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트롤러
칼날의 길이는 15cm, 손잡이의 길이는 11cm.
과도의 손잡이는 일각사슴의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던전에서만 발견되는 그 요정 같은 사슴은 유니콘처럼 뿔이 하나 달려 있다. 녀석의 가죽은 아주 보드라우면서도 질기고, 천천히 쥐면 말랑하고 따뜻하다.
칼날은 티타늄을 베이스로 소량의 골렘강 그리고 일각사슴의 뿔을 합금한 후 단조한 물건이었다. 초능력을 이용한 특별한 정련과 열처리를 거친 검신은 질기고 단단했다.
그 모든 과정의 증거로 검신이 가을 호수처럼 푸르렀다. 그 위를 긁고 못질을 해도 작은 흠 하나 생기지 않았다.
이런 물건을 만들기 위한 재료의 수급, 섬세한 손기술과 초능력, 마누스의 사용…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789만 원은 절대로 비싼 가격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다.
나는 과도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만지작거릴 때마다 가슴 깊이 충만함이 밀려들었다.
“아… 영롱하다.”
이제 와선 그런 생각이 든다.
사실 다 핑계가 아니었을까? 생존이고 뭐고, 강해지는 거고 뭐고…….
난 그저 좋은 물건을 만지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을 뿐이 아닐까?
설령 이런 명품들이 내 실력 향상에 도움이 안 됐더라도… 나는 세간을 다 팔아서라도 명품을 사지 않았을까? 적어도 이번 생은 그랬을 것 같다.
‘쥐고만 있어도 행복해…….’
[만상공감] 덕분에 그 누구보다도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나는… 그 정교한 감각이 주는 행복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지난 생에는 가성비만 생각하며 사느라 내 감성이 얼마나 학대당했던가?
‘정말 지독하게 살았네. 이 좋은 걸 어떻게 평생 참았지?’
한 생애 내내 억눌렀던 탐욕이 미친 듯이 분출되고 있었다.
과도를 쥔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다시는 이 행복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이번 생에는 지난 생에 누리지 못했던 온갖 좋은 물건들을 다 섭렵해 보겠다는 것처럼.
쓸 만한 세간을 다 팔아서 어쩐지 조금 넓어진 것 같은 반 평짜리 고시원에서, 나는 그토록 행복했다.
“좋아. 청하야, 잘 부탁한다!”
과도를 생산해 낸 브랜드 ‘청하’를 과도의 이름으로 붙여 주며, 과도의 모든 것과 교감하는 [만상공감]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화르르-
마침내 과도, 아니 청하에서 아우라가 피어올랐다.
아우라.
그것의 모습은 마치 타는 불꽃과도 같았다. 하얀색 색연필로 간단하게 그린 불꽃처럼 불길의 윤곽을 따라 하얀색 테두리가 있고, 속은 투명하게 텅 비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빙고- [수집물]이야.”
아우라가 없는 흔하디흔한 물건의 등급이 [습득물]이다. 내 손에 쥐여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나에게 속할 수 없는… 영혼 없는 죽은 물건들이 바로 [습득물]이다.
하지만 백색의 아우라를 가진 [수집물]은 달랐다.
익숙하게 쓰고 깊이 느끼다 보면, 혼이 강화된다.
혼이 강화된다니?
물론 처음엔 나도 반신반의했다.
혼이 강화된다니 이 무슨 혼이 비정상 같은 소리란 말인가? 근데 사실은 그게 상식이었다. 우리 지구인들만 잘 알지 못할 뿐.
[수집물] 그리고 혼의 강화.
인류의 대부분이 알지 못하는 이 두 가지의 개념 사이에, [만상공감]의 진가가 숨겨져 있었다.
“후우…….”
크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정갈하게 가다듬었다.
[만상공감]은 푸르른 과도, 청하의 모든 것을 읽어 냈다.
사악-
과도를 들고 수평으로 그으니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 예기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아니다. 이게 아니다.
손목을 돌린다. 과도란 본디 손목을 돌려 가며 작은 과일을 깎는 용도의 도구. 청하는 무려 789만 원이나 하는 하이엔드 과도답게, 청하의 손잡이는 돌려 깎기에 최적화되어 미묘한 곡선을 그릴 수 있었다.
‘내가 칼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손잡이의 방향대로 미끄러지게 놓아 둔다는 생각으로…….’
샤아악-!
그렇지. 이 느낌이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사과의 껍질을 떠내듯 가볍게 움직이는 칼날, 수박을 뚫듯 묵직하게 꽂히는 칼끝.
나는 [만상공감]으로 청하의 특성을 읽고 그 특성에 맞게 청하를 다루었다.
쉬익-
‘아니야.’
새애액-
‘이것도 아니야.’
샤아악-!’
‘옳지!’
푹-
‘아냐.’
파학!
‘그렇지!’
어떤 물건의 특성을 최대한도로 살린다는 것. 그것만큼 가슴 떨리는 일이 또 있을까?
제대로 쓰면.
손맛이 다르다.
온몸을 타고 전율이 흐른다.
내 몸이 물건에 맞춰져 길이 들고.
물건이 내 움직임에 맞춰져 길들여지는.
교감과 공감의 순간.
정교한 감각들의 향연.
그렇게 정신없이 청하를 휘두르는 동안 청하의 아우라는 조금씩 변해 갔다.
화르르-
아우라가 점점 커져서 내 몸을 덮었다. 내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며 청하의 아우라는 점점 더 그 불길을 키워 나갔다.
화르르-
화르르-
겨우 윤곽선만 하얀색이던 청하의 투명한 아우라는 아주 천천히, 아주 조금씩, 거의 알아차리기도 힘들 정도로 미세하게 하얀색으로 짙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전체 아우라의 3퍼센트 정도가 간신히 새하얗게 물들었을 때, 무아지경에서 발현되던 [만상공감]이 깨어졌다.
“아…….”
휘청-
다리가 저절로 풀려서 주저앉았다. 지독한 현기증. 땅이 파도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하… 하하.”
주먹을 쥐었다 폈다. 회귀한 이후로, 있기는 한 건지 잘 감지도 되지 않던 영력靈力이… 드디어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병아리 눈물만큼 적은 양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느껴진다는 사실 자체가 감개무량했다.
‘다른 놈들이야 영력을 키우기 위해서 마누스 수련법을 붙들고 있겠지만.’
처참한 영능 지배력을 타고 난 나로서는 마누스 수련법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영력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그저 이렇게 아우라를 가진 물건과 교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아니,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좋았다.
‘마누스 수련법 같은 원시적인 기술과는 다르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수련법을 붙들고 발버둥 치던 지난 생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렸다. 그 절망. 그 무력함!
이제 다시는 그런 일은 없다.
주먹을 꾹 쥐니, 손에 잡힌 과도의 곡선이 따뜻하고 폭신했다.
청하의 아우라는 미세하게 성장한 나의 영력과 함께 어우러지며, 그르렁그르렁 작게 부풀었다가 꺼져 들기를 반복했다. 테두리만 겨우 하얗던 처음과 다르게 이제는 전체의 3퍼센트 정도가 하얗게 물들어 있다.
‘교감 진척도 3퍼센트… 아직 적응 단계 초반이군.’
던전에 들어가기로 한 날은 이제 이틀이 남은 상태.
‘이틀 내로, 25퍼센트를 찍는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수건으로 땀을 대충 닦고 모자를 눌러썼다.
‘아무래도 과일이 필요하겠어. 가능하면 단단한… 던전 과일들로.’
청하의 본질은 결국 과도.
[만상공감]을 시행하며 과일을 깎으면 교감 진척도는 더욱 빠르게 늘어날 것이다.
* * *
사라라락-
선녀가 옷을 벗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나면, 청하의 푸르른 칼날이 허공을 떠내며 미끄러졌다.
파앙-!
가죽 북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면, 청하의 날카로운 칼끝이 공기층을 꿰어 버렸다.
쩌엉-!
무쇠솥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면, 허공이 뚝 갈라져 진공층이 만들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과도를 들고 무슨 싸움을 하냐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지난 이틀 동안 청하를 이용해 확실한 전투 기술을 확립했다.
“순서대로 사과 깎기, 수박 뚫기, 사과 쪼개기라고 불러야겠다.”
그렇게 세 가지 기술의 이름이 정해졌다.
…이름이 뭐 중요한가, 이미지가 중요하지.
청하를 감싸고 타오르는 아우라는 이제 사분의 일 이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적응’ 단계를 넘어 ‘안정’ 단계에 진입한 과도.
그러니까…….
“준비는 끝났다.”
이제는 실전이 남았다.
챙길 물건은 없었다. 청하를 사기 위해 방어구까지 다 팔아 치웠기 때문이다.
나는 달랑 청하 한 자루를 가슴에 품고 길동 그린블러드 던전으로 향했다.
길동생태공원 앞.
“손님? 여기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아. 공무원이신가 봅니다.”
택시 기사 아저씨는 아무런 장비도 들지 않고 던전 앞에서 내리는 나를 흘깃흘깃 돌아보더니 천천히 떠났다.
나무가 우거진 습지대 앞에는 각지에서 모인 예비역 헌터들이 끼리끼리 모여 있었다. 아직 파티를 구하지 못한 인물들은 목청을 높여 파티원을 구하고 있었고, 전공 점수를 관리하는 던전 공무원의 데스크 앞에는 임무 수주 신고를 하러 온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일단 나도 신고를 위해 줄의 끝에 가서 섰다.
웅성-
처음에는 한 사람이었다. 무심결에 지나가는 의미 없는 시선. 하지만 무언가에 놀란 듯 화들짝 돌아와 나에게 고정된다.
웅성- 웅성-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고, 두 사람은 옆 사람을 툭툭 치며 나를 가리킨다. 오늘 임무를 함께할 예비역 헌터 100명 모두가 나를 바라보는 건 순식간이었다.
“뭐야? 방어구가 없어?”
“무기도 안 보이는데?”
“임무 수주하는 것 맞아?”
분명 신고하는 줄에 서 있기는 한데, 기초적인 장비들조차 보이지 않으니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그 혼란은 내가 던전 공무원에게 수주 신고를 하는 순간 절정에 이르렀다.
“소시민 씨, 임무 수주하시는 것 확실합니까?”
“확실합니다.”
“장비 신고도 부탁드립니다.”
“예. 여기 있습니다.”
탁.
데스크에 올려놓았다.
나의 영롱하고 푸르른 과도, 청하를.
“…이게 뭡니까?”
“제 무기입니다.”
던전 공무원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미친놈아, 거짓말하지 마.’라는 속마음이 눈동자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방어구는요?”
“없습니다.”
“왜 이러십니까?”
이젠 슬픈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이 공무원… 보기 드물게 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던전에서 자살을 할 작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일반인보다 정신력이 강한 초능력자도 종종 자살을 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임무 신청을 막을 수는 없다. 국민 개병제라는 게 그렇다. 만약 정신이상을 이유로 빼 주기 시작한다면 전국민이 정신이상을 주장할 테니까. 총력전 중에는 청소년들도 전장으로 보내는 법인데 정신이상자쯤이야 대수겠는가.
결국 던전 공무원은 침통한 표정으로 나의 신고를 접수했다. 도장을 찍고 전공 기록용 각인 주문을 활성화했다. 푸르른빛을 내는 문양이 내 손에서부터 뻗어 나와 팔과 어깨를 지나 눈 주위까지 떠올랐다가 스르르 가라앉았다.
이로써 임무 수주 완료.
돌아서는데 사람들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하, 트롤이네.”
“그래도 이번 자살 희망자는 참신하다. 과도라니.”
“근데… 저 과도 꽤 비싸 보이지 않냐?”
찰칵-
수근수근. 나를 향하는 그 수많은 소리 중 가장 열받는 건… 말없이 찍는 카메라 소리였다. 사진을 왜 찍어? 열받게. ‘요즘 자살 희망자들 근황.JPG’ 뭐 이런 제목으로 글이라도 올리려고 그러나?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나는 천천히 몸을 풀었다.
‘길동 그린블러드 던전의 정원은 세 명.’
한 팀으로 들어갈 수 있는 최대 인원이 세 명이라는 뜻이었다. 세 명을 초과해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가면 세 명씩 끊겨서 던전 내 서로 다른 위치에 떨어지게 된다. 여기 있는 백 명 모두가 같은 던전에 들어가지만, 3인 파티로 다른 위치에서 시작하게 된다는 것.
‘그렇지만 달랑 과도 하나를 든 나랑 파티를 맺을 사람은 없겠지.’
나는 혼자 외롭게 시작을 해야 했다. 홀로 시작하는 던전 공략. 제아무리 E급 던전이라고 해도 긴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문제는 또 있었다. 이번 임무가 던전의 완전 소탕이 아닌 개체 수 줄이기라는 것. 기습의 우위를 취하지만, 전체적인 전력은 이쪽이 열세라는 것이었다.
‘그린블러드 던전에 출몰하는 괴물들은 단일 개체로서는 약하다. 대신 집단전에 능하고 개체 수가 어마어마하지. 오래 머물렀다가는 휩쓸릴 수밖에 없어.’
지난 생에도 막판에 괴물들의 인해전술에 떠밀려 후퇴하느라 그 물건을 챙기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오른손으로 청하를 꽉 쥐었다.
‘상황이 어떻든… 오늘은 반드시 세계수의 씨앗을 입수한다.’
세계수의 씨앗.
[만상공감]에 날개를 달아 줄 물건이자, 내 두번째 인생 설계의 핵심이 되는 물건. 지난 생에서는 사용법을 몰라 수없이 버려지고 썩혀져 버린 그 보물.
세계수의 씨앗을 쟁취하기 위한 나의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