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디까지나 좋은 의미로
증명의 전장에서 패배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있니.
어떻게 되죠.
일단 네가 죽겠지. 내 알 바 아니긴 한데, 서울 전체가 피해를 본다는 게 문제지.
왜죠.
도전자가 패배할 때마다 도전 목록이 늘어나고 더 강력한 괴물들이 늘어나거든. 여기가 벌써 15년 넘게 토벌되지 못했다. 중간중간에 아깝고 분한 패배들도 있었지만, 너 같은 머저리들이 허무하게 죽어 준 탓도 크다.
저는 그런 사람 아닌데요.
아니다. 누가 봐도 너는 그런 사람으로 보인다.
나를 둘러싼 광화문 경비 팀이 시뻘건 얼굴로 나를 위협해 가며 한 말을 또 하고 또 해 가며 악악 나눈 대화 내용은 사실 이렇게 간단했다.
나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대화로는 방법이 없다.
“됐고요. 여기 허가 신청은 제가 아니라 루드비히 가문이 넣었습니다. 따질 거면 루드비히 가문에 하든 아니면 루드비히 가문의 도전 신청을 받아 준 정부에 하든 알아서 하십쇼.”
“뭐?”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경비 팀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루드비히?”
“당신 루드비히 가문 소속?”
“자.”
실버 멤버십을 상징하는 루드비히 실버카드를 꺼내 보였더니 경비 팀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리곤 무슨 신기한 동물 쳐다보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는 불이라도 뿜을 것처럼 적대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더니 이제는 동물원 원숭이 바라보듯 한다.
“거기가 그렇게 대우가 좋다면서?”
이건 부팀장 이승민 씨의 물음.
“진짜 그렇게 예쁜 헌터들이 많나?”
이건 수석 김대철 씨.
“진짜 점심마다 스테이크가 나와요?”
이건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떤 선임병의 물음.
한심해라. 대한민국 정부 소속 엘리트 헌터로 꼽히는 광화문 경비 팀이 무슨 80년대 서울에서 온 전학생 보는 시골 소년들처럼 나를 봤다.
‘하긴… 이게 루드비히지.’
전세계 모두가 질시하고 경멸하면서도 결국에는 선망하는 자리.
내 기억 속의 루드비히도 그랬다. 산업 기반이 다 무너지고 지구가 멸망해 가던 그때에도 루드비히 소속의 헌터들은 하나같이 깨끗한 수제 맞춤 정복을 입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모두가 더럽고 추레하던 전장의 한복판에서 그들만 유독 빛이 났었다. 뭐, 실제로 항상 받을 대가는 다 받고 제일 폼 나는 임무들만 수행하기도 했고 말야.
결국 박민희 팀장이 나섰다.
“야! 너희! 이 쪽팔린 놈들아!”
짜악! 짝!
찰진 등짝 스매시가 등허리를 차례로 강타한 다음에야 부팀장 이하 경비 팀원들은 풀이 죽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큼. 크흠!”
어수선한 분위기를 기침으로 정리한 박민희 팀장은 다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거기! 아무튼! 루드비히고 뭐고 안 돼! 최소한 방어구는 챙겨 오쇼! 안 그러면 내 직권으로라도 막을 거요.”
예쁜 이마에 완고하게 잡힌 주름. 고운 목소리를 쫙 깔아서 무겁게 만든 목소리.
나이도 안 많아 보이는데 아무리 봐도 진성 꼰대다. 그래서 골치가 아팠다.
“방어구 살 돈이 없는데 어떻게 해요.”
남들 다 쓰는 기성 방어구를 사려고 해도 빚을 더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아까운 짓은 할 수 없었다.
박민희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돈이 없다고? 당신, 루드비히 소속이라면서?”
“네. 실버 멤버십 받은 게 이틀 전입니다. 이번 임무도 테스트 성격인 거고요… 아직 아무것도 못 누렸어요. 개털입니다. 가문에 잘 보이려고 무기에 올인했더니 방어구까지 맞출 돈이 없었어요.”
“진짜?”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이 무너졌다는 듯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진짜로, 진짜?”
“하…….”
깊은 한숨을 쉰 그녀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하더니, 이윽고 내가 정말 상상도 못 했던 행동을 했다.
“아… 시발… 그냥 풍선이나 흔들고 꽃이나 주려고 했더니.”
“예?”
풍선? 꽃? 뭔 소리야. 그러고 보니까 그런 건 왜 들고 있었던 거야?
“됐고. 그럼 이거라도 입어요.”
휙.
‘어?’
그녀는 자기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고 그 안에 입고 있던 조끼를 벗어 내게 던졌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고 이승민 부팀장에게 지시했다.
“부대 자산 목록에서 빠진 그 낡은 방호코트 있지? 가져와.”
“예? 팀장님 그건…….”
“시끄러. 가져와.”
이승민이 낡은 코트를 가져오자 그녀는 그것도 내게 던져 주었다.
“루드비히의 멤버십을 받을 정도면 실력이야 확실하겠지. 하지만 결투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방어구는 꼭 갖춰야지. 아직 어려서 호기 부리나 본데, 운 나쁘게 한 대 스친 걸로 어이없게 패배하면 어쩔 거야? 그거, 낡았지만 우리 경비 팀 정식 장비였던 방호코트고, 속에 조끼는 내가 아끼는 싸제 방어구니까, 이기고 와서 반납.”
눈도 안 마주치고 인상을 팍 쓴 채로 퉁명스레 내뱉는 말이 이런 식이었다. 나는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지난 생에 쉰 살 먹도록 살면서 깨달은 게 있었다.
뭐 하나 보태 주지도 않으면서 쓴소리만 하는 인간은 개새끼다. 하지만 쓴소리를 하더라도 뭐를 자꾸 보태 주면서 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은 흔치 않았지만.
‘와… 좋은 사람이었던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 한편이 아릿했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책임지려는 사람. 아무런 대가도 없이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놓는 사람.
루드비히 가문에 정확히 반대되는 사람들이자… 지난 생의 나와 내 친애하는 친구들이 다들 그랬다. 멍청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사랑스럽고 지긋지긋한 추억들.
‘와, 이거 추억 폭행이 오네.’
덕분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손에 쥐어진 조끼와 코트를 멍하니 내려다보기만 했다.
“아, 뭐 하나. 도전할 거면 빨리 하지.”
어쩐지 뺨이 살짝 빨개진 박민희 팀장. 그제야 나는 방호 조끼랑 코트를 걸치고 보랏빛 게이트를 넘었다.
“저봐라. 고맙다는 소리도 없지.”
게이트를 넘어서는 순간엔 박민희 팀장의 투덜거림이 들려서 쓰게 웃고 말았다.
* * *
증명의 전장은 밖에서 내부를 관찰할 수 있는 던전이었다.
단, 관찰자가 초능력자일 것.
초능력자가 보라색 게이트를 응시하면 그 안에 들어간 헌터가 괴물과 싸우는 모습이 텔레파시 형태로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름 그대로지. 증명의 전장.’
진입 제한 인원은 한 명. 일대일로,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남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누가 더 강한지 증명하는 것.
“후우우…….”
나는 숨을 가다듬고 도전 목록에서 트윈헤드 오우거를 고르고, 마침내 놈을 마주했다.
‘크다.’
그게 내 첫인상이었다.
킁. 킁.
벌름 거리는 네 개의 콧구멍조차 생각보다 거대했다.
‘전에 싸웠을 때는 이렇게 안 컸던 것 같은데…….’
사실 실제 크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압박감은 차원이 달랐다. 지난 생에는 팀을 짜서 싸웠지만 지금은 일대일.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막상 싸우려니까 고층 빌딩이나 무슨 절벽처럼 느껴지네.’
오우거란 본래 유럽 전승에서 나타나는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 가장 유명한 것은 잭과 콩나무에 등장하는 식인 거인이다.
왜 이 괴물에게 오우거란 이름을 붙였는지 알 수 있는 위용이었다.
심지어 이놈은 트윈헤드 오우거였다. 두 배는 더 교활하고 두 배는 더 힘이 센 괴물.
크르르르르- 후욱!
그런 놈이 나를 보고 으르렁거리며 콧김을 뿜었다. 저 멀리서 뿜어진 콧김이 강풍이 되어 내 머리칼을 휘이잉, 흐트러뜨렸다.
파드득!
나는 그게 무슨 신호라도 된 것처럼 곧장 네필림의 날개를 펼쳤다. 거인창을 녀석에게 겨누었다.
크륵?
킁킁.
트윈 헤드 오우거는 자신의 키만큼이나 기다란 창을 보며 호기심을 보였다. 머리 하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창을 살피고, 다른 하나는 고개를 쭉 내밀고 냄새를 맡았다.
‘진짜 만만치 않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머리가 두 개면 더 불편하고 굼뜰 것 같지만, [만상공감]으로 읽어 낸 감각은 정반대였다. 머리가 두 개여서 시야도 두 배였고, 머리가 두 개여서 반응도 두 배로 빨랐다. 살짝살짝 흔들리는 창끝에도 놈은 모조리 반응하고 있었다. 심지어 두 배로 교활했다.
크르륵-
배부른 사자처럼 여유를 부리면서도, 멍청한 곰처럼 이리저리 딴짓을 하면서도, 놈은 슬며시 눈알을 굴려 내 빈틈을 찾았다. 방심을 유도하는 것이다.
‘허점이… 거의 없는 수준이야.’
약점은 없다. 그렇다면 남는 건 정면 승부뿐!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어쩌면 내 공격이 막힐지도 모른다. 놈이 피할지도 모르고.
하지만 설령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해도, 찌를 때만큼은 의문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걸로 끝낸다.’
나는 일격 필살의 의지를 가다듬으며 옆구리에 낀 거인창을 단단하게 정렬시키고, 어깨에서 손가락으로 이어지는 한 올 한 올의 근육을 풀고 관절의 각도를 조절했다.
우우웅-
의지가 영력이 되어 거인창에 흐르고, 거인창이 그에 반응하여 울었다.
네필림의 날개는 딱 두 번 흔들었다. 땅에서 허공으로 도약할 때 한 번.
파앙-!
트윈헤드 오우거의 두 머리가 동시에 허공을 향했다.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네 개의 눈동자는 금세 나를 따라왔다.
나는 놈들을 쏘아 보며 다시 한번 날개를 떨쳤다. 이번엔 좀 더 강하게, 전력을 다해!
‘어디, 막아 봐!’
파아아앙-!
투명한 깃털이 내 눈앞으로 나부끼고 트위헤드 오우거의 모습이 크게 확대되었다.
놈은 내 움직임을 느꼈다. 하지만 미처 반응하진 못했다.
창 끝이 놈의 가슴으로 쭉 뻗는 순간.
‘통했다!’
라고 확신하는 순간.
후욱!
예고도 없이 놈의 몸이 돌아가고, 거대한 손이 눈 앞을 가로막았다.
꽈아앙-!
머릿속에서 벼락이 쳤다.
* * *
“어어, 저거?”
이승민 부팀장이 벌떡 일어났다.
“괜찮아. 방호 코트가 견뎠어.”
박민희 팀장이 게이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꿀꺽.
그녀는 마른 침을 생겼다.
‘뭐야… 뭐가 이렇게 무식해.’
소시민이라는 헌터가 2미터 길이의 길쭉한 가방을 짊어지고 있는 걸 보고 창이나 봉을 무기로 쓸 거라고 짐작하긴 했다. 그런데 가방에서 튀어나온 건 무려 7미터짜리의 전봇대 같은 창. 무식하기 짝이 없는 무기였다.
‘그런 걸 들고 바로 달려들다니?’
그리고는 쾅, 하더니 장면이 바뀌었다.
팀원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지 못했지만 박민희는 가까스로 그 과정을 볼 수 있었다.
트윈 헤드 오우거의 손바닥이 거인창을 막아섰다.
하지만 거인창은 오우거의 손바닥을 뚫고 팔뚝까지 뚫고 가슴을 관통했다.
그런데 이 무식한 오우거는 팔과 가슴이 꿰뚫리는 순간에도 손바닥을 끝까지 밀어쳤다.
육중한 손바닥이 창에 콰득콰득 뚫리면서도 기어코 나아가 그 너머에 있던 소시민을 때린 것이다.
소시민은 손바닥에 눌어붙은 파리처럼 잠시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박민희는 보았다. 그 코트를 타고 희미하게 점멸하는 황금빛 문양을. 그것은 수호의 각인. 모든 종류의 충격을 흡수하는 힘이 있는 오파츠, 일명 프로텍트 오브를 형태 변형자가 녹여 코트에 부여한 각인. 그게 희미하게나마 빛나고 있다는 뜻은 코트가 충격을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깐 오우거의 손바닥에 붙어 있던 소시민은 고개를 흔들며 떨어져 나왔다. 충격이 있는지 고개를 후르르 털었지만, 크게 다친 모습은 아니었다.
“와씨… 다행이다. 봤냐? 내 선견지명? 내가 코트를 안 줬으면 어쩔 뻔했냐?”
박민희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환호할 수 있었다.
“크… 역시 팀장님!”
팀원들은 그녀에게 존경어린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녀가 씩 웃으며 다시 게이트를 돌아보는 순간,
덥썩!
“어?”
트윈 헤드 오우거가 다치지 않은 손으로 소시민의 코트자락을 잡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분명 소시민은 재빠르게 피했는데, 펄럭이는 코트 끝자락이 오우거의 손에 걸린 것이다.
놀랐는지 소시민의 눈이 땡그랗게 커졌다.
그리고,
부우욱!
오우거가 방호코트가 찢어질 정도의 엄청난 힘으로 팔을 내리쳤다. 소시민은 엄청난 속도로 땅에 내리꽂혔다.
콰앙!
먼지 구름이 일었다.
그 처참한 모습에 경비 팀원들은 일제히 박민희를 돌아보았다.
“저, 저거… 코트 때문에…….”
누군가 중얼거렸다.
“아, 아니… 그게. 아씨… 저기서 코트가 왜…….”
박민희 팀장은 다시 한번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