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증명의 전장
소시민이 떠난 호텔방. 홀로 남은 데미안 루드비히가 중얼거렸다.
“…그건 뭐였지?”
우웅-
그러자 데미안의 반지가 빛을 뿌리며 진동했다. 반지로 연결된 수신호위이자 조언자인 리디아 위트필드의 응답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무척 아름다웠지만 군인처럼 딱딱하고 신중한 면이 있었다.
- 확실히 마누스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파괴력은 범상치 않고… 고유 스킬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공용 마누스도 배우지 못한 자가 마누스와 초능력이 융합된 고유 스킬을 사용한다?”
- 아직 보고되지 않은 이능의 작용으로 보입니다. 지속적인 추적 관찰을 건의드립니다.
“그래. 지켜볼 가치는 있지. 맞다. 증명의 전장으로 채점관을 보내.”
- 알겠습니다.
“근데 진짜 이해가 안 가는 건… 그건 뭐였냐는 거지.”
- 네?
“그거. 같이 살고 싶다잖아!”
데미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 그것도…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 진짜, 멀쩡한 부하 하나 만들기 어렵네.”
머리를 감싸 쥐는 데미안. 리디아는 반지 너머에서 그런 데미안을 위로했다.
- 잘하실 겁니다. 모두가 막내 도련님께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래. 고맙다. 나 잔다. 잘자.”
- 수신호위는 잠들지 않습니다. 언제나 도련님의 안전을 지킵니다.
“그래, 그래.”
반지의 불빛이 꺼졌다. 데미안 루드비히는 침대에 누워 화려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트윈 헤드 오우거를 잡겠다고? 정말? 그 정도로는 안 보였는데…….”
잡지 못한다면 어떻게 처벌해야 할까? 루드비히를 기만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확실히 알려 줘야 하나? 아니면 루드비히의 관대함을 보여야 하나?
또, 반대로 잡는다면… 어떻게 포상해야 할까?
데미안 루드비히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그래도 같이 사는 건 안돼.”
* * *
광화문 증명의 전장은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나타난 불규칙 던전이었다.
광화문광장과 광화문 사이의 대로를 집어삼키며 나타난 게이트는 보라색으로 빛났다.
최초로 증명의 전장에 진입한 사람은 당시 의경 복무 중이던 초능력자였다. 그때만 해도 국민개병제의 제도가 제대로 자리 잡기 전이었기에 초능력자가 의무 복무를 하는 경우도 잦았다.
“로마 시대 검투장과 비슷합니다. 들어가면 지정하는 괴물과 일대일로 싸울 수 있습니다. 저는 가장 약해 보이는 괴물을 골랐고, 겨우 이겨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보고를 했던 의경은 눈 하나를 잃어 피를 철철 흘리는 상태였다.
증명의 전장은 마치 게임과도 같은 룰을 사람들에게 강요했다.
규칙 하나. 초능력자가 그 보라색 게이트에 손을 대면, 기나긴 ‘도전 목록’이 눈앞에 떠오른다. 게임에서 캐릭터를 선택하는 화면처럼, 괴물들이 실감나게 움직이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목록이었다.
규칙 둘. 목록에 올라온 괴물은 반드시 ‘도전 기한’ 내에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광화문 한복판에 괴물이 풀려나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광화문 경비 팀장을 맡고 있는 박민희는 자꾸만 자기 머리를 쥐어뜯을 수밖에 없었다.
“으악! 그냥 내가! 그냥 내가 들어가서 죽이면 안 돼? 응? 제발……! 들여보내 줘!”
누구나 1류라고 인정해 주는 그녀의 솜씨라면 도전 목록에 있는 어지간한 괴물은 다 해치울 수 있었다. 그녀는 하루에도 열두 번은 생각했다. 그냥 자신이 도전 목록에 있는 괴물들을 다 없애 버리고 싶다고.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세 번째 규칙 때문이었다.
“1년에 한 번밖에 도전을 할 수 없다니, 이 무슨 개 같은 규칙이냐고!”
박민희가 광분하자,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부팀장 이승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것만 문제인가요? 무제한으로 도전하면 뭐 해요? 어차피 자기보다 약한 괴물은 지목도 못 하는걸.”
“으아악! 그러니까! 던전 주제에 무슨 규칙이 그렇게 세세하냐고!”
“왜, 학자들 말이 증명의 전장은 다른 차원의 지성체가 설계한 것 같다잖아요.”
“그래! 그 지성체 새끼! 데려와! 내가 죽여 버릴 테니까!”
박민희 팀장은 또다시 머리를 쥐어뜯었다. 우수수 뽑혀 나온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보며 더욱더 깊은 분노를 느껴야 했다.
‘이러다가 대머리가 되겠어. 아직 스물일곱인데… 여잔데…….’
그녀를 괴롭히는 문제는 한 달째 토벌하지 못한 괴물, 트윈 헤드 오우거였다.
‘그 자식 도전 기한이 이제 열흘밖에 안 남았다고…….’
열흘이면 진짜 코앞이다. 3주 전에 놈에게 도전했던 헌터가 전사했다. 그래. 거기까지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동물 사냥 중에도 종종 사고가 나는데 괴물을 잡는 일은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나흘 전에 녀석에게 도전하기로 했던 헌터가 다른 임무 수행 중에 큰 부상을 입는 바람에 토벌 일정이 또 연기된 건 끔찍한 악몽이었다.
트윈 헤드 오우거를 일대일로 잡을 수 있을 만한 헌터를 열흘 만에 섭외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아악! 이러다가 이 머리 두 개 새끼 광화문 광장에서 만나게 생겼어!”
“나오면 그때 조져도 되죠.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때마다 내가 조인트 얼마나 까이는 줄 알아? 여기 광화문이야! 나라의 중심이 어쩌고, 청와대가 어쩌고! 와씨! 내가 미친다니까?”
“그럼 현상금 걸어야죠 얼마를 걸어야 하나? 오우거도 아니고 트윈 헤드 오우건인데… 그걸 일대일로 잡아야 하고, 시간 제한은 열흘… 음… 예산 돼요?”
“안 되지! 안 되니까 이러지! 그러니까, 광화문에서 괴물이 날뛰는 꼴 보기 싫으면 예산이라도 많이 주든가!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어쩔 수 없죠. 여기만 힘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이, 이승민? 너 누구 편이냐?”
“저야 물론 아름다우신 박민희 팀장님 편입니다!”
“아닌데? 아닌 것 같은데?”
“맞는데요?”
“안 되겠다. 오늘 한번 거꾸로 매달려 보자, 승민아.”
“네? 그런 비인간적인 처사를……! 어이, 김대철 수석! 뭐라고 한마디 해 봐. 이게 말이 돼? 사람을 거꾸로 매단다니?”
“똑바로 매다는 것보다는 낫죠 뭐.”
“어?”
아, 똑바로 매달면 죽는 건가? 생각할수록 맞는 그 말에 이승민은 자신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는 박민희를 보면서도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띠링!
그때 문자가 울렸다. 심드렁하게 문자를 확인하던 김대철 수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전한답니다!”
그 말에 박민희와 이승민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그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트윈 헤드 오우거에 도전 신청이 올라왔습니다! 도전자가 1시간 내로 도착한답니다!”
* * *
“후우우…….”
이게 바로 호랑이 등에 올라탄 심정인가?
갑자기 회귀를 하고, 두 번째 인생은 행복하게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행복하기가 뭐 이렇게 힘든 건지.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모든 게 너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벌써 오우거에 도전한다고? 그것도 그냥 오우거가 아닌 트윈 헤드 오우거한테?”
트윈? 머리 두 개짜리?
뭘 잘못 먹었었나?
현시대에서 오우거는 하나의 자격증과 같았다. 오우거 슬레이어라는 타이틀이 있으면 어디에서나 제 몫을 하는 헌터라고 인정받는 것이다. 수호 가문에 찾아가면 말단 식객 노릇을 할 수 있고, 공무원이 되고 싶으면 특채로 뽑힐 수 있고, 어느 헌터 팀이나 대형 길드에 가서도 프리랜서로 일할 수 있다. 어디에서나 ‘주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수준.
“지난 생에도 말년에나 잡은 게 오우거인데…….”
그래. 오우거야말로 바로 일종의 트로피였다.
1류는 아니지만 그 바로 아래. 상위 6~7퍼센트의 실력. 수능으로 치면 2등급 초반!
“정말 미친 듯이 빠른 발전이구나…….”
실력은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더 올리기 어려운 게 세상의 이치였다.
상위 60퍼센트의 실력자가 상위 50퍼센트의 실력자가 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 반면에 상위 10퍼센트의 실력자가 상위 7퍼센트의 실력자가 되는 건 어렵다. 상위 7퍼센트가 상위 4퍼센트가 되는 건 훨씬 더 어렵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떤가?
지난 생에, 청계산 사마귀 던전에서 서민서를 잃은 소시민은 전체 헌터 중 전투력으로 상위 70퍼센트 정도 됐을 것이다 그랬던 내가 금천구 던전에서 미친 오크랑 싸울 때는 상위 15퍼센트를 자부해도 좋은 솜씨였다. 그런데 지금은 상위 6~7퍼센트쯤 돼야 잡을 수 있다는 오우거를 건너뛰고 상위 4~5퍼센트 실력이어야 잡을 수 있다는 트윈 헤드 오우거를 노리고 있었다.
그 정도면 1류의 턱밑이었다. 1류로 불리지는 못하지만 얼마든지 그들의 틈사구니에서 비빌 수 있는 1.5군의 지위!
그러니 손이 떨리고 목이 탈 수밖에 없었다.
‘벌써… 지난 생의 나를 뛰어넘는 거야.’
내 예상보다 반년은 더 이른 시점이었다.
회귀자들의 쇄국정책이라는 생각도 못 했던 난관을 만났기에 어쩔 수 없이 무리를 하게 되긴 했지만… 역시 이런 말도 안 되는 도전을 생각하게 된 건 거인창 덕분이었다.
‘영력만 따지면 여전히 지난 생의 5분의 1 수준도 안 돼. 그런데 진짜 미친 건… 이게 해볼 만하다는 거야. 무기의 차이가 이 정도로 큰 전투력 상승을 가져올 줄은…….’
지난 생에 [만상공감]이 어떤 능력인지 겨우 눈치챘을 때쯤엔 이미 인류의 산업 기반이 다 무너진 상태였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내가 쓸 만한 명품을 찾기 어려웠고 그걸 살 돈도 없었다. 그나마 꾸역꾸역 타키넷을 다니며 조금씩 사들인 이차원의 장비들로 나를 강화했지만, 아우라가 없는 그런 무기들로는 결국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거인창은 달랐다.
거창한 주술이나 마법이 각인된 것도 아니지만, 순수하게 좋은 재료를 가지고 경지에 오른 장인이 혼을 담아 벼려 낸 창.
다른 이들이 쓴다면 타키넷에 굴러다니는 장비가 훨씬 좋겠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그것의 잠재력을 이능과 신비의 영역으로 격상시킬 수 있다.
덕분에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지난 생과 현생을 통틀어 상대해 본 적 없는 강적에게 도전하겠다는 배짱을 부리게 된 것이다.
여전히 실감은 안 간다.
‘미친 게 틀림없어.’
심장은 쿵쾅거리고 손은 파르르 떨린다.
그래서 너무나…….
짜릿하다.
‘이렇게 좋다니… 정말 미친 게 틀림없어.’
어쩌다 보니 호랑이를 타고 그 기세에 이끌려 상상치도 못하게 멀리 왔는데… 그게 이렇게 신날 줄이야? 여기에서 비바람이 불고 태풍이 몰아치면 더 즐거울 것 같다.
아, 이건가?
이게 영웅들이 느끼는 세상이었을까?
호랑이를 만나면 호랑이를 잡아타고, 태풍을 만나면 태풍에 올라탈 수 있는 실력자의 세상.
그런 내 앞으론 ‘증명의 전장’이 보랏빛 광채를 뿜어내며 기다리고 있었다.
막 설레는 마음으로 그 안에 들어가려는데.
“장난하나… 야, 너 뭐 하는 새끼야?”
분위기를 깨는 사람들이 있었다.
‘광화문 경비 팀?’
까만 코트 자락이 펄럭이고, 금색 실로 수놓인 현란한 문양이 시선을 빼앗았다.
수도 서울의 중심부를 지키는 조직답게, 멋들어진 제복으로 유명한 헌터 팀이었다. 실력 역시 말할 것도 없다. 그중에서도 팀장의 휘장을 달고 있는 여성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보란 듯이 마누스를 운용해서 전신에서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며 날 압박했다.
‘초면에 이러는 건 엄청난 비매너인데?’
마누스를 이용한 압박. 민간인이나 수준 차이가 많이 나는 예비역 헌터한테 저런 짓을 하면, 발작을 일으키게 할 수도 있는 위험한 짓거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 일절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이 날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하……! 얘야, 내가, 트윈 헤드 오우거의 도전자가 나타났다고 그래서 설렜거든? 근데 너 정말 뭐니? 어떻게 너 같은 게 도전 허가를 받은 거야? 응?”
팡!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풍선이 악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 나갔다. 근데 풍선? 저런 건 왜 들고 있던 거야? 그러고 보니 그녀 뒤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팀원들도 풍선이나 팻말 같은 걸 들고 있었다.
이 상황 이해가 안 간다.
그런데 어리둥절한 내 모습이 또 보기 싫었나 보다.
팀장의 곱상한 볼에 씰룩, 주름이 갔다. 어금니를 꽉 깨문 모양이다.
“니 을마전만 해도 예비역이었다며? 근데 그건 그릏다고 쳐! 그른데!”
그녀의 손가락이 내 가슴을 쿡 찔렀다.
“방어구는 어쨌냐고, 시발아!”
어쩌긴. 과도 살 때 다 팔아 버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