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34화 (34/212)

9. 6.30 참사

6월 29일.

유월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두고 하늘은 어쩐지 어두웠다.

“왜 이렇게 어두워?”

“장마래.”

“그래? 그런데… 이쪽엔 아직 구름도 없는데?”

태양에 필터라도 씌운 것처럼 맨눈으로 해를 보아도 눈이 부시지 않았다.

휘이이이-

태풍 직전처럼 바람이 자꾸만 불어 왔다.

* * *

“…걔는 뭐 하고 있어?”

- 피팅룸에서 줄넘기를 마치고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내 마시고 있습니다.

“혹시 줄넘기는 그거야?”

- 예. 작년에 마에스터 우치에게 주문 제작한 청강靑釭 줄넘기 맞습니다.

“하… 귀신같이 좋은 물건만 쓰네? 음료수도 비싼 거만 마시나?

- 그냥 물을 마시고 있습니다.

“그래? 의외네. 하긴 토스카나 물이 맛있긴 하지만.”

- 그런데 그게… 잔을 열 개쯤 꺼내 놓고 바꿔 가며 마시고 있습니다. 도련님이 아끼는 잔들만 쓰고 있군요.

“미친… 하…….”

- 하아…….

리디아 위트필드가 데미안 루드비히를 따라서 한숨을 흘렸다. 항상 무감정하게 데미안 루드비히의 주변을 감시하는 수호자, 리디아로서는 드물게 감정적인 반응이었다.

- 도련님, 저자를 또 집에 초대하실 건가요?

“휴… 그래도 앞으로 두 번은 더 불러 줘야지.”

- 그 정도의 가치가 있습니까? 저는 사실 소시민의 대답이 그렇게 특별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원래 성공한 일 중 대부분은 기발한 아이디어랑은 상관이 없어.”

- 그렇습니까?

“그래. 열 살 때 배웠다고. 아버지 말씀하시길, 아이디어보다는 실행력이 먼저다! 내가 소시민 씨를 높이 평가한 것도 그래서고.”

- 실행력…….

“그 짧은 시간에 대책을 내놓았어. 실행 계획을 물어도 마치 밑바닥 헌터 생활만 삼십 년은 해 본 것처럼 구체적이고 자신감이 있더라? 그 말대로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해 준다면… 그만큼 훌륭한 고용인도 없지.”

- 지켜보실 생각이시군요?

“그래. 처음엔 일주일을. 그다음엔 한 달을. 녀석이 나를 실망시키기 전까지는 계속 기회를 주며 지켜볼 거야.”

- …도련님께서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하지만…….

리디아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가 분하다는 듯이 입술을 꼭 깨문 목소리로 이어 갔다.

- 하지만 역시 집에는 안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자, 도련님이 아끼는 물건에만 지분거리고… 기분 나쁩니다.

“에효… 하지만 100평짜리 집을 마다하고 그저 한 번 놀러오게만 해 달라는 사람한테 어떻게 그래? 내 시간 뺏으면서 놀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알아서 놀다가 가겠다는데.”

- 그게 더 수상한 겁니다. 도련님, 혹시 도련님의…….

“그만. 그만해. 그럴 리 없다는 거 알잖아.”

- …알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본가에는 부르지 말았으면 합니다.

“왜?”

- 여기서도 이러는데… 본가에 가면 드러눕고 안 나가겠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설마 그럴까 싶지만…….”

그때, 반지에서 영상이 흘러나왔다. 갖은 오파츠를 이용해 데미안 루드비히의 주변을 철두철미하게 감시하고 있는 리디아 위트필드가 보내 준 영상.

‘크… 땀도 뺐으니… 세수라도 할까? 샤워까지는… 아무리 나라도 눈치 보이고.’

영상 속에서는 소시민은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비명을 질렀다.

‘맙소사! 수건들이! 비누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달려가서 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비누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는다.

‘이건 입욕제! 목욕 오리마저! 안 돼… 안 돼… 이건 어쩔 수 없어!’

그리고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눈을 질끈 감고 옷을 훌훌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데미안 루드비히는 손을 휘휘 저어서 영상을 치워 버렸다.

썩은 음식이라도 먹은 것처럼 구겨진 얼굴이었다.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 바로 그렇습니다. 도련님.

“알겠어. 계속 주시해.

- 네. 일거수일투족도 놓치지 않고 감시하겠습니다.

“하아…….”

데미안 루드비히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고 침대 위에 벌렁 누웠다.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말했다.

“바깥은 아직도 어두워?”

- 네. 기상 이변이라는 것 같습니다. 각국의 기상 전문가들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일이야. 어쩌면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 능력을… 사용하셨습니까?

“응. 한 장을 봤어. 메이드의 가능성이 있어. 판돈은 크고.”

- 판돈이 큰데도… 배팅하십니까?

“뭐… 마침 여기 머물고 있으니까 겸사겸사지. 이쪽도 괜찮은 조합이 나올 가능성도 꽤 보였고.”

- 카드가 충분하면 좋겠군요.

“채점관 임훈도 있고, 얼마전에 불러온 경호 팀도 있으니까. 무엇보다… 네가 있잖아?”

- 저는… 도련님의 신변에 위협이 있을 때만 나설 수 있습니다.

“그거면 됐어.”

- 소시민과 서민서는 어떻게 쓰실 겁니까?

“실버 멤버십을 어디 쓰겠어? 자기들이 제안한 대로 밑바닥 민심이나 잡고 있으라고 해.”

- 네. 전달해 놓겠습니다.

“좀 잘게. 소시민 씨 알아서 놀다 가라 그러고. 가용가능한 전력들 다 이만 휴식 취하라고 그래. 내일은 비상 근무니 컨디션 조절하라고.”

- 네.

한동안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리다가,

데미안 루드비히의 숨소리가 점점 느려지며 깊어져 갔다.

* * *

6.30.

유월의 마지막 날.

그날 태양은 빛을 잃었다.

흑백으로 변해 버린 세상을 찢으며 따가운 바람이 몰아쳤다. 구름도 없이 후드득 비가 쏟아졌다.

TV에서는 어제부터 시작된 기상 이변에 관해 보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대한민국이 퇴근 시간이었던 그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물결과도 같아 보였다. 중심가에서 외곽으로. 퇴근하는 차량과 사람들이 강물처럼 냇물처럼 우르르 한 방향으로 흘러가던, 흔한 하루. 기상 이변쯤 아랑곳하지 않고 무신경하게 이어지던 일상.

하지만 갑자기 그 흐름이 변했다. 푸르게 빛나던 던전 게이트들이 돌연 붉게 물들고, 빈 허공을 노을처럼 물들이며 갑작스럽게 게이트가 열리고, 물살처럼 흘러가던 사람들은 빗방울처럼 흩어졌다. 연달아 울려퍼지는 비명은 사람 목소리라기보다는 소낙비 소리 같았다. 쾅쾅, 소리를 내며 자동차들이 폭발했다.

6.30 참사.

처음 그것이 시작되었을 때, 운 나쁜 사람들은 일대일로 괴물과 싸워야 했다.

쾅!

“컥! 뭐야 이 새끼는……!”

강전구는 작년에 프로 헌터가 되고 서울에서 200미터 규모의 초고층 빌딩으로 이사를 왔다. 거대한 빌딩에는 쇼핑 시설, 미용실, 피시방, 사우나까지 없는 게 없었다. 예전에는 헤븐팰리스처럼 부자들만 이런 곳에서 살았지만, 요즘은 던전 산업에 종사하는 신흥 중산층을 겨냥해서 방을 더 작게 쪼갠 이런 빌딩이 유행하고 있었다. 당장 강전구가 살고 있는 거리에만 이런 고층 주상 복합이 다섯 동 더 있었다.

이날 강전구는 슬리퍼를 끌고 장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난데없이 그의 앞으로 붉은색 게이트가 쭈욱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오크가 튀어나왔다. 장바구니를 집어 던지며 저항해 봤지만 무기도 방어구도 없는 상황에선 녀석의 손에 붙잡혀 이리저리 내던져질 뿐이었다.

꽈앙!

“쿨럭! 쿨럭!”

벽에 꽂힐 때 폐가 흔들렸는지 자꾸만 기침이 나왔다.

끼이익!

그때 강전구의 눈에 살짝 열리는 현관문이 보였다. 오며 가며 마주쳤던 여자아이였다. 여섯살이라고 했던가? 그 아이가 현관문을 붙들고 빼꼼 밖을 내다본다.

“야! 문 닫아!”

강전구가 소리 지르자, 오히려 겁을 먹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자리에 굳어 버리는 아이. 아이가 히끅, 하고 딸꾹질을 하자, 오크가 그르릉 하며 여자 아이 쪽으로 돌아봤다. 그 순간, 강전구는 벌떡 일어났다. 혈관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성이 마비되고 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강전구의 전신을 휘감았다.

텁!

카드득!

아무리 프로 헌터라고 해도 방범창의 창살을 맨손으로 뜯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강전구는 무의식 중에 그걸 아주 쉽게 해냈다. 그의 초능력 [무게 증가]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활성화되고, 쿵, 한 발을 딛는 순간 그는 이미 오크의 뒤통수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야이, 개새끼야!!”

막 돌아보는 오크의 정수리로 창살이 내리꽂혔다. 손에 집중된 [무게증가] 탓에 창살은 찌르는 게 아니라 망치로 박아 넣는 것처럼 무겁게 박혀 들었다.

꽈앙!

오크의 머리가 창살 채로 땅에 꽂혔다.

“야, 괜찮아?”

강전구는 오크 머리를 땅에 박아 놓은 채로 꼬마아이를 살폈다. 다친 곳은 없었다. 아이의 엄마가 소란을 듣고 밖으로 나오다가 오크의 시체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그사이 강전구는 복도 유리창을 통해 밖을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밖이 소란스러운 것 같았다.

“이런 시발…….”

그런 그의 눈에 보인 것은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때의 시원한 풍경이 아니었다. 그의 눈에는 저 멀리 아래에서부터 빠르게 솟구치는 불길과 시커먼 연기가 보일 뿐이었다.

쿵! 쿵!

으악!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가 현관문을 잡아 뜯는 소리. 사람이 찢어지는 소리…….

하지만 강전구의 머릿속에는 괴물들이 만들어 내는 그 참상보다도 저 아래에서 빠르게 번지고 있는 불길이 훨씬 크게 느껴졌다.

이곳은 까마득하게 높은 빌딩이었다.

괴물은 피하거나 싸우면 그만이지만 불길은 피할 수도, 싸울 수도 없었다.

“시발… 시발! 불이야아아!”

강전구가 외쳤다.

“불이라고! 불이야!!”

6.30 참사 첫날, 시작하자마자 괴물과 조우한 운 나쁜 이들은 골목길에서, 횡단보도에서, 복도나 계단에서 괴물과 싸우다 죽어 갔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은 무리를 이루어 안전한 곳을 찾아 정처 없는 피난을 떠나거나, 건물 옥상에 틀어박혀 농성을 벌였다.

그리고 고층 빌딩에 살던 어떤 이들은… 화마에 휩싸여 속절없이 죽어 갔다.

* * *

“선배… 이게 대체…….”

나는 와들와들 떠는 서민서의 손을 살짝 잡아 주었다.

“걱정 마. 우리가 이겨.”

당장은 다들 괴물에게 쫓기고 학살당하는 것 같아도 인류의 숫자는 많고 결국엔 우리가 이긴다. 애초에 모든 던전이 다 터지고, 불규칙 던전들이 대량으로 발생했다고 해도 아직까진 괴물의 숫자가 우리의 인구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니까.

다만 갑작스런 습격에 예비군이 제대로 동원되지 못한 것이 피해가 커진 원인이었다. 인간은 조직적으로 싸워야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족속이었으니까.

‘그나마 광화문이나 여의도처럼 직장인들이 몰려 있는 동네는 괜찮았지…….’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은 쉽게 무리가 생겨났고 시민들은 시위하듯 몰려 다니며 퇴로를 뚫어 낼 수 있었다.

‘문제는 주택가와 아파트들…….’

퇴근 시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직 텅텅 비어 있던 아파트 단지와 주택들은 자체적으로 퇴로를 뚫기보다는 옥상에서 농성을 하는 편을 택했다. 그리고 많은 이가 그대로 고립되어 죽었다.

‘그때 차라리 피해를 보더라도 아래로 내려와서 뭉치는 편이 나았을 거라는 말이 많았지.’

상황은 내가 기억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폰을 들어 허묵에게 전화를 걸었다.

- 뭐야! 나 바빠!

“그러니까 전화했죠. 지금 최치국이랑 같이 움직입니까?”

- 어? 어떻게 알았어? 갑자기 특수 의뢰를 넣길래 나왔는데… 젠장. 이게 무슨 일인지.”

그래. 회귀자들이 당연히 허묵도 불렀겠지. 허묵이 나랑 야합한 건 꿈에도 모를 테니, 그들로서는 6.30 참사를 대비하기 위해 쓸 만한 킬러 회사를 빼놓을 리 없었다.

“뭐 좀 물어볼게요. 혹시 최치국이 아파트나 주택 지역에 대해 언급한 거 있었어요?”

-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방금 전에 어디에 막 전화하던데? 방송차들에게 방송하라면서 뭐 막 멘트 불러 주고…….

허묵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웨에에에엥-!

웨에에엥-!

사이렌이 울렸다.

- 시민 여러분. 옥상은 위험합니다. 각개 격파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건물 밖으로 나와 다른 사람과 합류하고 진형을 갖추어주십시오. 반복합니다. 옥상은 위험합니다. 건물 밖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합류하고 전투 진형을 갖추어 주십시오.

끼이이익-!

커다란 스피커 여러 대를 장착한 방송차가 도로를 질주하며 스피커가 터져 나갈 정도로 크게 방송을 하고 있었다.

오케이. 그러니까 저게 회귀자가 내놓은 대비책이라는 거군?

“그밖에는 없었어요?”

- 딱히 없었다.

“지금은 어딘데요?”

- 여의도.

“알겠습니다. 최치국 계속 마킹해 주세요.”

- 어? 잠깐! 근데 너 뭔데 무슨 지시하듯이……? 내가 협력을 하기로 한 건 어디까지나 네가 씨앗을 키워 주는 조건이었는데 넌 아직……!

뚝.

말이 길어지길래. 그냥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래도 허묵 덕에 현재 상황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야.’

회귀자들은 일반인의 피해를 줄이는 것에는 크게 자원을 투입하지 않았다. 여의도로 간다는 것을 보니까 꼭 살렸어야 했다고 회자되었던 몇몇 리더들을 먼저 구할 생각인 것 같았다. 일반인들을 구하는 것에 직접적으로 역량을 투여할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저렇게 방송차로 방송이라도 해 준 게 최선이었다는 거네?’

물론, 저것만 해도 큰 도움이긴 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시민들에게 명확한 지시를 내려 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건질 것이다. 이게 나비효과가 되어서 아주 큰 효과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이곳 청파동 뉴타운의 고층 아파트 단지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화륵-

“세상에……! 선배 저기!”

200미터 규모의 고층 빌딩. 하늘에 닿을 듯 당당하게 서 있던 건물의 뿌리에서부터 시커멓게 화염이 치솟았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번지는 불길. 고층에 있던 사람들이 피난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시작됐구나.’

훗날 6.30 참사 아카이브 영상을 보면 반드시 자료 화면으로 등장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여섯 동의 고층 빌딩 전소. 입주민 4,000여 명 실종. 그중에는 어린아이의 비중도 상당히 높았다.’

오래 전 일인데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건, 6.30 참사 당시 면적 대비 두 번째로 많은 사망 사고가 발생한 일이었기 때문이었고, 불타는 건물을 배경으로 한 사진이 6.30 참사 그 자체의 상징처럼 쓰이기도 했던 탓이기도 했다.

나는 품에서 주황빛 젤리를 꺼냈다. 툭 치면 부풀어 오르는 젤리. 타키넷에서 구매한 두 번째 물건.

‘전부 구할 수는 없어. 하지만… 최소 3,000명은 구해 보자.’

나는 오늘 그 역사를 바꿀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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