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36화 (36/212)

11. 아이러니

후두두-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길은 비를 잡아먹으며 점점 더 커지기만 했다.

카르릉.

7미터의 거인창이 땅에 끌리며 비에 젖은 용처럼 쇳소리를 낸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단 한 번의 거창 돌격에 4,000여 명을 받아 낼 수 있는 힘을 실어야 했다.

4,000명. 상공 200미터에서.

라비륨 젤리가 힘을 증폭시켜 준다는 걸 고려해도 아득하기 그지없는 일.

‘후…….’

눈을 감았다가 뜬다. 내 어깨 위에는 청하가 둥실 떠 있다.

‘할 수 있지?’

스르릉-

청하가 운다. 아니다. 청하만 우는 것이 아니다. 내 몸도 스르릉 스르릉 함께 울었다.

동시에 청하의 아우라가 내 몸에 붙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전신을 휘감고 타오르는 이 하얀 불길이야말로 증거였다. [만상공감]과 수집물이 함께 만들어 내는 극치. 청하와 내가 ‘동화’되었다는 증거.

30분간의 교감이 마침내 결실을 보았다.

준비는 끝났다.

“서민서! 준비해!”

그렇게 외치고 곧잘 네필림의 날개를 펼쳤다. 영력으로 움직이는 이 투명한 날개에 영력을 있는 대로 때려 넣었다.

뿌드드득-

네필림의 날개에서 무언가 비틀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파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날개가 허공을 때렸다. 전신이 하늘로 솟구친다. 얼굴로 잿빛 빗방울이 쏟아진다. 하지만 그중 무엇도 내게 닿지 못하고 잘려 흩어진다. 내 몸을 감고 타오르는 아우라가 예리한 칼날처럼 빗방울을 가른다.

스르르릉!

그저 내가 한 자루 검이 된 것처럼, 공기의 층을 가르며 나아가는 감각만이 또렷했다.

‘짜릿하다.’

이게 ‘동화’구나!

지난 생에도 동화는 몇 번 경험하지 못했다. 그때는 내 능력의 가능성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으니까. 그래서인지 지금의 이 동화가 처음인 것처럼 새삼 짜릿했다.

비와 바람이 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만드는 것 같다. 보이지 않는 고속도로를 나 홀로 달리는 듯한 적막한 쾌감!

‘청하야, 한 자루 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100퍼센트 길들여진 수집물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동화’.

길든다는 건 일방적인 게 아니다.

네가 나에게 길들고. 나 역시 너에게 길드는 것. 그렇게 서로 다르던 두 존재가 하나가 되는 것.

사아악-

그저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사과 껍질을 떠내 듯 갈라지는 공기.

내 육신에 깃든 청하의 특성.

피와 살로 이루어진 내 몸이 달인이 다루는 칼날처럼 강인하고 빠르며 심지여 예리해졌다.

공기의 저항을 무시했기 때문에, 나는 단 한 번의 날갯짓으로 200미터 높이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는 사람들이 보였다.

“처, 천사?”

에이. 그건 너무 진부하다.

“안녕? 비둘기 선배! 배달 왔어요!”

반가움인지, 원망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을 담은 목소리로 서민서가 내 등 뒤로 [점멸]해 왔다.

근데… 야, 비둘기가 뭐냐? 비둘기?

눈이라도 한 번 흘겨 주려고 했는데, 뭐 어쩔 틈도 없이 등 뒤로 뭔가가 턱, 하고 얹혔다.

“[무게증가] 능력자예요.”

“아, 안녕하심까. 헌터 강전구라고 함다.”

강전구와 내가 짧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 서민서는 악몽사슬을 내 허리에 묶고 내게 물었다.

“느껴져요? 지금 가지고 있는 버프 다 넣으라고 말은 해 뒀는데… 버프 능력자가 다 합쳐서 4명밖에 없어서…….”

전체 인구 대비 초능력자 비율은 60분의 1.

그중에서 버프계 보조 능력자의 비율은 아무리 많이 잡아도 5퍼센트도 어림없지 않을까?

그걸 생각하면 4,000명 중에 버프 능력자가 4명인 건 오히려 운이 좋다고 봐야 했다.

그래서인지 버프가 아주 확실하게 느껴졌다.

뿌드득!

거인창을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서 창자루가 삐걱인다. 이건 근력을 강화하는 버프.

스으윽-

하강을 준비하며 자세를 잡는 움직임이 민첩해진다. 이건 속도 증가 버프.

우우우웅-

거인창에 맺히는 노란 광채. 이건 파괴력 증가 버프.

화르르르-

그리고 이건… 맙소사. 초능력을 강화하는 버프! [만상공감]이 강화되며 내가 쥐고 있는 거인창의 아우라마저 더욱 맹렬하게 타오른다. ‘동화’도 한층 더 강력해진다. 와… 나 정말 운이 좋구나?

온몸에 힘이 가득가득 차오른다.

창을 한 번 찔러 산도 무너뜨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이 들끓었다.

“버프 네 종류 모두 확인. 이 정도면 충분해!”

바로 여기까지가, 내가 200미터를 넘게 뛰어올라 떨어지기 직전, 여전히 천천히 상승 중이던 그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서민서가 물었다.

“그럼… 시작하나요?”

“그래. 사람들 뛰어내리란 신호는 네가 보내.”

“점멸, 악몽사슬로 선배 끌어당기고 나서?”

“맞아. 저 아래 주황색 젤리가 표적.”

“롸져 댓.”

탁탁.

화물트럭에 출발 신호라도 보내 듯이, 서민서가 내 등에 업힌 강전구 헌터를 두 번 두드렸다.

“최대 무게로!”

떨어진다!

그 순간, 어깨가 푹, 꺼졌다.

‘큭… 강전구라고 했나? 능력이 꽤 강력한데?”

등 뒤에 사람이 아니라 태산을 업은 것 같다.

여전히 남아 있던 상승의 여력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아래로 아래로 아찔하게 곤두박질 친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 속도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큭……! 더, 더 빨리!’

뿌득! 뿌득!

등 뒤로 전해지는 무게에 숨이 턱, 막혀 오고 아찔한 추락감에 정신이 없었지만 나는 기어코 네필림의 날개를 펼쳤다. 영력을 들이부어 최대한 날개를 키우고, 있는 힘을 다해 허공을 한 번 더 찼다.

파아아앙-!

가속한다!

스르르르르릉!

공기의 저항도 없는 적막한 가속!

세상이 지워지는 듯한 속도감.

저 아래, 지구의 중심에서 무언가가 나를 빨아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끝도 없이. 시간 사이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아찔하다. 너무 빠르니까 오히려 영원처럼 길게만 느껴지는 순간,

강전구의 허리를 붙잡고 함께 떨어지던 서민서가 내 허리에 감긴 악몽사슬의 머리 부분을 쥐고 [점멸]했다.

공간을 넘어 나보다 더 앞에 나타난 그녀는 내가 바닥에 고정시켜 둔 라비륨의 젤리에 악몽사슬의 머리를 꽂아 넣었다.

끼르르르륵!

사슬이 비틀리며 운다.

비틀린 공간에 저항하며 악몽사슬이 터무니없는 탄성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마지막 가속!

피이이잉-

이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적막 속에서 온 세상 풍경이 일그러진다.

나는 그저 [만상공감]이 알려 주는 감각을 따라 거인창을 세우고, 온 힘을 다해 옆구리에 딱 붙였다.

창끝이 라비륨 젤리를 찌르는 순간, 충격 밀집 기술로 거인창이 한 번 더 앞으로 치고 나간다. 그리고 그끝에서 덜컥, 무언가가 창끝을 멈춰 세웠다.

“지금이야! 뛰어요!”

서민서의 외침이 들리고.

뻐어어엉!

콰콰콰콰콰콰!

온몸이 흔들렸다. 거인이 나를 쥐고 갈기갈기 찢는 것 같았다.

폭탄이 터지고 폭포가 쏟아지는 소리가 나고.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배를 하늘로 향한 채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아… 뭐지?’

피투성이가 된 손. 욱신거리는 전신, 내 옆으로 기절한 채 같이 떠오르는 강전구 헌터.

아직도 옷자락을 펄럭이며 마지막 순간에 쏟아진 충격을 흘려냈음을 역설하는 내 소중한 방어구, 절밤이(절규를 삼킨 밤).

‘제대로 찔렀나?’

‘이 정도면… 충분할까?’

결과는 지켜봐야 아는 것이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최선의 찌르기였다.’

열 번을 다시 찌르라고 해도 아까처럼 잘 찌를 자신은 없었다.

‘부디, 이게 먹히기를.’

나는 배를 위로 향하고 천천히 떠오르고, 옥상 위의 사람들은 그런 나를 향해 뛰어내리고 있었다.

그 광경이 어땠냐고 물어본다면 아름다웠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태양은 잿빛이고 흑백으로 변한 도시의 하늘에서는 구정물 같은 비가 떨어졌다.

그 속에서 유독 발랄하게 빛나는 주황색 기류가 나를 끝도 없이 하늘로 밀어붙이고, 그보다 더 멀리 저 높은 곳에서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조용히 떨어져 내리는 모습.

둥실. 둥실둥실.

“뛰어! 뛰어, 뛰어!”

“빨리빨리 뛰어!”

“하악… 하아악! 모, 못해!”

“비켜!”

1분은 전혀 긴 시간이 아니다.

운동장에 도열해 있던 학생들이 조회를 마치고 운동장을 빠져나오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시간.

무려 4,000여 명의 사람들이 까마득하게 높은 옥상에 뛰어내리기에도 역시나 턱없이 부족한 시간.

당연히 모두가 뛰어내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뛰어내렸다. 지난 생에는 모두 죽었던 사람들이, 이렇게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둥실. 둥실둥실.

나도 모르게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선선하게 기분 좋은 가을 바람을 맞기라도 한 것처럼.

물론,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웃음을 참을 수 있겠어?

나는 오늘 단 30분 만에, 지난날 평생을 바쳐 구해 냈던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구해 냈는걸?

이번 생은 그저 혼자 행복하게 잘 살고 싶었을 뿐인데…….

이 무슨 기분 좋은 아이러니인지.

* * *

같은 시각.

후드득.

최치국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왜소한 그의 주변으로는 트윈 헤드 오우거들의 산더미 같은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세 마리. 여섯 개의 잘린 목.

그리고 그 중앙에는 우주인처럼 동그란 헬멧에 힘줄이 울룩불룩 튀어나온 거대한 검은색 슈트를 입은 자가 죽어 나자빠져 있었다.

그가 입은 슈트는 특정 차원에서 사용되는 전투슈트였지만,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머리가 맨들맨들한 거인 괴물이라고 생각할 만큼 크고 이질적이고 기괴한 차림새였다.

하지만 발길질로 헬멧을 걷어 내고 나면 그 안에 나타나는 얼굴은 지구인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평범했다.

“…꼭 사람처럼 생겼네.”

한동안 복잡한 눈길로 사체를 내려다보던 최치국이 말했다.

“클리어.”

그러자 텔레파시가 돌아왔다.

- 잘했어! 이로써 한반도에 숨어든 이차원 마족 새끼들은 다 색출해 냈네. 족히 10만 명의 사람은 살렸다.

“10만명…….”

최치국은 가만히 그 숫자를 되뇌어 보았다.

회귀비용 탓에 최치국에게는 기억나는 사건들이 많지 않았다.

그저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차원 간의 연결을 틀어막아야 한다는 사명. 그리고 텔레파시 능력자인 리프 얀센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것. 결국엔 ‘그분’만이 희망이라는 것.

족히 10만 명을 죽게 한다는 마족들에 관해서도 딱히 기억나는 게 없었다. 어쩌면 30년 뒤의 지구에선 10만 명쯤 죽는 게 그다지 큰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 육삼공 참사 속에서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 최우선 과제가 해결되었으니, 이제 눈도장 찍으러 가. 화이트 리스트에 있는 사람들은 살리고 블랙 리스트에 있는 사람은 죽이고. 대한민국 헌터협회장에게 네 실력을 보여 주고. 수호가문의 후계자들과 전우애 쌓고. 그동안 준비했던 대로. 이런 기회 다시는 안 오니까.”

“유물은?”

- 그건 그분이 챙기러 갔어.

“…걱정할 필요 없겠네. 그럼 루드비히가의 막내는?”

- 역시 너랑 경쟁하게 될 거 같아. 수호가문을 움직여서 확실하게 쫓아내. 루드비히 가문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거 확실하게 못을 박아 두자.

“기꺼이.”

최치국이 사납게 웃었다.

텔레파시는 거기까지였다. 최치국은 칼을 칼집에 집어넣으며 시선을 저 멀리 불타오르는 빌딩들에 두었다. 다른 빌딩들 사이로 삐쭉 솟아 보일 정도로 높은 그 빌딩이 횃불처럼 활활 타고 있었다.

미래의 일 대부분을 잊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저 풍경만큼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총 여섯 동으로 이루어진 청파동 신세기 타워.

참혹하게 타오르는 그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보며, 영웅의 삶을 살겠다고 맹세했던 지난 생의 최치국. 하지만 최치국은 지금 두 번째의 인생에서도 그 꼴을 다시 보고 있었다.

이 무슨 고약한 아이러니인지.

‘4,000여 명과 10만여 명인가?’

그는 영웅 노릇이 참 몹쓸 짓이라는 생각을 했다. 누구라도 저들을 구원해 줬으면 좋을 텐데. 회귀해서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이 나비 효과가 되어 저곳의 무고한 희생자가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났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생각조차도… 내 죄책감을 피하기 위한 개수작이지.’

저들은 다 죽었다. 내가 나서지 않았으므로. 모두를 구해 내기엔 내 능력이 미치지 못했으므로. 그게 더 강해져야 하는 이유다.

그렇게 최치국은 자신의 심장에 또다시 단단한 각오를 때려 박으며, 불타오르는 건물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그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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