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세계수의 씨앗
다행히 까막의 보호자를 찾으러 나설 필요는 없었다. 놈이 알아서 나를 찾아왔으니까.
놈은 숲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다가 내가 지나가는 순간을 노려 기습해 왔다.
은신과 관련한 스킬이라도 있는지, 아무런 기척도 없는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하지만 [만상공감]과 암습은 상성이 나빠도 너무 나쁘지. 기척이 없으면 뭘 하는가? 기척을 죽인 채 나를 노리고 있는 놈의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데.
나는 아무렇지 않게 공격을 피하며 놈의 어깨에 청하를 박아 넣었다.
부우욱!
보호자답게 실력이 괜찮았다. 어깨를 노린 청하가 놈의 가슴에 얄팍한 상처를 남기는 것에 그치고 말았으니까.
“……!”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놈의 동요가 느껴졌다.
“너, 어떻게 마누스도 없…….”
거 진짜. 마누스, 마누스 지겨워 죽겠네.
나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보디색을 내려놓았다. 청하를 들어 놈에게 겨눴다. 쥐꼬리만 한 영력에는 이제 여유가 거의 없었다. 놈이 내 공격력을 모를 때, 단숨에 승부를 보아야 한다.
내 기세를 읽었는지 놈의 눈빛이 변했다. 녀석의 눈동자가 바닥에 내려놓은 보디색을 빠르게 스치고 내게 고정되었다.
“…녀석은 살아 있나?”
역시 자기들 물건이라 그런지 인식 왜곡 기능이 먹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놈은 장검 한 자루를 들어 나를 겨눴다.
“어떻게 꼬맹이를 제압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깟 과도를 들고 더 이상 어쩌진 못할 거다.”
놈의 입가에 매달린 건 한 줄기 비웃음이었다.
그리고, 쿵! <대시>와 함께 놈의 검이 뻗어 왔다. 검 주변으로 아지랑이가 일렁거렸다.
‘<대시>와 <배시>의 조합……!’
휘두르는 검까지 마누스로 강화된 상태였다. 까막의 어설픈 공격처럼 일격에 깨뜨릴 수 있는 만만한 공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몸이 느린 내가 피할 수 있는 속도도 아니었다.
까아앙-!
청하와 장검이 맞부딪치는 순간, 손아귀가 찢기며 피가 튀었다. 비껴 막는다고 했지만 짧은 과도의 특성상 장검에 실린 힘이 고스란히 내 손으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충격을 흡수하고 손을 딱 잡아 주는 일각사슴의 가죽이 아니었다면 칼을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서걱!
그리고 놈이 긴 장검을 끌어당기는 순간, 청하로는 미처 커버하지 못한 팔뚝을 베였다. 또다시 붉은 피가 튀어 오른다.
“마누스를 담은 공격을 막아 내다니… 초능력? 아니면… 그 과도가 특별한 건가?”
까앙-!
깡!
놈은 이런저런 추측을 던지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장검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나는 휘청거렸고 피를 흘렸다.
‘젠장… 무기에서 너무 밀린다.’
장검은 사정거리도 길고, 휘둘러 칠 수도 있고, 찔러 넣은 다음에 끌어당겨 벨 수도 있다. 놈이 휘두르는 모든 공격이 내겐 위협적이었다.
반면에 청하로 놈에게 위협을 주려면… 아주 가까운 거리로 들어가 놈의 급소를 정밀하게 공격하는 수밖에 없었다. 막 휘둘러도 살상이 가능한 장검과 달리 과도는 막 휘둘러서는 칠면조 한 마리도 잡기 힘든 법이다.
‘그리고 막기는 또 얼마나 지랄맞은지……!’
손바닥만 한 칼날로 저 길다란 장검을 받아 내자니 손은 넝마가 되고 눈알은 긴장으로 빠질 것 같았다.
캉-!
스걱-!
까앙!
“큭…….”
그렇게 놈이 나를 열 번이나 베어 내는 동안 나는 단 한 번 반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더럽게 꼬였어…….’
이번엔 내가 상성이 나빴다. 아직 단련되지 않은 내 움직임으로는 놈의 공격을 피할 엄두가 안 났다. 결국 공격을 막는 수밖에 없는데 장검을 과도로 막는 건 끔찍하게 어려운 기술이다.
‘차라리 필살의 일격이라도 날려 주면 좋겠는데…….’
억지로라도 반격하려면 못 할 것도 아니었지만… 신중해야 했다. 쥐꼬리만 한 영력을 생각하면 기회는 단 한 번뿐이까.
밸런스가 단단히 잡힌 놈의 공격을 걷어 내며 골치를 썩히고 있었는데, 반가운 한마디가 들려왔다.
“꼬맹이 상태가 궁금하니… 이만 끝내도록 하지. 그래도 제법 재미있었다.”
그때 놈의 호흡이 변했다.
등줄기를 타고 얼음이 미끄러지듯이, 전율이 짜르르하게 스쳐 지나간다.
곧이어 이번에는 반대로, 뜨거운 증기가 척추를 타고 오르는 것 같았다.
특이하기 그지없는 감각. 나는 이 감각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피니싱>!’
<대시>와 <배시>가 초급 단계의 마누스라면 <피니싱>은 명백히 중급 단계의 마누스. 강렬한 일격으로 강철도 두부처럼 잘라 버리는 일격이었다.
놈은 지지부진한 싸움을 끝내기 위해 비장의 수를 꺼내 든 것이다.
‘땡큐! 고마워!’
나는 그 사실에 환호하며 간신히 남겨 둔 영력을 청하에 모조리 때려 넣었다.
그리고 튼실한 사과를 쩍! 하고 쪼개 버리는 과도를 떠올리며, 손목의 스냅을 살려 일격을 날렸다.
쩌어어엉-!
이번 싸움은 손바닥 씨름과 비슷했다. 손바닥 씨름에서 가장 까다로운 상대는 무게중심을 뒤로 빼고 손만 왔다 갔다 하는 놈이다. 충분히 힘을 싣지 않은 공격에 대응하다가는 이쪽이 먼저 무너지게 되는 법. 상대방이 자신의 무게중심이 흔들릴 정도로 충분히 진심으로 나설 때, 그때를 노려 벼락처럼 움직여야 한다.
청하가 장검의 검면을 후려쳤다.
“어?”
놈의 검이 몸 바깥쪽으로 쭈욱 밀려난다. 놈은 검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몸을 피하지도 못한 채, 중심이 무너진 어정쩡한 자세로 눈만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활짝 열린 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푸르른 청하를 치켜들고 놈의 목줄기를 겨냥했다. 놈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벙찐 얼굴이었다. 그건 죽음을 직면한 인간이 가장 많이 짓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응. 잘 가.”
푸욱-!
그린블러드의 숲에 또 하나의 붉은 피가 뿌려졌다.
* * *
길동생태공원에 위치한 그린블러드 던전.
그 푸르른 게이트에서 헌터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와아… 죽을 뻔했다.”
“미친… 진입 다섯 시간 만에 임무달성이네.”
“아무리 조기 퇴소라도 이딴 짓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잔뜩 상기된 얼굴들과 핼쓱하게 질린 얼굴들이 던전 안에서 벌어진 끔찍한 혈투를 증명했다.
바빠진 건 던전 공무원들이었다.
“뭐? 예비역들이 벌써 나왔다고? 빨리 상황 파악해!”
“예, 예!”
지쳐서 여기저기 주저앉아 버리는 예비역들 사이를 던전 공무원들이 뛰어다녔다. 갑의 위치에 있는 던전 공무원들이 이렇게 쩔쩔매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총원 101명. 부재자 2명. 진입 초기부터 그린블러드들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대단한 혈투가 벌어졌지만 오히려 고질적인 막판 웨이브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체력이 남아 있는 초반에 벌어진 전투라 오히려 장애가 남을 정도로 심한 부상자들도 없습니다.”
“부재자 두 명? 그럼 사망자가 최대 두 명인가? 하…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린블러드 던전 관리소장은 미간에 생긴 주름을 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섯 시간 만에 예비역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말을 듣는 순간 눈 앞이 캄캄했었기 때문이다.
던전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은 던전 관리소장의 책임. 던전의 이상 징후를 파악하지 못해 대량 사망자라도 발생했다가는 당장 옷을 벗어야 하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사망자가 두 명뿐이라면… 충분히 무마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마침 그의 시선에 유독 거지꼴을 한 예비역 한 명이 들어왔다. 저렇게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분투해 준 덕분에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거겠지.
‘버텨 줘서 고맙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터덜터덜 걷는 예비역이었다. 어깨에 무슨 커다란 짐이라도 짊어진 것처럼 어깨가 앞으로 굽어 있었다. 소장은 알싸한 감동을 느꼈다.
‘아이고. 힘들다, 힘들어.’
안쓰럽게 바라보는 소장의 시선도 모른 채, 나는 그저 터덜터덜 걸었다. 어깨에 걸머진 보디색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다행히 인식 왜곡술이 제 기능을 하는지 아무도 보디색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후우… 마지막에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킬러 두 명을 해치운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이후에는 정말 눈앞이 아찔했다.
흘러내리는 보디색을 한 번 더 추슬렀다.
‘빨리 뜨자.’
당장 주저앉아 쉬고 싶지만 한시라도 빨리 신고를 마치고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았다. 아무리 인식 왜곡 기능이 있다지만, 피투성이 소년을 자루에 넣고 돌아다니는 건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었으니까.
삐빅-
마누스 구슬에 손을 올리자 담당 공무원의 눈이 조금 커졌다.
“E급 괴수 77마리? 정말 분투하셨군요?”
그래. 덕분에 막판에 죽을 뻔했지.
그리고 현재로써는 다행스러운 일인데, 마누스 구슬은 다른 차원 생명체를 죽인 건 감지해도 같은 차원의 생명체… 그러니까 같은 지구인을 살해한 것은 감지하지 못한다. 다른 차원 생명체에게서 나오는 특별한 파장을 추적하는 방식이라나. 아무튼 덕분에 킬러를 살해한 일을 들킬 염려는 없었다.
“전공 점수 15점에 초과 달성 점수 5점 더 추가하겠습니다. 현재 총 152점입니다. 2달 내로 48점을 더 채우시면 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하고 서둘러 빠져나왔다. 길동생태공원 앞에는 전투를 마친 예비역들을 실어 가기 위해 택시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와아- 조기 퇴소네요. 기분 좋으시겠어요.”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택시 기사는 속도 모르고 그런 소리를 했다.
“신촌으로 가 주세요.”
나는 티나지 않게 보디색을 차에 싣고 무뚝뚝하게 목적지만 말했다. 택시 기사는 내 눈치를 슥 보더니 차를 출발시켰다. 그렇지. 예민한 예비역은 건드리지 않는 게 현명하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택시에 앉아 있으니 스르르 눈이 감기고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치열했던 전투들이 눈 앞을 스쳐 지나갔다.
프로 헌터급의 실력을 가진 킬러를 두 명이나 격파했고… 그리고 손쉽게 세계수의 씨앗을 얻고 나서…….
부르르-
저절로 어깨가 떨렸다. 세계수의 씨앗을 쥐는 순간 갑자기 발광하며 달려들던 그린블러드들은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했다.
‘그렇게 게거품을 문 괴물들은 이전 생에도 본 적이 없는데…….”
세계수의 씨앗을 얻으면 원래 그렇게들 발광을 하나? 그런 이야기 못 들었는데…….
‘뭐, 어쨌든.’
나는 천천히 품속에 손을 넣고 미소를 지었다.
‘얻었다.’
세계수의 씨앗은 사랑스러운 연두색으로 빛났고 크기는 복숭아 씨앗만 했다. [만상공감]으로 느껴지는 감각은… 근질근질하고 두근두근한 것이, 이 씨앗 녀석은 아무래도 불안, 초조한 모양이다. 그리고 무언가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불안, 초조는 모르겠지만… 갈증이라면 알 것 같았다. 녀석의 발아 조건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나는 휴대폰을 꺼내 서민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선배? 출근도 안 하고! 또 전공 점수 채우러 갔다면서? 왜 벌써? 나는?”
전화가 걸리자마자 우다다다 말을 쏟아 내는 녀석. 굳이 [만상공감]을 쓰지 않아도 녀석이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어쩐지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추욱 늘어진다.
“어, 퇴근했어?”
“응. 막 퇴근했어요.”
“저녁은?”
“아직? 왜요?”
“그럼 두 시간쯤 뒤에 고기 먹자. 부탁할 것도 있고.”
“선배가 쏘는 거?”
“어어.”
“그럼 콜!”
다행히 서민서와 나는 사는 곳도 가까웠기 때문에 부담스러울 것도 없었다.
이래저래 지친 날이었으니까 고기로 보충을 해야겠다.
“그리고 너도 밥 좀 먹어야지.”
나는 가슴팍을 툭툭 건드렸다.
토도독-
정전기 같은 따끔함이 가슴 부분을 스쳤다. 세계수의 씨앗이 발휘한 미약하디미약한 능력 같았다.
“자식이 밥을 준대도…….”
토도독-
또 따끔하다.
씨앗 상태로도 이 정도라니… 제법 성깔 있는 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