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난간에 선 사람들
라비륨(Labirium) 젤리.
젤리라고는 하지만 만지면 반발력이 있고, 기체를 만지는 것처럼 흐느적거리며 기이하게 요동을 쳤다. 잘 붙들지 않으면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이른바 ‘음의 질량(Negative mass)’을 가진 물체였다.
지구에서 이 물체의 무게를 잰다면, ‘-10kg’ 이런 식으로 음수로 표기할 수 있다.
음의 질량을 가진 물체를 처음 접하는 지구인은 얼이 빠진 듯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상식적으로 내가 물건을 밀면 그 물건은 뒤로 밀려야 한다. 하지만 음의 질량을 가진 물체는 내가 밀면 오히려 내 쪽으로 전진하며 나를 밀어낸다. 마임을 하는 것처럼 밀면 밀수록 오히려 나를 뒤로 밀어낸다. 반대로 당기면 오히려 내게서 멀어지며 나를 앞으로 끌고 간다. 지구의 중력 속에서는 땅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위로 솟구친다.
사실 거인창의 충격 밀집 기술도 부분적으로 ‘음의 질량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창끝이 표적에 맞아 충격이 가해지는 순간, 그 반작용되는 힘의 30퍼센트를 거꾸로 되돌리는 효과가 바로 그것이었다. 무언가가 막으면 막혀야 되는데 오히려 앞으로 치고 나가는 신비한 현상.
하지만 충격 밀집 기술은 던전에서 발견된 소재들을 이용해 운 좋게 만든 결과일 뿐 기술적으로 큰 의미는 없었다. 원시인이 전자 부품들을 주어다가 막 조합을 하다 보니 운 좋게 전구를 반짝거리게 만든 것뿐이다. 쓸 만하지만 인류가 의도한 것도 아니고 이해한 것도 아니다.
반면에 라비륨 젤리는 달랐다.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정제된 물질.
충격이 가해지면 충격이 가해진 방향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팽창한다.
충격량이 충분하면 기체가 되며 일종의 반질량 기류를 만들어 낼 정도였다.
이차원에서는 집중된 힘을 확산형 힘으로 바꾸는 컨버터로 쓰이기도 하고 동력 장치에도 쓰이는 흔한 소재. 쓰레기 거리에서 타키온 4개를 주고 산 이 주황색 물질이 수천 명의 사람을 살릴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서민서.”
“네.”
“네 역할이 중요해.”
“뭘 하면 되죠?”
서민서는 더 이상 떨지 않았다.
내가 저들을 구하겠노라 선언한 순간부터.
어떻게 구할 거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저 무엇이든 해낼 준비를 갖추고 차분하게 긴장된 얼굴로 나를 마주했다.
그렇게 준비된 녀석에겐 가타부타 긴 설명이 필요 없지.
“간단해. 내가 이 젤리를 땅에 놓을 거야.”
“네.”
“그리고 이 창으로 가능한 최대의 힘과 속도로 이 젤리를 찌를 거야.”
“네… 에.”
서민서의 표정이 조금 애매해졌다. 창으로 젤리를 왜 찌를까? 이해는 전혀 안 되지만 일단 믿고 들어 보겠다는 애매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 표정으로 참 정확하게도 말하는구나.
“그 순간 이 젤리가 팽창하면서 주황색 기류가 돼서 솟구칠 거거든? 바로 그때 옥상에 모아 둔 사람들이 일제히 뛰어내리면 돼. 그러면 천천히 둥실둥실 땅에 떨어질 수 있어. 단, 내가 젤리를 찌르고 1분이 지나기 전에 뛰어내려야 된다. 1분 지나서 뛰는 사람은 그냥 추락사할 거야.”
깜빡깜빡.
서민서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뭐, 왜 인마.
“아, 음… 선배. 저는 선배를 믿지만, 다른 사람들은요……? 다른 사람들이 과연 믿고 뛰어내려 줄까요? 저기 200미터가 넘는데…….”
서민서의 걱정은 타당했다. 살려면 뛰어내려야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200미터 아래로 뛰어내리라고 할 때 선뜻 뛰어내릴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것도 1분 내로.
그러니까 민서야. 네 역할이 중요한 거다.
“믿고 뛰어내리게 해야지.”
“어떻게요?”
“네가 직접 가서 설득해야지.”
“…네?”
“사람 설득에는 나보다 네가 낫다. 난 따로 할 것도 있고.”
나는 서민서에게 악몽사슬을 풀어 주었다. 악몽사슬의 본래 기능은 무기 겸 방어구가 아닌 절벽 지형 극복용 보조 장비.
차르르륵.
항상 왼손에 감고 있던 녀석이 풀려나가니까 허전하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자, 이 악몽사슬로 건물 외벽을 타고 올라가. 중간중간 막히면 [점멸]로 뛰어넘고. 그렇게 6개 동을 다 다니면서 사람들을 설득해.”
“네, 네?”
“아, 그리고 아까 내가 최대한의 힘과 속도라고 말했지? 그 말 그대로야. 나 혼자만의 힘으론 부족할 수 있어. 나에게 추진력을 줄 수 있는 능력자가 있으면 모조리 수배해. 무게 증가, 속도 증가, 완력 증가, 폭발력 부여. 뭐든 상관없어. 그리고 마지막은 네 [점멸]로 악몽사슬을 당겨서 추진력을 더하는 거야. 미친 오크 때 해 봤지? 그걸 반대로 한다고 생각해 사슬을 점멸시키고 내가 끌려가는 방식으로.”
내가 열심히 설명했지만 서민서는 어리바리하고 있었다. 한 번에 이해하기에는 너무 낯선 이야기였을 것이다.
“어, 어… 그러니까 젤리를 세게 쳐서…….”
하지만 이해는 필요 없다. 그저 내가 하라는 대로 실행하는 게 중요할 뿐. 그리고… 더는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시간 없어. 빨리 움직여. 믿는다.”
녀석의 등을 떠밀었다.
“아, 가는 길에 이것도 삼키고.”
녀석에게 창포묵처럼 하얀 덩어리도 하나 건네주었다. 타키온 1알에 열 개를 사 온 확성젤리라는 것이다.
“이게 뭐예요?”
“직접 봐.”
일분일초가 급하다. 나는 창포묵처럼 하얀 덩어리를 하나 더 꺼내서 꿀꺽 삼켰다. 미끈거리며 목구멍을 넘어가는 이 느낌. 아, 오랜만이네.
확성젤리는 미래에는 전장에서는 필수품으로 쓰이는 아이템이었다.
콰앙-
나는 거인창을 꺼내 쿵쿵 휘둘러 주변을 부수며 소리쳤다.
“여러분! 들리십니까!”
별로 크게 외친 것도 아닌데 내 목소리가 멀리멀리 퍼진다. 가까이에서 듣는 목소리의 크기와 멀리서 듣는 목소리의 크기도 별 차이가 없었다.
일정 범위 내에서 음파를 증식시키는 ‘확성 젤리’의 효능이었다.
저 멀리. 까마득한 옥상에서 아래를 기웃기웃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보였다. 목소리가 제대로 들린 모양이다. 7미터짜리 거인창을 휘두르고 있으니 그들의 눈에도 내가 보일 것이다.
“저는 헌터 소시민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을 구하러 왔습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이 아래로 뛰어내려도 안전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놓겠습니다! 지금으로 삼십 분 뒤! 제가 신호하면 다 같이 뛰어내리셔야 합니다! 절대 머뭇거리지 말고 1분 내로 전원 뛰어내려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를 믿으십시오!”
그렇게 대충 질러 놓은 다음 서민서를 바라보며 외쳤다.
“지금부터 제 동료가 한 동 한 동 올라가며 설명을 해 드릴 테니, 여러분들은 모두 옥상으로 모여 뛰어내릴 준비를 해 주십시오!”
딱 거기까지 말하고 서민서에게 손짓을 했다.
서민서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리다가 굳게 고정되었다. 입술을 한 번 깨물더니 확성젤리를 꿀꺽 삼키고 가장 가까이 있는 건물을 향해 달렸다.
“네! 헌터 서민서입니다! 일단 1동부터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금방 뵙겠습니다!”
4,000명의 사람 중 몇 사람을 구하게 될 것이냐. 이제 그건 서민서에게 달렸다.
나는 녀석이 가진 친화력과 말솜씨를 믿을 뿐이다.
이제 나는 나대로 준비를 해야 했다.
“후… 해 보자고.”
삼십 분이면 빠듯하긴 하지만… 한번 해 보자 이거야.
화르르르르-
타오르는 아우라가 보였다.
스르릉-
울고 있는 청하가 백색 아우라를 활활 피워 올리며 허공으로 저절로 떠올랐다.
나는 청하와 마주했다.
100퍼센트 완전히 차오른 아우라는 길들이기 작업이 끝났다는 증거였다.
‘완벽’ 단계에 오른 수집물이 내 눈앞에 있었다.
완벽 단계에 이른 수집물에는 특별한 힘이 깃든다.
‘아쉽게도 [수집물]이라서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떻게든 30분 안에 끝낸다.’
서민서가 사람들을 설득하는 동안, 나는 청하와의 교감을 최대로 이끌어 내기 시작했다.
* * *
낑낑거리며 건물 옥상에 오른 점멸 능력자에게 강전구는 그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뛰어내리라고요? 여기서? 200미터 높이입니다!”
“하셔야 돼요.”
점멸 능력자. 서민서의 목소리는 신뢰감이 느껴지면서도 단호했다. 하지만 그런 신뢰감 따위… 200미터 아래를 쳐다보는 순간 알코올처럼 날아가 버린다. 저 멀리 보이는 까마득한 풍경이 다리에 힘을 쭉 빼놓는다.
“아, 미치겠네… 이게 그냥 뛰어내리란다고 뛰어내려지는 높이가 아니잖습니까?”
“레펠 훈련이라고 생각하세요. 다들 레펠 해 보셨잖아요?”
국민개병제 덕분에 레펠을 안 해 본 사람은 없었다. 그래. 높은 곳에서 내려가는 거 하려면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강전구가 생각할 때, 점멸 능력자 서민서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레펠이 없지 않습니까!”
“그럼 공수 훈련이라고 생각하세요.”
“낙하산이 없지 않습니까!”
다 죽게 생긴 마당에 이게 무슨 만담인지…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쥐어뜯는 강전구의 시선에는 엄마나 아빠를 꼭 잡고 있는 어린아이들이 밟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불길은 말도 안 되게 빠른 속도로 건물을 잡아먹고 있었다. 솔직히 옥상까지 오면 헬기라도 와 줄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119에도 제대로 연락이 닿지 않고 있었다.
하긴.
119가 문제가 아니었다. 200미터 높이에서 바라본 도시는 사방 곳곳이 다 난리였으니까. 이대로 세상이 멸망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강전구는 바싹 마른 입술을 뗐다.
“이봐요. 여기 아이들도 많아요.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뛰어내린다고 우리 모두를 받아 줄 수 있는 그런 뭔가가 있을 거라는 건… 솔직히 상상이 안 가잖아요? 그런 장치는 들어 본 적도 없어요! 그러니까 뭐라도 말 좀 해 줘요. 아무리 불이 나고 우리가 다 죽을 지경이라고 해도… 저 같은 놈이야 죽는 셈치고 뛰어내린다고 해도요! 저기 저 부모 입장에선 애들 안고 시멘트 바닥에 머리 처박고 싶을 리는 없을 거 아니에요. 네?”
강전구의 그 간절한 말을 들으며 서민서는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건, 몇 가지 키워드뿐이었다. 소시민이 꺼내든 주황색 젤리, 강력한 힘으로 충격. 둥실둥실. 사실 그녀로서도 상상이 안 가는 소리였다. 손바닥만 한 젤리로 어떻게 떨어지는 사람을 받는다는 걸까? 세상에 별별 신기한 오파츠와 던전 부산물이 있다고 해도 그런 게 진짜 있는 걸까?
‘안 돼. 사실대로 설명하면 안 돼.’
자신의 마음에서조차 의심이 드는 것을 보고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강전구를 바라보며 답했다.
“지금 연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겠지만 저 아래에 중력 능력, 염동력 등을 지닌 초능력자 수십 명이 모여 있어요. 당신들이 뛰어내리는 순간, 던전에서 가져온 아이템을 이용해서 일순간 초능력을 폭주시킬 거예요. 딱 1분만 당신들을 모두 안전하게 땅으로 내려 줄 수 있는 수준의 초능력을 행사할 수 있어요.”
강전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말이야?’ ‘그 말이 사실이야?’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렇게 묻고 있었다. 하지만 강전구는 결국 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사실 그런 건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저, 믿어 볼 만한, 희망을 걸어 볼 만한, 그런 말이 너무나 절실했을 뿐이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서민서가 그의 어깨를 밀었다.
“자, 시간 없어요. 다 난간에 줄 서세요. 부모님들은 아이들 품에 꼭 안구요. 놓칠 것 같으면, 옷으로 포대기라도 만들어요.”
어쩔 줄 모르고 웅성웅성 서 있던 사람들이 주춤주춤 난간을 향해 섰다.
“지, 진짜 뛰어내리는 거야?”
“아래 초능력자들이 있대.”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연기 때문이지.”
“가만. 연기 사이로 뭔가 보이는 것도 같은데?”
“아가, 잠깐 눈 감고 있어.”
겁에 질린 채로 서민서가 지어 낸 이야기 하나만을 믿고, 스스로 난간에 서는 사람들. 있지도 않은 헛것을 찾아서라도 안심하고 싶어 하는 이들. 어째선지 그 모습이 너무나 슬프고 분해서, 서민서는 무너지려는 표정을 억지로 다잡았다. 태연하고 딱딱하게. 마치 정부에 파견한 요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프로페셔널한 가면을 쓰고 서민서는 말했다.
“그리고 초능력 증폭에 도움이 필요합니다. 버프 능력이나 무게 증가 등의 능력을 갖춘 능력자들은 모두 앞으로 나와 주세요.”
단 삼십 분 만에.
몇 번을 썼는지 기억도 나지 않게 [점멸]을 써 가며, 그렇게 서민서는 여섯 개의 동을 모두 돌아다녔다. 원래 같았으면 벌써 토하면서 쓰러졌을 텐데 이상하게도 쓰러지지 않았다.
마침내 저 아래에서 소시민이 외쳤다.
“시간이 됐습니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그 무심한 시작 선언에, 까마득히 높은 옥상 난간에 선 4,000여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침을 삼켰다.
‘선배, 제발…….’
지나치게 많이 소모한 초능력 탓에 신물이 올라오는 걸 간신히 삼키며, 하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신색을 유지한 채, 서민서는 심장을 쥐어짜듯 기도했다. 제발 마법처럼 이들 모두를 살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