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루드비히
살다 보면 그런 일들이 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지나친 일이 돌아보면 인생에 다시 안 올 기회였던 순간이. 돌아보면 이게 엄청난 기회라는 전조가 분명했는데… 왜 그때는 그걸 그냥 지나쳤을까?
루드비히 가문의 막내아들이 한국을 방문한 사건이 딱 그런 경우였다.
평범한 헌터들에게는 “와씨… 이때가 진짜 절호의 기회였는데!” 하는 오랜 후회를 남겼지만, 최치국 같은 초일류들에게는 “아, 그때 루드비히가 한국에 왔었어? 왜? 전혀 몰랐네.” 하는 잠깐의 의아함만을 남긴 사건.
크게 뉴스가 난 사건은 아니지만, 나랑 비슷한 수준의 헌터들 사이에선 두고두고 회자된 안줏거리였기에,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루드비히가의 막내. 데미안 루드비히.
그는 이 시기에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별로 존경한 가문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힘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번 생에선 그들을 내 후원자로 삼을 것이다.
* * *
[만상공감]은 어떤 능력인가?
알면 알수록 복잡한 능력이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설명할 수밖에 없지만… 지금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옛말에, 사람이 오래 쓴 물건은 도깨비로 변화한다고 했다.
[만상공감]이란 그런 도깨비를 빠르고 효과적으로 만들어 내는 초능력이다.
스르릉-
스릉-
김민수와 한성사에 다녀오고 다시 나흘이 지났을 때.
그러니까 청하를 감싼 백색 아우라가 75퍼센트쯤 차올랐을 때부터, 청하는 울기 시작했다. 바람도 불지 않았고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녀석은 혼자 울었다.
“후우… 할 수 있다.”
가끔 내가 혼잣말이라도 하면.
스릉-
맑은 검명을 흘려 답하기도 했다.
[수집물]. 즉 백색 아우라를 가진 명품이 75퍼센트 이상 길들면, 완숙 단계에 이른다. 그리고 완숙 단계에 이른 물건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특히 나에게, 반응하기 시작한다.
태양을 따라 고개를 돌리는 꽃처럼. 맹목적으로 어미를 따르는 아기 오리처럼. 의지랄 것도 없는 반사적인 반응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주변 세계와 통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작은 기적.
고장 난 줄 알았던 물건이 결정적인 순간에 제 기능을 한다든가.
평소에 아끼던 물건이 총알을 막아 준다거나.
때로는 더 큰 기적으로 이어지는 작은 기적의 발현이었다.
청하. 이 작은 과도에는 미약하나마 기적이 깃들었다.
나는 녀석을 잘 손질해서 허리춤에 매단 가죽 주머니에 꽂았다.
그리고 백색 아우라가 61퍼센트 정도 차오른 능숙 단계의 악몽사슬을 잘 닦아 왼쪽 팔뚝에 감았다. 가늘지만 질긴 사슬. 영력을 살짝만 불어넣어도 우우웅! 울며 팔뚝을 강하게 조인다.
푸드득-
그리고 등 뒤로 떠오르는 네필림의 날개. 이건 훌륭한 마도구였지만, 애석하게도 [수집물]은 아니었다. 아우라가 없는 물건. 내 것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내 것이 될 수 없는 영혼 없는 물건, 그저 [습득물].
지구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수집물]이 타키넷에서는 의외로 찾기 힘들다. 기계문명이 발달할수록 뛰어난 수공예품을 찾기 어려운 것과 비슷했다.
[수집물]이 아닌 건 아쉽지만 네필림의 날개는 그 자체로 강력한 마도구. 그 자체로도 무궁무진한 활용이 가능했다.
“하지만 역시 진짜는 이거지.”
두께 10cm에 길이 7m. 한 손에 채 잡히지도 않는 창을 쥐었다. 아니 쥐었다기보다는 들어 올렸다는 표현이 옳다. 도무지 사람이 다룰 수 없는 크기니까.
‘거인창’
판매처인 한성사에서 부르던 이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다루기는 어려울지언정 그 효용은 확실했다.
‘한 번의 찌르기만큼은 내 한계를 훌쩍 뛰어넘을 수 있다.’
거인창에 타오르는 백색의 아우라는 고작 10퍼센트를 넘긴 수준으로, 적응 단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자신한다. 이 정도로도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이룬 적 없는 관통력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일격만큼은!
스르륵-
거인창을 창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김민수는 이 창을 한성사社에서 4,700만 원에 사고 심지어 공간 왜곡 술식이 걸려 있는 주머니까지 사은품으로 얻어 냈다. 덕분에 7미터의 창을 2m 수준의 주머니에 집어넣고 어깨에 걸 수 있었다.
꾹!
물론 공짜 물건인 만큼 창 주머니가 거인창의 무지막지한 무게까지 줄여 주지는 않았다. 나는 무겁게 처지는 어깨끈을 손으로 꾹 쥐고 길을 나섰다.
이제는 데미안 루드비히가 기다리는 전장으로 향할 때였다.
* * *
영웅.
그들은 삶의 허망함을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왕씨의 고려가 무너지면 그 땅은 이씨의 조선이 차지한다.
록펠러가 죽으면 그가 남긴 재산은 다른 이들이 쓴다.
역사에 기록될 위대한 과업을 이룩하더라도, 결국 그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었다.
허무하다. 하지만 허무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내가 이룬 걸 다른 이의 손에 전해 주어야 했다.
기껏 이루어 낸 모든 것이 땅에 묻히고 그 찬란했던 이름조차 영영 잊혀지는 것보다는, 누군가가 누리고 나를 기억해 주는 게 더 의미 있으니까.
그렇기에 영웅들은 자신을 희생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이룬 위대한 일들을 기억해 주고 고마워해 주는 사람들이 남아 있기를, 인류가 멸망하지 않기를 바랐다.
사람으로서 태어나 겪은 모든 사랑과 이별이… 끝을 맞이하지 않길 바랐다. 그 이 갈리고 눈물 젖던 순간들이 다 사라지고 무너진 도시와 백골만 남는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없었으니까.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이기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 역시 삶의 허망함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인류’에 대한 정의가 영웅들과 달랐다. ‘인류’가 무엇인가? 그건 바로 나 자신이다. 나 자신과 가족들과 친구들이다. 그들이 대대손손 행복하게 잘 살고, 또 나를 기억해 주면 된다. 그 밖의 사람들? 솔직히 알 바 아니다.
때론 다른 사람 백 명을 희생시키더라도 내 가족 한 명을 위하는 것. 그들이 바로 가족이기주의였다.
루드비히 가문은 바로 가족이기주의의 궁극과도 같은 이들이었다.
그랬기에 루드비히 가문의 막내아들, 데미안 루드비히는 현재의 상황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분명 브레이크가 발생한 던전은 먼저 관리에 성공한 측이 관리 권한을 갖는 것이었죠?”
“…예. 하지만 저희가 실패하기 전까지는 등록하지 못하십니다. 도련님에게까지 기회가 돌아갈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모르는 거니까요. 안 그래요?”
던전 공무원은 데미안이 소름이 끼쳤다.
‘이게 열네 살짜리라고?’
던전 관리의 실패는 막대한 인명 피해를 의미했다. 그런데도 데미안은 그 실패를 바라고 있었다. 가문의 던전 관리 팀이 도착해 상황을 정리하면, 던전 하나의 부산물을 독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브레이크가 발생했는데도 피신을 하지 않고 붉게 물든 게이트를 주시하고 있는 데미안. 던전 공무원은 이 소년이 시체를 탐하는 독수리처럼 소름 끼쳤다.
‘역시… 루드비히 가문이 한국 땅에 뿌리를 내리게 두면 안 돼.’
공공의 안보와 이익보다는 자기 가족의 이득을 먼저 생각하는 루드비히 가문. 공무원은 그들에 대한 희미한 경멸을 담은 채, 말했다.
“이곳은 한국 정부가 관리하는 던전입니다. 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가시 돋힌 어조에 데미안 루드비히는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였다.
“음- 글쎄요?”
데미안이 턱짓으로 가리킨 곳에서는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헌터가 하나 보였다.
‘미친…….’
던전 공무원의 등줄기로 식은땀 한 방울이 서늘하게 흘러내렸다.
‘무슨 괴물이 장판파 흉내를 내고 있어?’
불규칙 던전이었다. 전조 징후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발생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브레이크가 일어났다. 그 밖에도 여러가지로 기상천외했다.
‘괴물이 맞기는 해? 불규칙 던전이 특이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건…….’
던전 공무원은 게이트 앞을 막아서고 있는 괴물을 보았다.
치이이익- 푸후우우-
증기 빠지는 소리가 요란했고, 위이잉-! 하는 모터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3미터가 넘는 체고를 따라 푸르고 노란빛이 LED 패널처럼 번뜩였다.
방패와 검을 든 강철 거인. 위화감이 드는 이상한 움직임. 그리고 무엇보다도 괴물의 등 뒤에서 게이트까지 이어지는 이루어진 두꺼운 줄은 아무리 봐도 전력선 같았다. 그건 괴물이라기보다는 로봇 같은 생김새였다. 그 로봇이 게이트로 통하는 좁은 길을 가로막은 채 버티고 서 있었다.
‘대체 저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괴물은 외양만 이상한 게 아니었다. 행동도 이상했다.
브레이크라는 건,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괴물들이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고 학살을 자행하는 사건을 말한다. 그런데 반대로 게이트를 지키는 괴물이라니?
‘대체 왜?’
덕분에 던전 공략만 늦어지고 있었다. 브레이크가 발생한 던전은 반드시 소멸해야만 했고, 던전을 소멸하려면 게이트 안으로 진입해서 던전 코어를 파괴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 하나뿐인 입구를 저 괴물이 막아서고 있으니, 길은 좁아 여럿이서 합공하기도 어려웠고 달려든 헌터들은 하나씩 격파당했다.
괴물의 위용은 홀로 대군을 멈춰 세운 장판파의 장비 그 자체였다.
‘그런데 대체 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를 할 수가 없으니 대책도 내지 못했다. 던전 공무원은 속으로 같은 질문만 반복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루드비히 가문의 막내아들, 데미안 루드비히가 상황을 지켜보다가 흐음~ 하는 콧소리를 흘렸다다.
“아까보다 더 빨라졌어. 확실해요. 저건 진화형 괴물이네요.”
던전 공무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진화형 괴물이요?”
“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지는 괴물입니다. 마지막 발견일은 지금으로부터 673일 전, 중국. 초기 진압에 실패해서 5만 명 규모의 소도시가 날아가고 200명이 넘는 프로 헌터들이 전사한 끝에 막을 수 있었죠. 완전히 강해지기 전에 힘의 원천인 던전을 소멸해야 합니다.”
“그, 그런……! 그런 게 있습니까? 사실입니까?”
“뭐… 대부분은 그런 괴물이 있다는 걸 모르겠지만… 루드비히가家에서는 일곱 살만 돼도 배우는 사실이죠.”
“……!”
그 말을 듣고서야 던전 공무원은 왜 괴물이 게이트 앞을 지키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동시에 경악했다.
‘놈은 자신이 강해질 시간을 벌고 있었던 거야!’
이런 말도 안 되는 괴물이 있다니?
대체 얼마나 강해지길래 소도시가 날아가고 200명이 넘는 헌터가 전사한다는 말인가?
던전 공무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곧바로 상부에 현재 상황을 보고했다.
다행히 답변이 금방 돌아왔다.
-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1류 헌터에게 요청을 보냈네. 하지만 30분은 걸릴 것 같군. 주변 통제에 힘쓰고 있게.
상부의 회신을 받은 던전 공무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30분. 불안하기는 하지만 일단 1류 헌터가 오기만 하면 그사이에 저 괴물이 얼마나 더 강해졌든 상황을 해결해 줄 것이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괴물과 싸우고 있던 헌터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미친… 여기서 더 강해진다고?”
“시발, 중국에선 200명이 죽었다잖아.”
“어차피 30분 뒤에는 1류 헌터가 온다며? 빼자, 빼.”
게이트를 감싸고 있던 헌터들이 뒤로 물러섰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던전 공무원이 소리 지르자 헌터들은 불퉁하게 맞받아쳤다.
“아니, 1류 헌터가 온다면서요. 저희는 임무 포기하렵니다.”
“지금도 미친 듯이 강한데 점점 더 강해진다면서요. 여기서 목숨 거는 건 수지가 맞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하나둘 임무를 포기하는 헌터들이었다. 던전 공무원은 황당했지만 딱히 저들을 막아설 명분도 없었다. 애초에 저들로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 1류 헌터의 지원을 요청한 것이 아니던가?
그렇게 마지막 헌터까지 임무를 포기하는 순간, 여태까지 조용히 있던 데미안 루드비히가 한 걸음 나섰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1류 헌터가 도착하는 30분 후까지는… 강화도 던전 브레이크 관리 임무를 맡고 있는 헌터가 한 명도 없는 것 확실하죠?”
그 말을 듣는 순간, 던전 공무원은 또다시 깨달았다. 데미안이 왜 굳이 목소리를 높여 진화형 괴물에 관한 정보를 알려 줬는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멍청했는지.
“그러면… 현시점에서 정부는 강화도 던전 브레이크 관리에 실패했습니다. 다음 순번인 정부 소속 1류 헌터가 도착할 때까지는 루드비히 가문이 임시 관리 주체로 등록하겠습니다.”
던전 공무원의 얼굴은 까맣게 죽었고, 반면에 데미안 루드비히의 얼굴엔 이 상황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 그려졌다.
“그… 직접 나서시려고요?”
던전 공무원이 물었다. 데미안 루드비히는 아직 어려서 모른다고 해도 그의 호위가 가진 무력을 생각하면 장비 흉내를 내는 저 로봇 괴물 쯤은 순식간에 정리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제 호위는 그저 저를 지키고 가끔 조언을 할 뿐 아직 제 명령을 따르진 않아요.”
루드비히가 하얗게 웃으며, 자리를 떠나려는 헌터들을 향해 소리쳤다.
“자, 그러니까! 누구든 저 괴물을 죽이는 헌터에게는 루드비히의 실버 멤버십을 드리겠습니다.”
하루 일당을 공쳤다면서 떠나던 사람들이 못 박힌 듯 제자리에 멈춰 섰다.
루드비히의 실버 멤버십!
그건 세계적인 가문인 루드비히 가문을 후원자로 둔다는 의미였다.
무수한 혜택이 있었지만, 설령 그 혜택을 포기하고 멤버십을 반납해도 루드비히 가문으로부터 30억 원을 보상 받을 수 있는 값진 자리였다.
30억이란, 이곳에 모인 고만고만한 헌터들 입장에서는 평생을 벌어도 모으기 어려운 돈.
목숨을 걸어 볼 가치가 있었다.
“씨발… 인생 한 방이지!”
호기로운 외침과 함께 헌터들이 다시 게이트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래… 인생 한 방이지.”
나도 그들 사이에서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