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6화 (16/212)

16. 타키온

30년 전이라 그런지, 헌터들의 감수성이 말랑말랑한 것 같다. 고작(?) 이 정도 잔혹함을 가지고… 크흠.

아무튼 이제는 마무리를 할 시점이다.

놈은 아직 죽지 않았다. 죽기는커녕, 여전히 같은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아무리 괴물이라지만 거기를 썰리고도 주저앉지 않다니… 대전사다운 기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놈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닫아 두었던 [만상공감]을 살짝 개방했다.

‘……!’

그 즉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 지난 다음일 텐데도 끔찍한 감각이 온몸을 기어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이걸로도 안 되는구나.”

놈은 여전히 강건했다. 온몸의 근육에서 맥이 조금 풀리긴 했지만, 여전히 나를 찢어 죽일 능력과 의도가 충만했다. 격렬하게 뛰는 심장. 불길처럼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발작성 분노.

하지만 아직 완전히 정신을 차리진 못했다. 자, 이제 마지막 기회다. 나는 부지런히 도망쳐서 서민서 근처로 돌아왔다. 물론 대전사의 허리에 감아 둔 악몽사슬을 손에 꼭 쥔 채로였다.

“최대 거리로.”

“아, 알겠어요……!”

서민서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점멸]을 시도했다. 그것도 그냥 [점멸]이 아니었다.

끼리리리릭-!

서민서의 손을 잡는 순간, 사방의 공간이 흔들렸다. 오크 대전사의 허리춤과 연결된 악몽사슬이 끊어질 듯 비틀리는 소리를 냈다. [점멸]은 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민서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집중 또 집중하며 [점멸]을 섬세하게 조절했다.

쿵!

쿠웅-!

우리가 또 [점멸]을 쓴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일까? 우뚝 서 있던 오크 대전사가 우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쿵쿵쿵!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점점 더 빨리 달려왔다. 놈이 푸른 입자를 광포하게 쏟아 내는 도끼를 치켜들었다. 저 도끼를 이용한 돌진 공격은 신속 그 자체, 단 한 걸음이면 놈에게 잡힐 수도 있었다. 다행히 그보다 먼저, 서민서가 [점멸]에 성공했다. 시야가 종잇장처럼 구겨지더니 휘릭-! 공간을 넘었다.

나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왼쪽 팔뚝에 감아 둔 악몽사슬에 영력을 퍼부었다.

키리리릭!

찌이이잉-!

공간을 넘는 순간, 악몽사슬이 찢어질 듯 비틀렸다. 사슬을 감아 둔 왼팔이 뜯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여기서 문제.

내 왼팔과 오크 대전사의 허리가 악몽사슬로 연결된 상태에서 나만 [점멸]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소설에서처럼 악몽사슬이 뚝 잘려 나가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물질은 기본적으로 공간의 비틀림에 저항한다. 비틀리는 공간을 따라 악몽사슬은 나와 서민서를 따라 ‘늘어났다.’

끼리리리리-!

물론 탄성 범위 이상으로 늘어나는 바람에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비명을 질러 댔지만, 괜찮다. 나는 영력을 퍼부어 악몽사슬의 특성을 강화했다. 정식 명칭은 ‘하피의 악몽’. 절벽 지형에서 하피의 날카로운 발톱에도 견디기 위해 제작된 사슬이다. ‘질긴 내구성’이라는 특성이 영력으로 한 차례 더 강화되자 공간의 비틀림을 견디기에 충분할 정도로 단단해졌다!

그러면 남는 건 뭘까?

공간의 비틀림 탓에 한계 이상으로 늘어난 악몽사슬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 위해 보여 주는 말도 안 되는 탄성뿐이다.

파아아앙-!

오크 대전사가 내게 빨려 들었다. 원래라면 몸무게 차이 때문에 내가 끌려들어야 마땅했지만, 공간을 비튼 주체가 이쪽에 있기 때문에 이런 황당한 그림이 나올 수 있었다.

이건 지난 생의 내가 만들어 낸 기술이었다.

그냥 칼을 죽죽 긋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하는 1류 이상의 헌터들에게는 필요 없겠지만, 저마다 하나씩 약점이 있는 우리 2류 헌터들은 때론 이렇게 힘을 합쳐 강력한 적을 물리치곤 했다.

나는 청하를 쥐고 무서운 속도로 빨려 들어오는 오크의 얼굴을 노렸다.

‘이겼다.’

이만한 속도가 받쳐 준다면, 내 힘으로도 청하를 검자루까지 박아 넣을 수 있다. 심장을 터뜨리든, 투구를 뚫고 머리를 박살 내든, 확실히 놈을 끝장낼 수 있다. 물론 충돌의 여파로 나도 크게 다치겠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중요한 건, 회귀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이 시점에, 내가 벌써 D급 던전의 네임드를… 그것도 오파츠를 가져서 사실상 C급 네임드나 다름없는 녀석을 고꾸라뜨린다는 것이다. 내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제대로 성장한다면, [만상공감]은 충분히 사기급 능력이 될 수 있었다.

‘이번 생의 나는, 엑스트라로 살 필요가 없어.’

누군가의 총알받이로 싸울 필요 없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도, 그래도 세상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증거가 바로 오크 대전사의 목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청하를 쥔 손에 힘을 더하는 순간.

서컥!

갑자기 내 앞을 가리며 나타난 소년이 검을 휘둘렀다.

빠르게 날아들던 오크가 그 검격에 두 동강이 났다. 상체는 오른쪽으로, 하체는 왼쪽으로, 우리의 양옆으로 갈라졌다.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한 방울도 우리에게는 닿지 않았다.

‘스틸……!’

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돌아보는 최치국의 얼굴이 그만큼 살벌했기 때문이다.

“그대로 부딪쳤다가는 죽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달리는 차를 맨몸으로 받아내 고도 무사할 수 있는 건, 최소 2류 헌터부터니까요. 당신은… 그렇게 튼튼해 보이진 않습니다.”

말투는 공손하고 나를 걱정하는 투인데, 눈동자는 강철처럼 딱딱하고 차가웠다. 천천히 나를 탐색하는 눈동자. 입가엔 문질러 닦은 붉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내가 <회격>을 방해하는 바람에 지금껏 누워 있어야 했을 테니, 얼마나 화가 났을까. 그건 이해를 하는데…….

‘와… 너무 살벌하네.’

나도 나름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데도… 아찔했다. 이 순간만큼은 눈앞의 최치국이 영웅이 아닌 희대의 살인마 같았다.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는 인생 끝장난다!’

나는 순간적으로 스치는 직감을 따랐다. 얼른 고개를 숙였다.

“하… 감사합니다. 오크 놈하고 같이 죽을 각오였는데… 덕분에 살았습니다.”

나보다 어린 그에게 깊숙이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이렇게 해야 내가 일부러 회격을 방해했다는 의심을 피할 것 아닌가?

최치국은 그런 나를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물었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셨죠?”

“소시민입니다.”

최치국의 눈동자가 잠시 위를 향했다가 내려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못 들어 본 이름인데…….’ 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나를 노려보다가 결국 한숨으로 깊은 분노를 몰아내며 말했다.

“소시민 씨.”

“네?”

“…마지막 [점멸]의 활용은 꽤 괜찮았습니다.”

최치국이 내 어깨를 툭 짚고 지나갔다. 고작 16세 소년이 윗사람처럼 그러는 게 남들 보기엔 웃길지 몰라도, 전생의 최치국을 알고 있는 나는 바짝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쪽팔리게도… 영광스러운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수거 팀은 오크 대전사 사체와 소지물을 모두 아공간 가방에 넣으세요. 하나도 빼먹으면 안 됩니다. 자, 그럼 이제 최단 거리로 뚫고 귀환합니다.”

결국 이번 싸움의 주인공은 최치국이었다. 내 결투에 환호하던 헌터들도 모두 최치국을 따라 장내를 정리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귀환하는 길에는 힘 좋은 헌터인 장흑소가 선두에 섰다. 나와 최치국은 거의 나서지 않았다. 그나 나나 힘을 많이 썼다. 나는 영력이 거의 바닥을 보였고 최치국의 마누스도 많이 소진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던전 공무원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빠른 귀환은 일반적으로 좋지 않은 사건을 의미했으니까.

“혹시 무슨 사고라도 있었던 겁니까?”

공무원 하나가 다가와 물었다. 긴장한 목소리였다.

나선 건 장흑소였다. 그가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띠고 말했다.

“하핫! 우리가 오크 대전사를 토벌했다 이겁니다! 아, 뭣들 해요! 빨리 전리품들 보여 드립시다!”

장흑소가 재촉하자 아공간 가방에 던전 부산물들을 담아 나온 헌터 하나가 아공간 가방을 거꾸로 뒤집었다.

쿵!

우르르르-!

D급 던전 입장 시에 빌릴 수 있는 아공간 주머니로는 모든 사체를 담아 올 수 없었다. 주로 오크들의 뱃가죽이나 오크들이 쓰던 장비들 중에서 묘한 광택을 가진 금속 재질들로 된 것들만 추려서 두서없이 담아 온 상태였다.

하지만 그 잡동사니들 중에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오, 오크 대전사……!”

2미터 가까이 되는 거대한 체구, 무슨 SF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도끼 그리고 범상치 않은 광택을 가진 까만 가죽 갑옷.

던전 공무원들이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우르르 몰려드는 와중에 장흑소가 말했다.

“자세한 건 마누스 수정에 찍어 봐야 나오겠지만… 내가 볼 때 1순위는 저쪽 도련님이고 2순위는 여기 과도 든 미친 놈. 3순위는 그 옆의 다 죽어 가는 아가씨 되시겠소. 그리고 우리 보수는 따블, 아니지 따따블로 뛰는 거고. 흐흐”

장흑소는 낄낄 웃으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바통 터치라도 하듯 최치국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한 걸음 걸어 나왔다. 단지 걸었을 뿐인데도 모두의 시선이 그를 따라갔다.

모두의 주목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간 최치국이 마누스 수정 위에 손을 올리자, 수정 위로 공헌도가 주르르 떠올랐다.

“마, 맞습니다. 오크 서른다섯 마리 토벌과 오크 대전사 토벌 제1기여자. 확인했습니다.”

던전 공무원이 확인을 해 주기 무섭게, 최치국은 오크 대전사에게 다가가 놈의 소지품을 하나하나 해체하기 시작했다.

쿵!

도끼를 한쪽에 던져 놓고.

털썩!

갑옷을 다른 한쪽에 떨어뜨려 놓은 후, 갑옷 속에 숨겨져 있던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좌르르륵-!

내용물을 꺼내 보니,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진주알 같은 것이 한 움큼 흘러 나왔다. 최치국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타키온.’

그의 입이 중얼거리는 게 보였다.

다시 고개를 든 최치국이 말했다.

“나는 이 도끼랑 이 주머니 하나면 돼요. 시체랑 갑옷 그리고 그 밖의 부산물들은 2순위자와 3순위자가 나눠 가지세요.”

그렇게 말하고 쿨하게 떠나려고 하는 최치국이었다. 워낙 1순위자의 권한이 큰 만큼 얼핏 보면 합리적으로 보이는 배분이었다.

하지만 검웅님, 아무리 그래도 그걸 그런 식으로 계산하면 안 되죠.

나는 얼른 앞으로 나섰다.

“잠깐만요. 그 주머니에 든 건 희귀 표본 같은데요?”

“무슨 말인지?”

세상에 믿을 놈이 하나도 없다.

그 위대한 영웅조차도 이득 앞에선 이렇게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입을 싹 씻으니 원.

“아까 목숨을 구해 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그래도 계산은 똑바로 해야 합니다. 저도 목숨을 건 만큼 그 오크에 대한 지분이 있으니까요.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그 주머니, 비싼 겁니다. 희귀 표본은 연구 기관 쪽에 팔면 부르는 게 값이거든요.”

웃으며 다가갔더니, 최치국이 나를 쏘아보았다.

“그래 봤자 고작 한 줌밖에 안 되는 표본의 가치가 얼마나 된다고…….”

“에이. 제가 연구 기관 쪽 거래처를 잘 알아요. 이런 물질은 완전 처음 보는 건데… 아주 비싸게 팔 수 있습니다. 정 그러면 그 주머니만 저 주십시오. 그거 하나 받고 제 루팅 권리 다 포기하겠습니다.”

손을 뻗자 최치국이 주머니를 뒤로 숨겼다. 눈빛에 의심이 어렸다.

“바라는 게 뭡니까?”

나는 입맛을 다셨다. 바라는 거? 사실 그 주머니 안에 든 타키온이다. 여기 있는 전리품을 모조리 합쳐도 저 타키온의 가치를 따라갈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최치국 역시 그 사실을 알겠지. 최치국은 절대 저 주머니를 내놓지 않을 거고… 내가 너무 압박하면 오히려 날 의심할 것이다. 현시점에는 타키온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을 거니까. 비싸게 팔 수 있는 연구 기관이 어딘가 있기는 하겠지만… 나는 그런 곳을 몰랐다. 그러니까 이건 가격을 높이기 위한 일종의 허장성세였다.

그래서 나는 한발 물러섰다. 끝까지 타키온을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뭐, 그 주머니를 꼭 챙기시겠다면 저도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적어도 도끼는 놓고 가시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저는 그 주머니에 든 물건을 진짜 비싸게 팔 수 있거든요. 그 주머니도 가져가시고 도끼도 가져가시면… 이건 수지가 너무 맞지 않습니다.”

어후… 또 노려보시네. 심장이 너무 떨려서 시선을 살짝 피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최치국은 지금 외통수였다.

그에겐 타키온이 꼭 필요하다. 내가 그 가격을 얼마나 높이든 무조건 사야 하는 입장이었다.

최치국이 나를 무섭게 노려보다가 중얼거렸다.

내 청력으로는 들을 수 없는, 이를 악물고 입속으로만 중얼거리는 혼잣말.

하지만, 나의 [만상공감]은 목을 간질이는 그 미세한 감각을 잡아냈다.

‘원래 이게 이맘때였나……? 이게 그렇게 비싸게 팔렸었나? 젠장… 회귀 비용 때문에…….’

이게 무슨 말이지?

회귀 비용……?

뭔가 있다. 머리를 팽팽 굴리고 있는데, 쿵! 소리와 함께 오크 대전사의 도끼가 땅에 떨어졌다.

최치국이 손을 탁 털었다.

“좋습니다. 도끼는 포기합니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슬쩍 가슴 안주머니에 몰래 챙겨 둔 오크 대전사의 쌈지를 툭, 쳐 보았다. 작은 진주알 같은 것이 손에 잡혔다. 그것 역시 타키온이다.

쌈지. 쌈짓돈.

아까 놈의 사타구니를 잘랐을 때 흘러나온 것이다. 오크들이 중요한 물건을 사타구니 가리개에 보관한다는 사실을 알고 보험 삼아 노려 봤는데… 타키온을 담아 둔 쌈지라니. 제대로 걸렸다. 물론 최치국이 가져간 양만큼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당장 쓸 만큼은 된다. 거기에 도끼와 갑옷까지 치면…….

“와. 대박…….”

서민서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글쎄? 그 말대로 대박인지까진 모르겠지만.

“얻을 건 다 얻었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질 정도는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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