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세계수의 묘목
싸르르-
작은 진주알 같은 것이 황금빛을 뿜으며 손바닥 위를 굴렀다. 조그마한 것들이 작은 손바닥 위를 굴러가는데 파도치는 듯 신비한 소리와 빛무리가 일어난다.
최치국이 가져간 것이 130알 정도. 내가 몰래 챙긴 것은 20알.
바로 타키온이었다.
차원을 넘나드는 힘을 지닌 신비한 물질.
나는 타키온을 주머니에 잘 갈무리하고 한 알만 꺼내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황금빛 알 속에 보이는 것은 우주와 같다. 만화경처럼 계속 변해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고, 오래 바라보면 물속에 빠져드는 것처럼 홀려 버린다..
나는 오랜만에 즐겨 보는 타키온의 아름다움에 심취해 이리저리 타키온을 돌려 보았다.
기웃- 기웃-
그런데 연두색의 잎사귀가 내 손짓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슬쩍 시선을 던지니 옆구리에 끼고 있는 세계수의 떡잎이다.
“이거?”
타키온을 든 손을 오른쪽으로 쭉 빼니 연두색 떡잎이 내 손을 따라 스르르 움직인다.
“아니면 이쪽?”
왼쪽으로 옮기니 또 사르륵 따라온다.
세계수의 떡잎은 타키온에 완전히 홀려 버린 것처럼 이리저리 춤을 췄다. [만상공감]으로 느껴지는 감각도 단 하나뿐이다. ‘타키온’.
피식-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럴 만도 하지. 아홉 개의 세계에 뿌리와 가지를 뻗는다는 세계수에게 있어서 차원을 넘나드는 힘을 가진 타키온은 가장 이상적인 비료였다. 한참 자라야 하는 떡잎에게는 먹을 게 가장 중요한 법이다.
“지 먹을 건 귀신같이 알아요.”
나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세계수의 화분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청하에 영력을 담아 화분을 살짝 내리쳤다.
쩌엉-!
맑은 울림과 함께 단단하던 화분이 쩍 갈라지고 그 안에 담긴 흙이 드러났다. 나는 세계수의 떡잎을 흙 째로 조심히 떠냈다.
브븟-
브브브-
세계수의 떡잎이 겁난다는 듯이 몸을 떨어 댔다.
“괜찮아. 여기에 뿌리를 딱 내리는 순간, 아, 여기가 내 집이구나 싶을 거니까.”
세계수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비료 그리고 뿌리를 내리기에 적합한 공간, 이 두 가지 모두가 필요했다. 비료는 타키온이면 차고 넘쳤지만 ‘공간’은 조금 어려웠다. 지난 생에 세계수가 그토록 귀했던 이유는, 그 가치를 몰라서 버려진 씨앗이 많아 그런 것도 있었지만 기껏 자리를 잡은 뒤에도 자라지 못하고 고사된 나무가 너무 많았던 탓도 있었다.
브븟-!
브브…….
이 조그만 녀석이 불안해하는 건 당연했다. 내가 잘못된 곳에 녀석을 심으면 손도 못 써 보고 죽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진짜 걱정할 필요 없다. 내 [만상공감]은 이런 면에서 사기적인 능력을 발휘하니까. 세계수와 세계수가 뿌리내릴 공간을 동시에 교감하다 보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가장 이상적인 환경을 발견해 낼 수 있다. 거기가 바로 여기였다.
“나를 만난 걸 다행으로 여겨. 여기처럼 딱 궁합 맞고 심지어 비어 있기까지 한 던전이 흔한 줄 아냐?”
원래라면 5년 뒤에 발견되어야 할 인왕산 공백 던전을 내가 먼저 발견했다.
공백 던전. 던전이기는 하지만 괴물도 없이 텅 비어 있는 던전을 말했다. 별다른 징조도 없고 그저 조용하기 때문에 보통 오랜 시간 동안 발견되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은 공백 던전의 코어 앞이었다.
코어는 흰빛의 부드러운 구체로 허공에 둥실 떠 있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을 자는 짐승처럼 작게 부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사실 이건 일종의 난파물이지.’
지구는 해변과 같다. 해변 위로는 부서지고 깨진 채 바다를 떠돌던 것들이 이따금 밀려온다. 그중에는 제법 쓸 만한 것들도 있는데, 공백 던전과 그것을 지탱하는 코어 역시 그런 것이었다. 아직 우리 지구인 대다수가 모르고 있는 이 세상의 비밀.
뭐, 아무튼.
이제 드디어 그간 들인 고생의 보답을 얻을 차례였다. 회귀한 이후 지금까지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달려왔다.
“자, 이제 여기에 뿌리를 내리는 거야.”
나는 드디어, 공백 던전의 코어 위에 세계수의 떡잎을 얹었다.
브븟-!
천 년 동안 잠만 자다가 기지개를 켜면 이런 기분일까? 떡잎의 가느다란 뿌리가 한 가닥 한 가닥 기지개를 켰다. 뿌리 끝까지 활력과 에너지가 시원하게 뻗어 나간다. [만상공감]을 통해 내 척추를 타고 짜릿하게 펴져 나가는 상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부우웅- 부웅-!
던전의 코어는 새하얗게 부풀고 세계수의 떡잎은 그 사이사이로 뿌리를 뻗는다.
“자, 밥 먹어.”
때가 무르익었을 때, 나는 떡잎 위에 타키온 한 알을 떨어뜨렸다. 구슬과 같던 타키온이 떡잎에 닿는 순간 이슬처럼 녹았고, 잎을 타고 또옥- 떨어져서 던전 코어에 닿는 순간에는 스펀지 위에 떨어뜨린 물방울처럼 순식간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두 알.
세 알.
총 다섯 알을 떨어뜨렸을 때.
드디어 기다리던 변화가 시작되었다.
바아앗-!
휘이이이-!
떡잎이 진동을 하고 곧이어 바람이 불었다. 던전 코어는 점점 더 새하얗게 빛났고, 세계수의 떡잎은 그 빛 속에서 그저 검은 실루엣으로만 보였다.
그 실루엣이 점점 자라났다. 떡잎을 열고 줄기가 솟구친다. 키가 점점 자라더니 가느다란 가지가 뻗는다. 가지 끝에서 잎사귀가 열린다.
마침내 새하얀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세계수의 묘목을 볼 수 있었다. 손가락만 한 떡잎에 불과했던 녀석이 지금은 허벅지 높이까지 올 것 같은 묘목이 되었다.
휘오오오오-
저절로 생성된 바람이 녀석의 잎사귀를 흔들며 소리를 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휘오-
바람과 함께 녀석이 가지 하나를 뻗어 내 손가락을 붙잡았다. 고마워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고마워하는 정도가 아니다… 이 감각은…….
‘어미를 보는 새끼 오리 같네.’
서민서나 좋아하지 나는 무슨 동네 형 보듯 하던 녀석이 오늘은 꽤나 뭉클하게 굴고 있었다.
당연히 싫지 않다. 그래서 나도 충동적으로 말했다.
“네 이름은 휘오야.”
휘오오오-?
녀석의 잎사귀를 타고 흐르는 바람소리가 휘오- 휘오오 하는 게 꼭 애기 옹알이처럼 들렸다.
“응. 휘오.”
휘오오오오~
바람을 따라 여린 나뭇잎들이 흔들린다.
알아들은 건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뻐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 * *
비밀이 하나 있다.
사실 지구는 원시적이다.
지난 생에는 마흔일곱을 넘기고서야 겨우 이 비밀을 알았다. 놀랍게도 지구에선 이걸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나는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에, 또한 내 초능력이 그만큼 독특했기 때문에 이 비밀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이 사실을 주위에 알렸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지랄. 네가 그걸 어떻게 알어?’
고작 2류 헌터에 불과했던… 아니지, 당시에는 겨우 3류 헌터였던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대단한 사람들도 그런 소리를 안 하는데 네가 무슨 수로 그런 걸 알아냈냐는 거다.
하지만 아무리 핀잔을 들어도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내 말이 맞으니까. 닭의 모가지를 비튼다고 새벽이 안 오는 건 아니다. 어떻게 확신하냐고? 그야 아주 구체적이고 반박 불가능한 증거를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타키넷.
우리 지구인들은 세계수를 통해 타키넷의 변두리에 접속을 하고서도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어쩔 수 없다. 그만큼 미개했으니까.
1800년대의 조선 사람이 유럽 한복판에 떨어진다면? 귀신에 홀린 것처럼 당황하고 혼란에 빠질 것이다. 숨기에 바쁠 것이고, 다가오는 푸른 눈의 도깨비들을 경계하기에 급급하겠지. 그런데 심지어 그 정도 차이도 아니었다. 선사시대의 원시인이 21세기의 뉴욕 맨해튼에 나타난 꼴이었다.
소통과 교류는커녕 상황 파악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 다행히 나에겐 [만상공감]이 있었다. 나는 미개한 원시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 가진 위대한 문명을 알아볼 뛰어난 감각이 있었고, 그들과 공감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원시인 주제에 센스가 있었던 셈이다. 그 덕택에 ‘교류’가 가능했다.
그렇게 나는 보았다.
‘영능학’이라는 관점에서, 다른 차원의 문명들이 얼마나 진보해 있는지.
반면에 우리 인류는 얼마나 미개한지.
똑똑히 보고 듣고 통감했다.
그랬기에, 인생을 다시 사는 지금, 나는 한시라도 빨리 타키넷에 접속해야만 했다.
이게 그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세계수와 타키온을 우선 확보해야 했던 이유다.
“휘오.”
휘오-?
“잘할 수 있지?”
휘오오오-!
묘목이 된 세계수에게는 차원과 차원을 연결하는 능력이 생긴다. 그것은 세계수의 본능이자 본질. 내가 허락하고 지지해 주자, 휘오는 기꺼이 차원의 경계 너머로 가지를 펼쳤다. 처음으로 날아 보는 새처럼 조심스러웠지만, 망설임 또한 없었다. 휘오는 계속 가지를 뻗었고, 그렇게 무턱대고 가지를 뻗어 나가다 보면 반드시 닿고야 말게 되는 곳에 닿고 말았다.
브르르-
휘오의 가지가 떨리더니 잎사귀 하나가 떨어졌다. 나는 얼른 그 연둣빛 잎사귀를 잡았다. 잎사귀에는 잎맥 대신에 고차원의 마법진처럼 아주 복잡한 문양이 지폐에 찍힌 홀로그램처럼 빛나고 있었다. 맞다. 제대로 찾았다. 이게 있으면 타키넷에 접속할 수 있다.
“잘했어, 휘오.”
나는 옆에 내려놓았던 보디색을 어깨에 걸쳤다. 소년 킬러 까막이는 미동도 없이 그 안에 구겨져 있다. 어차피 듣지 못할 테지만 나는 녀석에게 속삭였다.
“만약 살아남는다면… 넌 인마, 정말 운이 좋은 거야.”
그리고 숨을 골랐다. 아직 남아 있는 열다섯 알의 타키온 중 두 알을 꺼내 잎사귀 위에 떨어뜨렸다. 세계수의 잎사귀가 티켓이라면, 이것은 통행료.
황금색의 타키온이 잎사귀에 녹아서 흡수되는 순간.
파아아앗-!
거대한 황금색 게이트가 눈앞에 나타나 우리를 집어삼켰다.
그렇게.
지난 생에 비하면 20년은 더 빠르게.
나는 타키넷에 접속했다.
* * *
쿨럭… 쿨럭쿨럭.
어디선가 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 파도 같은 게 밀려와 몸을 한 번 뒤집은 것 같았다.
쿨럭! 쿨럭… 쿨럭.
‘누가 죽어 가네. 은살 선배가 일하고 있나?’
무심결에 그렇게 생각을 하는 순간, 까막은 목에서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어떤 떡대가 가슴팍을 누르고 앉아서 눈을 틀어쥔 것처럼, 눈꺼풀은 너무 무겁고 가슴은 답답했다.
쿨럭! 쿨럭! 쿨럭!
그제서야 까막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이 기침이 바로 자기 자신이 내고 있는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쿨럭!
‘시발… 뭐야, 이게.’
일어나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저 아팠다. 너무나 아팠다.
“죽기 싫으면 3초 내로 일어나. 농담 아니야.”
그때 무심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까막은 벌떡 일어났다. 자신도 놀랄 반응속도였다. 분명히 못 일어날 줄 알았는데, 몸은 저절로 목소리에 반응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뇌리를 스치는 생각.
‘아… 또 훈련이야?’
그가 10살 때 잡혀 들어갔던 킬러 회사. 까막은 그곳에서 정말 지독하게 훈련을 받았다. 그래서 훈련이라고만 생각하면 이렇게 못 일어날 몸으로도 벌떡벌떡 일어날 수 있었다.
그 모습에 감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반응 좋고. 생각보다 쓸 만한데?”
그제야 까막은 무거운 눈을 뜨고 흐릿한 시야 사이로 주변을 살폈다. 어둡고 컴컴하고 축축한 곳이었다. 선배들이 일을 하고 나간 작업실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어렴풋이 자기 앞에 선 사람의 얼굴이 들어왔다.
“…어?”
선배가 아니었다. 회사 사람도 아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어?!”
아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갑자기 모든 게 떠올랐다. 눈앞에 있는 남자, 자신을 죽인 남자다.
“어어?”
까막은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아니다. 자신은 죽지 않았다. 여기저기 욱신거리고 아프긴 하지만, 팔다리도 멀쩡하게 붙어 있고 살아 있었다. 문득 바닥을 굴러다니는 포션병이 보였다. 날 치유해 줬어? 왜지? 저거 비싼 건데… 여기는 어디일까? 치료해 놓고 고문하려는 건가? 그건 싫은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후회인지 억울함인지, 두려움과 긴장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슴이 아려 왔다.
멍하게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니 그가 말했다.
“딱 한 번만 설명한다. 여기는 타키넷, 차원과 차원 사이에 존재하는 환상의 차원이다. 그냥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하면 돼. 앞으로 너는 여기서 지내면서 내 심부름을 할 거야. 내 말을 따라. 그러면 살아남을 수 있어.”
까막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상황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상황 파악이 아니었다. 먹잇감인 줄 알고 덤볐던 상대가 알고 보니 무서운 사람이었다. 무서운 사람의 말은 이해가 안 돼도 일단 따르고 봐야 한다. 그래야 안 아프다.
그러자 무서운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장서면서 말했다.
“내 이름은 소시민이다.”
까막은 얼른 그 뒤에 따라붙으며 대답했다. 이 사람에게는 잘 보여야 한다.
“네, 소시민 선배.”
“네 선배는 아니고.”
“네, 소시민 님.”
“…간지러운데.”
“네, 형.”
“뭔가 좀…….”
무서운 사람은 투덜거리면서 어둡고 축축한 통로를 걸었다. 까막은 아픈 몸으로 악착같이 그 뒤를 따라붙으며 생각했다.
어쨌든 살아서 다행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