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기사들의 휴가 (3)]
그렇게 팬클럽의 새 역사를 쓰고 있는 유청을 바라보면서 유성원은 중한과 이야기하던 중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아이돌들을 직접 보고, 노래도 이리저리 들어 봤지만 유성원의 기준에서는 저 미라클이라는 그룹이 뭔가 탁월한 매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노래가 엄청 좋은 것도 아닌데 유청이 어디서 그녀들에게 끌린 건지 말이다.
“이상하단 말이지.”
“예. 저이의 취향이 아주 이상합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이 아이돌들의 어디가 좋아서 저러는 건지 말이야. 유청 정도면 아마… 경국지색급 미인도 엄청 봐 왔을 거고, 실제로 부인인 중한도 엄청난 미인인데 왜 저런 애들에게 끌리는 건지.”
“미인이라니, 부끄럽사옵니다, 폐하. 아무튼 역시 세간에서 말하는 로리콘이 아닐지?”
“아니, 그건 역시 아니야. 진짜 로리콘 클래스를 몰라서 그래. 으으음… 아무튼 계속 보자.”
그렇게 둘은 유청이 팬클럽 동지들과 함께 열띤 토론을 하며 패스트푸드점에서 식사를 하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앞으로 콘서트 계획이나 방송 스케줄, 행사에 대해 체크하는 그들은 마치 전쟁에 나가기 전 결의를 다지는 군인을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그… 플랜카드는 어찌합니까? ‘미라클엠파이어’ 님.』
『제가 아는 업체가 있습니다. 그쪽에 의뢰를 하죠. 물론 비용과 작업 과정은 투명하게 공개할 생각입니다.』
『여, 역시 마음이 든든합니다. 한데… ‘미라클엠파이어’ 님은 어째서 이런 팬클럽 활동을 하시는지… 조금 의문이 듭니다.』
『예? 제가요?』
『예. 사람마다 이유는 있겠지만… 솔직히 세간에선 걸그룹 덕질하는 사람을 별로 좋게 보지도 않고, 좋은 취미로 여기는 게 아니라 저희처럼 못난이들이나 하는 거라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죠. 하지만 ‘미라클엠파이어’ 님은 솔직히 이 물에 너무 안 어울리는 인싸 같습니다. 그래서 혹시 폐가 안 된다면… 입덕하신 이유를 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식사 중 마침 한 팬클럽 회원이 유청에게 그가 입덕한 이유를 물었고, 좋은 질문이라 생각한 유성원과 중한은 귀를 기울였다.
확실히 유청은 이미지부터가 저 물이랑은 너무 안 어울리는 귀공자였는데, 팬클럽 회원들의 질문은 그럴싸한 것이었다.
유청은 일반인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마스크부터 분위기까지 이런 근본 없는 신입 아이돌 그룹 팬클럽 회장이 아니라, 어디 회사의 임원이나 간부로서 빌딩의 높은 층에서 커피 한 잔 들고 내려다보는 게 어울릴 것 같은 고귀한 아우라가 퍼져 나왔으니 말이다.
『으으음, 확실히 제 외양과 행동, 처신은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라클’의 매력에 대해 모르는 건 아닙니다. 그녀들의 순수한 꿈과 열정으로 가득한 길을 응원해 주고 싶을 따름입니다.』
“으으음… 뭔가 다른 이유 같지?”
“그러고 보면 저이는 항상… 꿈을 좇는 사람을 돕는 걸 좋아했지요. 우리 원래의 폐하 유천 님을 섬길 때도 자신은 순수하게 꿈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그런 사람을 돕는 게 즐겁다고 했었습니다.”
계속 충격만 받던 중한은 스스로 고백한 유청의 이야기를 듣고 납득하면서 그가 왜 갑자기 아이돌을 좋아하게 된 건지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요소가 아니라 ‘꿈’을 좇는 자를 응원한다는, 나름 순수한 이유로 덕질을 한다는 걸 알게 되자 금방 기분이 누그러진 듯 평온해지는 것이었다.
‘휴우~ 다행히 이걸로 중한도 많이 진정한 것 같은데…….’
그런 중한의 모습을 보며 분위기가 좋아지려는 사이, 유청과 미라클 팬클럽들은 슬슬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유청이 운전하는 차량을 탄 채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세 사람이 이번에 향한 곳은 방송국 스튜디오. 뻔히 가수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가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이제 슬슬 돌아갈까? 아무래도 정말로 순수하게 응원하는 아저씨 팬 입장 같은데 말이지.”
“예. 저 사람에게 저런 인간적인 면도 있었다니, 좀 놀랐지만… 생각해 보니 아무런 이득 계산과 권력 관계에 얽히지 않아야만 저리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는 점은 오히려 슬프기도 합니다.”
“아무튼 뭐, 건전하게 취미 생활 하는 거니까 더 쫓을 필요는 없을 것 같네. 그럼 가자.”
“예. 폐하… 자, 잠시만! 저기!”
엘드라엔의 기수를 돌려서 돌아가려는데, 중한이 급히 유성원을 부르면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리고 거기엔 막 차를 주차시키고, 음악 프로그램 방청석으로 가기 위해서 나오는 유청 일행의 모습이 보였는데, 유성원은 그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기겁을 했다.
“어우… 쟤는 뭘 하기 시작하면 아주 진심이구나.”
“대, 대체 저 해괴망측한 꼴은 뭐죠?”
“그…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하나? 오타쿠 풀아머 무장?”
별 모양 선글라스, 한 손에 둘둘 만 소형 플래카드, 의지를 상징하는 핑크색 머리끈, 양손에 든 형광 응원봉, 거기에 ‘환희 열정!’이라고 새겨진 핑크색 외투까지. 빼어난 외모에 카리스마 넘치는 유청도 도저히 커버할 수 없는, 그야말로 옛 세대 아이돌 덕후의 패션이었다.
심지어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 같이 온 팬클럽 두 사람도 같은 패션이었는데, 보통이라면 주변의 눈치를 보며 위축되어야 하지만 유청의 뒤를 따라서인지 그 둘은 마치 이게 당연하다는 듯 당당한 모습이었다.
“…저걸 진짜로 하는 사람이 있구나…….”
“아아아아아… 저 사람이… 저 사람이… 제국의 기둥이라 불리는 저 사람이 저런 광대만도 못한 꼴을… 아아아…….”
그렇게 허용 용량을 초과해 버린 건지 쓰러져 버린 중한을 안아서 받치고, 유성원은 일단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는 둘을 번갈아 보면서 이 부부 관계가 해결되길 바라는 건 무리라는 생각과 함께 나중에 유청과 대화하자고 다짐했다.
그 전에 일단 중한이 일어나면 그녀를 위로해 주는 게 먼저였지만 말이다.
“정말이지! 저 사람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진짜! 처음에 결혼할 때는 비록… 정략결혼이긴 했지만 그래도 얼마나 설렜는데요? 겉모습은 백마만 타면 그야말로 왕자님이지, 지적이고 배려심 넘쳤는데… 실상은 사이코였죠. 흑흑…….”
“저런…….”
‘…중한은 술 마시면 가면이 벗겨지는 타입이구나.’
중한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일단 같은 여성이 동감해 주는 게 좋기에 부인인 신소미까지 불러 셋이서 술자리를 가진 유성원이었다.
그리고 알코올이 들어가자마자 중한은 불평불만을 쏟아 내기 시작했는데, 다행히 신소미가 잘 받아 주면서 그녀를 위로해 주고 있었다.
‘휴우~ 누님 부르길 잘했다. 역시 여성끼리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멘탈을 추스르는 게 낫지.’
“그래도… 훌쩍! 원래 저런 사람이었구나! 훌쩍! 하고 넘어갔고 체념했는데… 훌쩍! 여기 와서 저러는 게 얼마나! 얼마나 짜증나고 서러운지… 엉어어어엉! 저렇게 애정 같은 걸 보일 수 있으면 왜 진작…….”
“너무 마셨어요. 일단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또 이야기해요.”
한참 동안 중한의 푸념을 들어 준 신소미는 그녀를 잘 달래서 방으로 데리고 간 다음 재웠다.
그렇게 신소미가 돌아오는 사이에 자리를 정리한 유성원은 남은 술과 안주를 먹으며 그 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이미 생을 끝내기 전에 어긋난 부부였기 때문에 이제 와서 관계를 회복하는 건 기대 못할 거예요.”
“그러면 어째서 저렇게 중한이 화내는 거죠? 누님.”
“아마… 동경했던 거겠죠. 부부로선 최악이지만, 그래도 인간으로서는 같은 정부 아래에서 일했으니까요. 그런데 저도 유청이 그랬다는 건 정말 충격적이네요.”
“저도 놀랐을 정도니까요. 하하하.”
“아무튼 저쪽 부부의 문제를 보고 든 생각은 역시 살아 있을 때 잘해야 한다는 것 같아요. 그러니 당신… 얼른 씻고 와요. 나는 일 마치고 먼저 씻었으니까요.”
갑작스러운 신소미의 말에 유성원은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당신이라고 말하면서 씻고 오라는 것… 그래, 노골적인 부부의 밤일 신호였다.
물론 헌터로서 건강관리도 잘하고, 아직도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 정도로 보일 만큼 젊고 아름다운 신소미 누님이었기에 문제는 없었지만,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기 때문에 보통 새벽쯤(?) 거사가 끝나는 게 문제였다.
“그… 저기, 내일도 일이 있어서 그런데 누님, 주말쯤으로 미뤄 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저 부부를 보고서 든 생각이에요. 그럼 8년이나 사람을 기다리게 하지 말았어야지요. 아니면 제가 씻겨 줄까요? 아니면 씻으면서 할까요? 그것도 좋겠군요.”
“아…….”
그렇게 포식자의 눈빛을 한 누님을 본 유성원은 자신의 운명을 포기하게 되었다.
괜히 남의 부부사에 끼어들었다가 내일 피로 속에서 일하게 될 운명에 그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아영이 동생 만들기 작업(?)이 시작되었다.
***
다음 날 아침, 사령부 사무실.
아침 해가 뜨기 직전까지 거사를 치른 유성원은 결국 제대로 잠도 못 잔 채로 다시 씻고 식사만 하고서 곧바로 출근한 상태였다.
이것저것 빨려 나간 탓에(?) 아직 기력이 돌아오지 않은 그의 앞에 일거리는 쌓이는데, 퀭해진 얼굴로 멍 때리거나 조는지라 일이 영 진행되지 않았고, 그 모습에 출근해서 임무를 보던 유청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의 안부를 물었다.
“폐하, 안색이 안 좋으시군요.”
“…너 때문이야.”
“예? 제가 뭘 했습니까?”
“아냐. 농담이야. 하아아~ 잠깐 정신 좀 차리자. 커피 진하게 좀 부탁할게.”
“예, 그러지요.”
유청에게 부탁을 하고서 유성원은 잠을 깨기 위해 일단 인터넷 서핑을 시작했다.
뭔가 가십거리나 유머라도 보면서 어떻게든 잠기운을 몰아내려고 하는데, 자주 가는 유머 사이트에서 신기한 게시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음?”
“뭐지? 푸웁!”
게시 글에는 어제 유청이 ‘아이돌 오타쿠 완전 무장’을 하고 방송국 스튜디오에 간 사진들이 올라와 있었다.
저작권 침해를 피하기 위해 살짝 모자이크가 되어 있긴 했지만, 저 기럭지와 머리카락 길이, 게다가 어제 기억 속 패션을 그대로 하고 있어서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가 없었다.
“…아니, 게다가 이건!”
<‘미라클’의 노래가 나오자 객석에서 응원봉을 든 채로 같이 안무를 추기 시작하는 팬클럽 3인.>
<대장 같은 가운데 사람은 특히나 열정적으로 응원봉을 흔들고 안무를 추면서 응원까지 하고 있어 더욱 눈에 띄는 중이다.>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지만 단시간 내에 이런 팬을 만든 ‘미라클’ 그룹은 어떤 그룹인지 궁금해진다.>
게시 글에는 설명과 함께 사진이 정리되어 있었는데, ‘병신 같지만 멋있어.’ 코드가 제대로 적중한 건지 여러 인터넷 게시판에 퍼지고, 유X브에는 아예 실시간 영상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광대인 척 유머스럽게 드러냈지만 결과적으로 이 정도로 열정적인 팬클럽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걸그룹 미라클의 인지도가 올라가는 효과가 생긴 것이다.
‘팬클럽 수가… 무슨 실시간으로 늘고 있어? 설마… 그냥 덕후질만 한 게 아니라…….’
“여기 커피… 음? 폐하께서도 미라클을 좋아하십니까?”
“어? 인터넷에 갑자기 떠서 봤지. 그보다 의외네. 네가 걸그룹을 다 알고 말이지. 이 애들, 신인인데…….”
능청스럽게 둘러대면서도 유성원은 이 덕질하는 것조차 아이돌을 돕기 위한 계획인 건지 아닌 건지 모를 유청의 행동에 소름이 돋았다.
덕질도 그냥 단순한 취미 생활을 능가해서 팬이 아이돌을 캐리해 버리는 상황까지 만드는 모습을 보며, 유성원은 단숨에 잠이 달아난 채로 커피를 마시며 그를 정의하게 되었다.
유청, 취미 생활도 진심으로 하는 남자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