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이렇게 빠르게 이곳까지 도달한 건 네가 처음이다. 역시 같은 ‘별의 수호 기사’라서 그런가? 남다르군.]
“7년이나 걸렸는데? 지금 장난쳐? 바깥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걱정되어 죽겠는데!”
[바깥? 걱정할 게 있느냐? 어차피 ‘별의 수호 기사’인 너의 힘은 ‘별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을 텐데……. ‘별의 안전’에 대해선 걱정할 게 없지.]
“아니, 그거 말고! 처음에 두 번째 머리 나올 때 빨려 들어간 사람들!”
[글쎄? 그건 잘 모르겠는걸? 내 관할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렇게 먹혀 들어온 존재가 이곳에 한둘이 아니라서.]
은빛의 용인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모른다고 대답했다.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어조라서 딱히 비아냥거리거나 조롱의 의도가 아니라 진심으로 모르기에 모른다고 답하는 것이었지만, 7년이나 여기서 구른 유성원에겐 어르신의 생사는 중요한 일이었기에 다급했다.
“모르면 다인 줄 아나?”
[정말로 모른다네. 정~ 알아야겠다면 내 제안을 들어준다면 알아봐 줄 수도 있지.]
“제안?”
[그래. 아무튼… 본래 해야 할 이야기로 돌아가서~ 일단은 축하해 주겠네. 자네는 이 던전에서 굳은 의지와 인내를 통해 자격을 증명했네. 그렇기에 우리의 일원이 될 자격을 얻었지.]
“…무슨 개소리야?”
난데없는 ‘자격’이라는 말에 유성원은 발끈하면서 은빛의 용인에게 반박했다.
자신이 여기에 온 것은 성좌 영원한 분노의 머리를 지구에서 쫓아내기 위함인데 말이다.
그러나 은빛의 용인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할 말만을 계속해 나갔다.
[‘지성체’란 본디 자신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여길수록 ‘신’에게 도전하려고 하며 오만에 빠지기 쉽다. 특히 이곳에 스스로 온 자들 모두 자신의 ‘힘’과 ‘지혜’로 더 빠르게, 더 우수하게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크지. 한데 너는 7년이라는 아주 빠른 시간 만에 왔으면서도 이곳 ‘우주의 법칙’을 준수했지. 아주 훌륭해.]
“우주의 법칙? 훌륭해?”
[그래, 이 ‘성좌 영원한 분노’ 님의 ‘우주의 법칙’. 살아 있는 것은 죽어 누군가의 양식이 되고, 이것이 끝없이 순환한다. 작게는 이 성좌님의 육신 안에서 태어난 식물과 벌레부터… 크게는 이 ‘두뇌’를 지키는 비룡들까지 말이지. 그리고 너는 그 법칙을 준수하며 여기까지 왔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말이 너무 어려웠나? 쉽게 이야기하지. 보통은 여기까지 오는 데 수십 년의 세월이 걸리지. 입속의 바다를 건너고, 통로를 찾고, 그다음 저 들판을 아무리 빨리 온다고 해도 기둥에서 건설을 하려면 그 정도의 시간은 기본. 하나 보통 이곳에 오는 자들은 그만큼의 세월이 걸리는 걸 싫어하지.]
“그야… 당연하겠지.”
자신만 해도 이 7년, 말이 7년이지 일수로 따지면 2,555일.
지겹고 더럽고 힘든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군대에서 약 2년을 보내는 것도 짜증 나고 더럽고 치사하고 열 받는 판국인데, 그 3배를 넘는 시간을 계속 무언가 이루는 거 없이 그냥 싸우고, 공사하는 걸로만 보냈으니 말이다.
누구라도 더 빨리 갈 방안을 찾거나 고민하는 게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성좌 영원한 분노’ 님은 바로 그것을 가장 싫어하셔서 시도한 자들은 모두 더 빠르게 목숨을 잃었네. 지루하고 오래 걸린다는 이유로 잔머리를 굴리다가 말이지. ‘성좌 영원한 분노’ 님은 바로 ‘본능’대로 ‘순리’를 따라 사는 우주를 원하시는 분이시니 말이야.]
“순리……? 성좌 진황 님과 같은 소리를 하네?”
[으음, 그렇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근본적인 부분이 다르지. ‘성좌 진황’은 그래도 ‘지성체’와 공존이라는 덧없는 목표를 향해 가려고 한다면, 우리 ‘성좌 영원한 분노’ 님은 모든 ‘지성체’를 우주에서 없애고, 진정한 ‘우주의 평화’를 이룩하려는 분이시지.]
“우주의… 평화라고?”
[새삼 너도 느끼고 있지 않나? 태어나서 약 50억 년간 살아온 너희 ‘별’의 ‘지성체’는 고작 2천 년 만에 ‘별’을 멸망의 길로 가속화시키고 있지. 다시 천 년이 더 지나면 아마~ 너희는 폐허만 남은 ‘별’을 버리고 우주로 가서 또 다른 ‘별’을 먹어 치울 테고 말이야. 여기서만 있는 일이 아니라, 수없이 봐 온 일이지.]
“아… 그렇긴 하지?”
은빛의 용인의 말이 어찌어찌 이해가 가기 시작한 유성원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저래 30년 넘게 열심히 살아 보고, 아래에서 높은 자리까지 다 가 보고 인간들을 관찰하며 느낀 사실이기에 그의 말을 전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20세기 초부터 제기된 환경오염 문제부터 시작해서 여러 분쟁, 2차 세계 대전 이후 반짝했던 인류 평화에 대한 열망은 어느샌가 또 인류의 욕망으로 다시 후퇴하기 시작했고 말이다.
“그래서… 성좌 영원한 분노 님은 그러니까… 단순한 ‘포식자’가 아니라, 우주의 평화를 위해서 노력하시는 ‘별’님이라는 건가?”
[그렇다. 너희는 우리 성좌님의 포식에 모든 것을 잃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미… 너희는 너희 손으로 ‘별’을 멸망시킬 운명이었다. 그래서 너희 ‘지구’의 의지가 다른 ‘성좌’들을 부른 것이지.]
“…잠깐, 지금 뭐라고?”
[보통 우린 알아서 찾아가지만, 너희 ‘지구’는 스스로 ‘성좌’들을 부르더군.]
은빛 용인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진실에 유성원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는 지금까지 별의 수호 기사로서 지구를 유린하고 인류에 위협이 되는 사악한 성좌들을 무찌른다고 싸웠는데, 사실은 그 성좌의 시대를 연 것이 ‘지구’라니. 앞뒤가 안 맞지 않은가?
모든 전후 관계가 뒤집히는 느낌을 받은 그는 이해를 하려고 머리를 열심히 굴려 보았지만 생각할수록 혼란스러움은 배가되고 있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상하잖아. 다른 성좌들이라면 몰라도 성좌 영원한 분노를 불렀다고? 자기가 없어지는데?”
[우린 그저 신호를 보고 왔지만 아무튼… 너희 별의 생각과 진의에 대해선 나는 모른다. 하나 때로는 고통 속에서 살아 있는 것보다 평온한 안식을 원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아니면 독을 약으로 쓰기 위해 위험 부담을 지는 것일 수도 있지. 아무튼 우리에게 물을 것은 아니다.]
“…….”
이맛살을 찌푸린 채로 은빛의 용인의 말을 듣던 유성원은 그럴 법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생각의 근원은 다른 훌륭한 성품, 지혜, 용기를 가진 인간도 많은데 굳이 왜 자신 같은 인간을 별의 수호자로 택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봤을 때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회와 세상에 대해 포기하고 그저 살아가기만 하고 그 끝에 멸망이 있어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던 인간, 혹은 그냥 모든 것이 사라졌으면 했던 그때의 자신. 이 ‘지구’의 마음 그 자체였던 것이다.
‘성좌 영원한 분노를 왜 초대했는지 알 것 같네. 만약 다른 성좌로도 안 되면 그냥 다 끝내 버리고 싶었던 걸 거야.’
[아무튼 그렇게 수많은 별들과 손을 잡고, 또 초대를 하고, 때론 적대했지만 역시 특히나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가 너희 ‘별’의 가장 충실한 협력자였지. 지성체끼리의 혼란을 부르고, 끝없는 증오 속에서 싸워 공멸시키는 그 특성이야말로 너희 ‘별’이 가장 원하던 것이었으니 말이야.]
“…그 양반은 확실히 부를 만할 것 같더라. 하아아아~”
[생각 외로 무덤덤해 보이는군. 배신당했다든가, 이용당했다든가 하는 생각이나 분노는 없는가?]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고… 뭐, 인간끼리 이용하고 달달 볶고 배신하고 자빠졌는데~ 드높으신 성좌님이 그러는 거야 새삼스러운 일이고…….”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 ‘우주의 순환’을 지키며 이곳에 온 ‘별의 수호 기사’ 유성원, 너는 자격을 증명했다. ‘성좌 영원한 분노’ 님의 축복 아래, ‘우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일원이 될 자격을 말이지. 우리와 같은 ‘사도’가 되어라. 그러면 너는 여기에 추가로 온 ‘머리’ 하나와 군단을 지휘하게 되어 ‘우주의 평화’를 위해 싸워 나갈 것이다.]
“…그게 그 의미였나? 하! 배신하라는 제안이었군.”
[배신? 아니지. 더 큰 진리를 위하는 것이며 우주를 구하는 일이다. ‘지성체’들을 모두 없애고, 순리로 가득한 우주를 만드는 것이다. 네가 따른다면 저 ‘별’은 더 이상 포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원하는 인간들 소수 정도는 너와 함께 보낼 수 있게 배려해 줄 수도 있다. 배 속에 들어간 그 어르신이라는 자도 포함해서 말이지.]
은빛 용인의 제안은 꽤나 달콤한 것이었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더 이상 싸울 필요 없이 이대로 지구로 돌아가서, 가족과 친지 및 주변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게 된다.
이 코어 던전에서 지낸 7년.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커졌고, 눈앞의 저 은빛 용인과 싸워 이기는 것도 쉬워 보이지 않는 상황.
게다가 자신들이 사는 ‘별’도 인류를 거부하기까지 하니, 심리적으로 많이 혼란스러워져 있었다.
“야, 너희들, 오늘따라 왜 말이 없는데… 뭐라고 조언이라도 좀… 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고개를 돌려서 부하들을 바라보는데, 열심히 입을 뻥긋거리는 것은 물론 손과 발까지 흔드는 모습이 보였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 저 용인이 한 짓이리라.
“후우우우… 댁도 수작 부리는 거 아냐? 조언 좀 듣고 싶은데 말이지.”
[조언이라. 이해를 못하는 거면 모를까, 이미 다 이해했지 않은가?]
“하아아아…….”
숨을 깊게 들이마셔서 혼란스러운 마음을 일단 정리해 보는 유성원.
여기서 승낙하면 사도가 되고 자신은 돌아갈 수 있지만 분명 인류의 배신자가 되고, 남은 지구상의 인류를 모두 쓸어버리기 위한 싸움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도 힘들고 어려운 길이긴 하지만 적어도 눈앞의 저 막강해 보이는 성좌 영원한 분노의 사도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일이리라.
“하아아아… 다 맞는 말이긴 하네. 그런데 말이지. 만약 사도가 되면 우리 가족들이랑 지구에서 인류 다 멸망시키고 사는 거지? 그럼 그 이후 후손들은 어떻게 되는 건데?”
[지성체로서의 문명을 쌓아 가기 시작하면 다 먹어 치우고, 그렇지 않고 순리대로 살면 내버려 둔다.]
“…원시인 상태로 돌아가라는 거네. 그리고 나는 아마… 당신처럼 괴수들을 이끌고 다른 ‘별’들을 먹어 치우러 다니고?”
[원한다면 지금 저 뒤의 부하들을 이끌게 해 줄 수도 있다. 그 정도 융통성은 있다.]
“융통성이라……. 풉!”
피식 웃은 유성원은 머리 위를 쳐다보며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려한 대로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지구’의 운명과 ‘인류’의 운명이 갈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심리적으로 치면 ‘사도’ 제안 쪽으로 살짝 기우는 느낌이었다.
현재의 ‘인류’에 대해선 그동안 역사의 흐름과 밑바닥에서부터 지켜봐 온 혐오감들 때문에 힘을 얻은 지금까지 제대로 참여하거나 고치려 하지 않아서 많은 문제를 낳았을 정도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인류 멸망’이라. 그것도 썩 나쁘지 않지. 우리 성좌님도 바라시는 일이고 말이야. 생각해 보면 수십 년 전인가? 헌터도 없을 때, 전 세계를 아우르는 전염병이 돌았을 때 강과 바다를 포함한 자연이 엄청 회복되었다는 기사를 본 것 같기도 해.”
[호오… 이해하는 건가?]
“게다가 어차피 놔둬도 지금 분위기 보면 자기들끼리 싸워서 이미 멸망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멸망할 수도 있고, 혹은… 계속 놔둔다고 해도 환경오염, 자연 파괴 등등으로 멸망하거나 이 ‘별’을 버리고 도망칠 것 같기도 해.”
[아주 잘 아는군. 그럼 승낙의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는가?]
기대에 찬 의문에 대한 대답은 공교롭게도 유성원의 손에 올라온 티탄의 말뚝이었다.
그의 눈빛은 강한 의지와 적의로 가득했고, 그는 결의에 찬 말투로 당차게 말하기 시작했다.
명백한 거절의 의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진리와 현실, 예정된 실패와 멸망의 미래라곤 해도 그건 우리 행동의 대가이자, 삶이야. 어리석더라도, 멍청하더라도, 이기적이더라도! 우리 거다! 그걸 빼앗길 순 없어. 빼앗겨서도 안 돼.”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군. 결국 실패하게 될 것을… 어째서……!]
“그건 우리의 ‘실패’다. 대가는 우리 스스로가 치러야 해. 나는 ‘별’에게 임명되었지만 결국엔 ‘인간’. 정의란 악(惡)이 그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 우리 스스로의 대가를 나는 지킬 것이다. 이름을 대라! 성좌 영원한 분노의 사도! 나는 실패를 지키기 위해 싸울 거고, 끝까지 발버둥 칠 거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딱!
유성원의 대답을 들은 은빛의 용인이 손가락을 튕겼고, 그의 앞에 뼈로 된 대검이 떨어져 꽂혔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뽑아서 티탄의 말뚝에 갖다 대고서 유성원을 노려보는 동시에 투기를 일으키며 말한다.
용의 눈에서 숨이 막힐 것 같은 진한 투기가 나와 몸을 압박했지만, 유성원은 이를 악물고 버텨 내며 ‘용인의 말’과 함께 시작될 전투를 대비했다.
[나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으로 멸망한 별의 마지막 생존자이자, 한때 ‘별의 수호자’였으며 ‘성좌 영원한 분노’ 님의 사도이자 이름은… 의미가 없기에 잊었다. 정 부르길 원한다면 ‘잊혀진 자’라고 해라.]
“…이제 내가 기억할 거니 잊히진 않겠지만, 그렇게 부르길 원하니 부를게. 잊혀진 자여!”
[실패를 염두에 둔 주제에 말은 잘하는군. 그럼 나는 ‘실패한 자’라고 기억하겠다.]
“아직 실패 안 했다고! 각오만 했다고!”
[그럼 간다.]
콰아아아앙!
무기의 격돌 소리와 함께 황금과 은빛의 기사와 용인은 잔상을 남기며 싸우기 시작했다.
이미 실패한 자와 실패가 예정된 자의 싸움. 누가 이기든 결국 지구라는 ‘별’의 운명은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전자는 이미 결과가 나타난 반면, 후자는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큰 차이… 바로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 부분에서 이미 이 싸움의 승패는 갈려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