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3화 (3/212)

3. 영원한 동반자

“탈출이다!”

던전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바로 리셉션이었다. 마침내 살아남은 동료들은 환호하며 리셉션을 향해 달려갔다. 나도 절뚝거리며 리셉션으로 다가가 마누스 수정 위에 손을 얹었다. 마누스 수정이 붉게 물들며 소리를 낸다.

삐빅.

리셉션의 담당 공무원이 수정구에 떠오른 글씨를 확인했다.

“전공戰功 점수 6점이 추가되었습니다. 132점입니다. 2달 내로 68점을 마저 채우셔야 합니다.”

6점? 상당히 적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옆줄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나와 함께 던전에서 빠져나온 동료였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몇 번 같이 파티를 맺었다가 헤어진 사이일 것이다.

“6점? 6점이라고요? 저희 기록 못 보셨어요? D급 괴물들이랑 조우한 것 봤어요 못 봤어요? 저희 다 죽을 뻔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D급 괴수 하나를 잡고 나왔는데… 6점이라고요?”

“그걸 감안해서 6점입니다. 임무 실패 시 1점도 못 받는 경우가 있다는 걸 잘 아실 텐데요?”

“아니, 하지만 예정에 없던 D급이……!”

“그래서 6점입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공무원이었다. 결국 소란을 피우던 동료는 벌점을 받게 될까 봐 한발 물러서며 당부했다.

“하… 알겠습니다 대신 저 친구 치료라도 확실히 해 주십시오. 저 친구 아니면 다 죽었어요.”

“이미 치유 능력자 불렀습니다.”

“예, 예. 그냥 조금만 더 신경 써 달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헌터 자격증도 없는 예비역인데 D급을 잡았잖아요.”

“이미 치유 능력자 불렀습니다.”

“아, 예.”

지친 표정으로 물러서던 동료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밝게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시민 씨! 고마웠어요. 우리 다음에도 파티 같이 맺어요!”

“네. 시간이 맞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에이~ 제가 무조건 시민 씨 시간에 맞춰야죠! 그럼 잘 부탁해요! 몸조리 잘하시구요!”

이름 모를 동료는 밝게 인사하고 떠났다.

그리고 잠시 뒤 복도 저편 치료실에서 치유 능력자가 나를 불렀다.

“소시민 씨! 소시민 씨 어디 있습니까?”

“아, 예. 바로 가겠습니다.”

절뚝절뚝 걸어가다가 무심코 벽에 걸린 거울을 보았다.

‘아…….’

거기엔 스물한 살의 내가 있었다. 부상 때문에 파리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 모습조차도 젊고 건강했다. 스스로의 재능을 알지 못한 채, 고통 속에 흘려보낸 스물한 살의 가능성이, 거기에 살아 있었다.

이걸 보니까… 회귀했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나네.

“선배? 괜찮아요?”

어느새 다가온 서민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 녀석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니. 그것도 젊어진 내 모습만큼이나 신기하다.

“너는, 다친 데는 없어?”

“당연히 다쳤지! 마음이 엄청나게 다쳤다고요. 고생을 했는데 전공 점수가 고작 6점이라니… 그치만 일단 지금은… 으쌰!”

서민서가 다시 나를 부축했다.

“절뚝거리면서 걸어다니는 것 꼴 보기 싫어. 그치만 괜히 오해해서 반하지는 말아요.”

“…아직도 그 소리? 잠깐. 근데 너, 내가 고백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다고…….”

“네? 저 좋아해요?”

서민서는 시치미를 뚝 떼었다. 표정도 ‘어머? 진짜 고백이니?’ 하는 것처럼 뻔뻔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귓볼이 좀 빨개졌다.

큭큭. 웃음이 나온다. 맞다. 이런 녀석이다. 뻔뻔하고 능청스럽고. 그래서 별소리를 다 하는 이상한 녀석. 그런 주제에 알고 보면 부끄럼 많고 여린 녀석.

뭐라도 한마디 해 주려는데 벽 너머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바로 오겠다던 사람 어디 갔습니까? 예? 소시민 씨! 안 와요?”

“앗! 바로 갈게요!”

서민서가 나보다 더 당황해서 대신 대답을 해 버렸다. 그러곤 나를 보며 킥킥거렸다.

“치유 능력자도 전공戰功 점수 엄청 조금 받나 봐요. 짜증이… 어휴 무서워라. 빨리 가요.”

우리는 벽 너머로 돌아가 치유 능력자에게 치료를 받았다.

“아… 상처 깊네. 안 그래도 머리 빠개질 것 같은데… 용케도 살아오셨네.”

치유 능력자의 말투는 아주 불친절했다.

‘죽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거야?’

하지만 감히 따질 수는 없었다. 얼마나 깨끗하게 상처를 치유하느냐는 오로지 그의 손에 달려 있었으니까.

그의 손에서 퍼져 나온 우윳빛 빛무리가 왼쪽 허벅지를 따뜻하게 감쌌다.

내가 치료받는 내내 서민서는 옆에서 치유 능력자랑 재잘거렸다.

“진짜 죽다 살아났다니까요? 그런데 전공 점수를 몇 점 받았는지 아세요? 6점이래요, 6점! 미쳤죠. 200점을 채우려면… 아, 저희는 1년 중 지정된 3개월 동안 의무적으로 200점을 채워야 되거든요. 근데 6점을 받은 것 있죠? 아, 진짜! 너무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 주제가 치유 능력자의 마음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말해 뭐 해요. 저 사실 나름 고급 인력이거든요? 그런데 여기선 이렇게 하루종일 부려 먹히고 몇 점 받는 줄 알아요? 15점 받아요, 15점. 심지어 우리는 일정도 마음대로 못 정하고 그냥 국가가 지정하는 날에 나와서 일해야 한다니까요? 그렇게 1년에 200점을 채우라는 거예요. 14일이에요, 14일.”

“와… 진짜 너무 하네. 역시 호구선열의 국민개병제!”

“그쵸. 국민개~병제”

둘이 아주 죽이 척척 맞았다.

“그래도 덕택에 치료를 받아요. 엉엉. 감사합니다!”

“에효… 아닙니다. 세상이 이 모양이니 다 고생하는 거죠 뭐. 저도 고맙습니다. 덕분에 제가 전방에서 안 싸워도 되는 것 아닙니까?”

같이 국민개병제를 욕하더니 이젠 국민개병제로 만난 인연에 서로 감사해하는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던 대로다. 서민서의 친화력은 대단하다.

그 덕분에 내 왼쪽 허벅지는 흉터 하나 안 남기고 말끔하게 치유되었다.

원래 의무 복무 중인 치유사들은 대충 치료해 주는 걸로 유명했다. 생각해 보면 지난 생에는 한동안 붕대를 풀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상태는 완치 그 이상. 오히려 안 다친 오른 다리보다 더 거뜬한 것 같다.

“아… 이런. 음. 뭐, 조심히 가세요. 다음엔 다치지 마시고요.”

뒤늦게 힘을 과하게 썼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치유 능력자가 난처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우리를 보내 주었다. 치료실을 빠져나올 때, 서민서는 여우처럼 웃으며 내게 하이 파이브를 했다. 다 알고서 치유 능력자랑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다.

우리의 착한 여우, 서민서가 내 어깨를 톡 치며 말했다.

“그럼 몸도 나았겠다, 선배는 뭐 해요?”

뭘 하냐고?

별것 아닌 질문이지만 나에겐 그 울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시간을 거슬러 되돌아온 30년 전.

나는 뭐부터 해야 할까?

* * *

다행히 이맘때쯤 살던 고시원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났다. 가로등도 나가 버린 어두컴컴한 골목길에 있는 고시원. 거기에서도 가장 가운데에 있는 창문 없는 방.

불을 끄면 깊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방이 넓은지 좁은지 가늠도 안될 정도이다. 그 무한한 어둠 탓에 오히려 반 평짜리 방이 주는 답답함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나는 침대 위에 단정히 앉았다.

앞으로 뭘 해야 하나?

서민서가 던져 준 그 질문이 여전히 머릿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대답해야 하는 질문이 있었다.

회귀자가 존재하는 지금, 지구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게 될까?

‘…과연 승산은 있는 걸까?’

물론 인류는 가장 강력한 영웅을 회귀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으로 승산이 생기는 것일까?

인류가 본래 영웅이라는 에이스 카드를 쥐고 있었다면, 회귀라는 수를 사용함으로써 인류는 에이스 페어를 잡은 셈이 되었다.

하지만 미래의 침공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A 풀하우스 혹은 A 포카드가 필요할 것 같다.

솔직히… 못 이길 것 같다.

‘내가 죽어라고 싸운다고… 될까?’

회귀를 했고 내 가능성을 만개할 자신이 있지만, 그걸로 뒤집어질 차이일까? 내가 에이스 카드 두 개 몫을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미래에 침공하는 적들은 어마어마했다.

덕분에 나는 쉽게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이번엔 끼지 말자. 안 되는 싸움에 모든 걸 바치는 건… 지난 생 한 번으로 충분하잖아?’

회귀한 영웅들이 어떤 전략을 준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안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최대한 모습을 감추고 내 나름대로 삶을 즐겨 보는 것이다. 회귀자라는 사실을 꼭꼭 숨긴 채로.

‘내 삶을 즐긴다…….’

머릿속으로 상상을 해 보았다. 즐겨 본 적은 없지만 막연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었다.

‘맛있는 것 먹고, 안락하게 자고, 잘 만들어진 물건들을 쓰고, 데이트도 하고… 그런 건가?’

부끄럽게도, 입에 침이 고였다.

지난 생에는 대의라는 명분으로 나를 너무 혹사했다. 한데 이제 다 내려놓고 즐겨도 된다고 생각을 하니… 생각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이고 심장이 뛴다.

‘하지만 즐기는 것도 어느 정도는 돈과 실력이 있어야 가능한 거야.’

세상을 구하지는 못하더라도 실력은 길러야 한다. 실력이 있어야 돈도 버는 것이고, 또 어차피 싸움 못하면 즐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순식간에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었으니까.

이쯤 생각하자 무엇을 해야 할지는 점점 명확해졌다.

‘역시 밖에서 기회를 잡아야 돼. 전에 생각한 대로’

망해 가는 지구에서 실력도 기르고 좋은 물건들을 쓰며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싶다? 솔직히 불가능했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지난 생의 말년에서야 겨우 알아낸 길. 이번에는 시작부터 그 길을 걸어 볼까 한다.

‘그럼 우선, 그 물건을 구해야 된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인류가 그것의 사용처를 알게 되는 데까지 앞으로 20년은 더 걸릴 것이다. 나도 지난 생에는 20년이 지난 이후에야 막대한 수수료를 지불하고 한번씩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만상공감]의 진정한 가능성도 깨닫게 되었고…….

‘하지만 지금 시기에는 그렇게까지 희귀한 물건이 아니었어.’

처음엔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몰라 버려지고 썩혀졌던 그것들. 나 역시 그것을 본 적이 있었다.

‘앞으로 3일 뒤에 열리는 던전.’

서민서가 죽고 분노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연달아 던전 소탕 임무를 수주했던 그때… 분명히 그것을 보았다. 똑똑히 기억한다. 그 물건이 묘하게 나를 부르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만상공감]의 효용을 단지 하급 독심술이라고 알고 있었던 그때에도 나는 이상함을 느끼고 그 물건을 챙기려고 했었다. 하지만 밀려드는 괴물들 탓에 결국 입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그게 어떤 물건인지 알고 얼마나 허탈하던지.

‘속성으로 전투력을 끌어올리려면 바쁘게 움직여야겠군.’

준비 시간이 많지 않았다.

나는 내 장비들을 떠올렸다.

균형이 어그러지고 날도 무딘 칼.

찌그러진 가슴 보호구.

손목 부분이 좀 깨진 건틀릿…….

“일단… 새로운 장비가 제일 시급하네.”

[만상공감]의 영향으로 내 감각은 상상을 초월하게 예민했다. 이런 끔찍한 장비를 사용한다는 건 삶을 즐기기로 한 내 목표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일일 뿐 아니라, 강해져야 한다는 계획에도 큰 악영향을 끼치는 일이다.

[만상공감]의 올바른 사용을 위해 제일 먼저 필요한 건, 누가 뭐래도 명품名品급의 물건들이니까.

위잉-!

그렇게 막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했을 때, 메시지가 날아왔다. 서민서였다.

- 선배, 내일은 뭐 해요?

그 문자를 보고 잠시 고민했다.

‘민서한테 같이 가자고 할까? 어차피 얘도 전공 점수를 채워야 할 텐데. 얘도 허무하게 안 죽으려면 강해질 필요도 있고.’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어제 거의 죽다 살아났는데 한 번은 쉬고 가야지.’

민서는 전투로 닳고 닳은 나와는 달랐다. 지나친 강행군은 오히려 성장 가능성을 깎아 먹을 수도 있다.

일단 이번엔 던전 간다는 말을 하지 않기로 하고 짧게 답문을 보냈다.

- 쇼핑.

- 에? 쇼핑? 어제 완전 공쳤는데? 전리품도 못 챙겨서 하루 일당도 안 나왔잖아요. 이번 달엔 회사 월급도 안 나오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돈이 없어서 쇼핑을 못 한다니… 사회 초년생다운 발상이다.

- 민서야, 세상에는 힘든 순간을 줄곧 함께하는 그런 친구가 있다.

- 그런 게 있어요?

문자에서마저 순진함이 뚝뚝 묻어나는 서민서에게 나는 답해 주었다.

있다. 빚이라는 영원한 동반자.

보통 저당이라는 친구랑 같이 다니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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