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타키넷
첫째,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제 가격을 받고 물건을 팔아야 해.
둘째, 내가 지시한 일들을 철저히 완수해서 네 가치를 증명해야 돼.
셋째, 항상 뒤통수를 조심해야 돼. 잠잘 때, 모퉁이를 돌 때는 특히 더 조심하고.
타키넷에서, 나는 까막이에게 이 세 가지를 가르쳤다.
* * *
내가 강해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만상공감]의 올바른 사용법은 무엇일까?
첫째는 아이템이고, 둘째는 좋은 아이템이고, 셋째는 더 좋은 아이템이다.
나는 최치국 같은 괴물들과는 달랐다.
맨몸으로도 강한 그들과 달리 나는 맨몸으로는 결코 강해질 수 없었다.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내가 타고난 영능 지배력 자체가 형편없기 때문에 아무리 영력이 상승해도 대마법이나 강기 같은 고차원적인 능력은 발휘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대신에 나는 [만상공감]을 사용해 장비를 강화하고 장비가 가진 특성을 그 한계 이상으로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했다.
내게 쓰레기 같은 무기가 주어진다면, 나는 그저 쓰레기보다 조금 나은 솜씨를 보일 뿐이지만.
만약 내게 명품 무기가 주어진다면, 나는 그걸 통해 대마법과 검강마저 뛰어넘는 이적을 보일 수 있다.
그러니까 필요한 건 아이템, 아이템, 오직 아이템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타키온을 구해 타키넷에 접속한 것이다.
‘현재 타키온은 열세 알이 남았다. 그중에서 두 알은 교통비로 남겨 두어야 하니… 쓸 수 있는 것은 열한 알.’
타키온은 차원과 차원을 넘나드는 힘을 가진 물질이자 세계수의 비료였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황금.
타키온은 말하자면 황금이었다. 지구 어디에서나 황금의 가치가 인정되듯이, 차원 문명 어디에서나 타키온의 가치가 인정된다. 차원 문명들의 공용 화폐. 그게 바로 타키온이었다.
‘이걸 가지고… 타키넷에서의 첫 번째 거래를 시작한다.’
타키넷은 차원 문명들 간의 교류를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든 차원 간의 중간 지대, 수많은 차원에서 몰려든 존재가 활발하게 거래하는 자유 시장이었다.
이곳에서 아주 작은 거래라도 성공할 수 있다면 나는 크게 도약할 수 있다. 타키넷은 지구의 발전 수준을 아득히 상회하는 차원 문명들이 모이는 장소. 지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이 대단한 아이템들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서 11알의 타키온으로 가장 효율이 좋은 아이템을 구매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아직 저 아래 시궁창에 가까웠다. 고작 타키온 두 알과 세계수의 묘목으로 올 수 있는 곳은 타키넷 안에서도 가장 허름한 빈민가에 불과했으니까.
꿀꺽.
나를 따라 걷던 까막이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침을 삼켰다. 킬러로 키워진 소년조차도 긴장을 감추지 못하는 이곳은 타키넷의 최외곽이었다.
비유하자면 불법체류자들이 모여 사는 뒷골목 우범지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이들이 모여 사는 거대한 고시원. 반 평짜리 방에서 윙윙윙 끝도 없이 돌아가는 환풍기, 고장 난 조명, 쓰레기통을 뒤지는 유기견, 바퀴벌레… 나와 까막이 지나는 거리가 딱 그런 곳이었다.
좁고 어둡고 축축한 골목이었다. 그 양옆으로는 크고 작은 출입문들이 황당한 위치에 달려 있다. 어디는 쥐구멍처럼 작게 바닥에 붙어 있고 어디는 비행기 격납고처럼 커다란 문이 저 까마득히 높은 곳에 달려 있다. 출입구만큼이나 다양한 크기의 창문이 군데군데 뚫려 있는데, 그 안에서는 책도 못 읽을 정도로 침침한 불빛들이 흐릿하게 흘러나오고 있다. 중간중간 정체를 알 수 없는 외계 생명체들이 쥐새끼처럼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다.
골목은 좁고 텅 비어 있는데, 걷다보면 방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지 방문과 창문 너머에서 음침한 언어들이 들려오고는 했다.
- 빌어먹을… 하루 종일 일했는데 고작 타키온 여섯 알이라고?
-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 황금의 인챈터라 불리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 어제는 7지역 쪽이 무너졌다지? 내 방은 괜찮은 걸까… 젠장, 이런 거지 같은 방에서 하루 자는 데 타키온 두 알이면서… 정작 차원 불안정 현상이 나타나면 나몰라라군.
- 이 새끼야! 허가 받지 않은 곳에서 능력 쓰지 말라고! 어제 통로 하나 통째로 무너진 것 몰라?
- 그냥 라이트 마법 하나 썼을 뿐이라고!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어떻게 살란 말야?
- 이 새끼가? 안 되겠다. 너 좀 맞자. 어디 능력 쓰기만 해 봐라. 다진 고기로 만들어 줄 테니까.
생전 처음 듣는 이상한 언어였지만, 그 의미는 저절로 머릿속에 쏙쏙 박혔다. 최초에 타키넷을 만들어 냈던 위대한 존재들이 남긴 고대 마법의 효과였다.
옆에서 따라오는 까막이를 슬쩍 돌아보았다. 녀석의 눈매가 날카로워져 있었다. 괴물들의 으르렁거림처럼 들리거나 사악한 요정들의 저주처럼 들리는 낯선 언어들이, 저절로 통역되어 귀에 쏙쏙 박히는 괴현상에도 녀석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주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이를 악물 뿐이었다. 다만 긴장을 했는지 마누스를 끌어 올리려는 것 같길래 말했다.
“여기선 마누스 쓰지 마. 쓰는 순간 모두의 적이 된다. 꼭 써야 한다면 초능력만 써.”
괜히 겁주는 말이 아니었다. 타키넷은 환상 차원이고, 이곳은 그 안에서도 최외곽이었다. 차원의 불안정성이 극도로 높은 지역. 영력을 잘못 썼다가는 차원 붕괴가 일어나 일대가 통째로 박살 날 수도 있었다. 마누스는 영력의 원시적인 운용법. 만약 그런 걸 사용한다면, 예민하기 그지없는 이곳의 주민들에게 붙잡혀 순식간에 곤죽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을 까막이에게는 내 요청이 터무니없이 들릴 수도 있었다. 사방이 위협으로 가득한데 마누스를 쓰지 말라니? 그건 모기가 귓가에서 앵앵거려도 가만히 미동도 하지 말고 참으라는 말과도 같을 것이다.
“네.”
하지만 녀석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마누스를 억누른 채 이 낯설고 이상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애쓸 뿐.
고작 중학생 나이면서, 눈치도 빠르고 정신력도 강했다.
‘킬러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 라는 건가?’
앞뒤 분간 못 하고 나한테 덤비던 모습만 생각하고 걱정했는데… 죽다 살아나서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인지 아니면 원래 자기가 약하다 싶으며 저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기꺼운 일이었다. 생각보다 잘해 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가 생겼다.
그렇게 나는 녀석에게 타키넷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일단은 이곳, 빈민가를 다니다 보면 반드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위협과 기회에 대한 것부터 시작했다.
“저기 앞에 모퉁이 보이지?”
“네.”
“저런 곳에는 손님들이 있으니까 인사를 잘해야 돼. 잘 봐.”
나는 까막이보다 슬쩍 앞서 걸어가 모퉁이를 돌았다.
[만상공감]으로 미리 느꼈던 대로 그곳에서는 손님이 기척을 죽이고 나를 노리고 있었다.
손님에게는 인사를 해 주는 게 인지상정.
나는 모퉁이를 도는 순간 번개처럼 청하를 꺼내 앞으로 찔렀다.
“흡!”
파드드득!
깜짝 놀라는 소리와 함께 나를 노리던 사내의 등 뒤로 투명한 날개 같은 것이 생겨났다. 가벼운 날갯짓 한 번에 그의 몸이 쏜살처럼 뒤로 밀려났다. 그 신속한 움직임에 청하는 애꿎은 허공을 때렸을 뿐이다.
‘오, 좋은 물건인데?’
엄청난 반응속도에 관성을 무시하는 듯한 빠른 움직임까지. 나는 사내의 등 뒤로 사라지는 투명한 날개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검은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사내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청하를 겨누고 정다운 인사말을 건넸다.
“미간이 답답해? 바람구멍 뚫어 줄까?”
내 상큼한 인사에 감동했는지, 상대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쳇. 초짜가 아니었잖아?”
사내는 후드를 눌러쓴 채로 싸울 생각 없다는 듯 두 손을 위로 들어 보이고는 뒷걸음질 쳤다.
흔하디흔한 풍경이었다. 만만해 보이면 기습하고 노상강도질을 하는 건 여기서는 그냥 인사 같은 거였다. 원한을 가질 일도 아니었다. 놈의 기습은 내 [만상공감]에 걸려서 무산이 됐고, 놈을 역으로 노린 내 기습적인 일격 역시 놈의 빠른 기동력을 넘지 못하고 무산됐다. 그러면 거기서 끝이다. 차원의 불안정 현상 때문에 마음껏 힘을 쓸 수도 없는 곳에서 목숨을 걸고 생사결을 벌일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녀석을 그냥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기껏 인사를 나눴으면 사업 이야기도 나누고 그래야 하지 않겠어?
“자, 인사하는 법은 보여 줬으니까 이번에는 거래하는 법을 알려 줄게.”
까막이의 귀에 빠르게 속삭여 주고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어이, 타키온 필요해?”
그러자 후드의 사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시발. 그게 안 필요한 사람도 있나?”
“그럼 쓸 만한 물건 가지고 있어? 있으면 살게.”
“…타키온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데?”
방어적으로 대답하는 사내를 보며 나는 까막이의 귀에 다시 속삭였다.
“너는 저러면 안 돼. 사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물건을 보여 줘. 저렇게 싸가지 없게 굴지 말고.”
까막이는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고, 후드를 쓴 사내는 성질을 내며 말했다.
“어이, 다 들리거든?”
“들리라고 하는 소리지. 타키온이 필요하면 쓸 만한 물건이 뭐가 있는지 그쪽에서 먼저 제시하는 게 기본 아니야?”
“큭…….”
사내는 기분이 상한 듯했지만, 정말 타키온이 필요한지 더 이상 군말을 붙이지 않고 자신이 팔 수 있는 물건들을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다시 까막이에게 속삭였다. 이번엔 후드 사내가 못 들을 정도로 작게.
“운이 좋은 거야. 저렇게 물건부터 보여 주는 건 정말 타키온이 급하다는 거거든.”
그러자 까막이가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까는 먼저 보여 주라고 하셨는데, 어느 쪽이 우선이죠?”
“그건 쟤 들으라고 했던 소리지. 너는 저렇게 냉큼 보여 주면 안 돼. 내 패를 먼저 까기 전에 상대가 먼저 패를 까게 만들어.”
“네.”
정말로 알아듣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답은 꼬박꼬박 잘하는 까막이었다.
나는 녀석을 바라보다가 한 가지 당부를 덧붙였다.
“그리고 어떤 보물이 나오더라도 놀라지 마. 그런 것쯤 열 개는 있다는 듯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
여기는 타키넷이었다. 저렇게 허름한 양아치 같은 사내도 보물 한두 개쯤은 품고 다니는 세상.
까막이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사내가 말했다.
“이건 재생 물약이다. 잘린 지 수십 년이 지난 팔다리도 다시 돋아나게 만든다.”
훌륭한 물건이었다. 지구로 가져가면 못해도 천만 원 이상을 받고 팔 수 있을 만큼. 슬쩍 까막이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녀석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짜식, 잘하네.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뭐야?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것 말고 좀 특별한 것 없어?”
내 한마디에 후드 사내는 크게 당황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확신했다.
‘초짜는 오히려 저쪽이었네. 여기 온 지 한 달도 안 된 거 같은데?’
아마 저 물약은 사내의 세상에서도 꽤나 알아주는 보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저렇게 자신 있게 꺼냈겠지. 하지만 여기는 타키넷이었다. 차원을 넘나드는 날고 기는 문명들이 모이는 장소. 재생 물약 정도는 동네 슈퍼마켓에서도 살 수 있는 문명에서 온 인물들도 허다했다. 저런 물건이 먹힐 리 없다.
“크흠… 음. 그럼 이건 어때? 우리 세상의 속성 부여 실력은 타키넷에서도 능히 상급에 속한다고 자부한다.”
그렇게 말하며 사내는 푸르른 물약이 든 병을 꺼냈다.
“이 물약을 무기에 바르면, 무기에 번개 속성을 부여할 수 있다. 영력을 부어 충전할 수 있고… 번개를 충전한 채로 한 번 찌르면 열 명의 적을 통구이로 만들 수 있을 거다.”
이번에는 꽤 흥미가 동하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심드렁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말했다.
“한번 감정해도 되나?”
“…그런 것도 할 줄 알았나? 뭐 좋아. 대신 건네주지는 않아. 내가 들고 있는 상태에서 확인해라.”
“오케이.”
나는 천천히 다가가 물약병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감정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만상공감]은 그야말로 물아일체가 되어 ‘모든 것’을 느끼게 해 주는 물건이니까.
만져 보니 물약의 효능은 사내가 설명한 그대로였다. 탐이 나는 물건이었다.
‘번개 속성 부여라… 이런 게 있으면 전력을 크게 강화할 수 있다.’
계획을 많이 앞당길 수 있는 좋은 물건이었다. 하지만…….
‘이미 더 좋은 물건을 봐 버렸다는 말이지.’
나는 슬며시 지어지는 미소를 지루한 하품으로 위장하고는 사내를 바라봤다.
“이런 것 말고. 너, 정말 이런 게 팔릴 거라고 생각한 거면 타키넷을 너무 우습게 본 거야.”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번개 속성의 물약을 품에 집어넣으며 답했다.
“거래할 생각이 있긴 해? 싫으면 됐다. 꺼져라.”
“아니, 그거나 보여 줘.”
“뭐 말이냐.”
“네 날개.”
사내가 크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파는 거 아니다.”
타협의 여지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단호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