나는 몸의 무게 중심을 낮추고 팔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청하가 땅에 살짝 닿을 정도로.

‘그리고… 지금!’

모든 준비가 끝나는 순간, 호흡을 멈추고 네필림의 날개를 떨쳤다.

파아아앙!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풍경을 종이처럼 구겨서 등 뒤로 휙휙 던지는 것 같다.

그 아찔한 속도 속에서 청하가 저절로 움직이며 한강을 회 쳤다. 적재적소에 딱 알맞은 냉기를 쏟아 냈다.

폭발물 전문가가 딱 필요한 곳만 터뜨려 건물 전체를 내려 앉히듯이, 벌들이 얇은 밀랍으로 튼튼한 벌집을 짓듯이! 허무하게 흘러가 버린 얼음은 하나도 없고, 모든 냉기가 서로에게 기대며 단단한 결정을 만들어 냈다.

쩌저저저정!

이 모든 것이 한강 위를 고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남들이 볼 때는 그저 내가 지나가고, 그 뒤에 저절로 얼음의 길이 생겨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알아볼 사람은 알아보겠지. 이 얼마나 아름답고 정교한 디테일인지!

[만상공감]이 이끄는 치밀한 칼솜씨와 강물을 저미며 한 점의 손실도 없이 냉기를 주입하는 청하의 놀라운 예리함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예술 그 자체!

쩌저저저적!

청하의 짧은 칼날이 한강 위를 긋고 지나가면 그림이 그려지듯 새하얗게 얼어붙은 얼음의 길만이 남겨졌다.

팡! 파앙! 파아아앙!

나는 연속으로 네필림의 날개를 떨쳤다. 한강 사이에 떠 있는 노들섬까지 얼음으로 된 길을 만들고, 노들섬을 건너 한강 이남까지 얼음의 길을 만든 다음, 다시 되돌아오며 길을 넓히고 강화했다.

후드드-

흩날리는 투명한 깃털들. 그리고 그 뒤로 타오르는 새하얀 수증기.

슈우우우우-

드라이 아이스처럼 자욱하게 솟아오르는 수증기를 배경으로 살포시 보이는 거대한 얼음의 다리.

마족 새끼가 한강대교를 무너뜨렸지만, 방금 내가 새로운 다리를 만들어 냈다.

나는 확성젤리를 꿀꺽 삼키고 외쳤다.

“자! 자! 순서 지켜서 건넙시다! 예비역 헌터와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은 후방에서 괴물을 막으며 천천히 후퇴합니다!”

한강대교 전몰지는 이제 없다. 내가 크고 튼튼한 퇴로를 만들었기 때문에.

* * *

진정한 영웅이란 어떤 것일까?

평화로운 시기를 사는 사람들이 생각할 때 영웅이란 호구에 불과하다.

대가도 없이 사람들에게 퍼주기나 하는 존재. 처음엔 고마워하다가 갈수록 호의를 권리로 여기게 되는 염치없는 대중.

하지만 현실의 영웅은 그런 클리셰와는 다르다.

완전히 절망한 상황에.

이번엔 진짜로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순간에.

갑자기 나타나 길을 뚫어내고 구원을 제시하는 영웅.

그런 걸 진짜 눈앞에 두고 보면 계산 따위는 날아간다. 인간에 대한 관념 자체가 바뀌게 된다. 나는 작고 그는 크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부르르 떨리고 눈물이 왈칵 난다. 안 그럴 것 같지만 정말로 그렇다. 트라우마보다도 더 강렬하게 남는 구원의 경험.

그가 죽으라고 하면 정말로 죽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종교에 가까운 감정.

지금 강전구가 그랬다.

“아니… 시발… 당신은… 시벌…….”

비록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천박했지만, 그는 세계관이 통째로 뒤집히는 경험을 하는 중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었다. 저항할 수 없었다.

청파동 신세기 타워에서 활활 타서 숯검댕이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남았다. 그래도 이번엔 정말 죽을 줄 알았다. 아니, 괴물은 새카맣게 몰려들지, 눈 앞에서는 한강대교가 무너졌지… 살겠다는 생각을 하는 게 오히려 염치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또다시 그가 나섰다. 소시민이! 짧은 칼을 하나 들고 투명한 날개를 펼치며 한강을 죽죽 그으니 거대한 얼음의 길이 생겼다.

아랫배에서부터 끓어오른 아드레날린이 머리털 끝까지 퍼져 나갔다.

“와! 와! 와아!”

고작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아니었다. 고작 그런 게 아니다. 위업에 대한 순수한 경탄. 짜릿한 고양감. 죽음? 두렵지 않았다. 눈앞에서 이런 대단한 일이 벌어졌는데. 그런 사소한 건 문제가 아니잖아?

그게 인간이란 짐승들이었다. 평소엔 보잘것없고 겁 많아 보이지만, 막상 대단한 것을 보면 환장하는 족속.

고작 국가 대표 축구 팀이 월드컵 4강에 진출했을 뿐인데, 나랑 상관도 없는 일인데, 그걸 보고 신이 나서 모든 손님에게 공짜로 치킨을 돌려 버리는 군상들. 발가벗고 춤을 춰도 좋고 자동차 위에 올라가도 좋고. 내일이 없는 것처럼 당장 죽을 수도 있는 족속들. 그게 인간의 저력이었다.

쉬운 말로 하면.

‘사기士氣’

소시민이 외쳤다.

싸울 수 있는 자 싸우라고.

강전구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그와 싸운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짜릿하고 영광이었다. 내가 이러려고 살았나 보다.

먹고 살기 위해서 그리고 국방을 위해서, 자의 반 타의 반 ‘헌터’로 살았던 강전구가 지금 이순간 ‘전사’로 돌변했다.

“우와아아아악!”

쿵! 쿵!

고민 따위는 없었다. [무게증가] 능력이 저절로 극대화되었다. 땅을 찰 때는 무겁다가 앞으로 튀어나갈 때는 가볍다. 리드미컬하게 변하는 무게.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쭉쭉 뻗어 나가는 신체. 평소에는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고난도의 초능력 활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숨쉬듯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렇게 자연스럽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꽈아아앙!

표지판을 뽑아 만든 쇠파이프로 오크전사의 정수를 날려 버렸다. 원 킬! 쇠파이프의 무게를 조절해 빠르게 빙글 돌며 달려오는 다이어 울프의 미간을 뚫어 버렸다. 투 킬! 그리고 점프해서 거대한 오우거의 장딴지를 후렸다. 콰아앙! 소리를 내며 미끄러지는 오우거를 뒤따라온 다른 헌터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마무리를 지어 버린다.

고작 1년 차 프로 헌터인 강전구가 보일 수 없는 위용. 하지만 그는 해냈다. 그리고 그 이상을 해낼 자신도 있었다.

“으리야아아아아!”

포효하는 그의 뒤로 수많은 예비역 헌터가 마주 고함을 질렀다. 강전구의 포효 따위는 폭포 앞 시냇물 소리처럼 잡아먹히고 온 세상이 뒤흔들렸다.

오싹하게 돋아나는 소름.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었다. 이것은 전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축제.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괴물들이 그들을 넘어서지 못하고 오히려 주춤주춤 물러섰다.

우와아아아-!

인간들은 포효하며 괴물보다도 더한 짐승이 되어 날뛰었다. 하지만 그 짐승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이 축제의 주최자가 누구인지. 싸우다 말고 흘깃흘깃 시선을 돌렸다.

파라라락-

소매가 넓은 가죽 방어구를 입고 괴물들 사이를 누비는 소시민을.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전진했다. 두려움은 없었고 스스로의 한계도 없다고 여겼다.

이게 바로 인간의 저력이었다.

13척의 배로 수백 척의 배를 침몰시키고 300명의 병사로 수만 명을 저지하는 영웅과 함께 싸울 때, 그럴 때만 보여 줄 수 있는 인간종의 저력.

그렇게 오늘.

한강에서 영웅이 탄생했다.

“영웅님 뒤를 따라라!”

누군가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게 그렇게 소리질렀다.

* * *

영웅?

누군가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

‘와 오글거리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오글거리는 것까지 포함해서 신명 나는 싸움이었다. 거칠 것이 없었다.

나는 마에스터 유진이 만들어 준 방어구, ‘절밤이(절규를 삼킨 밤)’, 이 새카만 방어구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영력이 깃든 절밤이는 거대한 손바닥과 같았다. 그 어떤 공격도 소매를 한 번 휘두르면 비껴 나간다. 미노타우르스의 뿔도, 거인의 주먹질도, 거대 코뿔소의 돌진도 파앙! 하고 쳐 내는 소매에 닿으면 모든 여력이 절규도 남기지 못한 채 흩어져 버렸다.

너무 신나서 일부러 적진 한복판으로 파고들었다. 사방에서 덮쳐드는 공격을 소매로 파팡파파팡, 다 흩어 버리고 아직도 냉기가 남아 있는 청하로 예쁘게 깍둑 썰어 버리는 손맛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짜릿했으니까.

방어구 하나를 바꿨을 뿐인데, 근접 전투력 자체가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최치국하고도 붙어 볼 만하지 않을까?’

진심으로 즐거웠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이렇게 즐거운 싸움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오싹-

누가 정수리에 얼음 바구니를 쏟아부은 것처럼 타오르던 기세를 한순간에 꺼뜨리는 감각이 엄습해 왔다.

“소시민 씨!”

줄곧 내 곁에서 싸우던 박민희가 나를 불렀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커다란 헬멧에 새까만 근육질 스튜를 입은 존재가 우리를 바라보다가 등을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마족…….”

지구인들이 붙인 별명 마족.

하지만 실상은 제대로 된 차원 문명에서 넘어온 해적 또는 정찰대원이었다. 오크니 오우거니 하는 근본 없는 괴물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자들이었다.

사실 여기서 마주칠 거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그 기세를 느끼기만 했는데도 흥분이 차갑게 가라앉을 정도로 위협적인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잡고 싶다. 잡을 수 있다.’

목구멍으로 촉촉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생각을 해 보자…….’

저 마족을 잡는다면 타키온이 얼마나 나올까? 참고로 고작 차원난민에 불과했던 미친 오크가 100알이 넘는 타키온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난민이 아닌, 당당한 차원 문명의 주민인 마족은 대체 얼마나 가지고 다닐까?

최소 몇 백. 어쩌면… 천 단위!

“후우…….”

그 순간 계산은 끝났다.

‘잡고 싶다’가 ‘잡아야만 한다’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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