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리딩
“뭐, 뭐죠, 갑자기?”
갑자기 튀어나와 무리를 이끄는 네 명의 헌터. 서민서는 엉겁결에 그들을 따라 뛰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딩이라는 거야.”
“리딩?”
“그래. 무리 전투에서는 진로를 결정할 사람이 필요하니까.”
“아… 저 사람들이 뭐, 대장 같은 건가? 던전 공무원이 정해 줬어요?”
“아냐. 리딩은 누구나 할 수 있어.”
“예?”
헌터는 군인이 아니다. 국민개병제라는 제도하에 모두가 국방의 의무를 나눠 지는 세상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초능력자들이 자유와 인권을 제한당하는 군인이 된 건 아니다. 상명하복의 군대와 달리 헌터들 사이에선 다소 자유롭고 느슨한 지휘 체계가 생겨났다. 그게 바로 ‘리딩’이다.
온라인 게임에서 랜덤으로 매칭된 플레이어들이 자유롭게 오더를 내리는 것과 비슷했다. 다수의 헌터가 협력해서 싸워야 할 때면 누군가가 나서서 리딩을 했고, 헌터들은 자율적인 판단하에 그 리딩을 따르거나 거부했다.
기존 군대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휘 체계가 엉망진창인 것이었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 보면, ‘리딩’이라는 체계는 꽤 훌륭하게 작동했다. 던전공략으로 먹고사는 프로 헌터들이 모인 만큼 그들은 리딩의 합리성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캐치 했고, 처음 보는 사이에도 눈빛만으로도 누구의 리딩을 수용할지, 그 리딩을 어디까지 따를지 빠르게 정하고 제법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심지어 이곳은 오래된 던전으로 일명 ‘고인물’의 비중이 높은 곳. 서른 명의 헌터는 정예 군대 뺨을 치는 훌륭한 돌격을 보여 주었다.
“전방에 오크 100마리! 목표는 돌파!”
“오크 무리는 찢어야 제 맛이지!”
제일 앞에 나선 헌터가 기세 좋게 소리를 질렀다. 생긴 건 그냥 머리 벗겨진 아저씨인데, 손에는 자기 상체만큼 커다란 도끼를 들고 오크 무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쩌어엉! 쇠가 쇠를 찢는 소리가 귀를 따갑게 때리고 나면 오크의 뜯겨진 상체가 허공을 날았다.
이 순간은 그가 리더였다. 훌륭한 돌파력을 보여 주는 그가 리딩하는 대로, 헌터 무리는 진로를 잡고 오크들의 대열을 헤집었다.
“따라붙어! 따라붙어!”
“앞에 빨리 가라, 새끼들아!”
“야! 그냥 냅다 달리지 말고 옆에 오크들 밀어! 공간 확보하라고!”
“야이 씨벌 놈들아! 지금 내가 두 놈 닦는 것 안 보이냐! 뒤 놈들 뭐하냐? 따라붙어야지!”
모두가 독전관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욕설을 퍼부어 가며 어쨌든 자기 몫을 해내고 있었다. 혹은 최소한 자기가 한 사람 몫은 하고 있다고 다른 헌터들에게 인정을 받아 내고 있거나.
하지만 그 안에 나와 서민서의 몫은 없었다.
“비켜! 걸리적거리지 말고!”
갑자기 우리를 밀치고 지나가는 건 양반이었다.
힐끗.
그냥 한 번 돌아보고 무시해 버리는 놈이 태반이었다.
그건 아주 큰 문제였다.
고작 서른 명으로 백 마리를 돌파하는 중인데, 아무도 백업을 해 주지 않는다? 낙오하고 고립되어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오크 던전에서의 전략은 어느 한쪽이 다 죽을 때까지 한자리에서 싸우는 소모전이 아니었다. 우월한 기량과 잘 짜여진 진형의 힘으로 빠르게 돌파하고 빠져나가는 기동전이었다. 일대일의 기량은 이쪽이 우위지만 그 차이가 절대적이진 않기 때문이었다. 헌터 하나에게 오크 두 마리만 붙어도 위험해진다. 낙오는 절대 금물. 서로가 서로의 뒤를 봐주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임무.
하지만 다른 헌터들은 나와 서민서를 철저히 무시했다.
만약 내 실력이 프로에 막 입문한 신입 정도였다면 정말 죽었을 것이다. 설령 나는 무사하더라도 서민서는 확실히 죽었겠지.
나는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서민서의 어깨를 짝! 소리 나게 때려 주었다.
“정신 바짝 차려. 지금 우리가 제일 후미야.”
돌격 대형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선두라면 그다음은 후미다.
선두에 밀려났던 오크들이 설욕을 위해 파도처럼 달려들었다. 놈들에게 발목을 잡히는 순간 죽는 것이다.
“지금부터, 최후미에서 최선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놓치지 마.”
그러곤 서민서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앞으로 달려들었다.
차르륵!
왼손에 감겨 있던 닌자 갈고리를 풀어 던졌다. 달려오는 오크의 다리를 감아 당기니 오크가 우당탕 넘어진다.
옳지! 손에 착착 감긴다. 별로 힘들지도 않았다. 눈꼽만 한 영력을 아껴 가며 효율적으로 싸워야 하는 내 입장에서, 악몽사슬을 구입한 건 역시나 신의 한 수였다.
“속도 늦추지 말고 목만 빠르게 찔러!”
촤아앗!
말하자마자, 검붉은 피가 튀어 올랐다. 나는 뒤를 흘깃 바라보았다. 서민서가 바싹 언 얼굴로 쓰러진 오크의 목에서 장검을 뽑아내며 내 뒤를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하여튼 이 녀석은 시켜 보면 일 참 잘한다니까.
시작이 좋았다.
영력 소모가 거의 없다시피 한 상태로 오크 하나를 처리하고 속도를 높였다.
우리가 빠르게 치고 나온 덕분에 바로 앞에 달리던 헌터와 나란히 서게 되었다. 그는 우리를 흘깃 바라보고는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새끼들아! 길 막지 말고……!”
“꾸우우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오크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오크의 머리는 돼지머리처럼 크고 살쪄 있다. 찰흙으로 주물러 놓은 것 같은 머리통이라 얼핏 이목구비와 살 주름이 구분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놈이 더러운 콧김을 뿜으며 달려들면 정말이지 기분이 나빴다. 그 손에 들린 녹슨 도끼를 휘두르면 더더욱 그렇고.
촤르르륵!
영력을 불어넣자 풀어헤쳐졌던 닌자 갈고리가 급속도로 수축하며 다시 내 팔뚝에 감겼다.
쩌어엉!
그대로 사슬이 감긴 팔을 휘둘러 오크의 도끼를 쳐 냈다. 큭! 반발력이 만만하진 않지만, 청하를 휘둘러 막을 때보다는 훨씬 편하다.
불똥이 팍! 튀어 올랐다가 흩어지고 자세가 무너진 오크의 상체가 보였다. 청하를 쥔 오른손에 힘이 들어간다.
콰직!
오크의 관자놀이를 뚫은 과도를, 찌를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뽑아내고 앞으로 넘어갔다.
“서민서! 그냥 따라오지 말고 오크들 움찔하게 계속 칼 휘둘러!”
“예, 옙!”
멈추지 않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욕설을 내뱉으려던 헌터가 멍한 눈으로 우리를 쫓으며 중얼거렸다.
“뭐, 뭐야? 방금 그거 뭐야? 닌자 갈고리가……? 과도로?”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애매한 그것을 무시하고 나는 곧장 달려서 그다음 헌터를 따라잡았다. 그는 막 오크의 도끼를 어깨 보호대로 받아 냈는데, 제대로 비껴 내지 못한 바람에 휘청거리는 중이었다. 나는 그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오크의 뒷목을 청하로 그었다. 목뼈가 갈린 오크가 헝겁 인형처럼 주저앉는다. 검붉은 피가 비산하며 무지개가 그려졌다. 위기에 몰렸다가 살아난 헌터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나는 그 눈에 대고 말했다.
“페이스 올린다. 바짝 붙어 따라와!”
이게 리딩이다.
내가 보여 준 기량에 그들은 내가 방어구도 없이 닌자 갈고리와 과도만 달랑 든 미친놈이란 것도 잊고 내 리딩을 따라 달렸다.
서민서까지 이제 세 명. 내 뒤를 따르는 자의 숫자였다.
“미친… 과도로 오크 통뼈를 갈라 버리네.”
“저거 닌자 갈고리 맞아? 헌터 협회에서 만든 신무기 아니야?”
앞으로 치고 나갈 때마다, 오크의 피를 더 많이 뒤집어쓸 때마다, 감탄과 함께 나를 따르는 이가 점점 많아졌다. 그러다가 나는 만났다.
“와씨… 저 새끼도 실력자였네.”
“그래도 저쪽은 인간적으로 싸우기라도 하네. 피 칠갑한 것 보소.”
“이쪽이 너무 수준이 높은 거라고. 어디 명문가의 도련님인가 본데…….”
“아나…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
내 솜씨를 보고도 내 리딩을 따르지 않는 무리.
그들은 여전히 다른 쪽에 한눈을 팔며 감탄을 계속했다.
“속도를 올립니다! 3분 내로 다음 무리 돌파합니다!”
그들의 앞에는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나처럼 방어구는 하나도 걸치지 않았고, 달랑 장검 하나만 들고 있었다.
나와의 차이라고 한다면… 나는 방어구를 살 돈이 없어서 방어구를 입지 않은 것이라면, 소년은 방어구 자체가 필요 없어 보인다는 점? 소년의 검이 지나가면 오크 한 마리가 바닥에 누웠지만, 소년의 옷자락에는 피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물 한 방울 튀기지 않고 설거지를 해내는 미슐랭 식당의 주방 보조처럼, 제대로 조련된 명문 엘리트의 향기가 물씬 느껴졌다.
* * *
뿌우-
뿌우우-
서른의 헌터가 오크 무리 속으로 뛰어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뿔피리가 울었다. 피에 젖은 오크가 힘껏 불어 젖힌 뿔피리 소리는 평원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오크 무리가 그 소리를 들었다. 뿔피리 소리를 따라 오크들의 진격이 시작되었다. 푸르른 평원 곳곳에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많은 오크가 모두 헌터들을 노렸다.
이래서 오크 던전에서의 싸움은 시간 싸움이라고들 말했다.
적들을 처음 마주치는 순간부터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오크 무리를 돌파하며 죽이고 적당히 임무 달성량을 채우고 나면, 바로 빠져나가야 한다. 그 시간이 조금이라도 늦어진다면? 발목이 붙잡혀 잠시라도 한 장소에서 지체된다면? 평원을 가득 메운 오크들에게 둘러싸여 한 끼 식사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오크 던전의 리딩에서는 두 가지가 중요했다. 적에게 둘러싸이지 않는 최적의 돌파로를 제시하는 노련함. 그리고 누구보다 빠르게 오크 무리를 돌파하는 무력. 이 두 가지는 비등비등하게 중요했지만 그중에서 더 중요한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그건 바로 후자인 무력이었다.
그게 바로 초능력 [괴력]을 가진 헌터, 장흑소가 열에 아홉은 여기서 리딩을 하는 이유였다.
“크하! 바로 이동한다! 이번엔 10시다!”
그가 도끼를 한 번 흔들면 그 튼튼한 오크도 두 동강이 났으니 거칠 게 없었다.
장흑소는 첫 번째 무리에 이어 두번째 무리까지 성공적으로 돌파해 냈다. 그는 이런 식으로 크게 반원을 그리는 형태로 돌파를 거듭하며 포위당할 일 없이 할당량을 채워서 게이트를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다 그렇게 계산을 해 놓고 10시 방향의 세 번째 무리를 지목했던 것이었을 테니… 우리가 그 리딩을 정면으로 거부했을 때는 참 황당했을 것이다.
“어?”
장흑소의 멍청한 얼굴이 순식간에 뒤로 멀어졌다. 잠시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소리쳤다.
“2시 방향을 친다!”
“3시 방향으로 갑니다!”
순간적으로 내 옆에서 나란히 달리던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닌자 갈고리와 과도로 빼어난 기량을 선보인 나. 그리고 D급 던전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엄청난 검술을 보여 주는 소년.
지금 무리의 최선두에는 우리 둘이 서 있었고 우리의 리딩은 미묘하게 엇갈렸다.
그 직후 나는 2시로, 소년은 3시로 찢어졌다.
찢어졌다고는 하나 목적지가 다른 건 아니었다. 다만 하나의 목표를 향해 좌우로 나뉘어 돌격할 뿐. 일명 쌈 싸 먹기다.
내 뒤를 따르는 헌터가 13명. 소년을 따르는 헌터가 13명. 장흑소를 따르던 무리가 총 4명.
장흑소 무리는 눈치를 보다가 내 쪽으로 붙었다. 헌터들이 나와 소년을 따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가 믿고 따를 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최전방에서 싸우던 장흑소는 우리의 실력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이쪽으로 가는 거야? 저쪽에 깃발 안 보여? 오크 대전사가 이끄는 무리라고! 죽고 싶어?!”
내 옆에 따라붙은 장흑소가 거친 숨소리를 뿜으며 나를 윽박질렀다.
나는 그를 흘깃 돌아봤다.
“그래서 가는 거야. 오크 대전사니까.”
장흑소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오크 대전사.
금천구 오크 던전의 임무 달성 기준은 한 사람당 10마리의 오크를 잡는 것 또는 오크 대전사 한 마리의 토벌이었다.
이때 주목할 점은 오크 대전사 한 마리만 잡아도 서른 명이 10마리씩 총 300마리의 오크를 잡은 것과 동일한 대우를 해 준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오크 대전사를 잡기는 어려웠다.
1년 동안 60회 이상 진행된 임무에도 불구하고 오크 대전사를 토벌한 횟수는 5번을 넘기지 않을 정도로.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친놈아! 이번엔 그냥 오크 대전사가 아니잖아? 그놈이잖아, 그놈! 미친 오크! 오기꾼!”
미친 오크 또는 오기꾼.
오크가 미쳤다. 너무 강하다. 오크가 사기 친다. 오크 사기꾼이다. 그래서 미친 오크고 오기꾼이었다.
이 무슨 저렴한 작명 센스인가 싶지만 원래 이쪽 판이 이런 식이니 그러려니 받아들인다.
아무튼 장흑소가 어이없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여섯 번째 오크 대전사는 유명했다.
놈은 다른 오크들과는 달리 아주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토벌을 시도한 많은 헌터가 목숨을 잃어야 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나는 놈을 잡아야 한다.
놈은 특별한 무기를 가지고 있고, ‘타키온’ 역시 가지고 있었으니까.
“갈고리랑 과도를 들고 오기꾼을 어떻게 이겨! 심지어 저쪽 얼라도 방어구 하나 없는데!”
장흑소가 거품을 물며 뒤를 돌아봤지만 다른 헌터들은 그에게 호응하지 않았다.
“과도든 갈고리든 싸움만 잘하면 됐지.”
“나대지 말고 말 들어. 한 달 치 벌이 오늘 하루에 다 하는 날이니까.”
“솔직히 이 과도 형씨만 있으면 모르겠는데, 저기 저 장검 꼬맹이는 진짜 장난 아녀.”
“나도 사실 저 장검 꼬맹이 믿고 돌격하는 거지. 저 꼬맹이면 무조건 잡는다.”
“그랬어? 그럼 왜 과도 형씨를 따르는 거야?”
“아무래도 장검 꼬맹이가 더 시선을 끌 것 아냐. 이쪽이 안전해.”
“맞지? 맞네.”
처음에는 장흑소를 타박 주는 듯했는데 어느 순간 나와 저쪽 소년을 비교하고 있었다.
자신은 신경도 쓰지 않는 분위기에 장흑소는 얼굴을 붉히며 물러섰고, 나는 대놓고 소년보다 못하다는 말들에 민망한 헛기침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속도를 더 높였다. 전면에 보이는 건 붉은색 기를 높이 치켜든 100마리 규모의 오크 전사 무리. 그 한가운데에는 다른 오크보다 머리가 두 개는 더 큰 오크 대전사가 있었다.
우리는 놈의 왼쪽 편을 노리고 우회하는 중이었고, 소년 쪽은 놈의 오른쪽 편을 노리고 우회하는 중이었다.
나도, 소년도 모두 오크 대전사를 노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불안감을 느꼈다.
‘장흑소 무리가 이쪽에 붙어서 17 대 13으로 우리가 숫자가 더 많기는 한데…….’
그런데도 어쩐지 저 소년이 오크 대전사를 처치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지. 저 소년이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다면 당연한 거겠지. 넋 놓고 있다가는 오크 대전사는 뺏길 거야.’
안 그래도 낯이 익다 싶었는데, 그 대단한 검술을 보고 반쯤 확신했기 때문이다.
‘검웅劍雄 최치국.’
검 한 자루로 일국의 멸망을 막은 영웅. 지금으로부터 20년 뒤에 이순신 장군만큼이나 유명해지는 사람이었다.
‘당신도 타키온을 노리는 겁니까?’
나보다 다섯 살은 어린 사람인데도 마음속으로조차 쉽게 말을 놓을 수 없었다. 그 정도의 인물이었다.
예비역들에게는 프로 헌터라면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사람들이지만… 사실 프로 헌터의 대부분은 이름 한 번 떨치지 못하는 2류, 3류에 불과했다. 나 역시 지난 생을 통째로 헌신한 싸움 끝에 성취한 꼬리표가 결국 2류 헌터 아니었던가?
최치국은 그런 우리들과는 노는 물 자체가 달랐다. 그냥 일류가 아닌 초일류, 아니… 위인으로 분류될 사람.
나 역시 최치국 평전을 몇 번이나 읽었다. 그는 지금 이맘때쯤… 그러니까 16살의 나이로 벌써 C급 던전을 공략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왜 D급 던전에 들어와 있을까? 왜 하필 타키온을 가진 오크 대전사를 노리고 있을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역시… 회귀자입니까?’
이런 일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보니 꽤나 심경에 파문이 인다.
나는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최치국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지구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거스른 영웅들. 내가 존경하고 동경하던 영웅들.
내게 꼭 필요한 타키온을, 그들도 원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들을 존경하지만… 이번 생은 나 좋을 대로 살겠다고 마음을 먹지 않았나? 그렇다면 존경이고 영웅이고… 결정한 건, 결정한 거다. 입술 한번 깨물어 본다.
‘일단 다행인 건, 최치국은 내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는 거야.’
회귀했다는 사실을 들켜서 강제로 지구 방위 봉사를 하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은 덜었다.
그럼 이제 문제는 하나였다.
과연 내가 검웅 최치국을 제치고 타키온을 가져갈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