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다 필요 없고 명품 하나면 된다
[만상공감]을 제대로 쓰기 위해선 명품이 필요하다. 그것도 그냥 명품이 아니라 한 땀 한 땀 정성이 들어간 핸드메이드 명품이.
지난 생에선 이 사실을 깨닫는 데만 20년이 넘게 걸렸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고아가 명품을 써 봤겠는가? 심지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사치를 하는 건 죄악이라는 생각마저 들었으니… 제법 여유가 생기고 나서도 제대로 된 물건을 써 보기까지는 아주 오랜 세월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게 내가 [만상공감]의 진정한 효능을 뒤늦게 깨닫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그래서, 이번 생은 시작부터 제대로 해 볼 생각이었다.
‘내 재산이 허락하는 한, 제일 좋은 물건을 지른다.’
밥은 맨날 삼각김밥으로 먹고 옷은 넝마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벤츠를 몬다?
그런 이를 본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머릿속에 허영만 가득한 놈이라고 욕할 거다.
하지만 나한텐 그게 맞다.
허접한 물건 열 가지보다는 제대로 된 물건 한 가지가 좋다.
노숙을 할지언정 평범하지 않은, 짜릿한 감각을 선사해 줄 명품 하나라도 품고 자야 한다. [만상공감]은 바로 그런 능력이었다.
그게 바로 내가 잠도 안 자고 낡디낡은 장비들을 박박 닦는 이유였다.
‘한 푼이라도 더 받아야지.’
닦고 말리고 연마하고 기름칠까지 하고 보니 낡은 장비들이 기품 있게 반짝거렸다. 잠시 뿌듯하게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짊어지고 나섰다. 이태원에 있는 전당포를 찾아갔다.
“그래서? 이걸 팔겠다고? 햐… 낡았네. 이런 건 상품이 못 돼. 안 팔려.”
전당포의 할아버지가 흘러내린 안경 위로 나를 살펴보며 말했다.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럴 때는 어려진 게 안 좋네.’
어린 놈이 오면 가격을 후려쳐라. 뻔하디뻔한 장사꾼의 기본 스킬이다.
“젊은 사람이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사 주긴 사 주겠는데… 칼 30만 원. 가슴 보호구 60만 원… 건틀렛, 에이 이건… 5만 원. 그리고 어디 보자, 이건…….”
아저씨는 손가락 끝으로 물건들을 툭툭 밀치며 계산을 하고는 최종적으로 모든 장비를 다 합쳐 120만 원을 불렀다.
“엄청 많이 쳐 준 거야. 다른 데 가져가면 이런 물건 받아 주지도 않아.”
‘진짜 그랬으면 애초에 산다는 소리도 안 했겠지.’
살 때는 700만 원이 넘었던 헌터 장비 세트를 120만 원까지 후려치다니… 중고 거래가 활발한 장비 시장에서는 터무니없는 액수였다. 결국 ‘젊은 사람이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라는 말은 ‘젊은 놈이니까 호구 잡을게.’라는 선언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마음이 상해 돌아 나갈 필요는 없다. 어차피 시장 사람들은 다 거기서 거기라서, 마음 여린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보다는 여기서 제대로 협상을 하는 게 빠른 길이었으니까.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여기 이 가슴 보호구에 쓰인 광석이 뭔지 몰라요? 던전 부산물을 섞은 특수 합금이잖아요? 그냥 녹여서 팔기만 해도 100만 원은 나오겠다.”
일단 아는 체를 했다.
할아버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녹이는 품은 생각 안 하고?”
할아버지의 반격. 초보들은 여기에 걸려들어 당황할 수 있는데, 사실 이건 시험이다. 이 사람이 시장을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는가 물어보는 시험. 품이 어떻고 하는 말에 속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100만 원이죠.”
“으음…….”
여유롭던 할아버지의 자세가 방어적으로 변했다. 나는 한 번 더 밀어붙였다.
“그리고 봐요. 제가 광내고 기름칠까지 해 오지 않았습니까? 이건 벌써 상품이에요. 손질할 필요도 없이 그냥 팔 수 있는 물건 아닙니까?”
“아니지. 여기 이렇게 찌그러져 있는데.”
“에이. 금이 간 건 몰라도 살짝 찌그러진 건 괜찮죠. 오히려 그만큼 질기다는 뜻 아닙니까?”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사실 물건 가격이야말로 그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분야였다. 나는 온갖 말로 내 장비들이 언변만 좋으면 제값을 받을 수 있는 물건임을 설파했다.
몇 번 주거니 받거니 흥정을 하자, 결국 전당포 할아버지는 물러섰다. 약간 신경질적인 말투로.
“그래서 얼마를 받겠다고?”
“다해서 240은 받아야죠.”
“두 배를 받겠다고? 에이, 안 해.”
“그러지 말고 보세요. 솔직히 이건 무조건 팔리는 물건 아닙니까.”
“그래도 두 배는 안 돼.”
“알겠어요. 10만 원 빼 줄게요. 그리고 이것 봐요.”
나는 할아버지 앞에서 칼을 대각선으로 세우고 그 위에 휴지를 떨어뜨렸다.
사락-
칼날에 닿은 휴지는 두 조각이 나서 땅에 떨어졌다. 저녁 내내 혼신의 힘을 다해 세워 둔 칼날이다. 칼 자체의 한계 때문에 금세 무뎌지겠지만 그래도 한 달은 쓸 만한 물건.
할아버지의 눈에 흥미가 담겼다.
내가 10만 원을 빼 줬기 때문에 자존심을 세울 명분도 사라졌다.
“봐요. 기가 막히게 갈아 뒀죠? 이런 건 무조건 웃돈 얹고 팔 수 있는 물건이잖아요.”
결국 할아버지는 못 이기는 척 거래를 승인했다.
“알겠어, 알겠어. 내가 졌네. 이거 완전 강도야.”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등에 짊어지고 온 가방을 내려놓았다. 230만 원이 생기긴 했지만 아직 한참 멀었다.
“여기 노트북이랑 던전 소재로 만든 코트랑 밥통이랑 선물 받고 한 번도 안 쓴 식기 세트랑…….”
돈을 마련하기 위해 쥐어짜 낸 세간 살림을 늘어놓았다.
내가 쓸 만한 명품을 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 * *
폰을 켜 통장 잔고를 살펴보았다.
생활비를 위해 남겨 둬야 하는 50만 원을 제외하면 800만 원이 남았다.
거금 800만 원.
내 영혼까지 박박 긁어모은 액수. 쓸 만한 물건은 다 팔아치웠다. 장검이며 부츠며 방호복, 심지어 노트북까지.
그렇게 마련한 현금이 400만 원이었다. 그리고 초능력자 융자금으로 나머지 400만 원을 빌렸다. 정말 간신히 빌렸다.
나는 오늘, 이 돈으로 단 하나의 무기를 살 작정이었다.
‘방어구는 없어도 돼.’
포기할 건 포기한다. 일단 명품이면서도 공격력도 증폭시킬 수 있는, 확실한 무기 하나만 챙긴다. 괴물의 공격? 까짓것 피한다. 불안하기는 하지만 확실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때였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던전 마켓 명품관을 찾았다.
“그건 1억 5천만 원짜리입니다.”
명품관의 직원은 두 걸음쯤 떨어진 채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1억 5천만… 이렇게 비싼 무기는 지난 생에도 만져 본 적이 없었다. 손이 떨릴 뻔했지만, 나는 애써 동요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다.
“아, 예.”
나도 명품관 직원처럼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진열된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아…….”
직원이 뒤에서 작게 한숨짓는 소리가 들렸다.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이지 않았다.
탁.
내 손바닥이 검의 손잡이에 닿았기 때문이고.
스륵.
다섯 개의 손가락이 그것을 감싸 안았던 까닭이다.
꽈악-!
‘이, 이건?’
손끝에서부터 감각의 홍수가 밀려왔다. 내가 손잡이를 잡은 게 아니라 손잡이가 내 손을 꽉 붙잡는 것 같다.
“아…….”
손잡이를 감싼 따듯하고 촉촉한 가죽. 나는 이것을 알고 있다.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늪지 와이번의 꼬리 가죽!”
“엇?”
내 등 뒤에서 삐딱하게 서 있던 명품관의 직원이 놀랐는지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휘익-!
나는 그대로 검을 들어 땅과 수평이 되게 뉘었다. 이리저리 기울이고 일자로 쭉 그어 보기도 한다.
[만상공감]의 능력은 생명체뿐만 아니라 무생물까지, 문자 그대로 모든 것(만상萬象)에 적용이 되었다. 손을 통해 검의 모든 것이 느껴졌다. 무게감, 균형, 날의 예리함, 검과 손잡이의 맞물림, 단단함! 아찔한 감각이 온몸으로 밀려들어 온다.
나는 신 내린 사람처럼 검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무게감이 살짝 앞쪽으로 쏠려 있군요.”
“아. 예, 맞습니다. 그런데 그건…….”
심드렁하고 건방지던 명품관 직원이 조심스럽게 자세를 바로 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품평을 계속했다.
“아, 알겠습니다. 찌르기에 최적화된 검이군요. 앞쪽으로 쏠린 무게 때문에 미세하게 밸런스가 깨지지만, 대단한 탄성을 지닌 소재를 사용한 덕분에 내구성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요.”
“마, 맞습니다. 메탈 골렘의 몸에서 채굴되는 골렘강을 단조했습니다.”
휘릭!
이번에는 검날이 바닥을 향하도록 거꾸로 들고 검 손잡이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이 손잡이의 마감이 정말 끝내주는군요. 충격 흡수와 미끄럼 방지에 매우 뛰어난 늪지 와이번의 꼬리 가죽을 사용하다니… 훌륭합니다. 찌르기를 할 때 발생하는 반발력이 대폭 줄어들겠군요. 이러다가 검사들의 굳은살이 말랑말랑해지겠습니다.”
명품관 직원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렇지요. 바로 그 부분이 이 검의 진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기 혹시… 관련 업계에 종사하시는지요?”
마침내 공손한 자세가 되어 눈치를 보는 명품관 직원에게, 나는 대답 대신 신비한 미소만을 보여 주었다. 직원의 어깨가 더 뻣뻣하게 긴장되는 게 보였다. 아마 그의 눈에는 내가 대단한 무기 수집가이거나, 무기들을 품평하는 유명 잡지의 편집자라거나, 그도 아니면 모니터링을 나온 던전 마켓의 상급자쯤으로 보이겠지.
자. 이로써 명품관 직원의 정성 어린 서비스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나는 천천히 들고 있던 검을 제자리에 올려 두었다.
‘아…….’
하지만 검이 손에서 떨어지는 순간, 끔찍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찌르기’라는 한 가지 철학을 위해 완벽하게 벼려진 검.
[만상공감]을 통해 전해지던 그 농밀하고 달콤한 감각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 나는 일종의 고통마저 느꼈다.
‘역시 비싼 건 괜히 비싼 게 아니구나……!’
돈이 없어서 이런 검을 포기해야 한다니… 아쉬움은 배가 될 수밖에 없다.
‘…좀만 참자.’
이제부터는 당장 살 물건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빠듯했다. 아직 허접한 내 수준으로는 깊은 수준의 [만상공감]을 오래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명품관 직원에게 말했다.
“오늘은 일단 간단한 칼을 사러 왔습니다.”
직원은 빠릿하게 대답했다.
“예. 어떤 칼을 찾고 계신가요?”
“과도요.”
“네?”
“과도요.”
“…과일 깎는 칼 말씀이십니까?”
“네. 제일 좋은 물건들로 보여 주세요.”
그렇다. 내가 원하는 품질이면서 내가 살 수 있는 칼은 바로 흉악한 과일도 단숨에 참살할 수 있는…….
휴우… 자괴감이 들어도 어쩔 수 없다.
그날 나는 789만 원짜리 과도를 샀다.
그게 내가 내 전 재산으로 살 수 있는 단 하나의 무기이자 명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