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세계수의 떡잎
치이이이-
합. 냠냠.
서민서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고기를 야무지게 먹었다. 그 활기찬 모습을 보니, 전투로 인한 피로가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술도 안 먹었는데 적당히 열이 오르고 기분 좋다. 원하던 것도 다 얻었고… 평화롭다.
‘괜찮네.’
사실 서민서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 만든 자리였지만, 예기치 않게 소중한 시간이었다. 두 번째 인생을 살아 보니 알겠다. 이런 기분 좋은 날은 인생에 흔하게 찾아오는 게 아니다. 영원할 것 같은 친구들과도 계속 함께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 그러니까 이런 순간은 맘껏 즐겨 주는 게 예의였다.
불판 위로 송이버섯 두 개를 뒤집어 놓는다. 꼭지를 따 놓았기 때문에 바구니처럼 오목한 송이 안으로 천천히 즙이 고여 든다.
나 하나, 서민서 하나. 나란히 집어 들고 술잔 부딪치듯 짠- 하고, 송이즙부터 호륵. 우물우물.
“캬… 향긋해라.”
좋은 것을 순수하게 좋다고 말하면 훨씬 더 행복해진다. 서민서는 그걸 아는 아이였다.
그리고 나는…….
화르르-
영력이 성장하는 걸 즐겼다. 전투로 고갈된 영력이 천천히 회복되고, 회복을 넘어 아주아주 미세하게나마 성장한다. 아주 정교한 감각의 경험은 혼을 일깨운다. 결국 생이란 감각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고기의 육질과 송이버섯이 주는 풍미, 마음을 맡길 수 있는 친구인 서민서. 고된 싸움을 마치고 마침내 맞이한 잠깐의 평화… 이 모든 감각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나의 혼을 아주 조금 일깨워 주었다. 미세하게나마 성장한 영력이 바로 그 증거.
“그런데 시민 선배가 웬일로 이렇게 돈을 쓴대요? 무슨 룸이 있고… 양송이가 아니라 진짜 송이를 내주는 고깃집은 태어나서 처음 와 보는데… 참고로 나 보증은 안 서요.”
“먹을 것 다 먹고서 이제 와서 안된다고?”
“그쵸? 보증이죠? 내 그럴 줄 알았지. 차라리 돈을 빌려줄게요. 얼마면 돼요? 십 만원?”
히히 웃는 서민서를 보며 나는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일부러 룸을 잡았기 때문에 시선이 끌릴 염려는 없었지만, 다시 한번 문이 잘 닫혔나 확인하고 화분 하나를 내려놓았다. 오는 길에 집에 들러서 가져온 화분이었다.
“되게 예쁜 화분……!”
서민서가 화분을 들어 올리며 눈을 반짝였다.
아무렴. 예뻐야지. 이 손바닥 반만 한 게 11만 원이나 하는데.
과도 사고 남은 돈을 다 털어서 산 화분이었다. 흙은 세계수의 씨앗이 발견된 던전 속 숲에서 퍼 왔으니 문제없지만, 이 귀한 씨앗을 잘 키우려면 화분까지 훌륭해야 했기에 남은 돈을 쥐어짜서 사 두었다. 귀한 물건이라는 건, 그만큼 예민하게 관리해 줘야 하는 것이다.
화분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서민서의 시선은 이제 화분 중앙에 반쯤 박혀 있는 세계수의 씨앗에 못 박혔다.
“그런데 이 연둣빛 씨앗은 뭐예요? 씨앗 맞나? 도자기인가? 아니 초콜릿 같기도 하고. 예쁘다 정말…….”
“그게 내 부탁이야.”
“부탁? 씨앗이?”
“응. 그 화분을 붙잡고 [점멸]을 사용해 봐. 최대 거리로.”
“예에?”
서민서가 술이 확 깬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응.”
“저 등급이 낮아서 [점멸] 한 번 쓰면 난리 나는데.”
“알아.”
“기껏 고기로 불린 배가 다 꺼져 버릴 텐데.”
“또 사 줄게.”
“아니… 그때는 줘도 먹고 토할 텐데…….”
“부탁할게.”
“음… 최대 거리 말고 삼 분의 일… 아니 절반. 최대 거리의 절반 어때요? 고기는 또 시키고.”
“안 돼. 넌 등급이 낮으니까 무조건 최대 거리야.”
“아쒸…….”
어지간히 지금의 기분 좋은 상태를 깨기 싫었는지 서민서가 나를 흘겼다.
“병 주고 약 주고보다 더 나쁜 게 뭔지 알아요? 약 주고 병 주는 거예요!”
…음. 무슨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주장하며 녀석은 화분을 두 손으로 들고 노려보았다. 이러쿵저러쿵해도 부탁하면 들어주는 녀석이다.
“그럼 갑니다……!”
녀석의 주위로 공간이 흔들렸다. 바닥과 테이블이 미세하게 진동을 일으킨다.
즈즈즈즈-
[점멸]은 공간을 도약하는 초능력. 서민서는 최대 10미터의 거리를 도약할 수 있었다. 최대 거리로 한 번 뛰고 나면 주저앉아서 구토를 하고 난리가 난다. 좀 미안하긴 하지만…….
즈즈즈즈-!
훅!.
오?
“어?”
서민서가 멍청한 소리를 냈다. 그녀는 여전히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공간 도약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토악질을 하지도 않았다. 아, 이건 신기하네. 나도 몰랐다.
“어? 왜 안 됐지? 분명 도약을 했는데… 힘이 빠져나갔다가… 다시 돌아왔어?”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상황이 어지간히도 이해가 안 가는지 나사가 하나쯤 빠져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바닥을 기며 토해야 하는 그녀가 지금은 너무나 멀쩡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활기차 보였다. 세계수의 씨앗이 [점멸]의 초능력을 흡수하곤 정제하여 다시 돌려준 탓이었다. 산소를 마시고 더 많은 산소를 뱉어 내는 나무처럼. 아무리 작아도 세계수는 세계수라는 걸까?
“여기 봐 봐.”
턱짓으로 가리키자 서민서의 눈동자가 서서히 아래로 향하다가 자신이 들고 있는 화분 위로 떨어졌다.
“어어?”
서민서는 손등에 파랗게 핏줄이 설 정도로 화분을 세게 움켜쥐었다. 역시. 비싼 화분을 사길 잘했지. 일반 화분이었으면 초능력자의 악력에 와장창 깨져 버릴 뻔했다.
“이, 이게 갑자기?”
화분에 심어 놓은 세계수의 씨앗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사랑스러운 에메랄드 빛의 떡잎이 불쑥 자라나 있었다. 떡잎 하나의 크기는 내 손가락 두 개만 하다.
브르르르-
세계수의 떡잎은 탄생을 기뻐하는 것처럼 작은 잎사귀를 떨었다.
배부름. 따뜻함. 벅차오름. 약간의 초조…….
떡잎이 쏟아 내는 날것 그대로의 감각들이 [만상공감]을 통해 내게 전달되었다.
“얘… 얘 뭐죠? 뭔데 이렇게 귀엽죠?”
서민서는 씨앗이었던 것이 한순간에 떡잎이 된 마술보다도 세계수의 떡잎이 가진 청초한 귀여움에 더 시선이 가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서민서가 조심조심 세계수의 떡잎을 건드리는 순간.
‘아…….’
폭발적인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다채롭고 복잡한 감각. 그 감각에 동조되는 바람에 나는 가슴이 아렸다가 따뜻했다가 쿵쿵 뛰다가… 어째서인지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조그만 떡잎이 뭘 이렇게 많이 느끼는지.
후우…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서민서에게 말했다. 서민서를 보는 순간 또 떡잎이 전달하는 감각에 정신이 혼미했지만, 애써 누르고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고맙대, 너한테.”
“네? 누가요?”
“얘가.”
“이 아기 떡잎이?”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떡잎으로서는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세계수는 차원과 공간을 다루는 나무. 세계수의 씨앗이 발아하기 위해서는 차원 또는 공간을 비트는 에너지에 노출될 필요가 있었다. 이 어린 떡잎이 볼 때, 그 물꼬를 터 준 서민서는 엄마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뭐 그냥 길 가던 아저씨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젠장.
서민서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수의 떡잎은 그녀가 눈을 가까이 대자 온갖 복잡하고 행복한 감각들을 폭발시켰다.
그것을 느끼는 건지 못 느끼는 건지. 세계수의 떡잎을 바라보는 서민서의 표정도 점점 따스하게 녹아내렸다.
“아, 그래서 말인데.”
나는 그 훈훈한 분위기를 틈타 또 한 가지 부탁을 하기로 했다.
* * *
서민서를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이라기보다는 격납고라고 불러야 할 반 평짜리 캄캄한 고시원. 안 그래도 비좁기 짝이 없는 방이 지금은 한층 더 좁아졌다.
“아… 일단 살려서 데려왔는데 진짜 골칫덩이네.”
침대 옆, 사람 하나 간신히 누울 만한 작은 장소엔 까만 보디색이 놓여 있었다. 소년 킬러 까막이를 담아 온 보디색이었다. 놈은 그 안에 가사 상태로 구겨져 있다. 나는 까치발을 들고 녀석을 밟지 않기 위해 조심히 걸어 침대에 앉았다.
품에 품고 온 세계수의 화분을 맞은편 책상에 내려놓는데, 손에 짜릿한 정전기가 일었다.
“이게 또 성질 부리네…….”
서민서 앞에서는 천사 같던 녀석이 나랑 둘이 남으니까 온갖 패악을 부리고 있다. [만상공감]으로 전해지는 감각은 어두움, 추움, 배고픔… 그러니까 지금 이 고시원 환경이 구리다고 그러는 거지? 하아… 여기서 계속 살아온 나는 어떻겠냐?
‘네, 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한숨을 푹 쉬고 침대에 누웠다.
물론 저 녀석을 계속 화분에 담아 둘 수는 없었다. 빨리 옮겨 심어야겠지.
나도 잘 알고 있다. 옮겨 심는 것까지가 인생 2회차의 첫 번째 계획이다. 지금은 딱 절반까지만 성공한 셈.
그리고 일단 옮겨 심는 것만 성공한다면…….
나는 이번 생에,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
‘겸사겸사 저 녀석도 치우고.’
보디색에 누워 있는 까막이 놈. 보디색이 그 안에 들어간 시체나 가사 상태의 인간을 보존해 준다고는 하지만 그 기간이 영원하지는 않았다. 계속 저 안에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
대략 2주.
그 안에 세계수를 묘목까지 키워 옮겨 심고, 까막이 놈을 다신 지구로 돌아오지 못하게 이주시키는 것까지 끝내야 했다. 그게 놈도 살고 나도 살고 모두가 행복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브르르르-
생각을 정리하면서 천천히 잠이 들때 쯤, 문득 세계수의 떡잎이 몸을 떨었다.
브르르.
브르르-
흘깃 보니 에메랄드빛 떡잎이 이리저리 춤을 추고 있었다.
아까는 이런 누추한 곳에 자길 데려왔냐고 화를 내는 것 같았는데… 이제 보니 새로운 환경이 꽤 신기하고 재밌는 모양이다. 역시… 갓 태어난 아기 나무가 맞구나.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귀엽네.
이제 까무룩 잠이 들려는 찰나, 문득 그런 궁금증이 일었다.
‘다른 회귀자들은… 씨앗을 회수해서 뭘 어쩌려고 했던 걸까?’
나처럼 초반부터 이용하려고 하는 걸까? 그래. 그렇게 하는 편이 지구를 구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거다. 하지만 미안하다. 저건 내 거니까… 너네는 다른 것 찾아라. 어차피 현재 시점에서는, 많이 있으니까.
직후, 편안하고 달콤한 잠이 쏟아졌다.
* * *
캄캄한 방. 홀로 불을 밝히고 있는 노트북 모니터로 채팅이 올라왔다.
- 의뢰대로 숲이 등장하는 던전들을 조사했습니다. 총 23군데 중 총 세 곳에서 씨앗을 발견. 요청하신 대로 즉시 소멸시켰습니다. 망치로 으깨고 믹서로 간 후에 화약과 섞어 불태웠으며, 그 재는 말씀한 장소로 우편을 보냈습니다.
잠시 뒤, 누군가가 노트북 앞에 앉았다. 체구가 아담했다. 성인이 아닌 소년이었다. 그가 타닥타닥 답변을 남긴다.
- 수령 확인했습니다. 특이 사항은 있었습니까?
- 그린블러드 던전에서 직원 두 명이 실종되었습니다.
- …E급 던전인데요?
- 그래서 다시 조사 팀을 보냈는데… 시체조차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 씨앗은요?
- 없었습니다. 괴물들의 이상 준동이 있었다고 하던데… 깊이 들어갔다가 거기에 휘말렸던 것 같습니다. E급 괴물이 수백 마리씩 덮치면 2류 정도 솜씨로는 살아남기 힘들었을 겁니다.
소년은 잠시 노트북에서 손을 뗐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가늘어진다.
‘그린블러드 던전에서 이상 준동이 있었다고?’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듯이 미간을 찌푸리던 소년은 결국 잇소리를 냈다.
“빌어먹을 후유증… 그렇게 열심히 외웠는데도 뭐 하나 제대로 기억나는 게 없네.”
하지만 기억나는 게 없다고 대충 넘어갈 수는 없다. 지구의 운명이 달린 문제가 아니던가? 다행히 자신의 소명만큼은 잊지 않았다. 소년은 이를 악물었다. 눈에 독기를 품고 자판을 두드렸다.
- 그렇게 적당히 일 처리 하라고 막대한 의뢰비를 드리는 게 아닙니다만?
- …어떤 점이 미흡했는지 말씀해 주시면 시정하겠습니다.
- 그걸 모른다고요?
잠시 침묵하고 있던 채팅이 조금 뒤에 다시 올라왔다. 담당자가 바뀌었는지 어조가 바뀌었다.
-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다음과 같은 시정 조치를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1. 직원이 실종되었던 해당 임무에 참여한 예비역에 대한 전수 조사를 실시한다. 2. 온오프라인을 통해 씨앗에 대한 첩보를 수집하고 씨앗은 발견 즉시 파기한다.> 이런 시정 조치는 대한민국에서 발견되는 모든 씨앗을 일말의 의혹도 남기지 않고 모두 확실하게 파기하겠다는 의뢰주의 목표에 부응하기 위해 취해집니다. 다만 추가 수당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 그게 처음부터 제 요구였습니다. ‘일말의 의혹도 없이 확실하게’가 관건입니다. 그렇기에 고정 의뢰가 될 수도 있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리고 비용 문제는 그쪽이 장난만 안 치면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 잘 이해했습니다. 앞으로 더 철저한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 지켜보겠습니다.
소년은 노트북을 덮고 일어섰다. 초조한 듯 방 안을 돌아다니던 그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대마도사는 잘하고 있으려나? 그리고 또… 하, 빌어먹을. 진짜 기억 안 나네.”
서성거리던 소년은 결국 심호흡 몇 번으로 마음을 추스르며 말했다.
“…잘하고 있다고 믿어야지.”
소년은 목검을 챙겨 방을 나섰다. 소년은 며칠째 하루에 한 시간도 채 자지 않은 채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