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결투
‘잠시 누워 계십쇼.’
피를 토하는 최치국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검웅이라고 해도 저 정도 데미지면 잠시 동안은 몸을 추슬러야 할 것이다.
‘죄송합니다.’
존경하던 영웅이었던 만큼 양심이 살살 아팠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 두려운 발록을 꺾은 기술, 회격을 준비하는 것을 보니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당신들 회귀엔, 내 공헌도 없지 않으니 좀 봐줘요.’
2류 헌터로서 회귀가 성공할 때까지 바벨의 탑을 사수하지 않았는가? 비록 먼지에 붙은 먼지만 한 크기의 공헌일 테지만… 없지는 않다. 그리고 당신들이라면, 타키온 정도는 다른 곳에서 얻어도 되잖아?
그렇게 죄책감을 털어 버리고 눈앞의 오크에게 집중했다.
크르르-
오크 대전사는 정말 분노했는지 두 눈에서 검붉은 광망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점토로 주무른 듯한 놈의 얼굴이 분노로 더 일그러지자 더 꼴불견이다.
‘…예상보다도 더 빠르고 단단해.’
원래 방급 기습으로 끝내려고 했다. 하지만 놈은 그 찰나의 순간에 몸을 비틀었다. 목덜미를 찌르려던 칼날은 목덜미를 스치고 놈의 어깨에 박혔다.
그래. 피한 건 그렇다고 치자. 근데 영력을 잔뜩 먹여서 강화한 청하가 어깨 보호구를 꿰뚫지 못하고 반만 살짝 꽂혔다? 그건 좀 충격이었다.
<회격>이 [굴절]이라는 초능력을 이용한 최치국의 특수기라면, <특성 강화>는 [만상공감]을 이용한 나의 특수기다. 나는 도구가 가진 특성을 강화할 수 있었다.
사과 깎기, 사과 쪼개기, 수박 뚫기 이 세 가지가 바로 청하의 강화된 특성이었다.
과도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인 만큼, 강화했을 때의 위력은 강철도 사과 다루듯이 해야 옳았다.
그런데 그게 막혔다…….
‘갑옷도 오파츠란 소리네. 못생긴 오크가 생각보다 부자야.’
오크 대전사를 잡아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기는 순간이었다. 저놈 장비들을 팔면 그게 다 얼마야?
크하아아아-!
내 눈빛이 기분이 나빴을까? 오크 대전사가 포효를 터뜨렸다. 기백으로 나를 짓누르려는 듯, 거대한 몸을 일으키고 붉게 달아오른 도끼를 치켜들었다.
나는 놈을 마주 보며 호기롭게 외쳤다.
“서민서!”
“흐읍!”
내 옆에서 오들오들 떨던 서민서가 나를 붙잡고 [점멸]을 썼다. 휙! 눈 앞의 풍경이 뒤바뀌고.
콰아아앙-!
발아래서 폭음과 함께 푸르른 입자가 휘날렸다. 오크 대전사의 도끼가 굉음을 토하며 울어 대고 있었다.
‘진짜 말도 안 되는 공격 속도에 파괴력에…….’
간담이 서늘했다. 서민서의 [점멸]이 아니었다면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 여덟 번 남았지?”
“아뇨. 이런 식으로 뛰면 여섯 번… 벌써 속이 메슥거려요. 근데 되겠어요? 칼이 안 박히는 것 다 봤는데.”
“일단은 급소들을 노려 봐야지. 그래도 안되면… 플랜 B로 가자.”
“예에? 진짜요? 흐… 자신 없는데……!”
인정할 건 인정하자.
[만상공감]의 잠재력이 어떻든, 어쨌든 당장 내가 낼 수 있는 힘은 16세의 최치국이 휘두르는 [굴절]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그래. 누가 뭐래도 최치국은 검 한 자루로 나라를 구한 영웅인데, 당연한 거지.
하지만 괜찮다.
‘혼자 안 되면 둘이 하면 되니까!’
[만상공감]을 최대로 발휘했다.
느껴졌다. 오크 대전사의 근육 한 올 한 올이. 관절 한 마디 한 마디가, 놈이 쥐고 있는 흉악하게 날뛰는 도끼까지도. 녀석의 모든 것이 내 감각에 잡혀 든다.
[만상공감]. 그리고 공간을 뛰어넘는 [점멸] 이 두 가지 초능력이 있는 한, 내가 두려워할 것은 없었다.
* * *
헌터들은 오크 대전사와 나의 결투를 넋을 빼고 구경했다.
“와… 미친. 저걸 또 피하네.”
“적이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아는 것 같지 않아?”
최치국이 싸울 때보다도 더 열띤 반응들이었다. 당연하다. 최치국의 싸움은 굉장했지만, 대신 현실감은 떨어졌다.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소년이 오파츠 도끼를 떡떡 막아 대는 모습을 보면 그냥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에 반해 내 싸움은 이곳의 헌터들이 이해할 만한 수준에서 이루어졌다. 자신들과 비교했을 때 오히려 떨어지는 신체 스펙으로 무시무시한 괴물을 상대해 내고 있으니 손에 땀을 쥐고 콧김을 뿜게 되는 것이다.
“근데 무기를 다루는 기량이 진짜 말도 안 되네. 단순 스탯은 나만도 못한 것 같은데 그걸 기량으로 다 커버한다.”
“이게 컨트롤이라는 건가?”
그게 [만상공감]이다. 상대의 감각을 느껴 빈틈을 찾아내고, 가지고 있는 무기의 특성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그 빈틈을 완벽하게 공략한다.
지금은 청하와 악몽사슬뿐이지만, 좋은 무기를 많이 가질수록, 내 전투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것이다.
촤르르륵-!
악몽사슬이 날아가 오크 대전사의 도끼를 감았다. 도끼가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폭발하듯 덮쳐 오지만, 내가 더 빨랐다. 악몽사슬을 수축시키며 만들어 낸 탄성을 이용해 한발 먼저 오크 대전사의 옆구리로 날아들어 갈 수 있었다. 훅-! 끼치는 노린내와 함께, 놈이 입고 있는 가죽 갑옷의 겨드랑이 이음매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 작은 틈새를 청하가 사과 껍질을 발라내듯 가볍게 가르고 나왔다.
끼릭-!
청하를 거두는 순간 피가 찍! 튀어나왔다. 하지만 얕았다.
‘망할… 갑옷 틈새를 노렸는데도 손아귀가 뻐근하네.’
과연 오파츠 갑옷다운 단단함이었고 빌어먹게도 단단한 몸뚱어리였다. 일각사슴의 가죽으로 덧댄 손잡이가 충격을 흡수해 주지 않았다면 내 손바닥이 찢겼을 수도 있다.
크워어어억!
피를 본 오크 대전사가 광분했다. 등골이 쭈뼛, 소름이 올라왔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고 모든 힘이 도끼에 집중되어 땅을 향해…….
‘광역 공격이다!’
판단이 서는 순간, 주저할 시간은 없었다.
“서민서! 놈의 뒤통수로!”
“으아아악!”
서민서는 비명을 지르며 [점멸]로 다가와 [점멸]로 나를 옮겨 놓았다. 휙! 눈앞의 풍경이 바뀐다.
꽈과과광!
빨갛게 달아오른 도끼가 땅에 처박히는 순간, 붉은 기파가 파도처럼 전면을 휩쓸었다. 계속 놈의 앞에 있었다면, 어디로 피하든 맞을 수밖에 없었던 공격. 하지만 우리는 이미 놈의 뒤통수 쪽으로 [점멸]해 이동한 뒤였다. 뼈로 만든 투구를 쓰고 있는 놈의 머리통이 눈앞에 있었다.
한 번 더 생긴 공격 찬스.
‘투구는 뚫기 어려워. 노릴 곳은 목덜미뿐이다. 하지만 목 앞쪽과 뒤쪽에 보호대가 있으니… 트여 있는 양옆을 노린다.’
판단은 섬전처럼 이루어졌고, 행동은 쏜살과 같았다.
파아악-!
첫 번째 기습에 노렸던 목덜미를 다시 노렸다. 오크 대전사도 이번엔 막아 내지 못했다. 방금 막 큰 기술을 쏟아 낸 상태였기 때문이다.
키리릭!
청하가 쇠를 찢는 소음을 내며 놈의 목덜미를 간신히 파고 들어갔다.
크라라아아아!
오크 대전사가 비명을 질렀다.
검붉은 피가 어깨로 콸콸 쏟아졌다.
제대로 걸렸다!
나조차도 잠시 그렇게 착각을 했다. 하지만 놈은 정말 괴물이었다.
‘사기 치지 마……!’
D급 던전에 있어선 안 되는 괴물. [만상공감]으로 느껴지는 놈의 상태는 여전히 강건했다. 목덜미가 뚫려 피를 그렇게 쏟아 내면서도, 그저 ‘숨 쉬기가 좀 불편해졌네.’ 뭐 이 정도의 감각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놈의 근육은 여전히 탱탱하고, 심장에서는 활력이 용솟음쳤다.
‘청하가 너무 짧은 것도 있다…….’
칼날 길이가 15cm밖에 안 되는 과도로는 두꺼운 근육과 살집을 가진 오크 대전사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어려웠다.
놈의 붉은 눈이 나를 바라봤다. 새벽 내내 잠들지 못하게 하는 모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럴까? 살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분노에 미쳐 버린 놈의 근육이 일제히 꿈틀대는 게 느껴졌다. 몸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경련이라도 일으키는 듯한 그 반응은 도무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서민서!”
“이이잇!”
파앙!
공간을 뒤흔들며 나타난 서민서가 내 어깨를 잡고 다시 공간을 넘었다. 우리가 사라진 자리로 오크 대전사의 도끼가 쏟아져 내렸다.
그건 정말… 쏟아져 내린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소나기 같고 산사태 같은 그런 도끼질이었다.
쐐애애앵-!
쿠르르릉!
1초 사이에 몇 번을 휘두른 걸까? 오크 대전사의 오파츠 도끼가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렸다. 그건 더 이상 도끼질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밤하늘을 갈가리 찢어 놓는 벼락처럼. 붉고 푸른 빛이 오크 대전사의 앞에 거미줄과도 같은 궤적을 남겼다.
“못 이겨.”
“그냥 장검 꼬마가 다시 일어날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어.”
“[점멸]이라… 희귀한 초능력 덕분에 근근이 버티고는 있지만… 저 여자애도 이제 한계 같은데?”
“아… 지금이라도 튀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헌터들이 떠드는 소리가 귀에서 웅웅 울렸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서민서가 한계 같아 보인다는 말은 신경이 쓰였다. 슬쩍 돌아보니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서민서가 보였다. 진짜네. 진짜 한계다. 아까 여섯 번 더 뛸 수 있다고 했는데 벌써 네 번을 뛰었구나. 서민서 본인의 전투력이 너무 떨어지다 보니 [점멸]의 낭비가 심했다. 나를 데리러 오느라 점멸, 같이 피하느라 점멸, 회피 한 번에 점멸을 두 번이나 썼으니까.
하지만… 이미 기호지세다. 여기서 물러서면 아무것도 안 된다.
나를 믿는다.
그리고 서민서를 믿는다.
녀석이라면 버텨 줄 거다. 항상 그랬던 녀석이니까.
“민서, 정신 차려. 마지막이다. 타이밍 잘 맞춰. 일단은 살짝만 뛴다.”
“후욱… 옙.”
이젠 비명을 지를 힘도 없는지 신물을 삼키며 대답하는 서민서였다.
그 대답을 들으며 나는 악몽사슬을 던졌다.
촤르륵!
물뱀처럼 날쌔게 날아가는 닌자 갈고리. 하지만 오크 대전사는 눈에서 붉은 광망을 번뜩이며 도끼를 치켜들었다. 도끼가 폭발하듯 달아올랐다. 악몽사슬을 통째로 깨뜨려 버릴 작정인 것 같았다.
크하아아아!
우렁찬 울부짖음이 꼭 ‘내가 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할 줄 아느냐!’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같은 수법일 리가.
“민서!”
휘릭-!
시점이 살짝 바뀌었다. 멀리 뛰지 않았다. 우측으로 살짝 [점멸]했을 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미 날아가고 있던 악몽사슬이 함께 [점멸]하며 궤도가 바뀌었다. 악몽사슬을 박살 내려던 도끼는 애꿎은 땅만 박살 냈고, 악몽사슬은 아무런 방해도 없이 오크 대전사의 다리 한쪽을 휘감았다.
피이잉-!
영력을 주입하자 악몽사슬이 쫀쫀하게 수축되었다. 나는 훌쩍 날아가 오크 대전사의 기둥 같은 두 다리 사이로 파고들 수 있었다.
놈의 사타구니 아래쪽에선 시큼한 냄새가 났다. 내 머리 위로 사타구니 가리개가 늘어져 있고 그 안에는 냄새나는 것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갑옷으로 가려지지 않은 곳이다.
‘후우… 심호흡하고.’
일단 [만상공감]을 해제했다.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에서 그 감각의 편린이라도 내게 전달되어선 곤란했다. 원한다면 통증 정도는 적당히 필터링 할 수 있는 게 [만상공감]이지만… 아무튼 안 된다. 물리적으로 아프지 않아도 정신적으로도 치명적일 테니까.
그리고 또 할 일이 있었다.
‘청하야, 미안.’
내 아끼는 과도에게 미리 사죄한 나는 하얀 오라가 이글거리는 청하를 머리 위로 들었다. 목에 구멍을 뚫었는데도 통하지 않는다면?
‘거기는 어떠냐!’
청하가 독한 궤적을 그린다.
사타구니 가리개가 종잇장처럼 갈라지고, 이윽고 나는 사과를 따듯, 덜렁거리는 그것을 따 버렸다.
……!
비명은 없었다. 놈은 돌처럼 굳었다. 더러운 피와 함께 사타구니에 숨겨 둔 놈의 쌈지 하나가 후득 떨어졌다.
나는 잽싸게 쌈지를 챙기고 놈이 굳어 있는 틈을 타서 다리에 감았던 악몽사슬을 풀어 놈의 몸통 쪽에 감아 두고 도망쳐 나왔다.
끄아아아-!
뒤늦게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만상공감]을 꺼 두길 정말 잘했다.
어흑! 어흐흐흐!
괴물처럼 으르렁거리기만 하던 놈에게서 꽤나 인간적인 비명이 나왔다. 마음이 아팠다.
“미… 미친.”
“아, 아무리 괴물이라지만…….”
“근데 저 괴물 제대로 열받은 것 같은데. 분노로 미쳤어.”
“미칠 만도 하지. 아… 씨… 괴물쪽에 감정이입을 해 보긴 처음인데.”
내가 오크 대전사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헌터들은 환호하지 않았다.
그저 엉거주춤 다리를 움츠리고 미묘하고 복잡한 표정으로 나와 오크 대전사를 돌아볼 뿐이었다.
아, 뭐 어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